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딸은 지옥에서 돌아왔다2020.05.07.
“잘 먹겠습니다!”
허름한 여관방에서 어린 하녀가 기쁘게 외쳤다. 허기진 어린이 유니는 아가씨보다 먼저 식사를 시작했고, 레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방 한쪽으로 눈을 돌렸다.
“감사해요, 린 씨.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레나가 인사한 곳엔 이 비좁은 방의 주인이 있었다. 아까 레나와 유니를 도와준 청년, 린이었다. 그는 낡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어색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따라올 줄 몰랐는데.”
“네?”
린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하자, 레나는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갈 곳이 없으면 따라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을 막 따라오면…….”
“통성명했는데…….”
“이름만 아는 사이면 거의 모르는 사이라고 봐야…….”
중얼대던 두 사람은 서로의 발상 차이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레나의 말마따나 따라오라고 한 건 린이었다. 납치당할 뻔한 여자애들을 그냥 둘 수 없어서, 제 역할 못 하는 경비대에 맡길 수도 없어서, 게다가 곧 밤이어서 일단 따라오라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정말 따라온 레나가 내심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지금 그가 머무는 곳은 일반 가정집도 아닌 여관이었다. 린이 석연찮은 표정을 짓자, 레나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혹시 다시 나가라는 말씀을 하시는 거면…….”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레나가 울먹이자 린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그냥 뜻밖이라는 소리였어. 불편해하지 마.”
“불편하게 만들어놓고 불편해하지 말라네.”
“유니, 쉿.”
종알대다가 아가씨의 제지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유니는 굴하지 않고 빵을 씹으며 린을 째려봤다. 타당한 일침이기에 린은 얌전히 꼬리를 내리고 화제를 돌렸다.
“루벨 후작의 딸이라고 했지?”
“네.”
“후작에게 딸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린이 뭔가 아는 것처럼 말하자 레나는 멈칫하며 빵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상처 입은 얼굴로 웃었다.
“공식적으로는 그렇지만 알 사람은 알 거예요. 그 가문에도 딸이 있다는 걸요.”
레나의 고백에 린의 미간이 좁아졌다.
‘비공식적인 딸이면 혼외자인가?’
그런 딸이 이 시국에 왜 나타났지? 린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되물었다.
“그런데 왜 혼자야? 후작이 아무도 안 보냈어?”
“그게, 아버지는 제가 지금 찾아가는 걸 모르세요.”
레나의 대답에 린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보통 딸도 아니고 혼외자인 딸이, 아버지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찾아간다고? 심지어 이 시국에? 린은 자신이 제대로 이해한 건지 헷갈렸다.
“후작이 오라고 한 게 아닌데 만나러 간다고?
“네.”
“누가 허락했는데?”
“허락이요?”
허락이라는 말에 레나가 눈을 깜빡였다. 왜 허락이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덕분에 린은 고뇌에 빠졌다. 눈앞의 후작 영애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아가씨가 대책 없이 순진하다는 것. 이런 식으로 찾아가서는 문전박대당할 게 뻔했다. 아니, 문전박대만 당하면 다행이다. 후작이 갑자기 나타난 자신의 치부를 매장하려 들 수도 있다. 린은 반신반의하며 재차 물었다.
“후작이 지금 어디 있는지는 알아?”
“황궁에 계실 거예요. 곧 건국기념일이니까요.”
“그럼 당신이 지금 가는 곳은?”
“당연히 황궁이죠.”
레나의 수줍은 대답에 린은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
“네?”
“당신이야 그렇다 쳐도, 저 꼬마는 불쌍하잖아.”
“아어?”
자기 얘기가 나오자 유니가 스푼을 입에 댄 채 고개를 들었다. 그 천진한 모습에 린은 작심하고 말했다.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수도는 여기보다 훨씬 더 개판이야. 운 좋게 황궁까지 가도 후작이 당신을 만나준다는 보장도 없고, 황궁도 그리…… 친절한 곳은 아니야. 거기서도 아까 같은 일이 또 생길 수도 있어.”
“저,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제껏 잘해왔는걸요?”
“믿는 구석이라도?”
“그런 건 아니지만, 괜찮을 거라 생각해요. 아무리 흉흉한 세상이어도 나쁜 사람보단 친절한 사람이 많으니까요.”
“결국 남의 도움을 받겠다는 소리면, 그게 더 위험해.”
“더 위험하다니요?”
“눈에 띄어, 당신.”
레나가 갸웃댔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그래서 린은 고민하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예쁘다고.”
“아…….”
노골적인 평에 레나의 뺨이 붉어졌다. 하지만 린은 그의 미모를 칭송하려는 게 아니었다.
“덕분에 주목받기 쉽고, 표적이 되기 쉽고, 비싸게 팔리기도 쉬울걸.”
린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조용했다. 하지만 그 매서운 표현에, 특히 비싸게 팔린다는 대목에 레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린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도와준 대가를 요구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도와준 대가라니, 너무 에둘러 말했다. 그래도 애가 듣는 데서 몸을 요구할 거란 소리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레나는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레나는 굳은 얼굴로 생각하더니, 다시 린을 보며 물었다.
“그럼 린 씨도, 제게 대가를 요구하실 건가요?”
“아니.”
린은 단호히 부정했다. 그러나 부족했다. 레나는 이미 겁먹은 얼굴이었다.
‘이런.’
린은 뒤늦게 후회했다. 무신경했다. 저 숙녀에겐 본인도 낯선 남자인데, 여관까지 생글대며 따라 들어왔다고 말을 미처 못 가렸다. 린은 재차 부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미 경계심이 생겼는데 아니라고 해봐야 소용없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면 밤새 불편하게 생겼다. 린은 고민하다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레나가 흠칫 놀라는 게 보였지만, 못 본 척 태연히 다가갔다. 그러곤 허리에 맨 단검을 풀어 레나가 앉은 테이블에 올렸다.
“이건……?”
“안전장치.”
뜻밖의 말에 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레나가 얼떨떨하게 바라보자 린이 덧붙였다.
“필요할 때 써.”
“……어떻게요?”
“내가 접근하면 찔러.”
린은 명료히 답하며 다시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레나는 얼떨결에 받은 단검과 거리를 두는 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머뭇대던 숙녀의 입가에 차츰 미소가 번졌다. 두려운 기색도 함께 옅어진 걸 확인한 후에야 린은 마음을 놓았다. 몰래 웃던 레나가 살며시 말했다.
“린 씨도 그래요.”
“무슨 소리야?”
“예쁘다고요.”
린의 표정이 묘해졌다. 하지만 레나는 굴하지 않았다.
“린 씨도 예쁘세요.”
“대체…….”
린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대뜸 예쁘다니, 왜 갑자기 말이 그렇게 튀지? 린이 황당하게 쳐다봤지만 레나의 눈빛은 여전히 순진무구했다.
‘혹시 약간 모자란 건가?’
린은 무심코 생각했다가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짐작이 너무 그럴싸해서. 그렇지 않고서야 다 큰 숙녀가 이토록 세상물정 모르고 순진할 수는 없었다. 무거운 가설에 린의 시선이 흔들렸다. 하지만 레나는 린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듯,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처지와 입장도 까맣게 모르는 듯 어여쁘게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 . . 레나와 유니가 식사를 마쳤을 땐 이미 밤이었다. 밖이 어두워지자 린이 겉옷을 벗으며 말했다.
“난 소파에서 잘 테니까 당신들은 침대에서 자.”
“불편하지 않으시겠어요?”
걱정하는 목소리가 돌아왔지만 린은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하얀 잠옷 차림의 레나 때문이었다. 긴 소매의 잠옷이었지만, 린은 그 모습을 보는 게 불편했다. 그래서 모르는 척 등불의 크기를 줄이고 소파에 발을 뻗었다. 방이 어두워지자 레나와 유니도 부스럭대며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한참 후, 어둠 속에서 레나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린 씨, 주무세요?”
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나는 여상히 속삭였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됐어.”
“조금 놀랐어요. 이렇게 대가 없이 도와주시는 분은 처음이거든요.”
린은 건성으로 답하려다 멈췄다. 레나의 고백에서 차가운 무게를 느낀 탓이었다. 대가 없는 도움이 처음이라면, 이제까지는 대가를 치르며 도움받았을까?
“많았어요. 제가 마냥 순진한 줄 알고 접근하는 사람들이요. 하지만 정말 순진한 건 그런 사람들이죠.”
초연한 목소리였다. 린이 침묵하자, 레나가 목소리를 바꿔 속삭였다.
“그보다 린 씨, 이렇게 아무나 도와주면 위험해요.”
“내 걱정할 때가 아니잖아…….”
“린 씨는 정말 예쁜 분이세요.”
레나가 웃으며 속삭였고, 린도 결국 실소를 터트렸다. 린이 웃자 레나가 더 나긋하게 물어왔다.
“린 씨는 뭐 하는 분이세요?”
“그냥, 이것저것.”
“여긴 잠시 머무시는 것 같은데, 혹시 수도로 가는 중이세요?”
레나의 추측은 정확했다. 이 도시가 수도의 관문이니 그리 어려운 유추도 아니었다. 린은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이다가, 넌지시 선을 그었다.
“미리 말하는데 난 당신 못 데려가.”
“수도로 가시는 거 맞구나……. 데려가실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같은 길인걸요?”
알아서 따라오겠다는 소린가 보다. 야무진 포부에 린이 쓴웃음을 삼켰다.
“미안하지만 난 여기 볼일이 남았어.”
“볼일이요?”
“……늦었어. 피곤할 텐데 그만 자.”
연이은 질문에 린은 조금 난처해졌다. 신분을 밝힐 수 없던 그는 서둘러 말을 끊었다. 그로써 대화도 그쳤고, 밤은 다시 고요해졌다. . . . 그리고 더 깊어진 밤, 얕게 잠들었던 레나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쉿.”
코앞에서 한 남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린이었다. 레나는 어둠 속에서 밀착해온 그를 보다가 작게 물었다.
“지금 찌르면 되나요?”
“……아니.”
레나가 머리맡의 단검을 쥐자, 린은 빠르게 부정했다.
“침대 밑으로 숨어.”
린이 영문 모를 말을 하는 순간, 밖에서 삐거덕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복도의 마룻바닥을 밟는 소리였다.
“어서.”
린은 레나와 아직 잠든 유니를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직후 거칠게 문이 열렸다.
“어디 있냐, 이……!”
고함소리가 이어지다 뚝 끊기고, 대신 둔탁한 타격음이 울렸다. 콰당, 퍽, 우지끈, 콰직. 린은 문이 열리자마자 돌진했고, 들이닥친 자들은 어둠 속에서 속수무책 얻어터졌다.
“그만해, 새끼야! 불 질러 버리기 전에!”
돌연 방 안이 밝아졌다. 저쪽에서 숨겨온 등불을 급히 켠 모양이었다. 그로써 드러난 밤손님의 정체는 예상대로였다. 바로 오늘, 레나에게 접근한 건달들이었다. 집요한 그들에게, 린이 한숨을 쉬며 경고했다.
“말로 할 때 꺼져.”
그에 이미 폭행당한 남자들이 이를 갈았다.
“여자 내놔.”
“무슨 여자?”
“네놈이 가져간 내 여자!”
“잠꼬대가 심하네.”
린이 혀를 차자 대장 격의 남자가 으득 이를 갈았다.
“후회하지나 마라, 망할 새끼야.”
그 남자가 단검을 뽑았다. 린이 한걸음 물러났지만, 그는 따라붙지 않았다. 대신 칼끝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죽 그어버렸다. 뜻밖의 행동에 린은 놀라서 눈을 홉떴다.
‘설마…….’
린이 흠칫하는 사이 시뻘건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그와 함께 지독한 유황 냄새가 퍼졌다. 곧 연기마저 자욱이 피어올랐고, 그 속에서 어떤 형체가 빠르게 자라났다. 린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고 격분했다.
“이 머저리들아!”
하지만 남자들은 낄낄 웃기만 했다. 두려움을 감추느라 묘하게 고조된 웃음이었다. 몰아치는 불길함 속에서 낯선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네 발로 땅을 디뎠다. 언뜻 웅크린 인간처럼 보였으나, 더 자세히 보면 개의 몸에 인간의 머리를 붙인 듯 형언할 수 없이 기괴했다.
“큭!”
린은 코를 찌르는 용암 냄새에 이를 악물었다. 바보들이 무덤의 길을 열었다. 고작 여자 하나 데려가겠다고, 자신의 피를 바쳐 무저갱의 망자를 불러냈다. 상황을 파악한 린은 벽에 걸쳐둔 검으로 팔을 뻗었다. 동시에 눈을 뜬 망자가 덮쳐들었다. 카앙! 검을 뽑을 새도 없어 검집째로 막았다. 망자가 이빨로 검집을 박살 내자, 린은 진저리를 내며 그것을 쳐냈다. 망자가 밀려난 사이 린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자, 망자도 울컥대며 몸집을 불렸다. 사내들은 구경꾼이 되어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때였다.
“그만하세요!”
애처로운 호소와 함께, 새하얀 천 자락이 방 한가운데로 달려 나왔다. 레나였다.
“비켜!”
린이 앞을 가로막은 레나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레나는 듣지 않았다.
“제발 싸우지 마세요.”
레나의 애원에 린은 현기증을 느꼈고, 남자들은 폭소를 터트렸다. 망자까지 으르렁대자, 피를 낸 남자가 손을 들어 막더니 즐겁게 말했다.
“아가씨, 순진한 건 좋은데 분위기 파악도 해야지. 그러다 다치면 우리도 곤란해.”
“순진한 건 여러분이에요.”
“뭐?”
“지금이라도 멈추세요. 이런 억지와 폭력은 용서받지 못해요.”
“허!”
레나의 경고에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모자란 년이, 편드는 놈 있다고 기고만장해선.”
기실은 이를 드러낸 것에 가까웠다.
“닥치고 비켜, 쳐 죽이기 전에.”
그 남자는 지옥의 문을 연 영향으로 잔인한 충동을 겪고 있었다. 갈증이 났다. 다 됐으니 눈앞의 여자를 피투성이로 만들고 싶었다.
“레나, 그만해!”
남자의 호흡이 거칠어지자 린이 소리쳤다. 차라리 직접 데려오고 싶었지만, 코앞의 망자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저 때문에 린 씨를 다치게 할 순 없어요.”
“내 걱정할 때가……!”
“알겠어, 알겠으니까 둘 다 죽어!”
남자가 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동시에 망자가 바닥을 박찼다.
“레나!”
린이 달려들었지만, 네 발의 망자보다 빠를 순 없었다. 결국 망자가 레나를 덮쳤다. 새하얀 잠옷이 출렁이며 검은 핏방울이 허공에 비산했다. 싸늘한 공포를 느낀 린은 레나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그런데, 흔들리던 잠옷이 스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섰다. 비 맞은 풀잎이 튕겨 오르듯, 유연하고도 힘차게. 대신 시커먼 것이 후드득 쏟아졌다. 망자의 분리된 머리였다. 린은 그것을 얼떨결에 받았다가 경악하며 도로 던졌다. 그러곤 고개를 쳐들었다. 레나 루벨이 단검에 맺힌 피를 털어내고 있었다. 달빛을 받으며, 흐트러짐 없이 고고하게. 린은 숨까지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선이 쏟아지자 레나가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너무 놀라시네요.”
그러더니 웃으며 덧붙였다.
“정말이지, 순진하시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