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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저도 알 건 다 안답니다. (21/23)


21. 저도 알 건 다 안답니다.
2023.06.21.


일순, 마리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니콜라스는 그녀에게 서류 정리가 아니라 사건보고서를 쓰라고 했다. 그것은 그녀를 한 사람 몫의 경관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이윽고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니콜라스는 씩씩하게 책상으로 걸어가는 마리앤을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거기가 자네 책상이네. 산더미 같은 서류는 대충 아무 데나 밀어놓으면 돼. 아 참, 그리고.”

마리앤이 몇 걸음 걷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등을 돌리고 반대편으로 걸어가던 니콜라스가 한 손을 설렁설렁 흔들었다.

“오늘 퇴근 후에는 환영회가 있을 예정이야. 신입이 두 명이나 들어왔으니,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마셔 보자고.”

***

“변호사님! 도대체 여기서 뭘 하시는 거예요? 수도는 지금 난리가 났다고요! 더 이상 사건을 수임하지 않으시겠다니, 대관절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수도는 어쩌고, 이곳에 계시는 거예요? 대관절 언제 돌아오실 거예요? 예?”

벤치에 앉은 크리스토프는 올리버의 잔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느긋하게 한쪽 다리를 꼬았다. 가슴 앞에서 팔짱을 낀 그가 하늘 위로 시선을 던졌다.

새파란 창공과 하얀 구름, 선명하게 대비되는 색상이 봄의 한가운데에 있음을 알렸다. 시야에 언뜻언뜻 들어오는 나뭇가지는 선명한 연두색 잎을 틔웠고, 어디선가 경쾌한 새소리가 들렸다.

공기 중에 익숙한 소금 맛이 느껴졌다. 경찰청과 바닷가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그럴 리 없을 텐데도, 왠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이곳이 블라우버그이기 때문이리라.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땅.

크리스토프는 그제야 자신이 몹시 오랜만에 하늘을 올려다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급을 다투는 바쁜 일상 속에서 고작 하늘 한 번 볼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분주함의 결과는 마리앤의 이혼 선언이었다. 그녀가 가속하는 자신의 삶에 제동을 걸었다.

“올리버 엥겔.”

“예, 변호사님.”

올리버가 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크리스토프의 무심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왕립대학을 졸업한 후, 바거 변호사 사무실을 거쳐 내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냈네. 그사이 단 한 번도 휴가를 간 적이 없었어. 오직 일에만 매달렸지. 그러니 휴가를 가질 자격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그건 크리스토프의 말이 옳았다. 그는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였고, 의뢰는 끊임없이 들어왔다. 게다가 본인 자체가 일 중독자이기도 했다.

“좋아요, 변호사님.”

올리버가 한발 물러서는 척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디트리히 백작님의 사건만 처리하고 휴가를 떠나시죠. 그땐 저도 말리지 않겠습니다. 디트리히 백작님이 당장 변호사님을 데려오라고 성화예요.”

하지만 크리스토프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건 올리버가 크리스토프에게서 배운 처세술이었기 때문이다.

“적당히 둘러대. 그게 자네 역할이잖나.”

“적당히가 안 통하니까 그렇죠. 변호사님을 데려오지 않으면 저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하셨단 말입니다. 이래 봬도 처자식이 딸린 몸이에요. 디트리히 백작님께 찍혔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협상이 통하지 않자, 올리버가 방법을 바꾸어 우는소리를 했다. 일순, 크리스토프의 목소리가 서늘한 기색을 띠었다.

“디트리히 경이 내 사람을 건드린다? 그렇다면 그도 그만한 각오를 해야 할 거야. 그걸 모를 만큼 대책 없는 사람이 아닐 텐데.”

내 사람.

그 말에 올리버는 방금까지 울상을 짓던 것도 잊고 쑥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차갑고 냉철한 크리스토프지만, 그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한 번 자신의 사람으로 받아들이면 끝까지 책임을 졌다.

올리버의 기세가 진심으로 한풀 꺾였다. 푹, 한숨을 내쉰 그가 푸념을 흘렸다.

“디트리히 백작님의 셋째 아들이 또 사고를 쳤습니다. 이번엔 꽤 큰 사고인 것 같아요. 돈으로도 무마되지 않는 사고거든요.”

거기서 잠깐 말을 멈춘 올리버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곳은 수도가 아니었지만, 그는 조심성이 많은 신중한 남자였다.

“힌덴부르크 백작 부인을 건드렸답니다. 힌덴부르크 경께서 몹시 화가 나신 모양이에요. 신문에 오르내리든 말든, 그 개자식을 꼭 감옥에 처넣겠다면 길길이 날뛰고 계십니다. 이 사건을 수습할 분은 변호사님밖에 없어요.”

힌덴부르크.

그 말에 미하엘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딜 가든 삼남이 문제군, 하고 중얼거리던 크리스토프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미하엘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는 게 왠지 불길했다.

“힌덴부르크 백작 부인이라면 두 번째던가, 세 번째?”

“네 번째 부인이요. 얼마 전에 네 번째 결혼을 하시고, 한창 신혼을 즐기는 중이시잖아요.”

“처넣으라고 해. 그 셋째는 진작 감옥에 들어갔어야 해.”

“여태까지 그걸 무마시킨 게 누구죠?”

올리버가 그를 힐난했지만, 크리스토프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거하게 한숨을 내쉰 올리버가 그의 상관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잇새에서 미심쩍은 목소리가 나왔다.

“정말로 당분간 변호사 사무실 문을 닫으실 거예요? 손해가 막대할 겁니다. 하루에도 천문학적인 돈이 오간다는 거, 저보다 변호사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내가 농담 한 적이 있나, 올리버.”

“예, 압니다. 알아요. 변호사님께서는 농담 같은 걸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거요.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크리스토프 슈나이더 변호사님이 사무실 문을 닫는다니. 변호사님은 일 중독이시잖아요!”

“지금은 그깟 일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

그 말에 올리버가 경찰청 입구를 힐긋거렸다. 그가 또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슈나이더 부인께서 돌아오지 않으시겠답니까? 아니, 그보다 슈나이더 부인께서는 지금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왜 경찰청에 계세요? 슈나이더 후작님의 성에 계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크리스토프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열려 있는 창 너머로 뭔가에 집중하고 있는 마리앤의 옆모습이 보였다.

바람이 살랑거릴 때마다 그녀의 짧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서 흩날렸다. 아랫입술이 슬그머니 앞으로 삐져나왔다. 한 가지 일에 집중할 때면 튀어나오는 그녀의 습관이었다.

그는 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던 올리버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진 알지 못했다. 다만, 요 며칠 시체처럼 창백하고 싸늘하던 크리스토프의 얼굴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는 건 알겠다.

다행이긴 한데.

올리버는 크리스토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말처럼 크리스토프에겐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해야 하는 문제. 어쩌면 그의 삶이 걸린 문제.

여기선 내가 물러서야겠군.

거하게 한숨을 내쉰 올리버가 체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 방식대로 처리할 테니,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세요.”

올리버의 말에도 크리스토프의 시선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천재 화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열렬한 광신도처럼 마리앤의 얼굴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올리버가 다시 한번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

니콜라스의 뒤를 따라가던 마리앤이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파도처럼 그녀를 집어삼켰다. 술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인 고약한 냄새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왜? 이런 곳은 처음인가? 꽤 고상한 삶을 살았나 보지?”

뒤에서 따라오던 막심이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를 비웃었다. 마리앤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천만에요. 저도 알 건 다 안답니다.”

막심에겐 지기 싫었다. 그녀의 허세에 “흥. 알기는 개뿔.” 하는 코웃음이 돌아왔지만, 마리앤은 개의치 않았다.

“여기예요!”

먼저 도착해 있던 얀이 그들을 발견하곤 손을 들었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술병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플로리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맥주만 마셔댔다. 술이 들어갈수록 그의 안색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던 마리앤이 빈자리에 앉았다. 투박한 나무 의자였다. 무심코 그녀의 옆자리에 앉으려던 막심이 멈칫했다. 불쑥, 튀어나온 손이 의자를 낚아챘기 때문이다.

“…….”

크리스토프는 허름한 술집과 어울리지 않는 우아한 태도로 마리앤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가 눈동자를 들어 막심을 응시했다.

지그시.

“쳇.”

낮게 혀를 찬 막심이 테이블을 건너가 얀의 옆자리에 앉았다. 크리스토프는 누구에게도 마리앤의 옆자리를 양보할 마음이 없었다. 그것이 무식하고 고집만 센 막심이라면 더더욱.

니콜라스가 거품 반, 맥주 반인 잔을 높이 치켜들며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자, 오늘 하루도 다들 고생 많았다. 특히, 막심과 마리앤은 사고사를 타살로 밝혀냈지. 잘했어.”

그 말에 막심은 우쭐한 표정을 지었고, 마리앤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시선을 떨구었다. 잊고 있던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찜찜했다. 무엇이 찜찜하냐고 물으면 대답할 말은 없었다. 그러나 신발 안에 작은 돌멩이가 들어간 것처럼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크리스토프가 짙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내일은 휴일이니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마셔 보자고!”

한 번에 술을 들이켠 니콜라스가 입가를 닦으며 “크.” 하고 나직한 감탄사를 흘렸다. 막심과 플로리안, 얀까지 모두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긴장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킨 마리앤이 잔을 그러쥐었다. 그녀를 지켜보던 막심이 비죽, 입꼬리를 당겼다. 윽, 두 눈을 치뜬 그녀가 단번에 술을 들이켰다.

꿀꺽꿀꺽.

“괜찮나, 마리앤?”

옆에서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마리앤의 눈썹이 꿈틀했다. 걱정이라니, 크리스토프에게 그처럼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또 있을까.

“이 정돈 아무렇지도 않아요.”

마리앤이 호기롭게 외쳤다. 탁, 소리가 나게 빈 잔을 내려놓자 니콜라스와 얀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얀은 의외라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고, 니콜라스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지나가는 점원에게 술을 추가로 주문했다.

“마리앤, 그리고 크리스토프. 두 사람 다 우리 팀 동료가 된 걸 환영하오.”

“환영해요!”

얀이 쾌활하게 소리쳤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로의 잔을 부딪히던 막심과 플로리안이 얀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얀이 의기소침하게 어깨를 오므렸다.

그때, 크리스토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곧장 바텐더에게로 걸어갔다. 아마 맥주가 입에 안 맞았던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며 마리앤은 또다시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씁쓸했다. 무슨 맛으로 술을 마시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막심에게 지고 싶지 않았고, 그와 경쟁이라도 하듯 꿀꺽꿀꺽 잔을 비웠다. 그 순간.

달칵.

그녀의 앞에 접시가 놓였다. 기다랗고 모양 좋은 손가락이 그녀의 시야를 파고들었다. 그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거라도 먹어.”

마리앤은 말없이 눈동자를 움직였다. 손가락을 따라 올라간 시선이 팔과 어깨를 지나 이윽고 크리스토프의 얼굴에 닿았다. 그가 가볍게 눈썹을 까딱였다.

“점심도 못 먹었잖나. 식사 대용이라고 할 만한 게 샌드위치밖에 없더군.”

‘시체 때문’이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괜한 말로 그녀의 식욕을 떨어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테이블에는 깊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주변은 여전히 떠들썩했고 소음이 난무했지만, 어째서인지 그곳만 다른 세상인 양 고요했다.

“늦게 돌아가면 저녁이 남아 있지 않을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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