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나는 최선을 다해 당신을 흔들 거야.
(22/23)
22. 나는 최선을 다해 당신을 흔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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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나는 최선을 다해 당신을 흔들 거야.
2023.06.22.
얀이 군침을 흘리며 “나도 점심 못 먹었는데…….”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은밀하고 간질간질한 분위기에 니콜라스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고, 막심과 플로리안은 두 사람의 관계를 캐려는 듯 두 눈을 날카롭게 떴다.
읏.
마리앤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이 울렁거렸다. 아무래도 취기가 도는 모양이었다. 급하게 들이켠 술이 혈관을 따라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마음이 들뜰 리 없었다. 이렇게 열이 오를 리 없었다.
“…….”
그녀는 말없이 크리스토프를 노려보았다. 원망스러운 시선을 받은 크리스토프가 난처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검지로 눈썹 끄트머리를 긁적였다.
“당신이 샌드위치를 싫어했던가?”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마리앤은 샌드위치 대신 남은 술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래서, 두 사람은 무슨 관곕니까?”
막심이 크리스토프를 떠보듯, 은근하게 물었다. 플로리안은 관심 없는 척 귀를 곤두세웠고, 얀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예? 관계라니요?” 하고 되물었다.
“저래서 무슨 경찰을 한다고.”
눈치 없는 얀을 보며 쯧쯧 혀를 찬 막심이 다시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타박을 들은 얀이 시무룩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대답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대답 대신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의 가게를 눈으로 훑었다. 일을 마친 평민 사내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술집을.
“쳇.”
“자, 자, 그러지 말고. 얀 자네는 가서 술을 좀 더 가져와.”
“예? 제가요? 막내가 저기 있는데…….”
그렇게 말하며 마리앤을 가리키던 얀이 크리스토프의 서늘한 시선을 받고는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님이 어쩌고, 신입이 어쩌고, 애송이가 어쩌고 하는 구시렁거림은 사내들의 거친 음성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크리스토프 씨는 술을 좋아하지 않나 봅니다?”
플로리안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딱히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그저 그의 말투가 원래 뾰족한 것뿐이었다.
“술.”
크리스토프는 대답 대신 자신의 잔을 내려다보았다. 갈색 액체는 한 모금도 줄지 않았다.
술은 싫어하는 편이 아니었다. 다만, 술로 인해 이성이 사라지는 순간을 싫어하는 것뿐이었다.
그에게서 대답 듣기를 포기한 플로리안이 얀의 손에서 새 잔을 낚아챘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이 몇 순배 돌았다.
크리스토프는 이 자리가 몹시 지루했다. 불콰하게 달아오른 얼굴,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대화,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시끌벅적한 소음. 모든 게 그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에 마리앤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자리는 그에게 의미가 있었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머저리 같은 놈.
크리스토프가 나직하게 욕을 주워섬기는 순간.
“?”
그의 왼쪽 팔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크리스토프가 그대로 굳었다.
마리앤의 이마가 툭, 하고 그의 어깨를 쳤다.
“으음.”
그녀의 잇새에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알싸한 술 냄새가 풍겼다.
크리스토프는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이 순간이 깨어질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왼쪽 어깨가 희미한 열기를 품었다.
그것이 오랜만에 그녀와 맞닿은 탓인지, 마리앤의 취기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향기에 정신이 혼미해졌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마리앤?”
크리스토프가 나직한, 흡사 무언가를 참는 듯한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가 그녀의 한쪽 어깨를 붙드는 순간.
“싫어요, 크리스토프.”
그녀가 머리를 흔들었다. 일순, 크리스토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싫다고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를 되새겼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 크리스토프가 주먹을 바투 쥐었다. 마리앤이 두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놓으라고 하지 말아요.”
“…….”
아.
크리스토프는 저도 모르게 살짝 입을 벌렸다.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이었다.
마리앤의 들쩍지근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녀는 크리스토프가 자신을 떼어낼 거라 생각했는지 그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싫어요, 안 갈 거예요, 크리스토프.”
“내가 당신을 보낼 리 없잖아, 마리앤.”
크리스토프가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문질렀다. 손바닥에 닿는 온기가 평소보다 뜨거웠다.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홧홧한 열기가 전해졌다.
“취했군.”
“아니에요, 안 취했어요.”
마리앤이 고집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저었다. 픽, 그의 잇새에서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술에 취한 마리앤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취하면 어린아이가 되는 타입이었나.
“세상의 모든 주정뱅이는 자기가 안 취했다고 하지.”
그의 목소리가 다정한 빛을 띠었다. 흡사 어린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정말이에요. 하나도 안 취했어요.”
마리앤이 자못 억울한 듯, 웅얼웅얼 항변했다. 몽롱하게 풀어진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처럼 나른했다. 눈꺼풀이 청람색 눈동자를 자꾸만 가리었다.
크리스토프는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마리앤이 그의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아무렇지 않은 그 동작이 어째서인지 몹시 은밀해 보였다. 흡사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알겠으니 일어나. 이만 돌아가지.”
크리스토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은 그가 어렵지 않게 마리앤을 업었다. 그녀의 팔다리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가벼웠다.
하지만 기꺼웠다. 마리앤이 자신의 품 안에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느껴지는 무게였다. 텅 빈 주먹을 움켜쥐던 때보다 백배는 나았다.
만족스러운 숨을 내쉰 크리스토프가 여유로운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들의 면면을 차례로 훑었다.
“보다시피 마리앤이 취해서 먼저 일어나겠소.”
“…….”
그곳에는 경악 어린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네 남자는 술잔을 든 채로 하얗게 얼어붙었다. 얼빠진 눈동자가 크리스토프와 마리앤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가지각색의 눈동자들이 한계까지 벌어졌다. 자신이 뭘 봤는지 모르겠다는 듯.
하지만 크리스토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크리스토프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자신의 등에 업힌 여인뿐이었다.
무심하게 돌아서던 그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크리스토프의 건조한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어느 조직이든 오래 살아남는 법은 하나요.”
“…….”
“입조심 하는 거.”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달리 그의 눈동자는 더없이 차가웠다. 얀은 그와 눈이 마주칠세라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오늘 일은 마리앤에게 함구하는 편이 좋을 거요. 이래 봬도 마리앤이 부끄러움이 많은 편이라.”
마치 날씨 얘기라도 하듯 가볍게 경고한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크리스토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허름한 술집을 벗어났다.
탁, 그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
그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하늘엔 어스름이 깔려 있었고, 등 뒤의 소란스러움은 아주 먼 곳에서 들리는 듯 아득했다. 세상엔 그와 마리앤,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크리스토프…….”
그때,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짧고 강렬한 희열이 그의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렸다. 마치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던 그때로.
그가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잇새에서 탁한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그래, 마리앤.”
크리스토프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크리스토프…….”
“말해, 마리앤.”
“왜 자꾸 나를 흔들어요. 그러지 말아요.”
술에 취해 발음이 살짝 뭉개진 목소리는 희미한 떨림을 담고 있었다. 울음인 것 같기도 했고, 서러움인 것 같기도 했다. 혹은, 원망인 것 같기도 했다.
크리스토프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삼키려 아래턱에 힘을 주었다. 꿀꺽, 목울대를 울린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 때문에 흔들리기는 하나, 마리앤?”
“윽.”
얕은 신음을 삼킨 그녀가 한동안 침묵했다. 잠이 들었나, 생각할 만큼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의 숨결이 뒷덜미를 간지럽혔다.
“힘들어요. 돌아보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기만 하는 거……. 이젠 지쳤어요.”
이번에는 크리스토프가 침묵했다. 그의 목젖이 아래에서 위로 움직였다. 어두운 밤과 같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일그러졌다. 흡사 쓰라린 통증을 감내하듯.
조용히 숨을 들이켠 그가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였다. 억지로 쥐어짠 목구멍에서는 밭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괜찮아, 마리앤. 이젠 나를 기다리지 않아도 돼.”
“…….”
“이젠 내가 기다리지.”
“…….”
“이젠 내가 당신을 기다리겠어, 마리앤.”
크리스토프는 마치 자신에게 들려주려는 듯,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마리앤에게선 아무런 대꾸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실망했을까, 긴장으로 입술이 바싹 말랐다. 천하의 크리스토프가 할 말을 잃고 허둥거렸다.
어째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일까. 이제는 자신이 기다리는 것도 싫은 것일까. 꼴도 보기 싫어졌나. 그렇다면 난 무얼 해야 하지?
그가 막 입을 떼는 순간.
“마…….”
등 뒤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크리스토프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앤.”
그는 등 뒤의 온기를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긴 그림자가 그의 뒤를 따라왔다. 선선한 봄바람이 그의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더없이 완벽한 순간이었다.
묵묵히 걷던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당신이 흔들린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당신을 흔들 거야, 마리앤.”
그만큼 그는 절박했다. 마리앤에게 작은 틈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비집고 들어갈 만큼 치졸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당신도 각오하는 게 좋아.”
그의 목소리가 텅 빈 밤하늘을 갈랐다.
컹컹!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한 마리가 짖자, 동네 개들이 죄다 따라 짖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프는 행여 그들이 마리앤의 단잠을 방해할까, 먼 길을 둘러 갔다. 지루하지는 않았다. 힘들지도 않았다.
그녀의 마음이 완전히 닫힌 게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그는 뛸 듯이 기뻤다. 그에겐 아직 기회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기회를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이제껏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
휴일 아침이었지만, 마리앤은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 슈나이더 부인으로서의 습관이 몸에 밴 탓이었다.
그녀는 일찌감치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리스트 부인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숙취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지만,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가끔 마리앤을 보면 젊었을 적의 내가 생각난다오. 고상하기로는 나를 따라온 처녀가 없었지. 내게 목을 매는 사내가 한둘이 아니었지 뭐요.”
“그런가요?”
리스트 부인의 넉살에 마리앤이 스푼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그녀의 미소 끄트머리가 어색한 빛을 띠었다. 마음 한구석에 불안함의 그림자가 일렁였기 때문이다.
원인은 알고 있었다. 어제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그녀의 마지막 기억은 막심과 술 대결을 하던 장면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기억이 통째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