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아비의 상처2020.05.14.
레나가 친부모를 처음 만난 건 여섯 살 때였다. 그전까지 레나는 교외의 별장에서 지냈다. 자작부인이 후계자를 낳고 기르는 데 집중하려면, 딸아이를 떼어놔야 한다는 어른들의 조언 때문이었다. 그래서 레나는 아주 어릴 적 별장으로 보내졌다. 교외의 별장은 고즈넉해서 살기 좋았지만, 그럼에도 레나는 늘 외로움에 시달렸다. 가족이 그리웠다. 자작 부부의 초상화를 보며 그들을 상상했고, 집에 돌아갈 날만 꿈꾸며 교양과 예절을 갈고 닦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본 저택에서 연락이 왔다. 도련님이 충분히 자랐으니 아가씨를 그만 돌려보내라는 소식이었다. 레나는 기뻐하며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는 감격했다. 루벨 가의 본 저택은 별장보다 훨씬 컸고, 사용인들도 더 세련된 예절을 구사했다. 그리고 부모인 자작 부부는 초상화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레나가 그 모든 것을 홀린 듯 바라보자, 마중 나온 자작이 말했다.
“어서 오렴, 레나야.”
처음 듣는 아버지의 음성에 레나는 왈칵 울고 싶어졌다. 아주 어린 나이였지만 외따로 지낸 레나는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가족의 소중함을, 그 간절함을. 그래서 레나는 사랑에 빠진 심정으로, 늘 그리워하던 부모님께 무릎을 굽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레나 루벨이에요.”
오래 연습한 만큼 완벽한 인사였다. 미소 짓는 부모를 보며, 레나는 드디어 가족을 되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믿음은 6년 정도 이어졌다. 그러니까, 자작이 레나를 팔아넘기기 전까지.
. . .
“아가씨, 저기 황궁이 보여요!”
유니가 마차의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아이의 손끝엔 시가지 위로 솟은 백색 첨탑이 있었다. 황제가 기거하는 황궁의 일부였다.
“아가씨, 아가씨도 황궁에 가보신 적 있어요? 저기, ……아가씨?”
유니는 들떠서 조잘대다가 어딘지 멍한 레나를 뒤늦게 발견했다. 레나는 턱을 괸 채, 깊은 생각에 빠진 얼굴로 창문 너머를 보고 있었다.
“아가씨? 아가씨, 레나 아가씨!”
유니가 세 번이나 부른 후에야 레나는 퍼뜩 깨어났다. 레나가 눈을 깜빡거리자, 유니가 걱정스레 말했다.
“괜찮으세요?”
“네?”
“기운이 없어 보이세요.”
“아…….”
레나가 별거 아니라는 듯 웃자, 유니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속삭였다.
“린 씨가 보고 싶어서 그러세요?”
“린 씨요?”
“수도까지 동행하고 싶어 하셨잖아요. 같이 못 가서 서운하신 거예요?”
“설마요, 그 정도로 반하진 않았어요.”
“그럼 약간은 반하셨다는 거죠?”
앙큼한 유도신문에 레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린과 헤어진 지 이틀이 지났다. 그와 작별한 레나는 전날 밤 득한 돈으로 마차를 빌렸고, 이후 순조롭게 이동했다. 그런데 수도가 가까워지자 레나의 상태가 이상해졌다. 말수가 점점 줄더니, 수도에 들어와선 먼 하늘만 보기 시작했다. 유니가 상사병을 의심했지만, 레나는 웃으며 부정했다.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럼 왜 그러세요?”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요.”
레나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여섯 살이었지, 처음 집에 온 날. 그때도 지금처럼 마차를 타고 수도의 관문을 지났다. 마침 같은 길을 지나게 되어 옛 기억을 곱씹던 중이었다.
“여긴 여전하네요.”
레나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제국의 수도, 그란디스 그라샤는 아름다운 이름과 달리 지저분한 잿빛이었다. 대로에서 조금만 눈을 돌려도 판자와 천으로 엮은, 폐허나 다름없는 집들이 보였다. 거기엔 앙상한 사람들이 웅크려 있었고, 옆으론 고양이만큼 큰 쥐가 다녔다. 유니가 질린 얼굴로 중얼댔다.
“정말 수도가 더 개판이네요.”
“너무 쳐다보진 말아요. 구경거리가 아니잖아요.”
레나가 타이르자 유니는 창문에서 떨어져 등받이에 푹 기댔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창밖에 있었다.
“제국을 세우고 황제 노릇을 하면 뭐해요, 정작 사람들은 저렇게 집이 없는데.”
“제 역할을 잘하는 사람은 원래 드물어요.”
레나의 발언에 유니는 입술을 삐죽였다. 제 역할을 잘 못 한 사람. 비단 황제만 두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유니가 아가씨의 마음을 헤아리고 물었다.
“아가씨는, 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얘기부터 하실 거예요?”
“우선 잘 지내셨는지 안부 인사부터 해야죠.”
“그다음은요?”
“그다음엔 기회를 드릴 거예요.”
“기회요?”
유니의 물음에 레나의 미소가 짙어졌다. 레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옮기며, 나직이 속삭였다.
“제게 용서받을 기회요.”
레나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상냥했다. 그래서 묘했다. 유니는 그런 아가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엔 레나처럼 버림받은 자들이 가득했다. *** 마차는 도심으로 나아갔다. 그동안 너저분하던 정경이 차츰 나아지더니, 황궁 앞에선 완전히 달라졌다. 빈민의 출입이 금지된 이 구역은 그란디스 그라샤라는 이름에 걸맞게 순결하고 찬란했다. 도로엔 눈부신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그 옆으론 때 이른 봄꽃이 가득했다. 게다가 이곳은 완연한 축제 분위기였다.
“와, 사람 엄청 많아요.”
유니가 광장과 거리에 빽빽한 사람을 보며 감탄했다. 흰옷을 입고 색색의 꽃으로 치장한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흰색과 꽃은 황제의 상징. 사람들은 온통 꾸미고 곧 있을 건국일을 기념하고 있었다. 유니가 축제를 구경하는 사이 마차는 황궁에 다다랐다. 그런데 황궁 정문엔 이미 수많은 방문객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제 줄 서면 밤에나 들어가겠는데요?”
“우린 바로 들어갈 거예요.”
“예?”
“초대장, 잘 가지고 있죠?”
“아.”
레나의 말에 유니는 부랴부랴 가방을 뒤졌다. 곧 가방에서 밀랍으로 봉한 초대장을 찾아냈다. 초대장을 꺼낸 유니는 마부에게 줄을 서지 말라 일렀다. 초라한 마차가 귀빈 전용 문으로 들어서자 경비병들이 나와 막았다. 하지만 실랑이는 없었다. 유니가 초대장을 내밀자, 그들은 두말 않고 마차를 호수의 궁까지 안내했다. . . .
“역시 황궁은 다르네요!”
유니가 배정받은 세 칸의 방을 보며 감탄했다. 하지만 레나는 황실의 품격이나 호수가 보이는 풍경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보단 거울 앞에서 옷매무새를 다듬기에 바빴다.
“영감님한테 가시게요?”
영감님. 유니는 황실 초대장을 준 사람을 그렇게 불렀다.
“아뇨, 필요하면 그쪽에서 부르겠죠.”
“그럼 어디 가시게요?”
유니가 재차 묻자, 레나는 귀밑머리를 넘기고 생긋 웃었다. 그 해맑은 얼굴에 유니는 깨달았다. 이 아가씨가 잔뜩 들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레나가 황궁에서 들뜰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설마, 바로 만나러 가시게요?”
“자식이 부모를 만나는 데 절차가 필요한가요?”
반신반의하며 묻던 유니는 레나의 자신만만한 대꾸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사이 단장을 마친 레나가 산뜻한 얼굴로, 지체 않고 말했다.
“그럼, 아버지를 뵙고 올게요.”
*** 호수의 궁은 황궁의 귀빈들이 머무는 곳이다. 그런데 제국의 건국기념일을 맞아 동서남북의 네 공작이 일시에 입궁하며, 호수의 궁도 제국의 영토처럼 네 쪽으로 나뉘고 말았다. 서로를 혐오하는 공작들은 상대에게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궁전의 각 끝을 차지했다. 개중엔 제 영역을 주장하며 기사를 세워두는 자도 있었는데, 북부의 왕 이우라 플레누스가 바로 그러했다.
“이곳은 플레누스 저하께서 머무시는 곳입니다. 용무가 있으십니까?”
“저하의 오랜 벗이신 카르도 루벨 각하를 만나 뵈러 왔습니다.”
복도를 막아선 기사의 물음에 레나가 공손히 답했다. 기사들은 미심쩍은 눈으로 레나를 살폈다. 아름답지만 낯설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이토록 아리따운 숙녀라면 이름이 알려져야 정상인데. 심지어 이 무명의 미녀는 에스코트도 없이 찾아와 북부공의 측근을 만나겠다고 한다. 턱도 없는 상황에 기사가 되물었다.
“귀하의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레나 루벨입니다.”
기사들은 루벨이라는 성에 짐짓 당황했다. 린의 유능한 비서와 달리 북부의 젊은 무관들은 이미 죽은 소녀의 이름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들은 저들끼리 눈짓하더니 결국 마지못해 대답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기사들 중 하나가 슬쩍 물러났다. 그는 한참 후 다시 돌아왔다. 혼자였고, 손에는 종이를 들고 있었다. 기사가 모호한 표정으로 레나에게 그 종이를 건넸다. 거기엔 짧은 경고가 담겨 있었다. ―아비의 상처를 이용하지 마시오. 이번엔 충고로 끝내지만 다음은 아닐 거요. 레나가 종이를 펼쳐보고 놀란 표정을 짓자 기사가 말했다.
“루벨 각하의 전언입니다. 각하께서는 손님을 만날 뜻이 없으십니다.”
“한 번 더 전해주세요. 레나 루벨이 꼭 만나기를 청한다고.”
돌아가라는 뜻이었지만, 레나는 다시 간곡하게 말했다. 기사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여자를 위해 후작의 비위를 거스를 이유는 없었다. 그들이 수상한 숙녀를 몰아내려 할 때였다.
“잠깐, 기다리시오.”
기사들이 막아선 복도 끝에서 한 남자가 바쁘게 걸어 나왔다. 레나는 그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레나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집사……!”
*** 비슷한 시각, 동부의 주인 리그난 아이테르너는 호수의 궁 동쪽 귀빈실에서 숨을 참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린 린은 체중을 손끝으로 지탱한 채 중심을 잡았다. 그의 벗은 상체는 땀으로 흥건했고, 혹사당한 상완근은 잔뜩 부풀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댔다.
‘건국기념일은 이틀 후. 황제 알현 전에 공작들이 한 번은 모일 텐데 아직 기별이 없다. 날 배제할 작정인 것 같은데…… 구경만 해선 안 되겠지.’
린은 남몰래 땀 흘리며 앞으로의 일을 궁리했다. 그가 소리 없이, 하지만 분주하게 자신을 정비할 때였다.
“저하, 어느 숙녀가 루벨 후작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밖에서 막 돌아온 데카가 고했다.
“자신이 레나 루벨이라 주장했다고 합니다. 혹시 짚이는 바가 있으신지요.”
‘왔구나.’
데카의 보고에 린은 미동도 않고 몰래 웃었다. 이틀 전에 헤어진 레나가 무사히 입궁한 모양이다.
‘그런데 바로 후작을 찾아갔어?’
린은 반가워하는 한편 레나의 행동력과 대범함, 그리고 이상함에 공평히 감탄했다. 다짜고짜 찾아가다니. 게다가 이름까지 밝히고. 대책이 없는 건지 대책이 필요 없는 건지 아니면 그게 대책인 건지, 하여튼 종잡을 수 없는 아가씨였다. 린이 코끝으로 땀을 떨어트리며 되물었다.
“그래서, 후작은?”
“만나지 않고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언뜻 듣기엔 무난한 반응이다. 하지만 조금 곱씹으면 수상하다.
‘죽은 딸이 나타났다면 만나볼 법하지 않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격분하여, 아니면 구설을 막기 위해서라도. 린은 루벨 후작의 반응을 평가해보았다. 하지만 상황 자체가 워낙 이상해 추측도 쉽지 않았다. 조용히 궁리하던 린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나의 웃는 얼굴이 떠오른 탓이었다.
‘괜찮으려나.’
힘들게 찾아왔는데 문전박대를 당하다니. 린은 레나가 잘 버티기를 바랐다. 그래야 조만간 다시 볼 수 있으니 말이다. ***
“집사……!”
무려 6년 만이지만 레나는 그 노인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는 후작이 소년이던 시절부터 가문을 지켜온, 루벨가의 집사였다.
“집사, 그동안…….”
“그만.”
레나가 들떠서 입을 여는데, 집사가 손을 들어 막았다.
“일단 자리를 옮기죠.”
반색하는 레나와 달리 집사는 레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기사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모양이었다. 엄숙한 목소리에 레나도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레나를 궁 안의 작은 접견실로 이끌었다. 그러곤 레나가 입을 뗄 겨를도 없이, 나직이 따져 물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날 선 추궁에 레나의 입술이 열리다 멈췄다. 그리고 이어진 호통에, 레나는 그만 헛숨을 삼켰다.
“죽은 사람을 사칭하다니, 할 짓이 따로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