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이방인도 너희를 싫어한다2020.06.04.
레나는 마치 적진을 염탐하는 척후처럼 무도회장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 신중한 모습에 귀족들도 하나둘 웃음을 그쳤다. 다들 의아해하며 레나의 의도를 헤아릴 때였다. 레나가 둘러보기를 멈추고 한 남자에게 시선을 박았다. 직전까지 가장 호들갑스럽게 웃음을 참던 신사였다. 그 신사는 갑자기 눈이 마주쳐 내심 놀랐으나, 이내 태연히 레나를 마주 보았다. 그때까지도 그의 입가엔 호기심과 조롱이 가득했다. 레나는 그 얼굴을 빤히 보더니, 그의 꼴을 천천히 훑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목깃부터 소매까지. 그의 면면을 한참 동안 살핀 레나는, 이내 부채를 펼쳤다. 그러곤 얼굴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레나를 마주 보던 신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다른 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 몰랐다. 하지만 당사자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방금, 아주 노골적으로 모욕당했다는 것을. 눈이 마주쳤을 때, 레나는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 꼴로 어떻게 밖을 돌아다니지?’
착각도 피해망상도 아니었다. 실제로 레나의 두 눈엔 조롱과 멸시가 가득했다. 사람을 그딴 식으로 쳐다보고 웃다니. 무도회를 즐기던 신사는 순식간에 기분을 잡쳐버렸다. 남자가 어처구니없어하는 사이, 레나는 또 다른 여자와 눈을 맞췄다. 레나를 힐끗대며 옆 사람에게 쉴 새 없이 속닥대던 숙녀였다. 레나는 이번에도 그 숙녀의 생김새를 찬찬히 관찰했다. 그러더니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모으며 그 숙녀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보냈다.
“허?”
교양 있는 행동이 아니지만, 숙녀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터트렸다. 뭐야, 저 여자. 지금 날 깔봤어?
‘안타깝네요, 전반적으로.’
레나는 눈빛에 동정을 가득 담아 바라보았고, 그 의미심장한 시선이 숙녀의 가슴을 후벼 팠다. 아름다운 여자가 보낸 유감의 미소는 수치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레나는 순식간에 두 사람을 화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레나는 마치 사냥감을 물색하듯 귀족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어김없이 상대를 자극했다. 비웃고, 동정하고, 도발하고, 노골적으로 쏘아보기도 하고 때론 무시했다. 그제야 귀족들은 레나가 무엇을 하는지 깨달았다.
‘우릴 내려다보고 있어?’
레나는 마치 황제처럼 높이 서서 발밑의 귀족들을 품평하고 있었다. 저희가 당연히 우위라 믿었던 귀족들은 그걸 뒤늦게 깨닫고 얼이 빠졌다. 그리고 지켜보던 클라비스는 조용히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이야.’
겁도 없이 혼자 나타나서 어쩔 셈인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사이좋게 어울릴 마음이 없기는 저쪽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대범하네, 레나 루벨 양.’
클라비스는 두 눈에 이채를 담아 레나를 바라보았다. 샹들리에의 반짝임을 받으며 내려 보는 모습이 거만하고도 아름다웠다. 레나는 자연스럽게 정복자의 자세를 취했고, 귀족들은 그 모습을 얼떨떨하게 올려다보았다. 이건 그들의 계획과 달랐다. 모르는 이에게 함부로 말을 거는 건 큰 결례. 그래서 심술 맞은 귀족들은 레나를 홀로 세워두고서 하나부터 열까지 평가하며 비웃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어.’
레나는 이 단순한 사실조차 모르는 귀족들을 비웃었다. 그리고 클라비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소리 없이 물었다.
‘하지만 혼자서 괜찮겠어?’
똑같은 조건이라도 너는 혼자, 여기 모인 귀족은 수백 명. 그러니까 이건 일 대 백의 기 싸움. 이쪽도 다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닌데, 정말 감당할 수 있겠어? 클라비스가 속으로 묻는 순간 레나와 한 귀족 영애의 시선이 부딪혔다. 기가 세기로 유명한 그 영애는 레나 못지않게 약이 오른 상태였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영애는 화난 눈으로 방만하기 짝이 없는 불청객을 쏘아보았다. 그 노골적인 적의에 레나는 생긋 웃으며 부채를 흔들었다.
‘여기가 어딘데?’
그러더니 부채를 매섭게 접으며 그 영애를 마주 쏘아보았다. 두 숙녀의 시선이 뜨겁게 부딪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시선을 피한 건 영애 쪽이었다. 별수 없었다. 곱게 자란 영애가 죽음의 문턱을 넘어온 자를 감당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충분하잖아?’
클라비스는 염려를 즐겁게 철회했다. 그리고 레나는 작정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귀족들을 한 명 한 명 제압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공격만 한 건 아니었다. 무도회장엔 레나에게 악의를 품지 않은 자도 많았다. 어리고 착하거나, 귀찮은 일을 싫어하는 자들이 그랬다. 뺨이 발그레한 숙녀도 그중 하나였다. 이 어린 소녀는 사교계의 선배들이 왜 이리 부들대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레나의 시선이 그 소녀에게 부드럽게 가닿았다. 구경하던 귀족들의 눈도 레나를 따라 자연스레 움직였고, 작은 소녀는 사람들이 자길 보는 줄도 모르다가 뒤늦게 화들짝 놀라 레나를 쳐다보았다. 레나와 눈이 마주친 소녀는 사자를 본 토끼처럼 움찔하며 얼어붙었다. 레나는 그 모습을 빤히 보더니,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러곤 곱게 목례만 하고 다시 시선을 옮겼다.
‘아…….’
뜻밖의 눈인사에 어린 숙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후 복숭앗빛 뺨이 장밋빛으로 물든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레나는 그렇게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고, 반감을 사고, 호기심을 일으키고, 호감을 얻기도 했다. 그럴수록 더 많은 시선이 레나에게 집중됐다.
‘미치겠네.’
클라비스는 입가에 만발한 웃음을 손으로 가렸다. 저렇게 짜릿한 숙녀가 나타나다니. 클라비스는 어서 레나가 자신에게도 시선을 던져주길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대하고, 열망했다. 잠시 후, 그의 바람대로 레나의 투명한 시선이 클라비스를 담았다. 클라비스는 안달 난 마음을 숨기고 레나를 부드럽게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제법 오랫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그 시선이 오해를 사기 직전, 레나가 클라비스를 향해 웃었다.
‘웃어?’
레나의 화사한 미소에 클라비스는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당장 레나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서, 입 맞출 듯 가까운 거리에서 다시 보고 싶었다. 레나의 두 눈에 담긴 감정의 색깔을. 클라비스가 가쁜 숨을 애써 삼킬 때였다. 불만을 품은 귀족 몇이 중얼댔다.
“격에 맞지 않는 손님이 있네요.”
“그러게요. 모처럼의 자리가 이리도 불편해서야.”
“흥이 깨지기 전에 내보내야 하지 않겠어요?”
레나의 오만에 화가 난 귀족들이 궁여지책으로 무도회장을 지키고 있던 관리를 불렀다. 그들은 관리에게 저 숙녀를 내보낼 것을 종용했다. 이례적인 명령에 궁중 관리는 주저하며 레나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레나를 내쫓지 못했다. 레나가 기다렸다는 듯 초대장을 꺼내 보였기 때문이다. 황궁의 규범을 지키는 자로서 초대 손님을 이유도 없이 내보낼 순 없는 노릇. 가련한 관리는 결국 양쪽의 눈치를 보다 어물쩍 물러났다. 그러자 지켜보던 숙녀 하나가 짜증을 냈다.
“어떻게 좀 해봐요. 계속 우릴 내려다보게 하지 말고!”
그 등쌀에 옆에 있던 신사가 마지못해 나섰다. 그는 일단 웃으며 레나에게 접근했다. 적당히 말을 붙여 멋대로 오른 왕좌에서 레나를 끌어내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운도 떼기 전에 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부채로 앞을 막았다. 초면에 함부로 말 걸지 말라는 뜻이었다. 노골적인 무뢰배 취급에 신사는 말문이 막혔고, 결국 수치스러워하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인과 신사가 연이어 항복하자 지켜보던 귀족들은 더 성질이 났다. 그때 누군가 웃었다.
“풉.”
찬물을 끼얹는 소리에 귀족들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헛숨을 삼켰다. 경쾌하게 웃은 건 다름 아닌 클라비스였다. 그는 웃겨 죽겠다는 듯 쿡쿡대더니, 소파 쪽을 돌아보았다.
“이러려고 저 숙녀를 초대한 거야?”
그곳엔 눈매가 사나운 청년이 험악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응? 루비드 군.”
클라비스의 조롱에 청년, 루비드가 들고 있던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곤 거칠게 몸을 일으켰다. . . .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레나는 술렁이는 분위기를 살피며 궁리했다. 보여 줄 수 있는 건 다 보여줬다. 이 이상 하면 식상하거나, 실수하거나. 사실 레나도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다들 열 받은 모양이네.’
한둘도 아니고 수십 명이나 되는 귀족들이 도끼눈을 뜨고 있다. 이 말도 안 되는 대결이 가능했던 건 레나가 그들의 허를 찔렀기 때문이다. 저들은 어수룩한 촌뜨기를 기대하고 방심했다. 그래서 작정하고 나온 레나에게 속수무책 당했다. 하지만 이제부턴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다. 저들도 레나를 어느 정도 파악했을 테니까.
‘슬슬 퇴장할까?’
누가 판 함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신고식을 잘 마쳤다. 이대로 마무리하면 완벽. 레나는 물러나기 위해 살랑살랑 흔들던 부채를 접었다. 그러곤 지루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몇몇 귀족의 심기 불편이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더는 흥미 없다는 듯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레이디.”
한 목소리가 레나를 불러 세웠다. 레나는 또 놀란 척 그를 물리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저쪽이 더 빨랐다.
“초대에 응해줘서 고마워.”
뜻밖의 인사에 레나는 고개를 돌렸다. 금발을 길게 내려 묶은, 화사한 인상의 청년이 레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레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누군지 대강은 추측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인가?’
초대장을 보낸 사람. 레나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살포시 웃었다. 정식으로 초대받았다고 주장했으니, 초대한 사람을 모른 체할 순 없었다. 때문에 레나는 그를 밀어내지 못했고, 청년은 레나의 손등에 태연히 입을 맞췄다.
“저야말로,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레나는 그 입맞춤이 달갑지 않아 형식적으로 인사했다. 그러곤 다시 분위기를 읽었다. 패배감에 날 서 있던 귀족들이 새로운 호기심을 보이고 있었다.
‘거의 끝났는데.’
레나는 아쉬워하며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 청년은 상당히, 아니, 대단히 잘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레나가 이제껏 본 중에서 가장 미인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의 살결은 대리석처럼 맑았고 이목구비의 형태 또한 조각처럼 명료했다. 어깨 길이의 금발은 빛이 선명했으며 두 눈은 보석 같은 보랏빛이었다. 그 눈부신 미남, 루비드가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
“설마 벌써 가려고?”
“춤 신청을 못 받아서요. 아쉽지만 무도는 다음에 즐기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실례해야겠어요.”
루비드의 물음에 레나는 속눈썹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그러곤 더 지체하지 않으려고 도도하게 돌아섰다. 그때 루비드가 레나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몸이 휘청할 만큼 거친 손길이었다. 억지로 돌아서게 된 레나는 꽤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동요를 삼키고 루비드를 바라보았다. 숙녀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댄 주제에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쉬우면 더 있어. 춤은 나하고 추면 되잖아?”
루비드가 레나의 어깨를 누른 채 말했다. 그 행동은 무례하기를 너머 경박했다. 외모와 딴판인 태도에 레나는 바쁘게 생각했다.
‘이 사람 뭔데 이러지?’
교양 없는 자는 사교계에서 무시당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귀족들은 이 청년을 경멸하지 않고 도리어 즐겁게 바라보았다.
‘왜지?’
잘생겨서?
‘그럴 리가.’
경박하든 말든 재미있어서?
‘아니, 그것도 아니야.’
레나는 입장할 때부터 귀족들의 시선을 느꼈다. 초대장을 보낸 자에게 영향력이 없다면 귀족들이 그렇게 동조할 리 없었다. 바쁘게 궁리하던 레나는 결국 불편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 사람…….’
레나가 루비드의 무례한 손을 바라볼 때였다. 그가 돌연 하인에게 손짓했다. 술을 가져오란 뜻이었다. 루비드의 명령에 하인은 호수의 샴페인을 떠서 가져왔다.
“춤추기 전에 건배할까? 클라비스가 모처럼 준비한 샴페인이야.”
추기경의 이름을 허물없이 부르며, 루비드가 레나에게 샴페인 잔을 내밀었다. 레나는 부채를 펼치며 거절했다. 신사라면 스스로 물러나야 하는 신호지만 루비드는 개의치 않았다. 개의치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짓궂게 웃었다.
“건배가 싫으면 이건 어때?”
루비드가 손끝으로 레나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얼굴에 샴페인을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