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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미움받는 개 (8/208)

8화. 미움받는 개2020.05.28.

16562796790858.jpg“저하께서 초대하신 건 남자가 아니라 저예요.”

16562796790865.jpg“……그래, 경이 제 역할만 다 한다면 성별이야 무슨 상관일까.”

이맛살을 찌푸리던 남부공은 다소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마따나 그에게 필요한 건 필승의 용병이지 남자나 여자가 아니었다. 승리를 가져올 수만 있다면 성별 따윈 상관없었다. 하지만 레나가 일으킨 문제는 성별만이 아니기에, 남부공이 남은 문제를 꼬집었다.

16562796790865.jpg“루벨과는 무슨 관계인가?”

16562796790858.jpg“딸이에요.”

16562796790865.jpg“단지?”

16562796790858.jpg“굳이 부연하자면, 존재하면 곤란한 딸 정도?”

16562796790865.jpg“북부에서 따지고 들겠군.”

노인은 혀를 차며 중얼댔다. 결과만 놓고 보면 남부공 빌 알레스는 북부의 루벨 후작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가 감추고 싶은 존재를 황궁으로 들였으니 말이다. 이제 와 몰랐다고 하면 머저리가 될 테고, 가만히 있으면 북부를 도발한 셈이 된다. 어느 쪽이든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남부공은 자신을 기만하고 이용한 레나에게 화내지 않았다. 집행자라는 용병을 무한히 신뢰하는 탓이었다.

16562796790865.jpg“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건 아닐 테지.”

16562796790858.jpg“설마요.”

16562796790865.jpg“어쩔 셈인가?”

16562796790858.jpg“딸로서 아버지를 만날 거예요.”

16562796790865.jpg“내 입장은 고려해봤나?”

16562796790858.jpg“저를 변호해주시면 좋겠어요.”

16562796790865.jpg“북부와 척을 지라는 건가?”

16562796790858.jpg“약자의 편에 서라는 거예요.”

레나의 제안에 남부공이 침음했다. 약자의 편에 서라니, 허울은 좋은 말이다. 또한 사용하기에 따라 좋은 그림이 나올 소재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남부엔 북부의 오만함에 이를 가는 이들이 많았다. 게다가 폐허가 된 남부를 결집시키려면 북부와 대립 구도를 만드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남부가 북부의 맞수가 되어야 가능한 일.

16562796790865.jpg“약자의 편에 설 수 있는 건 강자일세. 약자는 단지 약자일 뿐이지.”

남부공이 날 선 눈으로 말했다. 용감하게 정의의 사도를 자처한들, 패하거나 꺾이면 더 가련한 약자가 될 뿐이다. 정의로움이 빛을 발하는 건 오직 승리했을 때뿐.

16562796790865.jpg“결과를 책임질 수 있겠나?”

노인이 쓴 약을 앞둔 심정으로 묻자, 레나는 빙긋 웃으며 끄덕였다. 레나가 남부공의 부름에 응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였지만 그렇다고 남부공과의 약속을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다. 남부공이 레나를 신뢰하듯, 레나 또한 그에게 나름의 신의를 가지고 있었다.

16562796790865.jpg“내가 원하는 건 하나뿐이네.”

16562796790858.jpg“남부의 안정이요.”

16562796790865.jpg“그래, 내가 어떻게 지킨 땅인데, 그 땅을 개 같은 동북부 놈들에게 넘길 순 없지.”

개 같은 동북부 놈들. 레나는 남부공이 이를 가는 대목에서 잠깐 린을 떠올렸다.

16562796790865.jpg“긴말 않겠네. 내가 경을 이용하듯 경도 날 이용해도 좋네. 다만, 경의 일에 마음이 기울어 내 일을 그르친다면 나도 좌시하진 않을 걸세.”

16562796790858.jpg“명심하겠습니다. 제 승리가 저하의 승리가 되도록.”

남부공의 경고에 레나는 겸손히 답하며 무릎을 굽혔다. 그러자 노인의 눈에 서렸던 노기가 이채로 뒤덮였다. 집행자, 그러니까 전장에서의 레나는 표범처럼 날렵했다. 전투에 임한 그의 동작은 언제나 힘 있고 재빠르며, 흐르듯 부드러웠다. 그런 몸으로 예를 갖추니 아주 작은 동작도 신기하게 우아했다. 남부공은 전우였던 집행자의 그러한 면모가 뜻밖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풀린 지금에야, 노인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16562796790865.jpg“그게 진짜인가?”

16562796790858.jpg“네?”

16562796790865.jpg“지금 그 모습, 그게 경의 진짜 모습인가?”

뜻밖의 물음에 레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16562796790858.jpg“아니요.”

16562796790865.jpg“아니라고?”

16562796790858.jpg“진짜도 아니고 가짜도 아니에요. 어떤 모습이든 저는 저예요.”

정말이지 시건방진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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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부공은 레나의 건방짐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사실 그는 얄밉다 싶을 정도로 야무진 것을 좋아했다. 그런 이는 적어도 능구렁이처럼 딴마음을 품진 않는다. 그러니까, 이놈처럼.

16562796848053.jpg“간만에 뵙습니다, 알레스 공.”

놀랍도록 아름다운 은발의 남자가 남부공에게 반가운 척 인사했다. 몸에 걸친 새하얀 성의가 거룩하기보다는 사치스러워 보이는, 묘하게 외설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그의 이름은 클라비스 시렌치움 그라샤. 과거엔 서부의 공작이었고, 서부가 망자들에게 먹힌 지금은 황궁에서 추기경 노릇을 하는 자였다. 빌 알레스 그리샤에겐 멀지 않은 친척이기도 했지만, 남부공은 이 능글맞은 녀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16562796790865.jpg“플레누스는 아직인가?”

16562796848053.jpg“예에, 뭐 그렇죠. 주인공은 원래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잖아요?”

남부공이 인사에 화답하는 대신 말을 돌리자, 클라비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남부공은 그 여우 같은 모습도 질색이었다. 하지만 클라비스는 다 알면서도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16562796848053.jpg“그럼 이우라 군이 오기 전에 대책부터 세울까요?”

16562796790865.jpg“대책?”

16562796848053.jpg“우리 이우라 군이 단단히 벼르고 있대요. 아, 대체 어쩌자고 그러셨어요? 레나 루벨이라니, 이우라가 루벨을 끼고도는 거 뻔히 알면서.”

16562796790865.jpg“그래서, 지금 나더러 눈치라도 보란 말인가?”

16562796848053.jpg“아하하, 설마요. 그냥 조심하자는 거죠. 괜히 싸울 필요는 없잖아요.”

남부공이 정색하자 클라비스는 웃으며 빠져나가려 들었다. 평소라면 남부공이 혀를 차는 것으로 실랑이가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남부공은 레나와 약속한 것을 떠올리며, 굳이 클라비스의 말을 걸고 넘어졌다.

16562796790865.jpg“괜한 싸움이 생긴들 그것이 내 책임이겠나?”

16562796848053.jpg“네?”

16562796790865.jpg“불화가 생긴다면 그건 루벨이 부덕하다는 증거. 선언컨대 이 불미스러운 일이 사실이라면 루벨은 물론 북부 꼬마도 책임을 면치 못할 걸세.”

남부공이 벼르듯 말했다. 그리고 말을 맺기 무섭게 회장의 문이 벌컥 열렸다.

1656279690548.jpg“누가 무슨 책임을 면치 못한다는 말입니까?”

이어 무거운 음성이 깔렸다. 서슬이 퍼렇게 선 목소리였다. 그 반갑지 않은 소리에 남부공과 추기경은 함께 고개를 들었다. 크게 열린 회장 문 가운데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적색 제복을 입은 위협적인 남자. 북부의 왕 이우라 플레누스 그라샤였다.

16562796848053.jpg“역시 주인공.”

추기경이 키득대는 사이, 이우라는 뒤따라온 기사들을 물리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인사도 않고 남부공을 힐난했다.

1656279690548.jpg“경솔하셨습니다.”

16562796790865.jpg“경솔?”

1656279690548.jpg“천한 잡배들처럼 여자를 이용하다니.”

젊은이의 도발에 남부공이 눈을 치떴다. 호랑이 같은 노인이 성을 냈지만 이우라는 끄떡도 않고 마주 보았다.

16562796790865.jpg“내가 경솔한지 자네가 완고한지는 곧 알게 되겠지.”

1656279690548.jpg“언제부터 맞고 틀리는 게 중요했습니까?”

16562796790865.jpg“뭐?”

1656279690548.jpg“남부가 살필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북부의 심기와 비위입니다.”

16562796790865.jpg“오만함이 끝을 모르는군!”

1656279690548.jpg“경의 만용에 더 주의하십시오. 전장에서 부지한 목숨 헛되이 하지 말고.”

쾅! 기어이 굉음이 울렸다. 남부공의 주먹이 원탁을 내리찍는 소리였다.

16562796790865.jpg‘이 개 같은 놈.’

남부공은 이를 갈며 제 조카뻘인 이우라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우라 역시 고압적인 눈으로 손위 어른인 남부공을 깔아보았다.

16562796848053.jpg“자자, 진정하시죠. 우리가 이렇게 싸우는 걸 알면 제국민들이 비웃을 거예요.”

추기경의 중재에 서로 노려보던 남북은 마지못해 눈을 돌렸다. 겉보기엔 남부의 노인이 밀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속내가 더 복잡한 건 북부의 이우라였다. 공작회담은 각 진영의 입장을 알아보는 자리. 이곳에서는 감정표현도 계산된 것으로 보아야 옳다. 그런 의미에서 남부공은 레나 루벨을 비호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북부공으로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판단이었다. 왜 이런 수를 두는 거지? 북부와 대립하기 위한 수단인가? 아니면 노인네가 어린 여자에게 눈이 뒤집혔나? 갑자기 나타난 레나 루벨이 뭔지는 관심 없었다. 그가 궁금한 건 여자를 앞세워 갈등을 조장하는 남부의 의도였다.

1656279690548.jpg“믿는 구석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북부는…….”

이우라는 재차 경고하려다가 멈추었다. 회장 밖이 묘하게 어수선했기 때문이다. 감히 누가 소란을 피우나 싶어 세 공작은 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때였다. 문이 요란하게 재껴지며 한 남자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16562796933521.jpg“으윽……!”

그 가련한 인물은 밖에 있던 추기경의 호위였다. 명치를 호되게 치였는지, 그는 밟힌 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고 헉헉댔다. 남부공은 무슨 일인지 물으려다가 문가에 선 청년을 보고 도로 입을 다물었다. 이우라의 눈빛은 한층 더 싸늘해졌고, 클라비스는 싱긋 웃었다. 클라비스가 들릴 듯 말 듯 가볍게 속삭였다.

16562796848053.jpg“진짜 주인공 등장.”

세 공작이 엇갈린 반응을 내놓았지만 당사자인 청년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쓰러진 남자의 몸을 지그시 밟아 넘더니,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1656279693353.jpg“여기들 계셨군.”

불손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그 난입에 남부공이 클라비스를 추궁했다.

16562796790865.jpg“이 얘긴 못 들었네만.”

16562796848053.jpg“저도 금시초문입니다.”

1656279693353.jpg“내가 못 올 곳에 왔나?”

두 사람의 대화에 불청객이 멋대로 끼어들었다. 연이은 무례에 참다못한 남부공이 일갈했다.

16562796790865.jpg“원탁에 앉고 싶다면 최소한의 예의부터 갖추어라.”

1656279693353.jpg“예의?”

하지만 청년은 도리어 코웃음을 쳤다.

1656279693353.jpg“쥐새끼처럼 몰래 작당하는 주제에 예의라.”

반문하는 청년의 눈에 새파란 살기가 맺혔다. 그 살벌한 위협에 남부공은 부득 이를 갈았다.

16562796790865.jpg‘이 개 같은 놈!’

이우라가 싸가지 없는 개놈이라면 저 새끼는 미쳐 날뛰는 개놈이다. 틈만 나면 물어뜯으려 드는 동부의 미친개.

16562796790865.jpg‘개 같은 리그난 아이테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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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부공은 뿌리 깊은 경멸로 그 청년, 린의 살기를 마주했다. 그라샤의 이름을 지닌 제국의 적자들에게 리그난 아이테르너는 존재 자체로 치욕이었다. 식민지 출신 노예 주제에 동부의 주인 노릇을 하는 애송이. 공작들이 모이는 건 어찌 알았는지, 꼴에 공작이랍시고 제 발로 찾아왔다.

1656279693353.jpg“그래, 그게 그라샤의 예의라면 기꺼이 따르지.”

두 눈에 칼을 품었던 린이 돌연 웃으며 원탁에 앉았다. 그러곤 뺀질대는 낯짝으로 덧붙였다.

1656279693353.jpg“귀하들을 쥐새끼로 착각해서 밟아 죽이지 않게 말이야.”

거의 동시에 이우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1656279690548.jpg“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알레스 공,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에 마저 나누겠습니다.”

16562796790865.jpg“그러지. 나도 그만 돌아갈 참이네.”

직전까지 으르렁거렸던 남북의 공작들은 마치 오물을 만진 사람처럼 손을 털고 일어났다. 두 사람이 나가버리자 추기경이 턱을 괴고 중얼댔다.

16562796848053.jpg“괜찮은 등장이었어, 주인공.”

클라비스는 린을 향해 다정히 웃더니, 역시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로써 린은 혼자 남게 되었다. 철저히 무시당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들이 떠난 테이블에 여 보라는 듯 발을 올렸다. *** 추기경보다 한발 먼저 복도로 나온 남부공은 씩씩대며 울화를 뱉어냈다.

16562796790865.jpg‘개 같은 놈, 주제도 모르는 오만방자한 자식!’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또 저 동부 놈의 뜻대로 되었다. 남북서의 세 공작이 동부공 하나를 피해 흩어졌다. 치욕스럽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아무렴 황제가 인정한 공작을 내쫓을 수는 없고, 옆에 앉든 말든 무시하면 저 미천한 놈을 자신들과 동등하게 여기는 셈이 된다. 이러니 매번 저놈에게 쫓기는 꼴이다. 남부공이 언짢은 얼굴로 성큼성큼 걷는데, 등 뒤에서 왁자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그난 아이테르너의 질 낮은 패거리들이 신성한 회장을 차지하고 기고만장하게 우짖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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