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아버지는 딸을 팔았다2020.05.04.
「모든 버림받은 자들과, 용서받지 못한 그대에게」 그날 밤, 어린 레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서재를 찾았다.
“아버지, 부르셨어요?”
“들어오거라.”
문 너머 음성에 레나는 입술을 물고 웃었다. 레나의 아버지인 루벨 자작은 멋진 사람이었다. 근사한 외모에 사교적이고 능력도 뛰어나 늘 인정받았다. 일밖에 몰라 가정에 소홀한 것이 다소 흠이지만, 레나는 그런 점까지 포함해서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레나를 따로 불렀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왜 부르신 걸까? 바이올린 수업 때 칭찬받은 걸 아셨나? 아니면, 내 생일 때문에?’
다음 주 수요일은 레나의 열두 번째 생일. 어쩌면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셨는지도 몰랐다. 레나는 기대에 부풀어 서재로 발을 들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준비한 것은 예쁜 선물이 아니라, 차가운 나락이었다.
“아이가 왔습니다.”
레나가 들어오자 아버지가 나직이 고했다.
“그 앤가요?”
이어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의 의자에 처음 보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성화 속 천사처럼 아름다운 남자였다.
“참 예쁜 아이네요. 정말 괜찮겠어요? 제물로 쓰기엔 좀 아까워 보이는데.”
남자가 레나를 보며 물었다.
“신중히 결정하세요. 시체도 안 남아서 장례 치르는 것조차 힘들 테니.”
레나는 귀를 의심했다. 시체? 장례? 레나가 놀란 눈으로 그 미치광이를 바라보는데, 아버지가 레나의 어깨를 붙들었다.
“결정은 이미 내렸습니다.”
“……아버지?”
레나는 어른들의 실없는 농담이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아버지, 루벨 자작의 얼굴은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올해 열 살이고 건강해서 잔병치레도 한 적 없습니다. 분명 전하께 도움이 될 겁니다.”
자작이 레나를 밀며 말했다. 덤덤한 평가에 레나의 표정도 멍해졌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었다. 정신이 아득한 와중에 자작의 말은 귓가를 맴돌았다. ―올해 열 살이고 ―건강해서 ―잔병치레도 한 적 없습니다. 맞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어린 레나는 찬 바람만 불어도 기침을 할 만큼 허약했다. 때문에 하인들은 날이 조금만 추워져도 아씨를 위해 생강을 꿀에 절이고 솜옷을 지었다. 하지만 이건 사소한 오해였고,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자작의 딸은 올해 열 살이 아니라 열두 살이었다. 레나는 자신의 생일은커녕 나이마저 모르는 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자작은 레나를 보지 않고, 딸의 작은 어깨를 짓눌러 압박했다. 버거운 손길이 레나를 일깨웠다. 믿을 수 없지만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아버지가 딸을 팔았다. 그날 밤, 레나는 버림받았다. 존경해 마지않던,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버지에게. 이미 6년 전의 일이다.
*** 인간은 가치 있다. 젊으면 더 그렇고, 미인이면 특히 비싸다. 강도소굴이 된 제국의 흔하고 환멸 나는 인신매매 추세였다. 제국에선 사람이 사라지는 일이 비일비재해서, 여자나 아이는 거리를 함부로 다니지 않았다. 그러니 아리따운 숙녀가 광장에 홀로 앉은 모습은, 시민들에게 퍽 낯선 광경이었다.
“아가씨!”
야무진 목소리가 빛바랜 광장에 울렸다. 소리친 것은 하녀복 차림의 어린아이였다.
“아가씨, 배고프시죠? 이것 좀 드세요.”
열 살쯤 된 하녀가 달려와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그러자 벤치에 앉아 있던 숙녀가 부드럽게 웃었다. 흔치 않은 미모에 사람들이 힐끗댔지만, 숙녀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듯했다. 아가씨는 하녀가 가져온 샌드위치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대며 물었다.
“왜 하나뿐이죠? 유니는요?”
“저는 괜찮아요.”
“혹시 돈이 다 떨어졌어요?”
“음, 안타깝게도, 네.”
하녀 유니의 대답에 아가씨의 표정이 짐짓 굳었다. 그래서 유니는 더 씩씩하게 노점에서 사 온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그러니까 이건 아가씨가 드세요. 저는 작아서 안 먹어도 괜찮아요!”
“작으니까 더 잘 먹어야죠. 모자라겠지만 나눠 먹어요.”
아가씨는 다정히 웃더니, 샌드위치를 반으로 나누어 더 큰 쪽을 돌려주었다. 유니는 배시시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네, 저도요.”
아름다운 숙녀와 귀여운 아이는 나란히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시선은 무수하게 쏟아졌다.
‘뭐 하는 애들이지?’
‘보호자는 없나?’
‘저러다 무슨 꼴을 당하려고…….’
대부분 걱정과 비난이었다. 시민들은 겁 없는 처자를 향해 혀부터 찼다. 그러곤 곁에 있던 딸이나 여동생을 타이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귀족인가?”
“야, 귀족이 저러고 있겠냐?”
“말 한번 걸어봐?”
반면 허드렛일하던 소년들은 저들끼리 쑥덕대기 바빴다. 다들 홀딱 반한 눈치였지만 자신의 비루한 몰골 탓에 멀리서 서성이기만 했다. 그리고 광장 입구에 선 장신의 청년 역시, 저 숙녀를 관찰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때였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웬 제복 차림의 남자가 그 숙녀에게 말을 걸었다.
“신분증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낯선 음성과 노을을 가리는 그림자에 아가씨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낯선 자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림새로 보아 도시의 경비대인 듯했다.
“신분증이요?”
“수상한 자가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신분증을 보여주시죠.”
“저, 지금은 없는데…….”
신고라는 말에 겁을 먹었는지 아가씨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무심하던 경비대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주지가 어딥니까?”
“저흰 이 도시 사람이 아니에요.”
“방문객? 다른 일행도 있습니까? 우리 도시에 방문한 이유는?”
“일행은 없고, 여긴 잠시 지나는 길이에요…….”
“그렇게 둘이서 말입니까?”
아가씨가 성의껏 대답했지만 경비대원은 오히려 의심스럽다는 듯 팔짱을 꼈다. 그러곤 취조하듯 되물었다.
“그대의 신분은?”
“저는 북부 후작가의…….”
“후작가의 아가씨가 하녀만 데리고 광장을 서성인다? 말이 되는 소릴 하시지.”
경비대원이 아가씨의 말을 끊고 코웃음을 쳤다. 그에 아가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에요, 저는…….”
“신원불명에 귀족사칭, 혐의가 풀릴 때까지 조사하겠다. 따라와!”
경비대원이 대뜸 아가씨의 손목을 잡아챘다.
“무슨 짓이야!”
“유니, 괜찮아요!”
“아가씨……!”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조사만 받으면 되잖아요.”
아가씨가 아이를 말리며 경비대원을 따라 일어났다. 발끈했던 유니도 별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경비대원은 기어이 무고한 아가씨와 아이를 끌고 갔다. 광장엔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다들 익숙한 듯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 . . 경비대원이 아가씨를 이끈 곳은 경비대 청사가 아니라 인적 드문 골목길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웃었다.
“이거 너무 쉬운데?”
경비대원이 비열하게 키들대자 숨어있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야, 어디서 이런 게 나왔어?”
“얼굴 뽀얀 거 봐라. 이게 진짜 여자지.”
추레한 사내들이 히죽대며 다가오자, 아가씨는 겁먹은 얼굴로 경비대원을 돌아보았다.
“도, 도시경비대 아니신가요?”
“맞아, 맞는데 봉급이 적어서 가끔 부업도 하고.”
“그런…….”
“그러게 왜 겁도 없이 혼자 다녀, 위험하게.”
사내들이 걱정해주는 척 낄낄댔고, 그 저속한 태도에 아가씨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자 한 사내가 중얼댔다.
“야, 근데 이거 탈 나는 거 아냐?”
다 큰 숙녀가 너무 순하다. 모로 보나 금지옥엽 길러진 부잣집 따님 같았다. 일행의 걱정에 경비대원이 코웃음을 쳤다.
“등신아, 귀한 집 아씨가 호위도 없이 다니겠냐?”
“몰래 외출한 걸 수도 있잖아?”
“뭐 어때, 내다 팔면 끝인데!”
경비대원이 험하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유니가 빽 소리쳤다.
“이 나쁜 놈! 아가씨한테 손대지 마!”
“푸하하!”
아이가 호통을 치자 남자들은 폭소를 터트렸다.
“요것도 잘 팔리겠네. 변태들이 좋아하겠어.”
“이러지 마세요. 제발 보내주세요.”
음험한 조롱에 유니가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아가씨가 유니를 감싸며 애원했다. 안 하느니 못한 짓이었다. 떨리는 목소리가 그들의 어그러진 심성을 부추겼다. 사내들은 늪이 꿀렁대듯 웃더니, 아가씨를 낚아채려는 듯 팔을 뻗었다. 그때였다. 쾅! 뜻밖의 소리와 함께 골목을 막아서던 남자 하나가 거꾸러졌다. 다들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시에 덜컥 굳어 버렸다. 골목 저 끝에, 노을을 등진 남자가 서 있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망토까지 까맣게 뒤집어쓴 장신의 괴한이었다. 그리고 그의 발밑엔 망보던 자가 무참히 쓰러져 있었다.
“뭐야, 이 새끼야!”
사내들이 불청객을 향해 소리쳤다. 괴한은 대답하지 않고 발밑에 쓰러진 남자의 머리를 밟았다. 까드득 뼈 깎는 소리가 났지만 밑에 깔린 남자는 기절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런 씨……!”
보다 못한 다른 사내가 달려들며 주먹을 내질렀다. 괴한은 얕게 피하더니, 헛손질한 남자의 팔을 잡아 꺾어버렸다.
“끄아악!”
나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주저앉았다. 그러자 괴한은 기다렸다는 듯, 한층 낮아진 남자의 턱을 무릎으로 찍어 올렸다.
“컥……!”
무자비한 폭행에 남자의 몸이 맥없이 넘어갔다. 동료가 연이어 쓰러지자 나머지 사내들도 벌컥 달려들 자세를 취했다. 그때 괴한이 몸을 세우며 어깨를 폈다. 움직일 땐 몰랐는데, 바로 서니 그는 몹시 거대했다. 게다가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은 죽일 듯 날이 서 있었다. 위압적인 체격과 서슬 퍼런 눈빛에 사내들은 주춤하며 멈추더니, 결국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제길!”
겁먹은 개가 짖는 법이다. 성을 낸 사내들이 몸을 빼며 달아났다. 개들이 도망치자 골목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하지만 아가씨와 하녀는 여전히 서로를 꼭 안고 있었다. 경비대원과 그 무리 못지않게, 망토의 괴한도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새카만 괴한이 그림자를 끌고 다가왔다. 그러곤 마른 침을 삼키는 아가씨와 하녀에게 조용히 물었다.
“괜찮아?”
평범하게 친절한 목소리였다. 뜻밖의 목소리에 아가씨가 놀라자 괴한은 복면을 걷었다.
“아…….”
이윽고 드러난 얼굴에 아가씨는 다시 한번 놀랐다.
과격한 행동과 달리 그의 인상은 단정했다. 달처럼 흰 얼굴에 이목구비가 말끔했고, 깊고 검은 눈동자는 아까와 달리 차분했다. 이 온화해 뵈는 청년이 사람을 그렇게 깨부쉈다니, 직접 보고도 안 믿길 지경이었다. 아가씨가 눈을 깜빡대자 청년이 말을 이었다.
“광장에서 보고 따라왔어. 경비대라고 무턱대고 따라가면 안 돼, 위험해.”
청년은 차분하게 타이르며, 아직 굳어있는 아가씨에게 손을 내밀었다.
“데려다줄게.”
“네?”
“집 앞까지는 말고. 근처까지만.”
“……저흰 이 도시 사람이 아니에요.”
아가씨가 실바람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긴 잠시 들른 거고, 수도로 가고 있어요.”
“그렇게 둘이?”
아가씨가 끄덕이자 청년의 눈에 의구심이 차올랐다.
“황궁에, 아버지가 계세요.”
청년이 빤히 쳐다보자 숙녀는 아름답지만 위태로운 얼굴로 고백했다.
“제 이름은 레나 루벨이에요. 북부의 후작이신 카르도 루벨 각하가 제 아버지세요.”
그렇게 말하는 숙녀, 레나 루벨의 눈빛은 6년 전과 다름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을 때와 다름없이 가녀리고, 또 가련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