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지옥으로 가세요2020.07.06.
나는 보았다. 죽어 묻힌 왕들이 생전의 모습대로 움직이며 말하는 것을. 그들은 검은 땅에서도 여전히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어서 오렴, 손녀야. 용케 여기까지 왔구나.
그중에는 그라샤 왕조의 다섯 번째 왕, 나의 고조부인 히엠스 그라샤도 있었다.
―자, 다들 멈추자. 모처럼 내 손녀가 왔다.
선왕의 청에 공격이 그쳤다. 나는 혼란 속에서 영문을 물었다. 그러자 선왕뿐만 아니라 다른 왕들도 와서 대답했다. 그 땅엔 다섯 왕이 있었다. 가장 먼저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이라 일컫는 왕이 말했다.
―이곳은 무덤. 시대를 지배한 왕들은 죽어서도 다스리고 거느린다.
이어 ‘첫울음을 삼킨 왕’이 덧붙였다.
―무덤엔 안식이 있습니다. 죽어서도 갈망이 끊이지 않는 이곳은 지옥입니다.
내 고조부인 ‘태움과 그을림의 왕’도 거들었다.
―그래, 지하의 갈증엔 끝이 없지. 하여 우리는 다시 지상을 탐한다.
가장 흉포한 ‘사자를 가둔 왕’ 역시 으르렁댔다.
―모두 짐의 것이다. 시간에 쫓겨났을 뿐, 짐은 너희에게 무엇 하나 상속한 적이 없다.
끝으로 ‘용서 받지 못한 왕’이 말했다.
―나는 다시 돌아가 너희를 지배하리라. 산 자는 죽은 자를 감당하지 못하리라.
나는 그때 깨달았다. 망자들이 지상으로 끊임없이 기어 나오는 이유를. 그들은 다만 되찾기를 원했던 것이다. 후대에 침략당한, 과거의 영광을.
***
“그 후 지상으로 돌아온 니힐 그라샤는 제국을 세우고 대륙을 통일했습니다. 지상을 노리는 망자들로부터 연약한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지요.”
클라비스는 그렇게 말하며 식민지 출신인 동부공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때 동부공의 눈빛이 사나워지는 것을 동부의 기사들은 애써 모르는 척했다.
“제국은 망자의 침공을 견디며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렇게 연단하기를 한 세기, 드디어 폐하께서 무덤을 범하라 명하셨습니다.”
클라비스가 말을 잇자, 이번엔 남부공의 어금니가 맞물렸다. 레나도 기가 막혔다.
“저 사람 정말 뻔뻔하네요.”
“난 사실 저놈이 제일 싫다네.”
남부공이 이를 꽉 물고 으르렁거렸다. 그는 저 박쥐 같은 놈이 모든 상황을 뭉개고 제국을 찬양할 때마다 속이 뒤집혔다. 남부는 고립된 채 죽을 뻔했다. 게다가 클라비스의 영토인 서부는 이미 망자들에게 먹혀 폐허였다. 그런데 무슨 낯짝으로 저런 소리를 하는지 놀랍다 못해 신기할 따름이었다. 클라비스가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이 사제들은 동부와 북부가 모아온 제단을 부서진 돌판에 끼워 맞췄다. 원래 저 돌판의 일부였기에, 제단은 부서진 부분에 정확히 맞물리며 돌판을 수복했다. 그로써 반파되었던 돌판은 다시 본래의 형상, 넓고 평평한 원형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이것은 100년 전, 무덤의 길을 막기 위해 폐하께서 만드신 문입니다.”
금간 제단 앞에서 클라비스가 말했다.
“황제 폐하의 지고한 뜻에 따라 오랫동안 봉해둔 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클라비스가 손짓하자 귀엽게 생긴 소년 사제가 은잔을 받쳐 들고 나왔다.
“다들 준비하시길.”
동·남·북의 기사들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비해 묵묵히 검을 빼 들었다.
“폐하의 영광 아래, 새로운 지평을.”
클라비스의 선언을 신호로 소년 사제는 제단 위에 은잔을 기울였다. 순결한 은빛 잔에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기사들은 검을 치켜세우고 제단이 피로 젖어 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썩은 내가 진동하며 제단 위로 기이한 틈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벼락처럼, 쪼개지는 살얼음처럼, 가지를 뻗는 나무처럼 허공을 가로지르며 돋아났다. 그 틈 너머엔 이제껏 본 적 없는 세상이 있었다. 황혼보다 붉은 하늘과 밤보다 검은 땅이 펼쳐진 기이하고 불길한 세상이었다. 한계를 모르고 뻗어 나가던 틈은 결국 성문만큼 거대하게 벌어졌다. 깨진 창문마냥 볼품없이 갈라진 균열을 보며, 남부공이 신음했다.
“저걸 메우려고 내 평생을 바쳤거늘…….”
노인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남부의 영토 끝에도 저런 틈이 있었다. 남부는 저 틈을 막기 위해 무수한 희생을 감내했다. 그런데 저것이 눈앞에서 다시 열리는 것을 보니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온다.”
동부공이 낮게 중얼댔다. 동시에 유황 냄새가 독해지고 진동이 일었다. 드드드드. 마치 군대가 몰려오는 것처럼 무수한 땅 울림이 번졌다. 비슷했다. 균열 너머에서 피 냄새를 맡은 망자들이 새카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적의 모습을 식별한 기사들이 돌진할 준비를 했다. 그 앞으로 북부의 왕자가 나섰다.
“내가 시작한다.”
루비드는 한걸음 내디디며 레이피어를 빼 들었다.
“비켜, 촉새.”
“저하, 잠깐만요……!”
루비드가 검을 치켜들자 아직 제단 앞에 서 있던 소년 사제가 비명을 질렀다. 소년이 후다닥 도망칠 때 루비드는 눈을 이미 파랗게 빛내고 있었다. 루비드가 가늘고 아름다운, 그래서 장식용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레이피어를 매섭게 휘둘렀다. 핑하고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기사들은 가벼운 바람을 느꼈다. 직후, 아직 멀리 있던 망자들의 목이 우수수 떨어졌다.
‘저게 북부의 참격.’
레나는 루비드의 일격을 감명 깊게 바라보았다. 황제 니힐은 자신의 경이로운 힘을 동서남북의 공작들에게 나눠주었다. 그중 북부가 가져간 것은 참격. 땅을 가르고 바다를 베는 힘이었다.
‘무도회장에서 샴페인 호수를 쪼갠 것도 저거였지.’
루비드가 빠진 직후, 샴페인 호수는 여러 갈래로 쪼개졌다. 단지 무너진 게 아니라 아주 예리하게 잘려나간 거였다. 저런 힘을 단지 화풀이에 쓰다니. 레나는 감탄하는 한편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북부의 왕자는 사람됨에 비해 너무 과분한 힘을 가졌다. 레나가 그렇게 생각하며 루비드를 바라보는데, 마침 루비드도 레나 쪽을 돌아보았다. 그 바람에 눈이 마주쳐서 레나는 짐짓 놀랐다. 레나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어쩐지 기고만장해진 루비드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뭐지?’
레나가 어처구니없어하는 사이, 참수당한 망자들 뒤에서 다른 망자들이 몰려왔다.
“막으세요, 문밖으로 못 나오게.”
추기경의 태평한 주문에 기사들도 대응에 나섰다. 몰려오는 망자들의 모습은 제각각이었다. 야수처럼 네 발로 뛰는 것, 비쩍 마른 사지를 가진 것, 비늘로 뒤덮여 피막의 날개를 펼친 것. 온갖 흉측한 형태를 지녔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은 모두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발로 달려 가장 빠르게 도달한 망자가 균열을 넘었다. 직후 여러 개의 검이 그 몸에 내리꽂혔다. 북부의 기사들이 일시에 내지른 검이었다. 그들은 절제된 동작으로 능숙하게 협공하며 밖으로 나온 망자들을 치기 시작했다. 반면 동부의 기사들은 게으르고 불성실했다. 그들이 주로 하는 일은 망자들을 베는 게 아니라 검집으로 호되게 쳐서 북부로 떠넘기는 짓이었다. 이 와중에 장난질이라니. 레나는 기가 막혀서 남부공에게 슬쩍 물었다.
“동부는 늘 저런 식인가요?”
“저런, 저, 저……!”
남부공도 동부의 작태에 울화통을 터트렸다. 하지만 남 일에 참견할 때가 아니었다.
“대열을 갖춰라!”
“우아악!”
“저리 가!”
남부의 기사들이 우왕좌왕하며 소리쳤다. 여유롭게 대응하는 동부나 북부와 달리 그들은 대책 없이 허둥대고 있었다. 그때 균열 높은 곳에서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빠져나왔다. 흡사 용과 같은 형태를 지닌 망자였다. 그것은 북부 기사들의 머리 위를 날아 넘더니 남부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앉았다. 쾅! 굉음과 함께 망자가 떨어지자 누군가 덧없이 소리쳤다.
“대열을……!”
그 간절한 외침은 망자가 날개를 펼쳐 휘두른 순간 맥없이 끊겼다. 망자는 날개로 주변의 기사들을 모조리 날려버렸고, 날아간 기사들은 날개 뼈에 맞은 충격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 사이 망자는 또 한 번 아가리를 벌리며 돌진했다. 그곳엔 남부공이 있었다.
“큭……!”
남부공은 눈을 부릅떴다. 이미 기력이 쇠한 그에겐 저만한 망자와 맞설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망자의 검고 깊은 목구멍이 망막에 비치자 모든 순간이 느려졌다. 남부공이 죽음을 직감하는데, 돌연 굉음이 울렸다. 쾅! 뜻밖의 소리와 함께 크게 벌어졌던 망자의 입이 도로 닫혔다. 남부공은 눈을 홉뜨며 고개를 들었다. 망자보다 더 검은 청년이 그것의 머리를 짓밟고 서 있었다. 위기의 순간 도움을 받은 남부공은, 그 상대가 동부공인 걸 깨닫고 신음했다.
“왜 네가…….”
“감사 인사는?”
린이 표정 없이 읊조렸다. 덕분에 잠시 순수했던 남부공의 얼굴이 도로 험하게 일그러졌다. 린은 그가 노성을 터트리기 전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남부공의 옆에 있던 레나는, 린이 남몰래 건넨 눈인사에 조용히 웃었다. 수많은 망자가 몰려왔지만 균열을 넘어 활개 치는 것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루비드가 몰려오는 족족 반 토막을 내버리고, 북부의 기사들이 빈틈을 치밀히 채운 덕이었다. 그로써 상황은 곧 정리되었다. 몰려온 망자들이 모두 죽어 사라지자 붉게 찢긴 균열만 남았다.
“길이 열렸네요.”
새빨간 균열 앞에서 클라비스가 말했다.
“정복이 끝날 때까지 이 길은 돌아가며 감시할 겁니다.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망자의 왕들이 밖으로 나오면 곤란하니까요.”
그가 웃으며 한 말은 사실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불길한 가설이었다. 남부가 오랜 시간 고초를 겪은 것도 영토 끝에 생긴 바로 저런 틈 때문이었다. 그런 틈이 다른 곳도 아닌 황궁 안에 생겼다. 공작들은 이 일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짓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추기경은 아무 걱정도 염려도 없이 즐거워 보였다.
“첫 번째 출정은 열흘 후입니다. 가서 왕관을 빼앗고 충정을 보이십시오. 폐하께서 더 큰 보상으로 갚아주실 겁니다.”
붉은 빛을 등지고 말하는 클라비스의 모습은 마치 황혼을 내리는 천사처럼 경건했다. 하지만 그 모습에 속는 이는 없었다. 사람을 지옥으로 밀어 넣으며 웃는 그 본질은 확실히 천사보다는 악마에 가까웠으니까. . . . 두엄의 궁에서의 일정이 끝나 각 진영이 흩어질 때였다. 누군가가 리그난 아이테르너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멈춰라, 잡견.”
기사들이 헛숨을 삼키는 사이, 린은 우뚝 멈추며 뒤를 돌아보았다. 린을 불러 세운 건 다름 아닌 북부의 왕자 루비드였다.
“내빼기 전에 버르장머리부터 고쳐야지.”
루비드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린이 북부의 제단을 밟아 비빈 것 때문에 벼르고 있다가 하는 소리였다. 그 진부한 시비에, 린은 곁에 있던 데카에게 귓속말로 중얼댔다.
“정말 그렇게 전합니까?”
데카가 놀라서 되물었다. 린은 덤덤히 끄덕였고, 지켜보던 루비드는 눈썹을 슬쩍 찌푸렸다. 루비드가 궁금해하자 데카는 마지못해 고했다.
“저하께서 치자와는 말을 섞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치자?”
“멍청이라는 뜻이다, 멍청한 놈.”
욕을 먹고도 욕인지 모르는 루비드를 위해 린이 직접 대답했다. 그러자 어리둥절해 하던 루비드의 눈빛도 곧장 사나워졌다.
“개면 개답게 짖어라, 건방지게 제국어로 지껄이지 말고.”
“제국어로 지껄여줘도 못 알아듣는데 왜 굳이.”
린의 차분한 조롱에 루비드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입술을 씹던 루비드가 다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혹시 짖는 법을 잊어버렸나? 그런 거면 자비를 베풀어주마. 네 미개한 족속들을 잡아다가 짖게 만들면 도움이 되겠지.”
이 역시 진부한 도발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효과가 있었다. 일족의 이야기가 나오자 린의 표정이 삽시에 굳었다. 루비드는 린이 반응하는 걸 알고 더 들쑤셨다.
“선택해. 알아서 짖을지 아니면 다른 개들과 함께 짖을지.”
린은 입을 굳게 닫고 루비드를 노려보았다. 성가신 녀석이 붙었다. 머리는 나쁜 주제에 남의 약점은 잘도 찔러대는 놈. 예의도 없고 정도도 모르는 북부의 망나니. 린은 가늘어진 눈으로 루비드의 어깨너머를 바라보았다. 다들 이쪽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 공작들은 내심 통쾌할 거다. 안하무인하게 굴던 린이 저보다 더한 놈을 만나 수모를 당하니, 즐거울 수밖에. 늘 그랬듯 이곳에 동부공의 편은 없었다. 린은 첩첩한 적의를 견디기 위해 숨을 깊게 마셨다. 그러곤 루비드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나직이 읊조렸다.
“그러다 물리지.”
“해 봐, 이 잡종아.”
린과 루비드는 양보 없이 서로를 쏘아보았다.
그때였다. 두 사람 사이로 상상도 못 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이테르너 공작 저하.”
온화한 음성과 함께 한 사람이 동부공의 곁으로 다가왔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남부의 레나 루벨입니다.”
남부의 대리인인 레나 루벨 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