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내게 돌아와 주세요.
(23/23)
23. 내게 돌아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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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내게 돌아와 주세요.
2023.06.23.
“잘 먹었습니다, 부인.”
“천만에요, 마리앤. 올라가서 쉬어요.”
“예.”
마리앤은 계단을 오르면서도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왠지 자꾸만 뒤통수가 당겼다. 그녀는 불길한 생각을 떨치려는 듯, 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설마, 별일이야 있었으려고.”
책상에 앉은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근심에 휩싸였다. 이번에는 그녀의 시선이 누런 종이 위로 떨어졌다. 쓰다 만 보고서였다.
사건은 종결되었고,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범인은 명확했고, 그녀는 보고서를 마무리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마리앤은 더 이상 보고서를 쓸 수 없었다.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천진난만한 눈망울이 떠올랐다.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던 얼굴도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내아이.
평범하지 않은 아이에게 죄를 묻는 것이 온당할까? 아니, 그 전에 정말로 그 아이가 범인이긴 한 것일까? 무언가 놓친 것은 없을까?
질문의 답을 찾으려 머리를 끙끙 싸맸지만, 여전히 답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정답은 없는지도 몰랐다.
법학을 공부할 때만 해도 마리앤은 세상이 흑과 백으로 나뉘는 줄 알았다.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나쁜 사람을 벌을 받는다. 권선징악, 그것이 마리앤의 세상이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서 맞닥뜨린 범죄에는 회색지대가 있었다. 유죄와 무죄,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희끄무레한 회색지대.
그녀의 상념이 점점 깊어지던 때.
“마리앤!”
리스트 부인이 아래층에서 그녀를 불렀다. 마리앤은 들고 있던 싸구려 펜을 내려놓으며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내려와 봐요!”
“예, 부인.”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지만, 그녀는 리스트 부인의 부름을 무시할 정도로 간이 크진 않았다.
아들 셋을 키워낸 그녀는 말보다 손이 앞서는 철의 여인이었다. 잘못했다간 등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무슨 일…….”
이냐고 물으려던 마리앤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리스트 부인은 현관에 서 있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다 인기척을 느끼곤 그녀를 돌아보았다.
“손님이 찾아오셨구려. 그러니까 이름이…….”
“크리스토프.”
그의 이름은 리스트 부인이 아니라 마리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부인이 손뼉을 짝 치며 환하게 웃었다.
“맞아, 크리스토프.”
정중하게 그녀를 대하던 크리스토프가 마리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리스트 부인은 이미 그에게 흠뻑 빠진 눈치였다.
“아이고, 우리 집 양반 젊었을 적이랑 꼭 닮았지 뭐요. 어젯밤에 봤을 때도, 우리 집 양반이 문을 열고 걸어 들어오는 줄 알았다니까. 저승에서 나를 데리러 오는 줄 알고 깜짝 놀랐어.”
“어젯밤……이요?”
마리앤이 미간을 찌푸리며, 미심쩍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불길한 예감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었다. 리스트 부인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기억 안 나요? 어젯밤에 이 신사분이 술에 취한 마리앤을 업고 왔잖아.”
아.
마리앤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질 않는가.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왈칵, 치밀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마리앤은 자신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쌀쌀맞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내심 당황했다. 부끄러움을 숨기려다 과하게 반응한 모양이었다.
“…….”
일순, 크리스토프의 눈동자가 상처를 받은 것처럼 보였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밤바다와 같은 눈동자. 그 검은 눈동자가 바람에 출렁이듯 크게 흔들렸다.
마리앤은 또다시 당황했다.
크리스토프가 상처라니, 그럴 리 없어.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꿎은 드레스만 꼭 움켜쥐었다. 이내 평소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가 등 뒤에 있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어머.”
리스트 부인이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그의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하나의 군락을 이룬 푸른색의 앙증맞은 꽃이었다.
“당신을 위한 거야.”
“!”
그 말에 마리앤은 가면을 쓰는 것도 잊은 채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녀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크리스토프, 당신이…… 산 건가요?”
크리스토프가 가볍게 눈썹을 들썩였다. 그가 아니면 누가 샀겠냐는 듯.
“꽃을 고른다는 거,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더군. 당신이 무슨 꽃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말이지.”
그래, 그건 그에게 있어 몹시 생경한 경험이었다. 그는 꽃을 고르는 내내 마리앤을 생각했고, 그녀가 좋아해 주길 바랐다.
그러고 나서야, 이제까지 그녀에게 건넨 선물들이 얼마나 성의 없는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올리버가 적당히 고른 꽃다발과 보석.
그것을 받고 씁쓸하게 미소 짓던 마리앤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때는 그녀가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혹은, 보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그것이 올리버가 고른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꽃고비네요.”
마리앤이 자그맣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의 잇새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크리스토프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군.”
마리앤이 천천히 눈동자를 들었다. 그녀와 크리스토프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어서 꽃다발을 받지 않고 뭘 하느냐는 듯, 팔을 좀 더 앞으로 내밀었다.
“내게 돌아와 주세요.”
그녀의 입에서 꽃고비의 꽃말이 흘러나왔다.
크리스토프의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속내를 들킨 게 머쓱한 듯, 그답지 않게 슬그머니 시선을 돌린 크리스토프가 물었다.
“꽃고비는 좋아하지 않나?”
“…….”
“금어초보단 괜찮은 의미를 지닌 꽃이잖아.”
크리스토프라면 자신이 남긴 금어초의 의미를 눈치챌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꽃에 관심이 없지만, 누구보다 명민하고 명석했으니, 오래지 않아 그녀의 뜻을 헤아렸으리라고.
그러나 이런 결과는 예상하지 못했다. 꽃말에 꽃말로 화답을 할 거라곤 말이다. 그건 크리스토프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래서 마리앤은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것이 크리스토프의 마음이라도 되는 듯, 꽃다발을 받으면 다시 그에게 돌아가야 하는 듯.
크리스토프 역시 고집스레 손을 거두지 않았다.
“…….”
“…….”
묘한 대치를 이루는 두 사람을 보던 리스트 부인이 덥석, 꽃다발을 받았다. 그녀가 크리스토프를 향해 호감 어린 미소를 던졌다.
“걱정 마요, 크리스토프. 내가 꽃병에 꽂아서 마리앤의 방에 장식해 둘 테니. 어쩜, 방이 환해지겠구려.”
“감사합니다, 부인.”
크리스토프의 미소에 리스트 부인이 “고맙긴 뭘.” 하면서 돌아섰다. 그녀의 뺨이 슬그머니 붉어져 있었다.
“꽃병이 어디 있더라.”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녀가 계단 너머로 사라졌다. 마리앤은 결국 크리스토프의 승리로 끝난 대결에 짧은 한숨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그는 마리앤과 결혼하기 전 그녀의 아버지부터 공략했다. 크리스토프는 전략적인 사람이었고, 그녀의 측근을 제 편으로 만드는 데 능숙했다.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마리앤이 다시 한번 같은 물음을 반복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머리는 괜찮나? 어제 술을 제법 마셨는데.”
“윽.”
마리앤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떨구었다. 목덜미와 뺨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무심한 표정을 가장했다. 제대로 되고 있는지 확신할 순 없었지만.
“혹시 내가 어제…….”
무슨 말인가 하려던 마리앤은 그녀를 직시하는 검은 눈동자 앞에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알면 어쩔 것인가. 그렇다고 변하는 건 없을 텐데.
“오늘 쉬는 날이잖아.”
자연스럽게 날아온 대꾸에 마리앤이 하던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요?”
“같이 커피나 마시는 건 어때? 당신이 좋아할 만한 찻집을 알고 있는데.”
마리앤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크리스토프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와 휴일을 함께 보낸다는 건 그녀에게 사치나 다름없었다.
카페는커녕 업무상 연회나 모임이 아니고는 그와 나란히 외출하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낯선 상황을 맞닥뜨린 그녀가 저도 모르게 말을 잃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크리스토프는 행여 그녀가 거절이라도 할까 싶어 서둘러 뒷말을 덧붙였다.
“사건과 관련해서 당신과 나눌 이야기도 있고.”
“사건……?”
무심코 그의 말을 따라 하던 마리앤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에게 할 말이 있었던 탓이다.
크리스토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이내 등을 돌렸다.
“잠시만 기다려요,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
“……천천히 준비해도 돼.”
크리스토프가 비로소 안심한 듯 부드럽게 대답했다. 마리앤이 쓰게 웃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잇새로 반쯤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처음이네요.”
“뭐가?”
“당신이 날 기다리는 거요. 언제나 내가 당신을 기다렸는데.”
“…….”
크리스토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아련한 미소에 그가 무심코 한 걸음 다가섰다.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다. 그러나 크리스토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들은 언제나 그녀를 기다리게 했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중요한 회의가 있어. 갔다 와서 얘기하지.
―보텐슈타인 판사장이 호출했어. 오늘 저녁 약속은 취소해야 할 것 같군.
―기다려, 마리앤. 지금 당장 살펴봐야 하는 사건 자료가 있어.
마리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아무리 늦더라도 그녀만큼은 언제까지고 자신을 기다려줄 거라고, 그렇게 자만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마리앤이 그를 기다렸던 건 그녀의 호의이자 선의였을 뿐,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크리스토프는 그녀를 잃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금어초.
오만.
“괜찮아.”
크리스토프가 뜨거운 감정을 삼키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밤바다처럼 새카만 눈동자로 마리앤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마치 억센 손이 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이로, 낮게 쉰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이번에는 내가 기다릴 테니까. 그동안 내가 당신을 기다리게 한 만큼 나를 기다리게 해도 좋아, 마리앤.”
“…….”
“당신은 얼마든지 내 시간을 낭비해도 괜찮아.”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
윽.
마리앤은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삼키려 서둘러 등을 돌렸다. 그러지 않으면,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그녀는 원망스러운 마음을 숨기려 주먹을 틀어쥐었다. 그리고 애써 의연하게 허리를 펴고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크리스토프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지난 과오가 거대한 해일처럼 그를 덮쳤다. 그는 거센 물살에 쓸려나가지 않으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쾅.
방으로 돌아온 마리앤이 닫힌 문에 등을 기댔다. 주르륵, 크리스토프의 시야에서 벗어난 그녀가 그제야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마리앤은 두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눈치 없는 심장은 또다시 쿵쿵 소리를 내며 뛰었고, 염치없는 기대는 새로운 싹을 틔웠다.
“안 돼, 마리앤. 제발 그러지 마.”
그녀는 자신에게 경고했다.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알고 있는 탓이었다.
“하아.”
짧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마리앤이 옷장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채도 낮은 자주색 드레스와 보닛 모자, 목에 달린 리본. 마리앤은 어느새 자신의 허름한 옷장에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었다.
그녀는 여전히 크리스토프에게 아름답게 보이길 원했다. 어리석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