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망자2020.07.02.
“오늘은 어떠시려나…….”
유니는 방 정리를 하다 말고 푸념했다. 밖에 계신 아가씨 때문이었다. 황궁에 온 지 오늘로 사흘째. 그간 레나의 전적은 화려했다. 첫째 날엔 독, 둘째 날엔 샴페인. 그럼 셋째 날인 오늘은 또 어떤 모습으로 돌아오실까? 유니가 한숨을 폭 쉬는데, 때마침 레나가 방으로 돌아왔다.
“아가씨?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시간이 조금 남아서요.”
“저녁까지 일정이 쭉 있다고……. 뭐예요, 또. 무슨 일인데 이래요?”
눈치 빠른 유니는 레나를 보자마자 긴장했다. 레나는 못 당하겠다는 듯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그러곤 갑갑한 제복의 단추를 풀며 말했다.
“아버지를 만났어요.”
“만났어요!? 어어어, 무슨 얘기 하셨어요!”
“필요한 얘기를 했죠.”
유니가 깜짝 놀라 소리치자, 레나는 장갑을 마저 벗었다. 그러곤 소파에 등을 기대며 긴 숨을 내쉬었다. 레나는 피로해 보였다. 유니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호기심을 삼키고 자그맣게 되물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뇨, 아직.”
“계세요, 간단히 드실 거 가져올게요.”
유니는 레나를 앉혀두고 선반으로 달려갔다. 그러더니 과일과 쿠키 따위를 잔뜩 꺼내왔다. 뜻밖의 다과에 레나가 눈을 깜빡였다.
“이건 다 어디서 났어요?”
“공물이요. 황궁에도 절 추종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유니의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레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똑똑하고 수다스러운 유니는 어디서든 곧잘 어울렸다. 대개 어린 유니를 귀여워하며 잘해주었는데, 유니는 어린애 취급을 싫어해서 그들의 호의를 추종이라 여겼다. 둘 다 대상을 섬긴다는 면에서 비슷하니, 크게 다르지 않다는 논리였다.
“계속 혼자 둬서 미안해요.”
“괜찮아요, 제겐 추종자들이 있어요.”
유니의 당찬 대답에 레나의 미소가 한결 밝아졌다. 레나는 아이의 영특함에 안심하며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그 얘길 하러 왔어요.”
“무슨 얘기요?”
“조만간 유니한테 접근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유니는 레나 루벨이라는 기이한 숙녀가 데려온 아이. 그 아이가 음모로 가득한 황궁 한복판에서 주목받는 건 당연했다.
“높은 확률로 아버지 쪽 사람이고 그 외의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있어요.”
“아가씨네 아버지요?”
“네.”
“그럼 어떡해요?”
유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레나는 이 넓은 궁전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하는 유니가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타일렀다.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피하세요. 최대한 빠르게.”
“……별로 안 위험하면요?”
유니가 조심히 되물었다. 레나는 아이의 호기에 한숨을 쉬듯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 그란디스 그라샤의 황궁 가장 깊은 곳엔 ‘두엄의 궁’이라 불리는 궁전이 있다. 본궁에서 서른 개의 정원을 지나야 겨우 도달할 수 있는 그곳은 이름만 궁전일 뿐, 실상은 옛 왕궁의 잔해를 그대로 방치한 폐허였다. 무너진 아치 기둥과 흔적만 남은 프레스코화, 잔해에 깔린 왕좌, 그리고 그 앞에는 반쯤 부서진 거대한 돌판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비극의 단면이었고, 뻥 뚫린 천장에서 쏟아지는 햇살도 이곳의 음울함은 거두지 못했다.
“동부공은 아직인가요?”
잿빛 폐허 가운데서 클라비스가 하얗게 웃으며 말했다.
“주인공 놀이에 너무 심취하신 게 아닌지.”
클라비스가 푸념할 때, 남부와 북부의 공작과 기사들은 그곳에 이미 모여 있었다. 건국기념일의 오후 일정은 두엄의 궁에서 이어졌다. 황제가 던지고 간, 무덤을 정복하라는 명령 때문이었다. 황제를 알현할 때와 마찬가지로 남부공의 곁엔 레나가 있었고, 북부공의 양옆엔 루벨 후작과 루비드가 있었다. 레나와 후작 사이의 거리는 불과 몇 걸음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부녀는 서로 모르는 사람인 양 상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평소엔 못 끼어 안달하더니…….”
한참이 지나도 동부공이 나타나지 않자 남부공이 언짢게 중얼댔다. 그리고 북부공은 추기경에게 곧장 항의했다.
“지체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동부공이 안 왔어요.”
“천함은 참았다. 이제 천박함까지 참아야 하나?”
이우라가 차갑게 잘라 말했다. 북부의 왕 이우라 플레누스는 소문대로 고압적인 인물이었다. 그 인상적인 태도에 레나가 속삭였다.
“형제가 꼭 닮았네요.”
싸가지가. 레나가 이우라와 루비드를 두고 말하자 남부공도 낮게 중얼댔다.
“나도 저놈들이 몹시 싫다네.”
레나와 남부공이 몰래 끄덕이는 사이, 클라비스는 별수 없이 이우라의 비위를 맞췄다.
“그래요, 시작하죠. 그럼 제단을.”
추기경의 허락이 떨어지자 루벨 후작이 앞으로 나섰다. 후작은 기사들을 시켜 가마를 지고 나오도록 했다. 금과 벨벳으로 장식된, 어딘가의 왕이 올라도 될 만큼 화려한 가마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 위엔 왕 대신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기사들은 작은 무덤처럼 수북한 돌을 추기경 앞에 엄숙히 내려놓았다. 클라비스는 그것을 보며 짙게 웃었다.
“이렇게나 많이 찾아내다니, 역시 북부는 유능하네요.”
“모두 플레누스 공작 저하의 명철하심 덕입니다.”
클라비스가 감탄하자 후작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남부공이 그 꼴을 비웃는데, 뜻밖의 목소리가 번졌다.
“내가 늦었나?”
동시에 검은 제복의 기사들이 두엄의 궁으로 들이닥쳤다.
“아니, 공들이 쓸데없이 서두른 거겠지.”
불손한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동부공이었다. 한참이나 늦은 주제에 그는 퍽 여유롭게 등장했다. 그러곤 누가 핀잔할 틈도 없이 뒤따라온 기사들에게 턱짓했다. 동부의 기사들이 묵직한 자루를 짊어지고 앞으로 섰다. 그러곤 그것을 추기경 앞에 우르르 쏟았다. 자루에서 나온 건 모두 돌이었다. 북부가 가마에 옮겨온 것처럼 표면에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돌, 제단이었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도 북부가 모은 것보다 많았다. 동부의 업적이 북부를 앞서자 루벨 후작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알고도 그러는지 클라비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공이 늦었어요. 덕분에 북부에서 화가 좀 났는데, 들고 온 게 많아서 혼은 못 내겠네요.”
“그래? 그럼 사과의 뜻으로…….”
클라비스의 힐난에 린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가마에 쌓여 있던 북부의 제단을 발로 좌르륵 쓸어버렸다.
“동부와 비교되지 않게 도와드리지.”
린은 그렇게 말하며 북부의 제단과 가마를 비벼 밟았다. 그 패악에 레나는 북부를 슬쩍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활활 타는 눈으로 린을 쏘아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노린 것 같죠?”
“……나는 저놈도 몹시 싫다네.”
레나의 속삭임에 남부공이 질린 목소리로 화답했다. 레나도 그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린 씨, 밖에선 이런 녀석이었구나.’
개자식처럼 굴 거라고 찡얼대서 그래봤자 얼마나 하겠나 싶었는데, 직접 보니 과연 훌륭한 개자식이었다.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도 했는데 저만하면 욕먹어도 싸다. 린은 참신하게 행패를 부리고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동부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클라비스가 슬쩍 끼어들었다.
“뭐, 좋아요. 미리 말하는데 모든 일은 폐하께 보고됩니다. 아시죠?”
추기경의 당부에 동부는 더 기고만장해졌고 북부의 심기는 더 불편해졌다. 어차피 황제는 공작들의 성품엔 관심 없다. 중요한 건 자신의 명령에 따르는 것뿐. 그리고 지금 수북이 쌓인 저 돌, 제단을 모아오라는 것이 황제의 첫 번째 명령이었다.
“그럼 정말 시작하죠.”
클라비스의 신호에 사제들이 바닥에 널린 제단을 하나하나 나열하기 시작했다.
“보라, 내가 사자를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제단을 옮기는 사제들 앞에서 클라비스가 말했다.
“100년 전, 바로 여기서 그 문이 처음으로 열렸습니다.”
황제 니힐은 자신의 전기에서 그날을 이렇게 묘사했다. ―벼락처럼 찢긴 틈에서 생전 본 적 없는 것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여러 형태를 빌어 땅을 딛고 섰다. 그중에 신의 피조물을 온전히 닮은 것은 없었다. ―여러 쌍의 날개를 펼친 것, 많은 뿔을 짊어진 것, 곤충의 관절을 가진 것. 온갖 기괴한 형상이 있었다. ―하지만 가장 기괴한 부분은, 그것들이 가진 인간의 얼굴이었다.
“가장 평화롭던 시절, 왕국 그라샤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적들에게 멸망했습니다. 이에 그라샤의 마지막 핏줄인 니힐 그라샤는 복수와 재건을 맹세하며 검을 들었습니다.”
클라비스가 옛날이야기 하듯 말을 이었다. 이 또한 니힐의 전기에 담긴 내용이었다. ―그 괴이한 존재들은 오직 우리의 죽음을 바랐다. ―우리는 끊임없이 죽고 먹혔다. ―공주로 태어나 부채보다 무거운 것을 들어본 일이 없지만 다른 길은 없었다. ―내 대신 칼을 드는 자도 방패를 세우는 자도 이젠 없기에, 나는 그 모든 것을 직접 치켜들었다.
“니힐 그라샤는 그들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무수한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 비로소 조우했습니다. 찬란하고 거대한 왕관을 쓴 자들과.”
그전까지 사람들은 그들을 괴물, 마물, 혹은 악마라는 멸칭으로 일컬었다. 하지만 니힐이 확인한 그들의 정체는 기존의 예측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나는 적들을 부수어 길을 내고, 벼락 모양으로 찢긴 틈으로 몸을 던졌다. ―하늘이 붉은 세계에서도 수백 번의 전투를 치렀다. 그로써 검은 땅의 내핵까지 파고들었을 때, 나를 반기는 이가 있었다. ―그가 말했다. ‘어서 오렴, 손녀야.’ ―그는 내 아버지보다 삼대나 앞선 그라샤의 선왕이었다.
“그때 니힐 그라샤는 깨달았습니다. 저들이 인간의 얼굴을 지니고, 끊임없이 지상을 탐하는 이유를.”
이것은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 하지만 새하얀 추기경은 어린아이에게 새로운 진리를 가르치듯 담담히 말을 맺었다.
“그들은 이미 죽어 땅에 묻힌 우리의 선조들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그들을 망자라 부르는 까닭입니다.”
*** 같은 시각, 유니는 호수의 궁의 지하 세탁실에 있었다. 새 수건과 침구를 챙기기 위해서였다.
“아직 어린데 솜씨가 야무지구나.”
유니가 한창 세탁물을 챙기는데, 별안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를 보니 웬 노인이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정장을 빼입은 모습으로 보아 잡역부는 아닌 것 같았다.
“누구세요?”
“너처럼 주인을 모시는 사람.”
“뭐요?”
노인의 아리송한 대답에 유니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유니의 두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그 노인이 안주머니에서 사탕 병을 꺼냈기 때문이다.
“혹시 사탕 좋아하니?”
“사탕을 싫어하는 어린이는 세상에 없어요.”
“잘됐구나.”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걸 함부로 먹진 않아요.”
유니가 경계하는 눈으로 사탕 병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불과 몇 시간 전 레나가 일러준 말이 떠올랐다.
―조만간 유니한테 접근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유니는 레나의 말과 눈앞의 사탕 병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더니, 노인의 눈치를 보며 소심하게 물었다.
“근데 그거 무슨 맛이에요?”
“한 번 보겠니? 다 섞여 있어서 난 모르겠구나.”
“사탕을 구경만 하라고요?”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안 먹는다니까.”
노인의 대답에 유니는 뚱하니 입을 내밀었다. 아이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무언가 궁리하더니, 이내 선심 쓴다는 투로 말했다.
“그럼 한 번만 더 권해주세요. 저도 염치가 있어서 세 번이나 거절하진 않거든요.”
아이의 깜찍한 요구에 노인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기꺼이 사탕 병을 내밀었다. 유니가 그 사탕 병을 냉큼 받아들자 노인, 루벨 가의 집사는 웃음 속에 옅은 한숨을 감추었다.
‘이것도 못 할 짓이군.’
집사는 고작 사탕에 넘어오는 어린애를 보며 쓴 물을 삼켰다. 루벨 가의 수석집사가 어린 하녀나 구슬리고 있다니. 제 처지에 환멸을 느꼈지만 집사는 주인의 명대로, 인자한 가면을 쓰고 레나의 하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유니는 아가씨와 나눈 대화를 다시 떠올렸다.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피하세요. 최대한 빠르게.
―별로 안 위험하면요?
유니가 조심히 되묻자, 레나는 한숨 쉬듯 웃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럼 친해지세요.
―얼마나요?
―충분히.
‘충분히가 어느 정도지?’
유니는 혼자 궁리하며 사탕을 입에 넣었다. 그러곤 시치미를 뚝 떼고, 사람 좋은 척하는 노인을 비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