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그들은 이방인을 싫어한다2020.06.01.
동부의 기사들은 공작들이 모였던 회담장에서 웃고 떠들었다. 린이 술과 고기를 내릴 테니 여기서 먹고 놀라고 명한 탓이었다. 괴상하다 못해 몰상식한 명령을 내린 린은, 기사들이 떠드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주안상이 도착할 즈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방문 앞까지 따라온 보좌관을 돌려보내고 홀로 방에 들어갔다. 완전히 혼자가 되자, 린은 저도 모르게 나오는 탄식을 끄응 삼켰다.
‘끝났다…….’
공작들한테 시비 털기. 오늘 그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황족인 남북서의 공작들은 린을 천하게 여기며 경멸했다. 그러다 보니 동부도 덩달아 무시당했고, 린은 하는 수 없이 공작들을 쫓아다니며 개처럼 짖었다. 무시당하는 것보단 미움받는 것이 나은 탓이었다.
‘피곤해.’
린이 두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공작들 앞에선 한껏 사납게 굴었지만, 사실 그의 성품은 난폭함과 거리가 멀었다. 본디 그는 동부보다 더 동쪽에 있는, 성품이 온화하고 예의를 중시하는 민족의 아이였다.
‘쥐새끼는 심했나……. 남부공은 한참 어른인데.’
예의를 아는 린은 오늘의 행패가 어땠는지 반추해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긴긴 한숨만 반복했다. 역시 황궁은 지긋지긋했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이렇게 괴롭다니. 린은 답답한 마음에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오를 막 스친 하늘이 밝았다. 저 해가 지려면 한참 더 기다려야겠지. 어서 밤이 되면 좋겠다. 밤은 조용하니까. 그리고 밤이 되면, 또 만날 수 있으려나? 린이 어젯밤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을 때였다.
“저하, 데카 모닐 경이 왔습니다.”
“들어와.”
문밖에서 들려온 보고에 린은 흐트러진 몸을 추슬렀다. 그는 지쳐 있었다. 하지만 데카가 들어와서 한 말엔 눈이 반짝 뜨였다.
“레나 루벨이 누구의 초대로 입궁했는지 확인했습니다.”
린은 저도 모르게 관심을 보였고, 그 모습에 데카는 내심 놀랐다. 동부공이 겉으로 드러나게 반응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남부공 빌 알레스가 자기 이름으로 직접 초대했다고 합니다.”
데카는 말을 덧붙이며 린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더 이상 특별한 반응은 없었다. 여느 때처럼 무심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데카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혼자가 된 린은 멍하니 되뇌었다.
‘레나를 초대한 건 남부공…….’
린은 지난밤 레나와 나눈 대화를 곱씹다 이마를 덮었다.
‘적이었구나.’
린은 허무하게 웃었다. 북부의 딸인 것만 조심스럽게 살폈는데, 생각지도 못한 배경이 튀어나왔다. 남부공의 손님이라니. 동부로 오라는 제안을 거절한 건 이 때문인 모양이다. 직전에 마주했던 남부공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 경멸 어린 눈. 레나는 그런 눈을 가진 자의 손님이었다. 더 외로워진 청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오를 막 스친 하늘이 여전히 밝았다. 하지만 밤이 되어도 이젠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 공작회담이 시작되기 약 한 시간 전이었다.
“경은 왜 여자인가? 약자는 약자일 뿐이지. 으에엑.”
남부공의 접견실에서 나온 유니가 남부공을 흉내 내며 투덜댔다.
“자기가 아쉬워서 불러놓고 엄청 잘난 척이야.”
유니는 거침없이 씩씩대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말투도 행동도 전혀 하녀답지 않지만, 레나는 뒤따르며 웃을 뿐 아이를 타이르지 않았다. 이윽고 두 사람은 본인들의 처소에 도착했다. 거기서 유니는 문틈에 꽂힌 카드를 발견했다.
“어? 아가씨, 이거 보세요!”
유니가 놀란 얼굴로 카드를 내밀었다. 그 카드는 다름 아닌 황실 무도회의 초대장이었다. 레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카드를 뒤집어보았다. 발신인은 없었다. 그저 무도회의 시간과 장소, 그리고 오늘 밤 자리를 빛내 달라는 상투적인 초대문구뿐이었다.
“와, 아가씨. 무도회에 초대받으신 거예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유니가 눈을 빛내며 묻자, 레나는 곤란한 듯 웃었다. 그 미지근한 반응에 유니가 눈을 깜빡였다.
“좋은 거 아니에요?”
상류 교양을 잘 모르기에, 유니는 초대가 곧 환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교술을 익힌 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건 절 시험하는 거예요.”
“시험요?”
“저는 지금 황궁에 아는 사람이 없어요.”
엄밀히 말하면 남부공과 연결되어 있긴 하다. 하지만 이런 전야제는 근엄한 남부공에게 어울리지 않는 젊고 가벼운 자리. 그러니 무도회장에서 레나를 이끌어줄 사람은 없다고 봐야 했다.
“이참에 친구를 사귀면 되잖아요.”
“그건 불가능해요.”
“왜요?”
“귀족은 자신을 직접 소개하지 않거든요.”
“에엥?”
레나의 설명에 유니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상류사회에선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게 큰 실례예요.”
“그럼 아는 사람하고만 얘기해요?”
“물론 그럴 순 없죠. 그래서 지인을 통해 소개를 주고받으면서 인맥을 늘려야 해요.”
“으음…….”
유니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레나는 익명으로 보내진 카드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발신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저를 정말 초대하고 싶으면 카드를 보내기 전에 먼저 찾아왔을 거예요. 그래야 제가 낯선 모임에서 소개를 받고 어울릴 테니까요.”
“그럼 이 카드는…….”
“제가 사교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떠보는 거죠.”
“함정이에요?”
유니가 비로소 이해하고 발끈했다. 레나는 피식 웃으며 동조했다.
“초대를 무시하면 오만한 여자가 될 테고, 파트너를 구해서 나타나면 영악하다고 할 거예요. 혼자 가면 바보 취급을 받을 거고요.”
원래 사람들은 이방인을 싫어한다. 황족인 공작들이 이방족의 피가 섞인 리그난 아이테르너를 배척하는 것처럼, 황궁의 사교계도 레나 루벨이라는 수상한 숙녀를 반기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조잡한 함정을 팠다. 근본 없는 계집이 함정인 줄도 모르고 잔뜩 꾸미고 나타나면 얼마나 웃길까? 그 멍청한 여자는 처음엔 들떠 있다가,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으면 차츰 당황할 것이다. 용기 내서 먼저 말을 걸면 다들 어색하게 뒷걸음치고, 신사들도 모르는 숙녀에겐 춤을 청하지 않으니 모두가 춤출 땐 벽의 꽃이 되어 구경만 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다들 관심 없는 척 외면하지만, 속으로는 웃겨서 어쩔 줄을 모르겠지. 그러곤 저들끼리 있을 때 두고두고 놀리겠지. 레나는 대충 예상되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리며 쓴웃음을 삼켰다.
“뭘 하든 손해네요.”
“맞아요.”
“그럼 차라리 칼부림을 하고 오세요!”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유니의 과격한 제안에 레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유니는 따라 웃지 않았다. 버릇처럼 장난을 치긴 했지만, 상황이 심각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떡하실 거예요?”
유니가 걱정스레 물었다. 레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밝은 얼굴로 말했다.
“유니, 그 드레스 좀 꺼내 줄래요?”
“그 드레스라면…….”
“우리가 가난한 네 번째 이유요.”
“그 옷을 지금 입으시겠다고요?”
유니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사실 집행자는 아주 비싼 용병이었다. 남부공은 미처 몰라봤지만, 레나는 남부 전쟁에 자원하며 남들의 다섯 배나 되는 돈을 선금으로 받았다. 이후 남부공도 포상을 내렸으니, 레나는 남부에서만 꽤 거금을 벌어들인 셈이었다. 그럼에도 여비가 없을 정도로 쪼들린 이유는 품위 있는 숙녀가 되기 위해 파격적인 지출을 했기 때문이다. 그 지출목록 중 하나가 바로 황실 무도회에 어울리는 풀 드레스였다.
“장식은 생화가 좋겠어요. 꽃은 궁정 관리인들에게 말하면 얼마든 가져다줄 거예요.”
숙녀는 싸움을 피하지 않는 법. 레나는 곱게 웃으며 눈을 빛냈다. 레나의 거침없는 결정에 유니는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두 주먹을 쥐며 응원했다.
“이기고 오셔야 해요!”
“밀린다 싶으면 칼부림을 해 볼게요.”
“그래야 우리 아가씨죠.”
*** 연회나 무도회를 주관하는 건 본디 안주인의 일이지만 제국엔 황후도 황태후도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황실 무도회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이 일은 영토를 잃고 황궁에 눌러앉은 클라비스 추기경이 전담했다.
“역시, 오늘도 감탄밖에 안 나오는군요.”
“전하의 심미안은 신의 축복이에요.”
어여쁘게 꾸민 숙녀들이 엄살을 부리며 클라비스를 추켜세웠다. 그 간지러운 칭찬에 클라비스도 나긋이 웃었다.
“이제야 하는 말인데, 전하께서 전야제를 무려 100일 동안 연다고 하실 땐 내심 걱정했어요.”
“아무리 좋은 파티도 한 곳에서만 하면 지루하기 마련이니까요.”
“누가 아니래요. 그런데 매일 새로운 무대를 꾸며주시니, 지난 걱정이 무색하다 못해 무안할 지경이네요.”
또 다른 귀족들도 화기애애하게 덧붙였다. 아부가 섞이긴 했지만, 그들의 말은 진심이었다. 클라비스는 100번째 건국일을 기념해 100일의 전야제를 준비했다. 하지만 놀기 좋아하는 어린 귀족들도 이 소식은 그리 반기지 않았다. 무도회나 사교모임은 신선하고 특별해야 하는데, 똑같은 주최자가 똑같은 무도회를 연달아 연다면 그건 오히려 고역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염려와 달리 클라비스는 놀랍고 참신한 발상으로 젊은 귀족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황궁의 드넓은 공간을 모두 이용해 매일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덕분에 귀족들은 어느 날은 천상의 신처럼 놀고 또 어느 날은 이방의 야만인처럼 놀며 무료할 틈 없이 꼬박 100일을 보냈다.
“오늘도 놀랍네요. 샴페인으로 호수를 만드시다니.”
한 신사가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호수를 보며 감탄했다. 호수를 채운 것은 모두 맑은 샴페인이었고, 그 위로는 촛불을 실은 작은 배와 활짝 핀 꽃송이가 유유히 떠다녔다.
“이미 내기 중이에요. 다들 취하는 게 빠를지, 저 호수가 바닥나는 게 빠를지.”
“아, 그 내기였어요? 난 다른 내기를 하는 줄…….”
다들 무도회를 칭찬하는데, 한 숙녀가 부채를 살랑이며 중얼댔다. 그러자 다른 귀족들도 덩달아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오늘은 유희거리가 많군요.”
한 신사가 점잖게 중얼대자, 귀족들은 아예 웃음을 터트렸다. 내기도 유희거리도, 모두 레나 루벨을 지칭한 말이었다. 그 수상한 숙녀에 대한 소문은 이미 퍼질 대로 퍼졌다. 그리고 오늘, 어느 막강한 인사가 그를 무도회에 초대했다는 소식도. 때문에 사교장에 모인 젊은 귀족들은 과연 그 숙녀가 나타날지, 나타나면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게, 정말 생각도 못 한 유희네.”
클라비스 역시 그 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무도회가 이용당한 것을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소파에 앉은 청년을 향해 부드럽게 눈을 흘길 뿐이었다.
“루비드 군도 참, 이렇게 짓궂어서야.”
클라비스의 힐난에 다리를 꼬고 앉은 청년, 루비드는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가볍게 까딱였다.
“왔나 봐요!”
누군가가 속삭였다. 귀족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시치미를 뚝 떼며 회장의 입구를 몰래 쳐다봤다. 한 숙녀가 에스코트도 없이 입장하고 있었다. 레나 루벨이었다. . . . 그 숙녀는 순백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정교하게 잡은 장미 모양 주름이 가슴에서부터 치맛단까지 이어지는, 말도 안 되게 화려한 드레스였다. 부케처럼 우아한 드레스 위로 드러난 어깨는 흙을 빚어 구운 듯 매끄러웠고, 곧게 뻗은 쇄골은 빗물이 고일 정도로 깊었다. 또한 흰 목덜미엔 값을 헤아리기도 어려운 보석이 찬란히 빛났다. 생화로 장식해 늘어트린 머리카락은 탐스러웠고, 팔꿈치까지 올라온 장갑은 어딜 봐도 최고급, 한낮의 물결처럼 반짝이는 레이스 부채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아름다운 얼굴까지. 도무지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웃겨 죽을 지경이었다.
‘불쌍해서 어쩌나.’
‘저리도 순진할 수가.’
‘딱 애완고양이 수준이네요.’
평범한 바보는 불쌍하지만 잘난 바보는 우스꽝스럽다. 저 숙녀는 대단히 아름다운 탓에 더 비웃음을 샀다. 겉모습만 번드르르하면 뭐하나, 예의범절은 하나도 모르는데. 귀족들은 레나를 부단히 비웃었다. 고개를 돌린 채 서로 눈짓하고, 부채로 가리고 웃다가 힐끗댄 후 다시 웃었다. 레나가 무도회장을 쭉 돌아볼 때, 어느 신사는 폭소를 참지 못해서 테라스로 뛰쳐나가기도 했다. 마치 기름이 물에 떨어진 것처럼 레나와 귀족들 사이엔 뚜렷한 경계가 생겼다. 기백 명의 귀족들은 계속해서 레나를 훔쳐보았다. 그가 행동할 때마다 비웃을 작정이었다. 레나가 사뿐사뿐 걸어 회장에 들어섰다. 그 사랑스러운 몸놀림에 귀족들은 입까지 막고 웃음을 참았다. 누가 촌뜨기 아니랄까 봐, 무도회에 온다고 잔뜩 들뜬 모양이었다. 귀족들은 모처럼의 구경거리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나 레나는 천천히 걸어갈 뿐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 역시 긴장한 기색으로 보여 귀족들은 또 한 번 비웃었다. 이윽고 레나는 바닥보다 높은 단상에 올라, 허리를 펴고 섰다. 그때부터였다. 귀족들이 묘한 이질감을 느낀 것은.
‘어머?’
가장 먼저 깨달은 건 어느 눈썰미 좋은 숙녀였다.
‘저 여자 표정이…….’
없어? 곧게 선 레나의 얼굴엔 아무 표정도 없었다. 설렘도, 긴장도, 꿈과 기대에 부푼 홍조도. 그들의 예상과 달리 저 숙녀는 조금도 들떠 있지 않았다. 들뜨기는커녕 차가웠다. 아니, 찌르듯 날카로웠다. 레나는 마치 적진을 염탐하는 척후처럼, 무도회장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