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2020.06.22.
건국일 아침, 대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하얀 비둘기가 날아오르자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 황궁 앞 광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 가운데 호화로운 식탁이 놓였다. 넘치도록 향기로운 술과 음식은 황제가 베푼 자비였다. 사람들은 밝은 얼굴로 축배를 들며 건국일을 기념했다. 하지만 이것은 수도 안쪽에서만 벌어지는 호사였다. 수도 외곽에서도 종소리는 들렸으나, 지붕 위로 날아오르는 비둘기나 꽃잎은 보이지 않았다. 광장에선 개들도 기름진 접시를 핥지만 외곽에선 냄새조차 맡을 수 없었다. 제국의 번영 아래 누군가는 구정물로 주린 배를 채웠다. 그러나 이것을 문제 삼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
“오늘 경은 남부의 대리자로 공표될 걸세.”
남부의 제복을 갖춰 입은 노인이 똑같은 차림의 숙녀에게 말했다. 노인, 남부공이 성큼성큼 앞서 걸으며 불쾌하다는 듯 덧붙였다.
“이미 알아서 동네방네 떠든 듯하다만.”
“동네방네까진 아니었는데.”
“잘났군.”
숙녀, 레나의 무성의한 변명에 남부공의 얼굴은 더욱 떫어졌다. 어젯밤 전야제에서 벌어진 불상사, 그러니까 레나와 루비드가 서로를 샴페인에 절였다는 소식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그때 레나는 남부의 제복 차림이었다. 이 일로 입 가벼운 귀족들이 얼마나 많은 말을 지어내고 있을지 남부공은 생각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다.
“그래도 남부의 명예는 지켰어요. 제가 이겼거든요.”
“거참 장하군.”
레나가 덧붙인 말에 남부공은 콧방귀를 탕 뀌었다. 사실 북부 애송이가 레나에게 처발렸다는 소릴 듣고 내심 통쾌하긴 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레나가 불편해, 남부공은 엄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앞으로는 처신을 조심하게. 적어도 내 귀엔 들리지 않게.”
“네, 명심하겠습니다.”
레나는 착실히 대답했다. 하지만 남부공은 그게 건성으로 느껴져 마음에 차지 않았다. 언짢음을 뒤로하고, 남부공이 말을 이었다.
“오늘 황제가 출정을 명할 걸세.”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기로 결심하셨다죠.”
“웃기는 일이지. 남부가 침식당할 땐 강 건너 불구경을 하더니.”
남부공이 얼굴을 더 험하게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말마따나 남부에서 침묵 전쟁이 한창일 때 황제는 방관했다. 그러다 남부가 생환하니 새롭게 노략질할 계획을 세웠다. 남부공은 속에서 천불이 났지만, 한마디 불평조차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절망했다.
“다들 이번 정복지가 어디인지 알고 있나요?”
“아니, 공작들 외엔 모를 걸세. 아마 각료들조차 모를걸.”
남부공은 이제 지친 목소리였다. 황제의 변덕과 독단으로 돌아가는 제국의 꼴에 노인은 이미 질려 있었다.
“그럼 오늘 발표하겠네요.”
“그렇겠지. 이번 출정은 어차피 북부와 동부의 무대일세. 우린 그저 아주 뒤처지지만 않으면 되네.”
“뒤처지지 않으면 된다고요?”
“가장 앞설 필요는 없네. 하지만 지나치게 뒤처져서는 안 되네.”
레나의 물음에 남부공이 재차 설명했다. 하지만 말을 못 알아들은 쪽은 레나가 아니라 남부공이었다.
“그러니까 중간만 하란 말씀이시죠?”
“그래.”
“죄송한데 조금 헷갈리네요.”
“뭐가 말인가?”
“꼭 중간을 해야 하는 건지, 중간 이상이면 아무래도 좋은 건지요.”
남부공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짧게 탄식했다. 무슨 말인가 하니, 처음이든 중간이든 끝이든 주문대로 맞춰 주겠다는 뜻이었다. 그 시건방진 태도에 남부공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신만만한 건 좋네만, 그 전에 상황파악을 해 주면 좋겠군.”
잡담은 거기까지였다. 복도를 가로지르던 두 사람은 어느덧 커다란 문 앞에 다다랐다. 크게 열린 문 안으로 대례전의 홀이 보였다. 신성한 상징으로 가득 찬 대례전에는 이미 고위 귀족과 관료들이 빠짐없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있었다.
‘린 씨.’
레나는 새카만 사내들 속에서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린이었다. 린은 늦게 등장한 남부공을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찌르듯 비웃고 고개를 돌렸다. 그 오만불손한 태도에 남부공은 부득 이를 갈았고, 레나는 그의 새로운 모습에 남몰래 감탄했다. 또 그 옆엔 붉은 옷을 입은 자들도 있었다. 북부였다. 거기에도 레나가 아는 얼굴이 있었다. 하나는 도도하게 선 루비드였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인 루벨 후작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엔 루비드와 닮은 사내가 중심을 잡고 서 있었다. 북부의 왕, 이우라 플레누스였다. 제국을 지탱하는 세 공작이 나란히 섰다. 그런데 추기경이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정숙하고 예를 표하십시오.”
양각 나팔 소리와 함께 시종의 엄숙한 음성이 울렸다. 그러자 갈대가 바람에 눕듯 귀족들이 허리를 굽혔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유일했다. 콧대 높은 귀족들이 자신의 발끝을 바라보았고, 무겁게 내린 정적 위로 또각대는 구두 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나긋한 음성이 들려왔다.
“일어나렴.”
어처구니없게도 명랑한 목소리였다. 나이 많은 귀족들은 침착하게, 비교적 젊은 자들은 당황을 삼키며 옥좌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비어 있던 그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하얗게 바랜 머리칼을 짧게 자른, 하지만 얼굴은 아직 젊은, 코르셋에 리본을 화려하게 달아 격식 없게, 더 나아가 경박스럽게 꾸민 여자. 그래서 황제의 자리에 앉았지만 차마 그 정체를 확신할 수 없는 여자. 바로 제국의 시작이자 정점, 황제 니힐 그라샤였다.
올해로 백 살이 훌쩍 넘었을 황제는 여전히 젊었다. 살아 있는 기적과 마주했지만 귀족들은 그 모습을 경외하기는커녕, 하얗게 드러난 황제의 어깨와 다리에 눈 둘 곳을 몰라 허둥댔다.
“다들 반갑다. 처음 보는 애들도 있고, 이미 몇 번 본 애도 있네.”
황제의 목소리는 자다 깬 듯 나른했다.
“사실 구분이 잘 안 돼. 얘가 얜지, 쟤가 쟨지, 어린 것들은 다 엇비슷해서. 늙으면 죽으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가 봐.”
황제의 혼잣말에 장내가 고요해졌다. 그러자 황제가 무미건조한 투로 명령했다.
“웃어, 농담한 거야.”
숨 막히는 정적 끝에, 마른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 억지로 낸 웃음을 시작으로 이내 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와하하 웃기 시작했다. 미치광이 같은 광경이었다. 그 앞에서 황제는 크게 하품했다. 그러곤 팔걸이에 몸을 기댄 채 웅얼댔다.
“아무튼 반가워. 그런데 오늘 왜 모였지?”
“오늘은 건국기념일입니다.”
한 남자가 곁에서 말했다. 황제와 함께 등장한 클라비스였다.
“아, 그래? 그럼 시작하렴.”
황제는 턱을 괴며 클라비스에게 손짓했다. 그에 클라비스가 황제를 대신해 귀족들 앞에 섰다.
“기쁜 날입니다, 여러분. 황제 폐하의 보살핌 아래, 제국의 역사가 백 년에 달했습니다.”
클라비스가 나서자 귀족들은 차라리 안심했다. 클라비스는 노쇠한 폭군을 대신해 능숙히 말을 전했다.
“이 날을 기념하며 폐하께서 영토의 확장을 결정하셨습니다. 이우라 플레누스 그라샤 공, 빌 알레스 그라샤 공, 그리고 리그난 아이테르너 공.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새 지평을 개척하고 정복하십시오.”
호명된 세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귀족들은 정복지의 공표를 기다리며 흥분을 삼켰다. 그들은 기억했다. 10년 전 동방을 휩쓸어서 누린 풍요와 30년 전 대륙 너머에서 발견한 부, 또 70년 전 사막을 건너 얻은 화려한 문물을. 그때마다 제국의 귀족들은 한층 더 호화롭고 세련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귀족들은 이번에도 호황을 기대하며 추기경의 선언에 귀 기울였다. 클라비스는 그들의 속내를 뻔히 알고,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새롭게 원하시는 곳은 이 땅 아래, 무덤입니다.”
무덤?
“폐하께서는 망자들의 땅인 무덤을 정복하라 명하셨습니다.”
클라비스의 선언에 귀족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재미있을 거야. 거기 신기한 게 많거든.”
귀족들이 난감해하자 황제가 느긋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왕들을 죽이는 건 이제 질렸고, 지상에 있는 건 어차피 손만 뻗으면 내 거. 그러니 이제 좀 색다른 걸 가져볼까 해. 너희도 좋지?”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클라비스가 부드럽게 화답하자, 귀족들도 뒤늦게 박수치며 환호했다. 공작들 역시 이 촌극에 어울리기 위해 텁텁하게 손뼉을 쳤다.
“그럼 출정에 앞서 빌 알레스 공, 폐하의 영토를 지켜낸 공로를 치하하니 원하는 것을 청하십시오.”
차례가 오자 남부공이 앞으로 나섰다.
“지고하신 황제 폐하, 남부가 승리한 것은 모두 폐하의 보살핌 덕입니다.”
“물론 그렇겠지.”
황제가 흥미 없이 중얼댔다. 남부공의 턱에 잠시 힘이 들어갔지만, 이어진 목소리는 여상히 침착했다.
“신하 된 자로서 원하는 것은 전심으로 폐하를 섬기는 것뿐이오나, 점점 쇠약해지는 몸이 송구할 따름입니다. 하여 다른 믿을만한 젊은이에게 남부의 임무를 위임토록 허락하여주십시오.”
“그래, 누구?”
황제는 건성으로 중얼대며 손을 뻗었다. 그가 시종들이 가져온 예식용 칼을 쥐자, 레나도 앞으로 나섰다. 황제는 레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대 이름은?”
“레나 루벨입니다.”
“그래, 레나 경.”
황제가 검을 들어 올렸고, 레나는 서임 받기 위해 무릎을 꿇으려 했다. 그런데 몸을 채 숙이기도 전에 황제의 검이 레나의 목을 겨눴다.
“비천한 이름으로 여기까지 잘도 왔구나.”
황제가 검 끝으로 레나의 목을 찌르며 말했다.
“벌레보다 하찮은 너를 내 친히 거둬주마. 그러니 목숨 걸고 무덤에 다녀오렴.”
황제는 표정 없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칼끝이 살갗을 파고들었고, 레나의 목에선 기어이 피가 흘렀다. 붉은 피가 제복의 하얀 옷깃을 적셨지만 레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자 황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못하겠다면 죽어도 좋다. 나는 자비로우니 네 무능을 용서하마.”
황제는 그제야 레나의 목덜미에서 검을 거두었다. 아무 존중 없이 충성만 강요받았지만, 레나는 그럼에도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레나는 한발 물러나며 황제의 검에 입을 맞췄다. 그러곤 모든 귀족들이 주문처럼 읊조리는 말을 따라 했다.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 . . 괴팍한 폭군은 예식이 끝나자마자 처소로 돌아갔다. 때문에 이후의 오찬도 의미를 잃어 귀족들은 눈치껏 끼거나 빠졌다. 레나와 남부공은 오찬에 참석하지 않는 쪽이었다. 바로 이어지는 오후 일정이 빠듯한 탓이었다. 레나가 남부공을 따라 대례전을 나설 때였다.
“레이디.”
뜻밖의 목소리가 레나를 불러 세웠다.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다가온 사람은 다름 아닌 루벨 후작이었다. 갑작스러운 접근이었지만 레나는 놀라지 않았다. 대신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고개를 갸웃댔다.
“레이디?”
그러더니 유감스러운 얼굴로 후작에게 되물었다.
“레이디가 아니라 경이 올바른 호명 아닐까요, 각하?”
레나의 물음은 부드러운 듯 단호했다. 덕분에 후작은 짐짓 당황했다.
“그대 말이 맞소. 내가 실수했군. 그렇다면 경, 잠시 시간을 내주시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예상치 못한 지적에 멈칫했던 후작이 손아랫사람을 달래듯 다시 청했다. 레나는 슬쩍 눈을 돌려 남부공을 바라보았고, 남부공은 마지못해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레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잠시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