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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집행자 (7/208)

7화. 집행자2020.05.25.

노집사의 마른 손가락이 단추를 채웠다. 셔츠 깃이 단단한 목을 감쌌다. 그 위로 보이는 건 불혹을 갓 넘긴, 준수함과 중후함을 겸비한 사내였다. 그의 이름은 카르도 루벨. 자작의 아들로는 유례없이 높이 올라, 이제는 후작이 된 남자였다. 루벨 후작은 집사에게 착복을 맡긴 채 편지를 읽고 있었다. 오늘 새벽에 도착한 레나 루벨의 편지였다.

16562796590085.jpg“실수는 없었나?”

16562796590091.jpg“몇 번이고 확인했습니다. 실수는 절대…….”

후작의 물음에 집사가 서둘러 변명했다. 그러나 그는 말을 다 맺지 못했다. 레나가 웃으며 한 말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16562796590096.jpg―만약에, 내가 내일 시체로 발견되면 어떨 것 같아?

  독이 든 차를 앞두고 레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 일을 떠올린 집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건 대체 뭐였을까. 불안하기를 너머 불길했다. 그 아가씨가 어떤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집사가 숨죽여 전전긍긍할 때, 불현듯 커다란 손이 그의 어깨를 감쌌다.

16562796590085.jpg“자네가 실수했다고 생각하진 않네.”

16562796590091.jpg“주인님…….”

16562796590085.jpg“자네의 철저함을 내가 모를까.”

주인의 자상한 음성에 집사의 떨림이 멎었다. 두려움이 사라져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16562796590091.jpg“제, 제가 마저 정리하겠습니다. 이번엔 꼭, 문제없이……!”

집사는 거의 질겁하며 후작에게 매달렸다. 그는 자신의 주인에게 비밀을 아는 쓸모없는 노인으로 여겨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소리 낮춰 애원하는데, 단조로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16562796590085.jpg“들어오게.”

후작의 허락에 젊은 하녀가 안으로 들었다. 그는 공손히 인사하더니 후작에게 쪽지를 건넸다. 집사가 불안하게 지켜보는 사이, 후작은 쪽지를 펼쳐 보고 중얼댔다.

16562796590085.jpg“차라리 다행이군.”

후작이 쓰게 웃으며 집사에게 쪽지를 건넸다. 집사는 주저하며 그것을 받았다. 거기엔 짧은 첩보가 담겨 있었다. ―레나 루벨을 초대한 것은 남부공. 하녀가 가져온 정보에 집사의 얼굴이 더 해쓱해졌다. 그는 어제 나름대로 레나에 대해 조사했다. 죽은 게 분명한 아가씨가 갑자기 어떻게 나타났는지 알아볼 셈이었다. 하지만 황궁의 공식 초대 명단에 레나 루벨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래서 대체 어디서 솟았나 했는데, 남부 공작이 직접 초대한 손님이었다니. 집사는 예상도 못 한 거물의 등장에 경악하다가, 퍼뜩 의문을 떠올렸다.

16562796590091.jpg‘그럼 어젠 왜…….’

왜 혼자 나타난 거지? 공작의 귀빈이라는 신분을 무기 삼지 않고 왜 혼자서, 이름만 밝히며 나타난 거지? 집사와 같은 생각을 하던 후작이 깊게 웃었다.

16562796590085.jpg‘떠본 거로군.’

아비의 속내를 알고 싶어서. 그래서 제 뒷배를 숨기고 나타난 거다. 카르도 루벨이 어떻게 나올지 알아보려고. 결과는 문전박대. 그리고 독살시도. 둘 다 남부공의 손님으로 찾아왔다면 절대 겪지 않았을 수모였다. 후작은 레나가 보낸 편지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편지에 담긴 비웃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딸의 영악함에 아비도 웃었다. 서글픔이 가득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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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62796620493.jpg“아가씨, 일어나세요!”

환한 창문 아래서 어린 하녀가 목청을 높였다.

16562796620493.jpg“얼른요, 영감님이 불러요!”

유니의 연이은 외침에 레나는 베개 속으로 머리를 파묻었다. 어제 너무 늦게 잤다. 정원에서 우연히 만난 린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들어와서는 편지를 전달하느라 새벽까지 깨어 있었다. 때문에 잠이 부족했던 레나는 베개에 얼굴을 박고 중얼댔다.

16562796590096.jpg“그냥 독 먹고 죽은 걸로…….”

16562796620493.jpg“끔찍한 소리 하지 말고 눈 뜨세요!”

유니가 빽 소리치며 이불을 빼앗았다. 사실 레나는 유니에게 이겨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필패한 레나는 별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한바탕 소란 후, 레나는 다시 우아한 숙녀가 되어 문을 나섰다. 밖엔 레나를 한참이나 기다린 시종이 서 있었다. 레나를 황궁으로 초대한 장본인, 남부의 지도자 빌 알레스 그라샤 공작의 시종이었다. *** 노인의 거친 피부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자잘한 생채기부터 깊게 파인 상흔까지. 모두 남부 전쟁이 남긴 처절한 흔적이었다. 꼭 100년 전, 제단이라는 불길한 돌이 등장하며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 제단으로 인해 죽은 자들이 기괴한 모습으로 깨어났고, 그라샤는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망자들과 끔찍한 전쟁을 치렀다. 가장 먼저 망자들을 부수고 제단을 회수한 건 동부. 뒤이어 승리를 선포한 것이 북부. 덧없이 굴복해 죽은 자들의 땅이 된 서부. 그리고 최근까지 치열하게 싸워 이긴 곳이 남부였다. 남부공 빌 알레스는 몇 대에 걸친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니 개선장군답게 한껏 거들먹대도 좋을 텐데, 정작 그 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건 과격한 무용담이 아니라 깊은 한숨뿐이었다.

16562796590096.jpg“간밤 평안하셨습니까, 알레스 공작 저하.”

접견실로 든 숙녀가 치마 끝을 들며 인사했다. 함께 따라온 어린 하녀도 꾸벅 고갯짓했다. 남부공은 아리따운 숙녀와 어린 하녀, 레나와 유니를 번갈아 보다가 탄식했다.

16562796620515.jpg“경은 항상 날 놀라게 하는군.”

16562796590096.jpg“과찬이세요.”

16562796620515.jpg“도착했는데 기별도 않고, 이름은 멋대로 바꾸고, 심지어 어젠 북부의 루벨에게 찾아갔다지? 내겐 일언반구도 없이.”

남부공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레나를 힐난했다. 그에 시치미를 떼던 레나는 순순히 사과했다.

16562796590096.jpg“그건 드릴 말씀이 없네요. 먼저 저하께 인사드려야 했는데. 부디 용서하세요.”

16562796620515.jpg“사과받자고 하는 말도 아니거니와, 진짜 문제는 따로 있지 않은가?”

남부공이 턱에 힘을 주고 레나의 모습을 훑었다. 원래는 화를 내야 하지만 저 모습을 보니 그저 기가 막혔다. 그는 곤혹스러움에 한참이나 말을 뱉지 못하더니, 이내 목 졸린 사람처럼 말했다.

16562796620515.jpg“경은 지금, 대체 왜 여자인가?”

얼간이 같은 말이다. 스스로도 그렇게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갈피를 잃은 물음에 레나의 눈도 동그래졌고, 그 틈에 유니가 야무지게 끼어들었다.

16562796620493.jpg“그렇게 물어보심 어떻게 대답해요? 아무도 영감님한테 왜 할아버지냐고 물어보진 않잖아요.”

16562796620515.jpg“나는 지난 10년간 언제나 노인이었다. 하지만 경은 불과 반년 전에도 여자가 아니었다.”

무엄하기 짝이 없는 반박이지만, 남부공은 노여워하지 않고 답했다. 그러자 레나와 유니가 도리어 놀랍다는 듯 입을 가렸다.

16562796590096.jpg“설마 치마를 안 입었다고 여자가 아니었다 하시는 건…….”

16562796620493.jpg“우와, 구식이야.”

16562796590096.jpg“안 돼요, 유니. 아무리 사실이어도 함부로 말하면.”

16562796620493.jpg“우와, 오래되어 보존의 가치밖에 남지 않은 사고방식이에요.”

16562796590096.jpg“훨씬 낫네요.”

16562796620515.jpg“농담하자고 부른 게 아닐세.”

레나와 유니의 노닥거림에 남부공이 이를 갈았다.

16562796620515.jpg“나는 내가 고용한 값비싼 용병이, 왜 치마를 입고 나타났는지 묻고 있는 걸세.”

그가 하얀 눈썹을 일그러트린 채 되물었다.

16562796620515.jpg“대답하게, 집행자여.”

  *** 불과 반년 전에 종식된 남부 전쟁은 ‘침묵전쟁’이라 불렸다. 그 전쟁엔 소리가 없었다. 지휘관의 호령도 없고, 군병들의 기합도, 부상자의 신음도 없었다. 전사자의 비명소리만 간혹 울릴 뿐, 그 전쟁은 철저한 침묵 속에서 시작되고 끝났다. 남부의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소리를 삼킨 이유는 망자들 때문이었다. 남부로 기어 나온 망자들은 ‘첫 울음을 삼킨 왕’에게 복속된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소리에 반응했다. 그들은 앙상하게 마른 몸을 휘적대며 배회하다가 소리가 울리는 순간 돌변했다. 아주 작은 소리라도 들리면 무작정 이빨부터 들이밀고 입술도 볼도 없어 한없이 벌어지는 입으로 철까지 씹어 삼켰다. 때문에 남부의 군대는 어떤 상황에서든 소리를 삼켰고, 그 지독한 전쟁은 침묵전쟁이라는 묘한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한 형국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망자들의 끔찍한 몰골과 더 끔찍한 만행, 오랜 전투, 연이은 패전, 그럼에도 한숨조차 편히 쉴 수 없는 상황에 병사들은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지경이 되었다.

16562796620515.jpg‘여기까진가…….’

남부공이 검게 물든 하늘을 보며 탄식했다. 그마저도 소리를 참고 낸, 반쪽짜리 탄식이었다. 2년 전, 남부 벼랑 끝에 있었다. 첫울음을 삼킨 자들은 남부를 게걸스레 먹어치웠고, 어렵사리 살아남은 것들도 곧 고깃덩어리가 될 운명이었다. 패색이 짙었으나 남부의 지도자는 전장을 떠나지 않았다. 북부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만약 그가 몸을 뺀다면 최후의 방어선도 모래처럼 흩어질 터. 그럼 남부도 서부처럼 망자의 땅이 되고 만다. 그래서 죽기로 결심한 남부공은 급히 긁어모은 병력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16562796620515.jpg‘마지막 만찬이 너무 초라하군.’

남부는 이미 대부분의 병력을 잃었다. 그래서 구색을 갖추기 위해 모집한 용병은 너무 어리거나 늙거나 병든 자들뿐이었다. 당연했다. 불쏘시개로 쓰일 것이 뻔한데 백만금을 준다 한들 멀쩡한 자가 와서 죽을 리 없었다. 심경이 참담했으나 남부공은 굴하지 않고 몸을 세웠다. 그러곤 다시 용병들을 살피다가 혀를 찼다.

16562796620515.jpg‘가장 먼저 죽게 생긴 녀석이군.’

비루먹은 용병들 중에서도 유독 왜소한 녀석이 눈에 띄었다. 얼굴은 복면으로 칭칭 감아 감췄지만 손만 봐도 얼마나 어린지 보였다.

16562796620515.jpg‘이런 어린 것까지 내보내야 한다니.’

남부공은 끔찍한 기분으로 진군을 명했다. 그러곤 눈을 부릅떴다. 격려 한마디 건네지 못했으니, 하다못해 그들이 가는 길만은 끝까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힘이 들어간 눈에 실핏줄이 돋았지만, 남부공은 눈가의 뜨거움을 참고 마지막 전투를 망막에 새기려 했다. 그런데 최후의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전장 한가운데서 검은 피가 몰아쳤다. 순식간에 토막 난 망자의 피였다. 남부공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망자 하나를 잡고 병사 서넛을 잃으면 선전했다 여기는데, 망자의 피가 소리도 없이 툭툭 튀고 있었다. 그리고 피가 튈 때마다 망자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남부공은 얼이 빠져 누구의 짓인지 급히 살폈다. 그 녀석이었다. 가장 먼저 죽겠구나 싶던 그 녀석. 그 어린 용병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전장을 종횡무진 누비며 단검으로 망자들의 목을 치고 있었다. 죽은 망자들이 내뿜은 독기가 지독할 텐데 조금도 굴하지 않고. 그 행동엔 거침이 없었다. 아니, 아예 작정한 것 같았다. 이곳은 나의 사냥터. 나는 유일한 사냥꾼. 모두 멈추고 먹잇감이 되어라. 그게 싫다면, 내게 굴복하라. 남부공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모은 불쏘시개 중에, 성화의 횃불이 숨어 있었다는걸. 그 순간을 기점으로 판도가 뒤집혔다. 기사들도 다시 창을 들어 어린 용병의 뒤를 따랐고, 백성들은 승전보가 터질 때마다 남부공과 그의 용맹한 기사들을 칭송했다. 하지만 최전방에 있던 자들은 이 전쟁의 진짜 공신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경외의 뜻을 담아 그 용병에게 별명을 붙였다. 집행자. 망자들을 담담히 처형하던 모습에 걸맞은, 무자비한 이름이었다. ***

16562796590096.jpg“으음…….”

레나는 입을 다문 채 곤혹스럽게 웃었다. 사실 당사자인 레나는 집행자라는 별명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솔직히 유치해서. 레나는 오글거림을 참고, 근엄한 표정의 남부공께 아뢰었다.

16562796590096.jpg“우선 오해를 풀자면, 저는 한 번도 남자 행세를 한 적 없어요.”

16562796620493.jpg“맞아요. 단지 상황에 맞는 옷을 입으신 거죠.”

16562796590096.jpg“아무렴 드레스 입고 용병 일을 할 순 없으니까요.”

16562796620493.jpg“암요.”

숙녀와 하녀의 천연덕스러운 해명에 남부공은 헛기침을 터트렸다. 말마따나 ‘집행자’는 스스로를 남자라 소개한 적이 없다.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상황에서, 남부공이 멋대로 오해했을 뿐이다. 진실을 깨달은 남부공은 당혹감 섞인 얼굴로 레나를 바라보았다. 집행자를 황궁으로 초청한 그에겐 나름의 포부가 있었다. 꼬질꼬질한 용병 녀석을 때 빼고 광내서 자신의 대리인으로 세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보니 건드릴 필요도 없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오셨다. 심지어, 드레스 차림으로. 남부공이 답답한 듯 탄식을 내뱉자, 잠자코 지켜보던 레나가 물었다.

16562796590096.jpg“놀라게 해드린 건 송구하지만, 문제 될 게 있을까요?”

남부공이 뭔 소리냐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 어리석은 노인을 향해, 레나가 웃으며 덧붙였다.

16562796590096.jpg“저하께서 초대하신 건 남자가 아니라 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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