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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역시 예뻐요 (3/208)

3화. 역시 예뻐요2020.05.11.

숙녀가 망자를 찢을 때, 사람들은 세상이 멈추는 기분마저 느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다들 경악할 때였다.

16562795455427.jpg“끄아악!”

망자를 불러낸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피로 연결된 망자의 죽음이 그를 덮친 탓이었다.

16562795455427.jpg“왜, 왜 이래!”

남자가 발광하며 제 일행을 마구잡이로 물어뜯었다.

1656279545544.jpg“저런.”

또 다른 난장판이 벌어지자 레나가 혀를 차며 다가갔다. 정신이 멀쩡한 자들은 도망치려 몸부림쳤고, 눈이 뒤집힌 자는 목표를 바꿔 레나에게 달려들었다. 폭주하는 사내의 기세가 섬뜩했지만 레나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침착하게 그의 정수리를 단검으로 내리찍었다.

16562795455444.jpg“흐어억!”

남자들은 동료의 골이 쪼개지는 줄 알고 기함했다. 하지만 다시 보니 남자의 머리를 찍은 건 칼날이 아니라 칼자루였다.

16562795455427.jpg“끄윽…….”

남자가 거품을 뱉으며 쓰러졌고, 다른 남자들은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 주춤댔다. 그들을 향해 레나가 속삭였다.

1656279545544.jpg“그러게 왜 아무나 건드려요, 위험하게.”

16562795455427.jpg“으……!”

한 남자가 질겁하며 몸을 돌렸다. 동시에 단검이 날아와 그의 뺨을 스치고 문에 꽂혔다.

1656279545544.jpg“아직 가면 안 돼요, 여러분.”

흉기를 투척한 레나가 다정히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섬뜩한데, 레나의 주변으로 하얀 안개가 번지기 시작했다. 망자의 피가 증발하며 생긴 안개였다. 레나가 자욱한 연기를 헤치며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갔다. 기절한 남자는 손바닥 크기의 암석을 쥐고 있었다.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기묘한 돌이었다.

1656279545544.jpg“이분은 제단을 언제부터 가지고 계셨죠?”

레나가 그것을 ‘제단’이라 부르며 물었다. 남자들은 우물대기만 할 뿐 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레나가 갸웃대며 되물었다.

1656279545544.jpg“답하기 어려운 질문인가요? 아니면, 내가 너무 친절하게 물어봤나?”

레나가 중얼대자 남자들은 그제야 화들짝 답했다.

16562795455427.jpg“세, 세 달. 세 달쯤 전에.”

1656279545544.jpg“혹시 출처도 아세요?”

16562795455427.jpg“그, 우연히 주웠다고…….”

1656279545544.jpg“우연히?”

레나는 그럴 리 없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다들 모르는 기색이어서 더 추궁하지 않았다.

1656279545544.jpg“이건 압수.”

레나가 제단에 묻은 피를 닦아서 챙겼다. 그러곤 쭈뼛대는 남자들을 돌아보았다.

1656279545544.jpg“여러분은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지셨으면 해요.”

레나의 발언에 남자들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때 침대 밑에서 유니가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꼬마는 잠옷을 탁탁 털더니 남자들 앞으로 총총 걸어갔다.

16562795484227.jpg“괜찮아. 실수는 만회할 수 있어.”

그러곤 그들을 향해 손을 벌렸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16562795484227.jpg“가진 거 다 내놔.”

  . . . 유니는 남자들의 양말까지 뒤집어 상당한 돈을 갈취해냈다. 지독하게 털린 그들은 울먹이며 퇴장했고, 유니는 착하게 살라고 타이르며 배웅했다. 그때까지 린은 묘하게 소외되어 방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남자들이 모두 사라지자, 그가 머리 맞은 얼굴로 중얼댔다.

16562795484235.jpg“다 연기였어?”

1656279545544.jpg“무슨 말씀이신지…….”

연기라는 말에 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단호하던 레나의 인상이 다시 순진무구해졌고, 린은 그 격변에 기가 막혀 되물었다.

16562795484235.jpg“계속 약한 척 연기했잖아.”

1656279545544.jpg“약한 척한 적 없어요. 평범하게 예의를 지켰을 뿐이죠.”

16562795484235.jpg“불한당한테 얌전히 끌려가는 게 평범한 예의……?”

린이 따져 묻자, 레나와 유니는 곤란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더니 작정한 장사꾼 같은 얼굴로 변명했다.

1656279545544.jpg“그건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었어요.”

16562795484227.jpg“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또 다른 선량한 여자아이들에게도.”

1656279545544.jpg“이 일로 저분들은 교훈을 얻었을 거예요.”

16562795484227.jpg“만만해 보인다고 건들지 말자.”

1656279545544.jpg“그만큼 다른 사람은 안전해질 거고요.”

16562795484227.jpg“일종의 정의구현?”

1656279545544.jpg“물론, 그 과정에서 약간의 수고비를 챙기긴 했어요.”

16562795484227.jpg“여비가 필요하여 불가피하게.”

1656279545544.jpg“좋은 게 좋은 거니까요.”

이인조는 그렇게 말하며 방긋 웃었다. 무해하고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린은 속지 않았다.

16562795484235.jpg“강도잖아, 그거…….”

1656279545544.jpg“하고많은 말 중에 강도라니.”

린이 핵심을 간파하자 레나가 슬퍼했다. 린은 그 가련한 얼굴을 쳐다보다가 여태 간과한 사실을 깨달았다. 레나는 도와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레나의 외모와 눈빛, 그리고 상황을 멋대로 오해하고 나선 건 순전히 린이었다. 게다가 오해만 했으면 차라리 다행이다.

16562795484235.jpg―안전장치.

16562795484235.jpg―필요할 때 써.

16562795484235.jpg―내가 접근하면 찔러.

  린의 뇌리에 자신의 지난 발언이 퍼뜩 스쳤다. 동시에 오싹한 한기가 전신을 휘감는 게 느껴졌다. 안전장치라니, 접근하면 찌르라니. 대체 누구 앞에서 치명적인 수컷 행세를 한 거지? 자신의 만행을 깨닫는 순간 수치심이 와르르 쏟아졌다.

16562795484235.jpg‘으아악…….’

린은 입술을 깨물며 절규를 참았다. 외마디 비명은 다행히 묵음 처리되었지만,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것까지는 막을 도리가 없었다. 린이 괴로워하자 레나는 눈을 깜빡이다 피식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린이 불타는 얼굴로 중얼댔다.

16562795484235.jpg“내가, 쓸데없는 참견을…….”

1656279545544.jpg“쓸데없는?”

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하지만 린은 수치심에 매몰되어 듣지 못했다. 레나는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다가, 이내 모르는 척 말을 돌렸다.

1656279545544.jpg“그보다, 혹시 이건가요? 린 씨가 말씀하셨던 여기서의 볼일.”

레나가 아까 얻은 제단을 흔들었다. 린은 더 놀라지도 않고 힘없이 되물었다.

16562795484235.jpg“어떻게 알았어?”

1656279545544.jpg“수도로 가신다기에 그러지 않을까 싶었어요. 대처가 익숙한 것도 그렇고, 황제 폐하께서 이걸 찾으신다고 들었거든요.”

담백한 대답에 린은 긴 숨을 내쉬었다. 왜 레나가 순진하다고 생각했을까? 순진하기는커녕 무섭도록 눈치가 빠른데. 말마따나 린은 저 제단을 찾고 있었다. 제단. 지옥의 문을 여는 열쇠. 꼭 한 세기 전 세상에 등장해 인간의 역사를 바꾼 끔찍한 돌. 린은 수도로 향하던 중 이 도시에 제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탐색 중이었다. 린이 침묵으로 긍정하자, 레나는 즐거운 기색으로 되물었다.

1656279545544.jpg“이건 이제 제건데, 어떡하실 거예요?”

16562795484235.jpg“어떻게 하다니?”

1656279545544.jpg“빼앗으실 건가요?”

레나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린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1656279545544.jpg“별로 안 중요하신가 봐요?”

16562795484235.jpg“그런 건 아니야.”

1656279545544.jpg“그럼요?”

16562795484235.jpg“중요하지만 뺏을 생각은 없어. 애당초 왜 전제가 뺏는 건데?”

린이 단호히 일축하자, 레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1656279545544.jpg“역시 린 씨는 예뻐요.”

뜻밖의 말에 린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레나는 그 얼굴을 상냥하게 마주 보며 제단을 내밀었다.

1656279545544.jpg“쓸데없는 참견 아니었어요. 구해줄 필요는 없었지만 친절은 필요했어요.”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린의 손을 감쌌다.

1656279545544.jpg“정말 감사해요. 이건 제 약소한 보답이에요.”

레나의 손은 잠시 머물다 떠났고, 린의 손에는 어느새 제단이 쥐어져 있었다. 린은 놀라서 레나를 바라보았다. 약소하다니, 대체 어디가. 그가 베푼 친절은 고작해야 싸구려 여관의 숙식이었다. 반면 제단은 무려 황제가 찾는 물건. 계산이 너무 틀리지만 린은 사양할 수 없었다.

16562795484235.jpg“준다면 감사히 받을게. 하지만 보답으로는 과하니까 갚을게. 어떤 식으로든.”

1656279545544.jpg“기대하고 있을게요.”

레나가 환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그러나 린은 마주 웃지 못했다. 눈부심을 피하듯, 시선을 옮기느라고. *** 소란한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 레나와 린은 여관 앞에서 작별인사를 나눴다.

1656279545544.jpg“같이 가자고 하실 줄 알았는데.”

레나가 서운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린은 그게 장난인 걸 알았지만, 그래도 양해를 구했다.

16562795484235.jpg“일행이 기다리고 있어.”

린은 어젯밤 말한 대로 레나와 동행하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의 볼일이 끝났어도, 레나가 가출한 철부지가 아닌 걸 알았어도 그의 결정은 그대로였다.

16562795484235.jpg“당신한테도 도움이 안 될 거야. 후작을 만날 생각이면.”

의미심장한 말에 섭섭한 척하던 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린은 레나의 아버지를 아는 것처럼 말했다. 때문에 레나는 린의 정체가 새삼 궁금해졌다.

1656279545544.jpg‘뭐 하는 사람인지 다시 물어볼까?’

레나는 고민하다가 질문을 도로 삼켰다. 그러곤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1656279545544.jpg“수도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겠죠?”

16562795484235.jpg“아마도.”

1656279545544.jpg“황궁에 계실 건가요?”

물음이 아니라 확인이다. 린은 못 당하겠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16562795484235.jpg“응.”

1656279545544.jpg“그럼 황궁에서 뵈어요.”

레나의 다정한 인사에, 린은 머뭇대다 돌아섰다. 청년이 길 끝으로 멀어지자 옆에 있던 유니가 종알댔다.

16562795484227.jpg“보기 드물게 건실한 청년이네요.”

1656279545544.jpg“그러게요.”

16562795484227.jpg“처음엔 덮치려고 밑밥 까는 줄 알았는데.”

유니의 발칙한 의심에 레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꾸밈없는 웃음소리에 유니가 레나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16562795484227.jpg“즐거워 보이시네요, 아가씨.”

1656279545544.jpg“네?”

유니의 말에 레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요조숙녀처럼 웃었다. 딴청 피우는 게 명백했지만, 그마저도 예뻐서 유니는 그냥 넘어갔다.

16562795484227.jpg“그나저나, 아가씨네 아버지를 아는 눈치였죠?”

유니가 린의 발언을 떠올리며 종알댔다.

16562795484227.jpg“황궁에 간다는 것도 그렇고, 제단을 모으는 것도 그렇고. 뭐 하는 사람일까요? 옷은 죄다 싸구려던데.”

1656279545544.jpg“다시 만나면 알 수 있겠죠.”

린의 정체가 궁금하지만, 레나는 이 호기심을 아껴두기로 했다. 이제 황궁으로 가면 6년 만에 아버지를 뵙고, 린 씨와도 재회할 수 있다. 아버지의 반응이 미지수인 만큼 친절한 린 씨가 어떤 사람인지도 미지수. 불확실성이 늘었다. 덕분에, 황궁에서의 여정이 더 즐거워질 것 같았다. *** 도시를 빠져나온 린은 숲이 시작되는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손에 쥔 제단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16562795484235.jpg‘이건 못 쓰겠지.’

린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어깨를 폈다. 그러곤 차갑게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떼기 무섭게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가 나와 그를 맞았다.

16562795455427.jpg“무탈하셨습니까, 저하.”

16562795484235.jpg“별일 없었나?”

16562795455427.jpg“네. 다들 대기 중입니다. 탐색은 어떠셨습니까?”

린은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제단을 던졌다. 남자는 얼떨결에 받고 감탄했다.

16562795455427.jpg“찾으셨군요. 어떻게 발견하셨습니까?”

16562795484235.jpg“건달들이 강도질에 쓰고 있더군.”

린은 짧게 답하며 수풀을 넘었다. 그러자 열 맞춰 대기하던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들이 칼 같은 동작으로 경례했다. 린이 고개를 끄덕여 경례를 받자, 서너 명의 시종이 의복을 들고 달려왔다. 그들은 린의 남루한 망토를 벗기고 흑색 제복과 코트로 갈아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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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색은 동부의 상징. 황제는 제국의 광활한 영토를 사방으로 나누어 네 공작에게 다스리도록 했다. 그중 하나인 동부의 주인 리그난 아이테르너는 역대 공작 중 가장 젊고, 야심 차며, 무도한 자였다. 옷을 갈아입고 동부공으로 돌아온 린은 소리 없이 이를 악물었다.

16562795455427.jpg“저하께서 이틀간의 탐색으로 제단을 찾아내셨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그란디스 그라샤로 이동한다.”

마중 나왔던 남자가 명령하자 기사들이 말에 올랐다. 린도 거대한 흑마에 올라탔다. 그가 말머리를 돌리자 무수한 땅 울림이 쫓아왔다. 그것이 새삼 버겁게 느껴질 때였다.

1656279545544.jpg―린 씨도 예쁘세요.

  긴장으로 굳은 린의 머릿속에, 문득 레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저도 몰래 웃을 뻔한 린은 애써 참고 푸념했다. 대체 누가 누구더러 예쁘다는 건지. 이상한 숙녀였다. 순진한척하며 강도질을 일삼는, 그럼에도 묘하게 올바른. 린은 레나가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똑같은 내숭쟁이라며 반가워하려나?

16562795455427.jpg“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16562795484235.jpg“좋은 일?”

16562795455427.jpg“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몰던 남자가 물었다. 린은 그를 힐끗 쳐다보곤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핀잔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린은 곁에서 따르는 남자를 다시 불렀다.

16562795484235.jpg“데카.”

16562795455427.jpg“네, 저하.”

16562795484235.jpg“루벨에게 딸이 있나?”

16562795455427.jpg“북부의 루벨 후작 말입니까?”

린의 비서, 데카 모닐이 되물었다. 의외의 질문이었다. 북부는 동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루벨 후작은 린을 적대하는 북부에 속한 자였다. 데카는 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착실히 대답했다.

16562795455427.jpg“있었습니다. 하지만 몇 년 전에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16562795484235.jpg“이름은?”

16562795455427.jpg“이름은…….”

데카는 말끝을 흐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머릿속의 계보를 샅샅이 살피다가, 이내 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16562795455427.jpg“레나, 또는 레지나 같은 이름이었습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데카의 대답에 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혹여나 웃음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하는 숙녀. 혼외자인 줄 알았는데 사망자였다니. 그럼 어제 만난 건 레나 루벨의 망령이었나?

16562795484235.jpg‘다시 만나면 알 수 있겠지.’

그를 짓누르던 중압감 사이로 일말의 호기심이 피어났다. 덕분에, 황궁에서의 여정이 조금은 즐거워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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