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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기회를 주는 이유 (17/208)

17화. 기회를 주는 이유2020.06.29.

복도로 나온 레나는 번지는 웃음을 삼켰다. 드디어 아버지를 만났다. 그날, 평화롭던 밤 별안간 제물이 되어 팔려나간 이후 처음이다. 그리고 재회를 통해 알게 된 아버지의 실체는, 기억을 더듬어 그린 예상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냉혹했다.

16562799546843.jpg‘하긴, 보통 사람이면 그렇게 못 하지.’

6년 만에 나타난 딸에게 대뜸 독을 먹이다니. 다시 생각해도 대단하다. 하지만 후작은 오히려 놀란 눈치였다. 레나가 독살 시도에 대해 이미 아는 것과, 그럼에도 자신을 태연히 마주하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레나는 그 또한 우스웠다.

16562799546843.jpg‘왜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레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름을 밝히고 찾아가면 후작이 높은 확률로 공격해올 것도, 이상한 소문이 돌기 전에 서둘러 손을 쓸 거라는 것도.

16562799546843.jpg“정말이지…….”

레나는 완벽히 예상대로 움직인 아버지를 떠올리며 실소했다. 레나는 후작이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알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니까.

16562799546843.jpg‘그것도 까맣게 모르실 테지만.’

레나는 이미 예전에 집으로 돌아가려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실패했고 그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당사자인 레나 루벨 말고는, 아무도. *** 6년 전, 어린 레나는 밤거리에 홀로 서 있었다.

16562799546843.jpg‘돌아왔어……?’

레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짙은 밤하늘과 그 안에 가득한 별을 바라보았다.

16562799546843.jpg‘돌아왔어.’

레나는 익숙한 별빛을 발견하고 입술을 깨물며 울었다. 무서운 일을 겪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환상인지 현실인지조차 확실치 않은 그런 일이었다. 그대로 영영 갇히는 줄 알았는데 다시 돌아왔다. 별빛이 내리는 하늘 아래, 이 평범한 세상으로. 흐느껴 울던 레나는 눈물을 훔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낯선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16562799546843.jpg‘여긴 어디지?’

지저분한 거리였다. 허물어질 것 같은 집이 첩첩이 겹쳐진 소위 빈민가였다. 레나는 두려운 눈으로 갈 곳을 찾았다. 추웠다. 피곤하고 배가 고팠다. 쉴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가장 반듯한 집을 골라 문을 두드렸다. 동화책에서 본 것처럼, 가난하지만 선량한 부인이 나와서 도와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동화와 달랐다. 되돌아온 것은 험한 욕설뿐이었고, 레나는 처음 받는 냉대에 놀라 도망쳤다. 그러곤 벌벌 떨며 한참 더 헤매다 잡동사니가 쌓인 구석에 몸을 웅크렸다.

16562799546884.jpg“얘, 혼자니?”

레나가 새벽이슬을 맞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친절한 목소리였다. 힘없이 끄덕여 답하자 남자는 돈을 벌게 해주겠다며 레나를 데려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그 뒷골목보다 더 깊은 곳, 부둣가의 사창가였다.

16562799546884.jpg“어디서 이런 걸 잘도 주웠네.”

담뱃대를 문 여자가 남자에게 동전을 건네며 말했다. 그때 레나는 이미 숨도 못 쉴 만큼 떨고 있었다. 소설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욕망에 찌든 남자들이 동전 몇 닢으로 궁박한 여자를 범하고 학대하는 곳의 이야기를. 레나는 자신이 어디 와있는지 깨닫고 아득히 절망했다. 다른 것보다 여기까지 이토록 순식간에 오게 된 것이 당황스러웠다. 여긴, 더 나중에 오는 데가 아닌가? 나는 아직 어린데. 이제 겨우 열두 살인데? 레나는 반신반의하며 눈을 굴리다가 발견했다. 자신과 또래로 보이는 아이가 이 추운 날 등이 파인 드레스를 입고 호객 중인 것을. 그리고 그 곁으로 아버지뻘은 족히 될법한 남자가 비틀대며 다가가는 것을. 레나는 질식할 것 같은 기분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레나는 자신을 산 여자에게 매달려 애원하고 있었다.

16562799546843.jpg“저는 귀족이에요!”

16562799546884.jpg“이 년이 뭐라는 거야?”

16562799546843.jpg“진짜예요, 전 루벨 자작의 딸이에요. 여기 오게 된 건 사고예요. 제발 집에 보내주세요.”

거리의 여인들은 레나의 절규를 믿지 않았다. 건달들은 어린 게 일하기 싫어서 꾀를 쓴다며 욕했다. 하지만 레나를 산 마담은 예사로 넘기지 않고 레나를 등불 앞에 세웠다.

16562799546884.jpg“이는 하얗고 피부도 깨끗하네……. 때가 좀 탔지만 묵은 때는 아니고.”

16562799546884.jpg“누님, 얘 말을 믿어요?”

16562799546884.jpg“닥치고 종이랑 잉크 가져와 봐.”

마담은 레나에게 종이와 펜을 내밀며 글을 쓰게 시켰다. 레나는 손을 덜덜 떨면서도 최대한 예쁘게 시 한 구절을 적었다.

16562799546884.jpg“그대는 한여름의 차가운 꿈이어라. 이게 무슨 뜻이니?”

16562799546843.jpg“시, 시예요. 비트라의 시집 첫 장에 나오는…….”

16562799546884.jpg“어머, 시.”

마담은 감명 깊은 척하며 레나에게 몇 가지를 더 물었다. 상류층의 교양이나 예법, 루벨 자작가의 위치, 하인의 수 등이었다.

16562799546884.jpg“아이고! 실례가 많았네요, 아가씨!”

레나가 더듬대며 대답하자, 마담은 돌연 태도를 바꿨다.

16562799546884.jpg“이놈이 워낙 못 배워놔서 착각을 했나 봐요! 사정이 있으신 모양인데 안심하세요. 제가 아주 극진하게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

마담은 싱글벙글 웃으며 레나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수족처럼 부리는 건달들에겐 이렇게 속삭였다.

16562799546884.jpg“흠집 내지 말고 잘 지켜. 몸값을 뜯을 거니까.”

마담은 뜻밖의 횡재에 들떠 루벨 가와 접촉을 시도했다. 그 사이 레나는 허름한 방에 갇혀 보호인지 감금인지 모를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끔찍한 시간이었다. 얇은 문 너머에선 온갖 소리가 다 들렸다. 비명, 울음소리, 난생처음 들어보는 욕설까지. 레나는 견디기 위해 귀를 막고 시를 외웠다. 하지만 조금도 진정되지 않았다. 사실 레나를 두렵게 하는 건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라 앞으로 벌어질 일이었다. 자신이 돌아온 걸 알면 아버지는 어떻게 반응할까. 제 손으로 버린 딸이 다시 돌아왔다고 하면, 데리러 올까? 이제라도 미안해할까? 후회하고 사과할까?

16562799546843.jpg‘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아버지를 떠올리자 어김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내가 뭘 잘못했지? 거짓말쟁이. 복수할 거야. 사랑한다고 했잖아. 이유가 대체 뭐야? 구해 줘. 미워. 내가 나쁜 거야. 살려 줘. 용서해 주세요. 레나는 그 좁은 방에서 마음을 잘게 찢으며 견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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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이 지났다. 다행히 마담은 제법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작에게 곧장 연락하지 않고 자작가의 상황부터 살폈다. 그로써 레나는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16562799546884.jpg“누님, 자작가가 아니라 백작가던데?”

16562799546884.jpg“뭐야?”

16562799546884.jpg“얼마 전에 북부공한테 백작위를 받았대요. 뭐 뒷돈이라도 찔렀나?”

제국의 공작들은 일국의 왕 이상의 권세를 지녔다. 그러니 자신의 신하에게 작위를 내리는 것도 얼마든 가능했다. 하지만 이미 귀족들이 가득한 마당에, 굳이 누군가를 진작시키는 일은 드물었다.

16562799546884.jpg“딸을 찾는다는 소린 없어?”

16562799546884.jpg“아, 그 집에 딸내미가 하나 있는 건 맞는데…….”

16562799546884.jpg“그런데?”

16562799546884.jpg“병 걸려 뒈졌데. 이미 장례도 치렀다더만.”

16562799546884.jpg“뭐? 그럼 저건 뭐야?”

16562799546884.jpg“어린 게 약아빠진 거지, 염병.”

소식을 주워온 건달은 헛수고했다는 듯 가래침을 모아 뱉었다. 하지만 마담은 오히려 묘한 직감에 눈을 빛냈다.

16562799546884.jpg“언제 죽었대?”

16562799546884.jpg“한 달 전에.”

16562799546884.jpg“자작이 백작이 된 건?”

16562799546884.jpg“보름 전?”

16562799546884.jpg“그 집 딸년, 무슨 병으로 죽었는지도 알아봐.”

16562799546884.jpg“아, 누님! 지금 저 계집애 말만 믿고…….”

16562799546884.jpg“아니, 아니다. 그냥 무덤을 파보자. 너 친구 중에 땅개짓 하는 놈들 있지?”

결국 마담은 건달들을 다그쳐서 레나 루벨의 무덤을 파헤쳤다. 그로써 루벨 가의 비밀은 너무 쉽게 꼬리를 밟혔다.

16562799546884.jpg“와하하! 이게 무슨 일이야! 누님, 이거 완전 대박 맞지? 어!”

한 달 전 장례를 치렀다는 소녀의 시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관 속은 옷과 책, 인형, 그리고 바이올린 따위로 채워져 있을 뿐이었다. 빈 무덤, 아직 살아 있는 아이. 갑자기 백작이 된 자작. 전부 예삿일이 아니었다.

16562799546884.jpg“그래, 이거 사례금 수준으로는 안 끝나겠어.”

마담도 귀족의 약점을 잡았다는 생각에 흥분했다. 그것도 막 출세 가도를 달리는 유력한 귀족의 뒤를 잡았다. 이런 횡재가 찾아오다니, 이 지긋지긋한 생활도 드디어 끝이야! 마담은 분명 영리한 사람이었지만, 썩 신중하지는 못했다. 잔뜩 들뜬 마담은 레나의 머리카락을 잘라 루벨 가로 보냈다. 그러곤 루벨 자작, 아니, 루벨 백작에게 방문해줄 것을 청했다.

16562799546884.jpg“진짜는 옆 건물에 숨겨 둬. 힘으로 빼앗으려 들 수도 있으니까.”

마담은 여차하면 협박할 생각으로 레나를 옆 건물 옥탑에 가뒀다. 대신 다른 여자아이를 대역으로 만들고 백작을 기다렸다. 약속 당일, 레나는 옥탑의 창가에 앉아 초조한 눈으로 거리를 바라보았다. 궁금했다. 과연 올까? 나를 데리러 와 주실까? 이제라도 다시 날 찾아온다면, 만약 그러면……. 레나는 가슴을 졸이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직 샛별이 보이는 이른 새벽, 부둣가로 낯선 손님이 찾아왔다. 이 거칠고 더러운 거리와 어울리지 않는 말끔한 노신사였다. 레나는 그를 첫눈에 알아보았다.

16562799546843.jpg‘집사!’

그는 레나를 무척 예뻐하던 루벨 가의 집사였다.

16562799546843.jpg‘집사가 왔어!’

그를 발견한 레나는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슬프고 괴로워서가 아니라 마음이 녹아서 흐르는 안도의 눈물이었다. 레나는 기뻤다. 긴 악몽에서 드디어 해방된 기분이었다. 집사가 자신을 데리러 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행복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집사는 하인들과 함께 마담이 기다리는 건물로 들어갔다. 레나가 굳게 닫힌 문을 애절히 바라보는데, 돌연 큰 소리가 들렸다.

16562799546884.jpg“아아악!”

분노로 가득 찬, 찢기듯 처절한 여자의 비명이었다. 레나는 피가 식는 기분으로 거리를 바라보았다.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집사가 금방 다시 나왔다. 그는 들어갈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하인들은 온몸이 피로 젖어 있었다. 집사가 무언가 지시하자 하인들이 흩어졌다. 다시 보니 집사와 함께 움직이던 서너 명 외에도 꽤 많은 사람이 있었다.

16562799546843.jpg‘왜 저렇게 많이 왔지?’

날 찾으려고? 아직 순진했던 레나는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마담을 해친 건, 그래. 그 사람이 아버지를 협박했으니까 그런 거야. 날 구하려고 그런 거야. 분명 그런 걸 거야. 레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집사와 하인들이 어서 자신을 찾아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레나의 기다림은 엉뚱한 방향으로 보답받았다. 투명하던 새벽하늘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누군가 일부러 낸 불은 욕심 많은 마담의 시체를 녹이고 오물로 얼룩진 거리를 태웠다. 겨우 눈을 붙인 여인들과 옆에서 코 고는 남자들도 화염에 휩쓸렸다. 집사와 하인들은 부둣가에 서서 사창가가 불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간혹 불꼬리를 달고 뛰쳐나오는 자가 있다면 도로 밀어 넣으면서. 그 고요한 새벽, 불길은 소리 없이 춤추며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새벽이 지나고 거리를 다 태운 불길이 사그라지자 집사와 하인들은 서둘러 떠났다. 처음부터 작정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그로써 백작의 뒤를 캐던 사창가는 깨끗이 타버렸다. 누군가의 명령대로 그곳에 살아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단 한 사람, 잿더미에 앉아 재보다 더 하얗게 우는 소녀 외에는. *** 후작은 그때도 그랬다. 어린 딸을 팔아넘겨 놓고는 병으로 죽었다며 가짜 장례를 치렀다. 그 후 딸이 살아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모조리 불살라 죽였다. 때문에 레나는 후작의 이번 만행도 별로 놀랍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그 잿더미 속에서 이미 뼈저리게 깨달았으니까. 하지만 정작 그들은 모를 것이다. 그곳에 레나가 있었다는 걸,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는 걸, 그럼에도 아직 살아 있다는 걸.

16562799546843.jpg‘꼭 그것만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레나는 비로소 마주한 아버지의 면면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레나의 교활한 아버지는 생각보다 모르는 게 많았다. 반역에 대해서도, 자신의 아내에 대해서도, 그리고 오랜만에 찾아온 딸에 대해서도 거의 몰랐다. 그래서 레나가 용서받을 기회를 주겠다고 할 때 그 말을 협박으로 여겼다. 이 역시 어찌나 가련한 오해인지. 후작은 확신했다. 아비에게 내쳐진 아이가 제대로 된 인간이 될 리 없다고. 겉모습은 멀쩡할지라도 그 속은 썩고 타고 일그러져 엉망일 거라고. 그래서 후작은 레나가 입에 담은 용서라는 단어도 믿지 않았다. 레나가 품에 칼을 숨기고 있을 거라 믿었고, 절대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이게 후작의 가장 큰 오판이었다. 버림받아 나락까지 떨어진 여자아이라고 반드시 망가져야 하는 건 아니다. 분노에 휩싸여 비탄을 토해낼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다. 레나도 망가진 여자아이나 원한을 품은 복수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대신 어떤 존재가 될지 스스로 선택했다. 레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버지가 있는 별실 쪽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에 담긴 것은 이글대는 복수심이나 원한이 아니라 차분한 결심이었다. 하지만 후작은 그 사실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 아마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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