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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내가 시체로 발견되면 (5/208)

5화. 내가 시체로 발견되면2020.05.18.

16562796031303.jpg“죽은 사람을 사칭하다니, 할 짓이 따로 있지……!”

집사가 낮게 윽박지르며 레나를 쏘아보았다. 원망이 들어찬 눈빛에 레나는 급히 해명했다.

16562796031312.jpg“집사, 나야.”

16562796031303.jpg“이보세요! 대체 누구신데 이럽니까! 왜, 돈 때문에?”

16562796031312.jpg“정말, 정말 못 알아보는 거야?”

연이은 질타에 레나의 두 눈이 흔들렸다. 설마, 그럴 리가. 6년은 분명 긴 시간이다. 하지만 같이 살던 사람을 잊을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레나의 얼굴엔 어린 시절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못 알아보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16562796031312.jpg“정말 나 모르겠어?”

16562796031303.jpg“그만 좀……!”

16562796031312.jpg“그럼, 이건 기억나? 내 방 옆 계단 카펫.”

집사가 탄식하자, 레나는 찬찬히 읊조렸다.

16562796031312.jpg“나 일곱 살 때, 계단에서 맨날 넘어졌잖아. 그래서 집사가 내 방 쪽에만 카펫을 두 겹 더 깔았어. 넘어지더라도 덜 다치라고. 그런데 계단 턱이 높아져서 나는 더 많이 넘어지고, 다른 사람까지 덩달아 넘어졌어.”

기억을 더듬던 레나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걸렸다.

16562796031312.jpg“그래도 집사는 카펫을 계속 그렇게 뒀어. 나 때문에, 다치지 말라고. 이거, 기억 안 나?”

16562796031303.jpg“그 얘긴 또 어디서 듣고 온 겁니까?”

16562796031312.jpg“집사…….”

16562796031303.jpg“제발 그만하세요. 어디서 무슨 소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아가씬 돌아가셨어요. 그때 주인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셨는지 안다면 감히 이런 짓 못 할 겁니다!”

레나가 따듯한 추억으로 자신을 증명하자, 집사는 원망 어린 목소리로 절규했다. 그의 날 선 시선에 레나의 애틋함도 차츰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똑똑 소리와 함께 궁정 하인이 접견실 문을 열었다. 언제 귀띔을 한 건지, 하인은 쟁반에 차와 다과를 받쳐 들고 있었다.

16562796031303.jpg“고맙네, 그만 가보게.”

집사는 직접 일어나 쟁반을 받았다. 그러곤 하인을 서둘러 돌려보냈다. 여기까진 성실한 집사가 할 만한 평범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다음은 달랐다.

16562796031303.jpg‘불쌍한 아가씨…….’

집사가 레나를 등지고 탄식했다. 그러곤 품에서 시계를 꺼냈다. 그 나이대 노신사들이 흔히 쓰는 회중시계였다. 집사는 시간을 확인하는 척 시계를 기울였다. 그러자 시계의 태엽 구멍에서 물이 주르륵 흘러 차에 떨어졌다. 그것은 상냥한 독이었다. 마시면 잠들 듯 숨이 끊기는 안락한 독.

16562796031303.jpg‘왜 굳이 돌아와서…….’

집사는 목이 메어 마른 침을 삼켰다. 실은 그도 첫눈에 레나를 알아보았다. 못 알아볼 리 없었다. 태어난 모습도 지켜본, 한때 퍽 예뻐하던 아가씨였다. 때문에 더 매몰차게 굴었다. 그럼에도 레나가 카펫 이야기를 꺼낼 땐 심장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다. 카펫 때문에 하인들이 덩달아 넘어진 게 아니라, 넘어지고 창피해하는 아가씨를 위해 일부러 넘어진 척했던 것을. 서툴고 귀여운 아가씨를 위해 다들 연기했던 것을. 그 시절이 떠올라 괴로웠지만 집사는 마음을 다잡았다.

16562796031303.jpg‘용서하세요, 아가씨. 안 그러면 모두 죽습니다.’

집사는 속으로 사죄하며 몸을 돌렸다. 레나는 우울하게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또 아팠지만, 집사는 감정을 숨기고 독이 든 찻잔을 내밀었다. 레나는 기꺼이 찻잔을 받았다. 그러곤 색이 짙은 홍차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16562796031312.jpg“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 같네.”

처연한 속삭임이 집사의 가슴을 찔렀다.

16562796031312.jpg“믿어달라고 하진 않을게. 그냥, 아버지께 안부만 전해줘.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 말이야.”

집사는 차마 답하지 못했다. 그사이 레나가 찻잔을 들었다. 집사의 호흡은 느려졌다. 레나는 입김을 불어 차를 식히더니, 찻잔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끝났다. 집사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찻잔이 기울어지기를 멈췄다.

16562796031312.jpg“그런데 집사.”

차를 마시려던 레나가 돌연 멈췄다. 그러곤 찻잔을 턱에 댄 채 말했다.

16562796031312.jpg“만약에, 내가 내일 시체로 발견되면 어떨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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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동시에 섬뜩한 추위가 전신을 덮었다. 그가 희게 질리자, 레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16562796031312.jpg“그냥 해본 말이야.”

레나는 장난스레 말하곤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다시 내려온 찻잔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독을 다 삼킨 레나가 젖은 입술로 빙그레 웃었다.

16562796031312.jpg“만나서 반가웠어. 그럼, 또 봐.”

레나는 작별인사를 끝으로 접견실을 나섰다. 홀로 남은 집사는 한참 얼어 있다가 숨을 토해냈다.

16562796031303.jpg‘눈치챘나? 아니, 설마…….’

그는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훑었다. 식은땀이 흥건했다. 노집사는 알 수 없는 섬뜩함에 몸을 떨다가, 레나가 사용한 찻잔을 던져서 깨버렸다. *** 문 열리는 소리에 유니는 옷장을 정리하다 말고 고개를 내밀었다.

16562796087302.jpg“오셨어요? 생각보다 일찍…….”

방으로 돌아온 레나는 대꾸도 없이 유니를 지나쳤다. 그러더니 화장실 문을 우당탕 열고 세면대에 매달렸다.

16562796031312.jpg“우읍!”

헛구역질 소리가 나자, 유니도 놀라서 달려갔다.

16562796087302.jpg“아가씨, 괜찮으세요?”

레나가 뭔가를 토해내고 있었다. 유니는 영문도 모른 채 레나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길 얼마, 레나가 기어이 소량의 물을 토해냈다.

16562796087302.jpg“뭐예요, 왜 그래요?”

유니가 놀란 토끼 눈으로 물었고, 레나는 지친 얼굴로 대답했다.

16562796031312.jpg“좀 일으켜줄래요? 신경독 종류 같아요. 발끝이 저리네요.”

16562796087302.jpg“네?”

유니는 깜짝 놀라서 레나를 바라보았다. 옅게 웃는 레나의 안색이 평소보다 파리했다. 그 모습에 유니가 경악하며 레나를 부축했다.

16562796087302.jpg“아니,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독을 마시고 들어와요!?”

16562796031312.jpg“반가운 사람이 주는데 안 먹을 수가 있어야죠.”

레나는 유니의 도움을 받아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앉아 상태를 살피니, 발끝에서부터 마비가 느껴졌다. 통증은 없었다. 약간 얼얼하게 저릴 뿐이었다. 조용하고 강한 독. 아마 그냥 두면 마비가 올라와 고요히 숨을 거뒀을 것이다.

16562796031312.jpg“풉.”

자신의 상태를 관찰하던 레나가 돌연 실소했다. 그러더니 아예 배를 잡고 쿡쿡 웃기 시작했다.

16562796087302.jpg“설마 정신이상……?”

레나의 기괴한 행동에 유니가 중얼댔다. 레나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16562796031312.jpg“아, 웃겨서 그래요. 진짜, 너무 웃겨서.”

독살당할 뻔한 주제에 뭐가 웃기다는 건지. 유니가 떨떠름한 얼굴로 되물었다.

16562796087302.jpg“아버지는 만나셨어요?”

16562796031312.jpg“아뇨, 대신 집사가 나왔어요.”

레나가 낱장의 종이를 건네며 말했다.

16562796031312.jpg“찾아가니까 나오진 않고 쪽지만 달랑 보내는 거 있죠?”

16562796087302.jpg“그래서요?”

16562796031312.jpg“감격했죠.”

유니는 의아한 얼굴로 종이를 받아 펼쳤다. ―아비의 상처를 이용하지 마시오. 이번엔 충고로 끝내지만 다음엔 아닐 거요. 내용을 들여다본 유니가 눈을 껌뻑이며 되물었다.

16562796087302.jpg“감격이요?”

16562796031312.jpg“거기, 상처를 이용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16562796087302.jpg“제가 보기에 이건 화낼 부분인데요, 아가씨.”

16562796031312.jpg“다시 생각해 봐요. 상처가 남았다는 건 다쳤다는 의미예요. 아팠다는 의미고, 그 일을 후회한다는 말이기도 해요.”

레나가 순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16562796031312.jpg“그래서 조금이나마 제게 미안해하고 있나 싶었어요.”

16562796087302.jpg“설마 그 말을 다 믿으신 거예요?”

16562796031312.jpg“그런 건 아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요. 그래서 혼란스러웠는데, 집사가 차에 독 타는 거 있죠? 정말 너무 웃겨서…….”

실은 하인이 차를 내와서 조금 놀랐다. 사람을 사기꾼 취급하면서 차 대접을 하다니.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어 유심히 살펴봤다. 그때 미세한 물소리가 났고, 이후엔 예정된 동작으로 찻잔이 내려왔다. 이때까지도 설마 싶었다. 그래서 찻잔을 들고 살짝 떠보니, 집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몽땅 빠져나갔다. 그로써 확신을 얻은 레나는 보란 듯이 차를 마셔버렸다. 한결같은 아버지를 위해서. 전말을 알게 된 유니가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댔다.

16562796087302.jpg“그렇다고 독을 마시면 어떡해요?”

16562796031312.jpg“애쓰는 것 같아서 마셔줬어요. 이정도로 죽진 않으니까.”

16562796087302.jpg“죽진 않아도…….”

아픈 건 마찬가지잖아요. 유니는 이렇게 말하려다가 뒷말을 삼켰다. 그러곤 다시 표정을 바꿔 한숨을 내쉬었다.

16562796087302.jpg“하여튼 그게 웃기다는 아가씨도 별나지만, 아버지 쪽도 대단하네요. 어떻게 바로 독을 들고 나오죠?”

16562796031312.jpg“원래 결단력이 뛰어난 분이세요.”

레나가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버지의 속내를 알게 되어 기쁜 모양이었다. 유니는 그 자학적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레나의 옆에 몸을 붙이고 앉았다. 고양이가 사람을 위로하려고 슬쩍 다가오는 것과 비슷한 행동이었다. 어린 하녀는 그래놓고 뚱하게 종알댔다.

16562796087302.jpg“내일쯤 아가씨의 생사를 확인하러 오겠네요.”

16562796031312.jpg“그래서 먼저 찾아가 인사하려고요.”

16562796087302.jpg“좋은 생각이에요. 그럼 다음엔 암살자가 오겠죠?”

16562796031312.jpg“충분히 있을법한 일이죠.”

16562796087302.jpg“그전에 침대에 써놔야겠다. 레나 루벨의 침대, 유니의 침대.”

16562796031312.jpg“혼자만 살겠다는 거예요?”

16562796087302.jpg“저는 아직 어리잖아요.”

유니는 아무 가책 없이 아가씨를 배신했다. 그러곤 고양이 같은 눈으로 아가씨를 빤히 바라보았다. 레나는 그 달콤함과 독에 취해 맑게 웃었다. *** 그날 밤, 레나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16562796031312.jpg‘뜨거워.’

뱃속에 숯이 굴러다니는 기분이었다. 약 기운 탓인지, 속에서 핀 작열감이 시시각각 형태를 바꾸어 몸 안을 핥았다. 레나는 열기에 뒤척이다가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유니가 새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나는 유니가 깨지 않게 발꿈치를 들고 발코니로 나갔다. 그러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16562796031312.jpg“후…….”

초봄의 밤공기는 차가웠다. 덕분에 몸 안의 열을 다소 식힐 수 있었다. 바람을 쐬는데 황궁의 낯선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자정이 지났는데도 밝은 창문이 제법 있었다. 젊은 귀족들이 새벽까지 사교와 유희를 즐기는 모양이었다.

16562796031312.jpg‘즐거워 보이네.’

레나는 난간에 몸을 기대고 반짝이는 빛과 오가는 그림자를 구경했다. 바람결에 음악 소리도 들려왔다.

16562796031312.jpg‘원래대로라면 나도 저기 있겠지.’

원래대로라면, 아버지가 날 팔아넘기지 않았다면. 자작가의 영애였던 레나는 사교계에 데뷔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가장 예쁜 모습으로 황제 폐하께 인사를 올리고,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근사한 신사와 춤추고 싶었다. 그게 그토록 큰 욕심이었나? 아니, 그것은 자연스럽게 도래할 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16562796031312.jpg“원래대로…….”

표현을 곱씹던 레나는 자조하며 시선을 옮겼다. 반짝이는 빛 아래 조용히 잠든 호수가 보였다. 걷고 싶어진 레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2층인 발코니에서 가뿐히 뛰어내렸다.

16562796031312.jpg‘깜깜하네.’

내려와서 보니 정원은 생각보다 더 어두웠다.

16562796031312.jpg‘심야의 정원은 밀회의 장소랬나?’

어릴 적 몰래 보던 소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이제 와선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어떤 비극적인 이유로 떳떳이 사랑할 수 없는 남녀가 심야의 정원에서 몰래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였다. 레나는 오래된 기억 속의 묘사를 곱씹으며 어두운 정원을 거닐었다. 그때였다. 바로 뒤에서 은밀한 기척이 느껴졌다. 동시에 암살자가 올 거라던 유니의 목소리가 스쳤다.

16562796031312.jpg‘벌써?’

레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팔꿈치로 상대를 매섭게 내리찍었다. 탁! 그러나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레나의 팔꿈치가 허공에서 멈췄다. 팔이 붙잡힌 레나는 이를 물며 몸을 당겼다. 그때 괴한이 말했다.

16562796201272.jpg“진정해.”

평범하게 친절한 목소리였다. 뜻밖의, 그러나 귀에 익은 음성에 레나는 눈을 크게 떴다.

16562796031312.jpg“린 씨?”

바로 맞췄다. 레나의 부름에, 괴한으로 자주 매도당하는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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