소설리스트

20. 부디 선처해주시길 바랍니다. (20/23)


20. 부디 선처해주시길 바랍니다.
2023.06.20.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마리앤의 미간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 곱씹을수록 그의 말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두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며 저만치에 있는 막심의 등을 노려보던 크리스토프가 쯧, 하고 낮게 혀를 찼다.

고개를 돌리던 막심이 마리앤을 향해 눈을 부라리다 크리스토프와 시선이 마주쳤다. 흠칫, 어깨를 굳힌 그가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당신에게 관심이 있으니까 괴롭히는 거 아닌가?”

“예?”

마리앤이 그건 도대체 무슨 이론이냐는 듯,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크리스토프는 사뭇 당당했다.

“기억 안 나, 미하엘 힌덴부르크?”

“아.”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애매한 탄식이 터졌다. 미하엘 힌덴부르크, 오랜만에 듣는 그 이름과 함께 심술궂은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가 법대에 입학했을 때,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눈엣가시처럼 괴롭히던 사내였다. 여름 날씨처럼 변덕이 심한 사내이기도 했다.

어떤 날은 눈만 마주쳐도 화를 냈고, 어떤 날은 찬바람이 불만큼 냉랭했다. 불쑥 찾아와 쓸모없는 선물을 떠안기는가 하면, 불편할 만큼 끈덕진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고, 경쟁이 치열한 도서관의 자리를 선뜻 양보해주기도 했다.

한마디로,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당신, 옛날부터 이상한 놈들한테 인기 있었잖아.”

그 말에 마리앤은 저도 모르게 크리스토프를 쳐다보았다.

빤히.

아주 오랫동안.

그 이상한 놈에 당신도 포함되는 거 알아요?

그녀의 물음이 소리 없이 그에게로 건너갔다. 크리스토프가 일자로 죽 뻗은 눈썹을 스윽 밀어 올렸다. 왜 그렇게 쳐다보냐는 듯이.

그녀의 물음은 끝내 그에게 닿지 못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마리앤이 “됐어요.”라고 대답하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크리스토프는 진심이었다. 그가 졸업과 동시에 마리앤에게 청혼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미하엘 힌덴부르크였기 때문이다.

미하엘의 행동은 동네 개도 눈치챌 만큼 노골적이었다. 그가 마리앤을 좋아한단 소문은 당사자 둘만 빼고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의 유급이 결정되었을 때, 크리스토프는 왠지 모를 조급함을 느꼈다. 그가 없는 곳에서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행여 미하엘이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면 어쩌나 초조했다.

미하엘은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내이긴 했지만, 명색이 힌덴부르크 백작의 삼남이었다. 행세깨나 하는 힌덴부르크 가의 아들.

그것은 꽤 괜찮은 결혼 조건이었고, 그가 알기로 미하엘을 눈독 들이는 여자들도 몇 명인가 있었다. 어차피 결혼이라는 건 가문과 가문의 계약이었으니까.

그래서 크리스토프는 마리앤에게 청혼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청혼이었다. 심지어 크리스토프 본인조차도.

하지만 크리스토프는 그날의 결정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듣고, 충격받은 표정을 짓던 미하엘의 얼굴을 목격하고 나서는 더더욱.

마리앤은 그날의 선택을 후회할까. 평생을 약속한 그날을 후회하기에 이혼 서류를 던지고 떠난 것일까.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크리스토프의 상념이 점점 길어지던 그때, 니콜라스가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경감님.”

잠시 마리앤을 일별한 니콜라스가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주며 한 손을 내밀었었다. 짙은 눈썹을 들썩인 크리스토프가 악수에 응했다.

마리앤은 그가 막심에게 했던 것처럼 무례한 행동을 할까 봐 전전긍긍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그녀의 기우였다. 크리스토프는 흠잡을 데 없이 정중한 태도로 니콜라스를 대했다.

마리앤이 그의 귓가에 작고 빠르게 속삭였다.

“잊지 말아요. 나는 마리앤 슈나이더도, 마리앤 클로제도 아니에요. 마리앤 하베크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니콜라스가 인사를 건넸다.

“니콜라스 슈테판 경감입니다. 청장님께 얘기 들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 경찰청의 자문을 맡기로 하셨다고요, 슈나이더 경?”

‘경’은 일개 변호사에게 붙일 만한 호칭은 아니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가 이미 자작의 작위를 물려받았다는 걸 감안하면, ‘경’이라는 호칭도 딱히 틀린 건 아니었다.

크리스토프는 교과서에 나올 만큼 반듯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는 귀족 특유의 오만함을 담고 있었다.

“크리스토프 씨면 충분하오. 시몬 청장에게도 말해뒀지만, 나는 슈나이더 후작님의 후계자로 이곳에 있는 게 아니오. 개인적인 일 때문이지. 그러니 슈나이더라는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으면 하오. 경찰청 자문은 비공식적인 직함이니까.”

“비공식적이라……. 좋습니다, 크리스토프 씨. 그런데.”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니콜라스가 마리앤과 크리스토프를 번갈아 보았다.

“우리 신입과 무슨 관계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꽤 친밀해 보이던데 말입니다.”

니콜라스는 작금의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며칠 사이, 청장의 입김을 통해 낙하산 두 명이 자신의 팀으로 떨어진 이 상황이 말이다. 졸지에 보모가 된 것 같았다.

크리스토프가 입술을 달싹이는 찰나, 마리앤이 재빨리 그의 대답을 가로챘다.

“제 대학 선배예요.”

“…….”

“…….”

짧은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동의하지 않는 침묵이었다.

크리스토프가 천천히 눈동자를 돌려 마리앤을 응시했다. 마리앤은 따가운 시선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허튼 말 하지 말라는 듯 단호한 눈길이었다.

그와 동시에 니콜라스 역시 마리앤을 바라보았다. 직업 특성상 그는 상류층 가십에 꽤 해박한 편이었고, 그들 중 대다수와 안면이 있었다.

미간을 모은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니콜라스의 머릿속으로 슈나이더 부인의 이름이 마리앤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성은 하베크가 아니었지만, 이름은 분명 마리앤이었다. 그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마리앤 클라인, 혹은 마리앤 클레버, 그런 느낌의 이름이었다. 원래 이름보다 슈나이더 부인이라는 호칭이 훨씬 더 유명하지만.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니콜라스가 이번에는 크리스토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왕립대학……?”

크리스토프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마리앤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었다. 누구도 그녀를 탐내지 못하도록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마리앤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처분을 기다리는 피고나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판결은 두 가지 중 하나일 터였다.

이혼, 혹은 재결합.

존경하는 재판장님, 부디 선처해주시길 바랍니다.

“크리스토프 씨께선 수도에서 가장 잘나가는 변호사라 들었는데, 블라우버그 경찰청의 자문 역할을 맡으신 이유라도 있습니까?”

“안 될 건 없지 않소?”

“…….”

그 당당한 대꾸에 니콜라스가 할 말을 잃었다. 안 될 건 없었다. 어차피 이곳은 곧 그의 영지가 될 땅이었으니까.

블라우버그에서 슈나이더 가문은 왕이나 마찬가지였고, 누구도 그를 거역할 수 없었다. 그때, 크리스토프가 마치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덧붙였다.

“이곳에서 되찾아야 할 것도 있고.”

되찾아야 할 것이라.

힐긋, 마리앤을 곁눈질한 니콜라스가 크리스토프에게 시선을 주었다.

청장의 지시, 마리앤이라는 이름, 반지를 뺀 흔적, 크리스토프의 등장.

유능한 수사관인 니콜라스는 몇 가지 단서만으로도 진실을 꽤 그럴듯하게 끼워 맞추었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렇다면 판사에게 압력을 가해 티몬의 보석을 기각하도록 하신 이유는요?”

“!”

뜻밖의 소식에 마리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티몬이라면, 보석상 강도의 이름이 아니던가? 그녀가 크리스토프에게 묻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티몬.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크리스토프의 낯이 서늘하게 일변했다. 그는 차갑게 굳은 눈동자로 니콜라스를 직시했다.

15년 간 형사 일을 하며 온갖 범죄자를 만난 니콜라스조차 움찔하게 만드는 위압적인 시선이었다.

“글쎄. 누구를 말하는지 모르겠군.”

그러나 다음 순간, 크리스토프의 잇새를 비집고 나온 목소리는 나른하리만큼 무감했다. 그와 동시에 마리앤이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아.”

그 개자식을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고 뇌까리던 크리스토프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했다.

어쩌면 그래서일까? 티몬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혀서? 그래서 그의 보석이 받아들여지지 않도록 손을 쓴 것일까?

마리앤이 확신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크리스토프가 느릿하게 눈동자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마치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넓고 깊은 밤하늘과 우주처럼, 검은 눈동자와 청람색 눈동자가 한데 뒤엉켰다.

“…….”

마리앤의 눈동자가 흔들리려는 찰나.

“변호사님!”

누군가 왈칵, 소리를 지르며 경찰서 안으로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불청객이 크리스토프를 발견하곤 곧장 이리로 다가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크리스토프에게 쏠렸다. 마리앤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올리버 엥겔.

크리스토프의 보좌관이자, 그의 수족과 같은 사내. 그가 원망과 반가움, 안도가 뒤섞인 얼굴을 하고서 성큼성큼 가까워졌다.

크리스토프의 눈썹이 꿈틀했다. 오직 마리앤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하게.

간혹 그런 일들이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대체로 무심하고 무표정한 편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아마도 어렸을 적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 역시 슈나이더 부인이 된 후에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훈련했으니까.

그런데 가끔 그의 미세한 감정의 변화를 눈치채는 순간이 있었다. 꿈틀거리는 눈썹, 실룩이는 눈매, 바짝 힘이 들어간 입술에서.

그리고 방금 그가 느낀 감정은 성가심이었다. 일순, 마리앤의 입꼬리가 들썩였다. 장난꾸러기 아이를 보듯.

“변호사님.”

올리버의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와 비교해 얼굴이 반쪽이 된 걸 보니 마음고생이 꽤 심했던 모양이다.

마리앤은 왠지 그게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그에게 미안한 시선을 던졌다. 그녀를 발견한 올리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슈……!”

“나가서 얘기하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려는 올리버의 입을 틀어막으며, 크리스토프가 니콜라스를 향해 “먼저 실례하겠소.”라는 인사를 남겼다.

올리버가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하도록 도와준 걸까?

마리앤은 사무실을 나서는 크리스토프의 뒷모습을 보며 참았던 한숨을 흘렸다. 저 남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자, 그럼.”

니콜라스가 마리앤을 돌아보더니 서류 더미가 쌓인 책상을 가리켰다. 그의 뒷말을 짐작한 마리앤이 의연한 얼굴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오늘도 종일 서류 정리를 해야 할 모양이다.

“사건보고서를 쓰도록 하게, 마리앤. 자네가 출동한 사건이니 자네가 마무리 짓는 게 좋지 않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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