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용서받을 기회2020.06.25.
“앉지.”
별실에 도착하자 후작은 레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곤 레나의 맞은편에 앉아,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러길 한참, 후작이 작게 중얼댔다.
“좋아 보이는구나.”
그것은 신사가 숙녀를 대하는 예절도 아니고, 고위 귀족이 기사를 대하는 태도도 아니었다.
“다행히도.”
다만 아버지가 딸을 대하는 목소리였다. 그에 레나는 저도 몰래 탄식했다.
“절 알아보시겠어요?”
“내 자식인데 못 알아볼 리가.”
레나의 물음에 후작은 씁쓸히 웃었다. 그 태세 전환에 레나가 고개를 기울였지만, 후작은 여상히 다정하게 말했다.
“위험한 선택을 했더구나.”
“무슨 말씀이시죠?”
“남부공의 대리인으로 나선 것 말이다.”
후작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레나는 그만 헛웃음을 터트렸다.
“훈계하시는 건가요?”
“걱정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만…….”
“너무 많이 건너뛰셨어요, 아버지.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아요?”
레나의 친절한 지적에, 후작도 자상히 웃었다.
“그래,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있지.”
다음 순간 레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후작이 소파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아버…….”
레나는 놀라서 마주 일어나려 했다.
“미안하다.”
그 전에 후작이 말했다.
“나를 용서해다오.”
정말 슬픈 목소리였다. 레나는 무릎 꿇은 후작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늘 올려다보던 아버지가 한참이나 낮아지자, 레나의 입술 새로 긴 한숨이 흘렀다.
“뭐가 미안하다는 말씀이세요?”
“널 외면했다. 아니, 팔아넘겼지. 그 위험한 남자에게.”
후작의 음성은 단조롭지만 절박했다. 부친의 자백에 레나는 멍한 얼굴로 중얼댔다.
“……이런 순간을 상상 안 해 본 건 아니에요.”
그러곤 머뭇대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막상 보니 그리 즐겁지 않네요.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예요? 어젠 모르는 척 하시더니.”
“믿을 수 없었다.”
“뭘요?”
“네가 다시 나타났다는 걸. 너를, 다시는 못 볼 거라 생각했으니까.”
후작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레나의 눈빛도 덩달아 애틋해졌다.
“아깝네요. 독살 시도만 안 하셨으면 믿었을 텐데.”
레나의 속삭임에, 후작의 두 눈에 차올랐던 호소가 거짓말처럼 그쳤다.
“단순한 사칭자에게 독까지 먹일 리는 만무하고, 집사를 보낸 것도 확인이 필요해서 그러신 거 아니에요? 진짜 저일까 봐요.”
핵심을 찌르는 말에 후작의 얼굴이 굳었다. 레나는 그 모습을 보며 씁쓸히 중얼댔다.
“제가 찾아와서 그렇게 곤란하셨어요?”
“그게 무슨…….”
“괜찮아요, 뭐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그래요.”
후작이 변명의 말을 찾자, 레나는 도리어 그를 다정히 달랬다. 레나의 입가엔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것은 날카로운 비소도 빈정대며 놀리는 조소도 아니었다.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때 으레 머금는 진짜 웃음이었다. 그걸 본 후작은 뒤늦게 클라비스의 말을 떠올렸다.
―날 알아봤어요. 그런데 웃더군요.
―자길 지옥으로 밀어 넣은 사람한테, 대체 어떻게?
―알겠어요? 우리가 제물로 삼았던 아이가 괴물이 되어 돌아온 거예요.
싸늘한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엄습해 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레나가 독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어제 무도회장에서 스스럼없이 다가왔으니까. 그건 목숨을 위협당한 사람이 보일 반응이 아니었다. 위협에 분노하는 것은 살아 있는 존재의 당연한 본성. 하지만 레나에게선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온화함은, 오히려 인과가 어긋난 악몽의 조각처럼 한없이 기괴했다. 후작이 소리 없이 경악하자 레나는 몸을 낮춘 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거기까지 가신 거예요? 아니면, 원래 그런 분이셨어요?”
레나가 어릴 때 아버지는 몹시 바빴다. 그래서 자주 볼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레나는 아버지를 정말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는 다정하고 따뜻하고 멋진 아버지였으니까. 그는 이따금 엉뚱한 장난을 치기도 했다. 잉크 묻은 손으로 딸의 얼굴을 콕 찌르고 시치미를 뗀다든지, 레나의 사과 주스를 진저 티로 바꿔놓고 반응을 살핀다든지, 레나가 흘린 인형을 레나 대신 소중히 안고 다닌다든지. 그는 점잖은 얼굴로 뜻밖의 장난을 쳐서 딸아이의 원성과 웃음을 사는 아버지였다. 레나는 선명히 기억했다. 아버지가 춤을 가르쳐준다며 레나의 발을 자신의 발등에 올리고 함께 아장아장 걷던 일을.
“저는 아버지를 정말 좋아했어요.”
“……나도 그랬다.”
“그런데 왜 그러셨어요?”
레나가 속삭이듯 물었다.
“우린 나쁠 것이 없었는데, 왜 그렇게까지 하신 거예요?”
“천해서.”
“천해서?”
“황제의 말대로 벌레처럼 비천해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다 함께 죽든지, 손가락 하나를 잘라내든지.”
“설마 그 손가락이 전가요?”
레나가 웃으며 되물었다. 그 초연한 태도에 후작은 묘한 절망감을 느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그만 일어나세요. 이렇게 안 하셔도 괜찮아요. 이런다고 될 일도 아니고요.”
아니나 다를까 레나는 여상히 다정하게 말했다.
“저도 이제 성인이에요, 아버지.”
“뭐……?”
“올해 딱 열여덟, 제국이 법으로 인정하는 성년이죠. 혹시 지금도 제 나이를 착각하고 계신 건 아니죠?”
레나가 딸의 나이도 모르던 아버지를 놀렸다. 하지만 후작은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레나는 아버지의 당혹을 즐기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손가락이 아니라 사람으로 대해 주세요. 불편하게 무릎 같은 건 꿇지 말고.”
레나의 요구에 후작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가 보낸 편지는 잘 받았다.”
아무래도 레나에게 소회를 털어놓는 건 무의미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후작은 차라리 이성적으로 대화하기를 택했다. 정답이었는지 레나도 빙그레 웃었다.
“어제도 이유를 물었지.”
바로 어제, 레나는 편지로 이렇게 물어 왔다. ―저도 꼭 그만큼 궁금합니다. 아버지가 제게 왜 그러셨는지요. ―그러니 그 이유를 알려주시면 저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버지께 무엇을 하러 왔는지, 또 무엇을 할 수 있는지요. 다시 곱씹어도 선전포고로밖에 읽히지 않는 편지였다. 이를 악물고 보낸 편지라고 생각했는데. 그 또한 독살에 대한 걸 알고 쓴 거라니 무게가 새삼 달리 느껴졌다.
“아까 한 대답으로는 부족하겠느냐?”
“아뇨, 충분해요. 이제 제가 가르쳐드릴 차례죠? 제가 뭘 하러 왔는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후작이 뒷말을 잇자 레나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저는 존재하길 원해요.”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저는 이 세상에 없어요. 모두가 잊었고, 간혹 기억하더라도 죽은 사람으로 알죠. 하지만 저는 죽지 않았어요. 지금 여기에 살아 있어요.”
레나는 미소 띤 입술로, 하지만 단호한 눈으로 선언했다.
“제가 바라는 건 그뿐이에요. 아버지에게 지워진 제가 다시 존재하는 것.”
“존재라면…….”
“절 인정해주세요. 공식적으로.”
“……내 잘못을 자백하라는 뜻이냐?”
“아버지의 잘못에는 관심 없어요. 제가 바라는 건 단지 저예요.”
레나의 요구에 후작은 숨을 깊게 마셨다. 레나 루벨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라니. 그건 레나가 자신의 딸인 것과 병으로 죽지 않은 것, 클라비스의 제물이 된 것, 그럼에도 다시 돌아온 것을 모두 밝히라는 뜻이었다. 결국 반역을 고백하라는 말이고,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것을 버리고 죽으라는 말이기도 했다.
“새 삶을 주마.”
후작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만족할만한 삶을 약속하마. 후작가의 영애가 아니라 황족 못지않게 고귀한 생활을 하게 해주마.”
“괜찮아요.”
하지만 레나는 겸손히 사양했다.
“계속 말하지만 제가 원하는 건 그냥 저예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왜죠?”
“그건 반역이니까.”
후작이 숨을 길게 뱉으며 고백했다. 레나의 두 눈이 동그래졌고, 딸의 놀란 얼굴에 후작은 씁쓸히 웃었다. 후작은 어제 내리 고민했다. 분명 작정하고 찾아온 딸. 그 아이가 가진 패는 뭘까. 대체 무슨 수가 있어서 추기경과 북부 후작에게 도전하러 온 걸까. 짚이는 건 하나뿐이다. 반역. 반역죄를 덮어씌워 황제를 움직이는 것 외에, 레나가 자신과 추기경을 흔들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후작은 차라리 그 패를 먼저 쓰기로 했다.
“이건 몰랐던 모양이구나.”
정말 몰라서 놀란 건지, 아니면 선수를 빼앗겨서 당황한 건지는 모른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추기경이 널 데려간 건 황제와 맞서기 위해서였다. 만약 그 일이 알려지면 나는 물론 너 역시 반역자의 자식이 될 거다.”
모든 왕들이 그러했지만, 니힐은 반역에 대해 특히 비정했다. 니힐 그라샤는 자신에 대한 비방까지도 반역으로 치부해 일족을 몰살하는 자. 심지어 그는 밀고자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반역이라는 패는 레나에게도 치명상을 입힐 양날의 검이다. 하지만 악에 받쳐 서로 죽자고 덤벼들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후작은 레나가 불나방처럼 굴 것까지 염두에 두고 말을 이었다.
“날 원망하는 심정은 이해한다. 난 네게 아무 면목이 없지만…….”
후작은 말을 멈추며 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눈을 마주한 채 나직이 중얼댔다.
“네 엄마는 죄가 없어.”
엄마라는 말에 레나의 눈이 흔들렸다. 레나는 정말 당황했는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후작은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안심했다. 이제야 딸에게서 인간성이 느껴져서, 딸의 약점을 찾은 것 같아서.
“……죄가 없는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레나는 한참 후에야 중얼댔다.
“안심하세요. 아버지를 고발할 생각은 없어요. 그렇게 끝내기에는 지금까지 들인 시간이 아까워요.”
들인 시간. 후작은 흥미로운 표현이라 생각했다. 그래, 6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혼자 버려진 아이에게는 더욱 가혹하고 길었을 터. 그러게, 차라리 죽지. 후작은 살아 돌아온 딸이 진심으로 안타까워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레나는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그러니 기회를 드릴게요.”
“기회?”
“제게 용서받을 기회요.”
뜻밖의 말에 후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버지가 인정하지 않으셔도, 설령 반역의 단서가 되더라도 저는 레나 루벨로 있을 거예요. 아버지는 이런 절 없애고 싶으시죠?”
후작은 차마 답하지 못했다. 정곡을 찔린 탓이었다. 레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쓰게 웃었다.
“시도하세요. 성공하면 아버지는 지금처럼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어요.”
“시도?”
“절 죽여보세요. 앞서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레나의 목소리는 여상히 담담했다.
“기한은 무덤 정복이 끝날 때까지. 그때까진 보복도 폭로도 하지 않을게요. 대신 마지막 날까지 절 죽이지 못하면, 그땐 저도 받은 만큼 할 거예요.”
받은 만큼 하겠다. 단순한 말이지만 그 안에 담긴 서슬은 새파랬다. 이건 서로 죽이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후작이 굳은 얼굴로 쳐다보자, 레나는 한층 옅어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그전에 절 인정해주시면, 그땐 저도 아버지를 용서할게요.”
죽이거나, 죽거나, 아니면 자백하거나. 이것이 레나가 주는 용서받을 기회이자, 다시 죄를 범할 기회였다.
그 의미를 이해한 후작은 깊게 탄식했다.
“이틀 전에도 이 얘길 하러 왔었느냐?”
“네.”
“그랬구나.”
그래. 그랬구나. 후작은 작게 중얼댔다. 딸의 사무친 각오가 살갗에 닿을 듯 생생해서 그는 한참을 되뇌었다. 후작이 말을 잇지 못하자 레나는 가볍게 농을 던졌다.
“기한은 충분하겠죠?”
후작의 입가에도 쓴웃음이 번졌다. 자길 죽이라면서 농담을 하는 레나가 기묘해서. 강하다고 여겨야 할지, 망가졌다고 봐야 할지 아직 알 수 없어서.
“꼭 이래야겠느냐?”
“저도 똑같이 묻고 싶네요. 꼭 그러셔야 했는지.”
레나의 단호함에 후작은 마지못해 끄덕였다.
“제안은 신중히 고려해보마.”
“모쪼록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세요.”
“레나야.”
레나가 말을 맺으려 하자 후작이 불렀다. 과거, 딸을 부르던 목소리 그대로.
“잠시라면 만나게 해 줄 수 있다.”
“누구를요?”
“네 엄마.”
후작의 목소리는 진중했다. 또 다정했다. 그래서 레나의 표정은 오히려 묘해졌다. 레나는 웃을 듯 말 듯한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레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