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손가락들2020.07.13.
6년 전, 레나는 아버지의 서재로 불려갔던 바로 그 날 끌려갔다. 식구들에게 인사하거나 짐을 챙길 틈은 없었다. 마치 납치당하듯 낯선 마차에 올랐고, 그 후엔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열흘 가까이 이동했다. 어디로 가는지 언제까지 가는지도 모르는 탓에 레나는 하루하루 불안에 시달렸다. 덫에 걸린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는 신세였다. 그래서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많이 울었다. 울고 또 울고, 말라죽을 것처럼 계속해서 울었다.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이 마른 것은 서부공의 성에 도착했을 즈음이었다. 극도로 두려워하던 레나는 결국 마음이 텅 비어, 실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지고 말았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칠 능력도 없고 현실을 마주할 용기도 없으니 그편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싶었다. 체념하니 다 헐어버린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이한 균열을 보자 다시 눈물이 쏟아졌다.
―환영해, 널 위해 준비한 길이야.
레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남자가 그 균열 앞에서 말했다. 허공의 균열, 그 안에는 레나가 난생처음 보는 붉은 하늘과 검은 땅이 악몽처럼 이글대고 있었다.
―너무 무서워하지 마.
남자, 클라비스의 목소리는 그 와중에도 상냥했다. 그래서 더 미친 것 같았다.
―혹시 망자를 본 적 있니?
클라비스가 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레나는 덜덜 떨며 고개를 저었다. 망자는 남부에나 있는 거였다. 아니면 북부에 가끔 나타나거나. 그마저도 어른들이 하는 말을 언뜻 들은 게 다였다.
―그래, 없구나. 도시 밖에선 시체가 나날이 늘고 있는데, 아가씨는 저택에서 예쁜 옷 입고 케이크를 먹느라 아직 못 봤구나?
클라비스가 조롱기 다분하게 속삭였다. 때문에 레나의 가슴은 또 한 번 철렁 내려앉았다.
―괜찮아, 비난하는 게 아니야. 그건 아가씨 복이야. 좋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는 게 당연한, 타고난 복.
클라비스가 흐느끼는 레나를 달랬다. 하지만 그 역시 레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누린 것처럼 이것도 이유를 찾지 말고 감당해줘. 고통스러워도, 죽을 것 같아도, 다들 그렇게 견디며 사는 거니까.
클라비스는 그렇게 말하며 레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곤 얼어붙은 레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자, 이제 그만 울고 가야지?
어딜 가라는 거예요? 레나가 소리 없이 물었다. 클라비스는 그 가련한 표정을 알아보고 화사하게 웃었다.
―저기 보이는 게 망자들의 땅이야. 황제 폐하께서 발견한, 우리 입장에선 지옥이지.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친구들을 많이 보냈는데 아직 아무도 안 돌아왔어.
클라비스가 레나의 등을 떠밀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조건을 맞춰봤어. 황제처럼 곱게 자란 여자아이면 될까 싶어서. 지옥에서도 귀천을 따진다고 생각하면 좀 서글프지만 말이야.
입으로는 서글프다고 하지만, 정작 클라비스의 두 눈은 즐거워 보였다.
―무사히 돌아온다면 너도 황제처럼 위대해질 거야.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클라비스는 무책임하게 지껄이며 레나를 밀었다. 레나는 필사적으로 뒷걸음쳤다.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질 법도 한데, 클라비스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레나를 질질 끌고 갔다. 그러곤 기어이 나락으로 밀어 넣으며 인사했다.
―그럼 기다릴게. 복수해도 좋으니까, 부디 돌아와 줘.
그게 끝이었다. 그 속삭임을 마지막으로 레나는 떨어졌다. 한없이 깊고 낮은 곳으로. 그곳에서 레나는 낯선 세계와 마주했다. 과거,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 건국기념일 다음 날, 남부공은 이른 아침부터 심기가 불편했다.
“간밤 평안하셨습니까, 저하.”
“아닌 것 같아요. 영감님 표정이 좋지 않아요.”
“실례예요, 저하는 원래 늘 저런 표정이세요.”
“앗, 저런…….”
어린 하녀가 슬픈 눈으로 유감을 표하자 남부공은 참다못해 짓씹었다.
“지금 내 표정이 누구 때문에 이 모양이라고 생각하나?”
“설마 저 때문인가요?”
레나의 순진한 물음에 남부공은 눈을 꽉 감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건국기념일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남부공은 날이 밝자마자 레나를 불렀다. 전날 레나가 저지른 실수 때문이었다.
“어제 경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고는 있나?”
“동부공?”
“알긴 아는군!”
남부공이 호통쳤지만 레나와 유니는 눈도 까딱하지 않았다. 그게 남부공을 더 환장하게 만들었다. 어제 레나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동부공에게 머리를 숙였다. 상전에게 아부하듯 먼저 말을 붙이고, 자신을 소개하고, 심지어 감사를 표했다. 모두 남부의 대표로서 해선 안 될 행동이었다.
“남부의 제복을 몸에 걸친 이상 경이 곧 남부고 남부가 곧 경일세, 그런데 아무리 무지하기로서니 함부로 숙이고 다녀서야 쓰겠는가!”
“도움을 받아서 인사한 것뿐이에요.”
레나가 태연히 해명하자 남부공은 다시 소리치려 했다. 그러자 레나가 한발 먼저 덧붙였다.
“동부공이 아니었으면 크게 다치셨을 테니까요.”
나 말고 당신이. 레나의 소리 없는 지목에 남부공은 말문이 막혔다. 동시에 체한 사람처럼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그는 건방진 동부공이 자신을 구해준 것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그럴 놈이 아닌데, 그 개놈이 대체 왜. 남부공이 혼란스러워하자 레나는 무구한 눈으로 되물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도움을 받았는데 그냥 넘어가면 너무 무례해 보일 것 같았어요. 기본 예의를 지키는 것도 품위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실수한 걸까요?”
그렇게 묻는 레나의 목소리는 가냘프기 짝이 없었다. 남부공은 집행자의 그런 모습이 도무지 익숙지 않아 이를 부득 갈았다.
“정 인사해야 한다면 조용히 하는 법도 있었을 걸세.”
“그럴 거면 뭐 하러 인사를 해.”
“유니, 쉿.”
노인이 구차하게 우기자 가만히 듣고 있던 유니가 투덜댔다. 레나가 서둘러 말렸지만 남부공은 이미 그 소릴 똑똑히 들었다. 때문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사실 저 꼬맹이는 레나가 적을 도발하기 위해 들고 다니는 복화술인형 같은 게 아닐까? 그는 망상에 가깝게 의심하며 울화를 삼켰다. 그리고 레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조금 미안해졌다. 사실 어제 나선 건 순전히 린을 돕기 위해서였다. 남부의 품위를 위해서 그랬다는 건 대충 둘러댄 말인데, 고지식한 남부공은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노인의 내적갈등을 느낀 레나는 양심이 찔려 뒤늦게 비위를 맞춰주었다.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알아요. 남부의 대표로서 걸맞게 행동해야 하는데 제 생각이 짧았죠.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말은 잘하는군.”
“말을 해돕……!”
어김없이 유니가 치고 나왔지만, 다행히 이번엔 유니의 입보다 레나의 손이 빨랐다. 레나는 유니의 입을 막으며 ‘유니, 쉿’하고 작게 속삭였다. 아가씨의 당부에 유니는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고, 좌절하는 유니를 보며 남부공은 비로소 마음을 풀었다. 레나는 그의 기분이 나아진 것을 확인하고 넌지시 덧붙였다.
“사실 가장 좋은 건 처음부터 그런 상황을 안 만드는 거죠.”
“흠?”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인사할 필요도 없으니까요.”
남부공은 눈썹을 들고 레나를 바라보았다. 대뜸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그에 레나는 조심히 본론을 밝혔다.
“그런 의미에서 여쭙고 싶은데, 남부 기사단에 무슨 일이 생겼나요? 침묵 전쟁에 참전하신 분들은 다 어디 계시죠?”
레나의 물음에 남부공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전쟁만큼 치열한 게 전후라네.”
남부공은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하는 사람처럼 중얼댔다. 실은 어차피 해야 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약점을 드러내는 게 불편해 미루고 있었는데, 이렇게 직접 물어오니 더는 피할 수 없었다.
“경이 아는 자들은 남부에서 전후 상황을 수습하고 있네.”
큰불이 지나면 잿더미가 남는다. 불길을 잡는 것이 절박한 몸부림이라면,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은 지독한 고행이다. 같은 이치로 전쟁 후는 전쟁만큼 치열했다. 무너진 성을 보수하고 피폐해진 민중을 계도하며 살아날 방도를 강구해야 하는데, 거기에 어설픈 인물을 배치할 순 없었다. 그래서 남부공은 함께 전장을 누비던 측근들을 남부 각지로 보냈다. 그로써 용맹하던 남부 기사단은 뿔뿔이 흩어졌고, 남부공은 그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새로운 인물로 새로운 기사단을 꾸렸다.
“그러니까 이쪽은 풋풋한 새내기로 채웠단 말씀이시죠?”
“풋풋한 새내기, 줄이면 풋내기네요.”
“크흠……!”
레나와 유니의 연계 발언에 남부공은 헛기침을 토했다. 풋내기라는 말이 꽤 아팠지만 부정할 수 없어 더 괴로웠다.
“상황파악을 먼저 하라는 게 이런 뜻이었군요.”
“그래도 전원 명문가의 자제들일세.”
남부공은 구차하게 중얼대며 곁에 있던 비서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비서가 준비된 보고서를 레나에게 건넸다.
“이건?”
“기사단 명부일세. 백날 설명하는 것보단 직접 보는 게 빠르겠지. 안 그래도 상견례를 준비하라 일렀으니 오후에 만나보게나.”
레나는 유니와 함께 보고서를 넘겨보았다. 안에는 기사들의 이름과 나이, 가문 등이 적혀 있었다. 남부공의 말마따나 다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하지만 레나는 그들의 출신이 아니라 출생순서에 더 주목했다.
‘백작가의 삼남, 자작가의 차남, 또 차남, 이쪽은 사남…….’
그들은 대부분 둘째나 셋째, 혹은 그보다 나중에 태어난 아들들이었다. 개중에 장남이 하나 보였다. 레나는 웬일인가 하고 살펴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피에타 백작님은 어릴 때부터 조숙하셨나 봐요.”
레나의 농담에 남부공은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레나가 알기로 남부의 피에타 백작은 서른 초반으로 아직 젊었다. 그런데 명부에 있는 그의 장남은 나이가 스물둘이었다. 백작이 열 살 때부터 후계자 생산에 힘쓴 게 아니라면, 여기 있는 백작가의 장남은 양자일 것이다.
“이제야 상황파악이 되네요.”
귀족가의 차남, 삼남, 그리고 양자가 모인 기사단. 레나는 그것이 뜻하는 바를 깨닫고 쓰게 웃었다.
“버리는 패군요, 이 사람들.”
남부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위태롭고 피폐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황제는 공작들에게 정복을 명했고, 남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부는 하는 수 없이 새 기사단을 꾸리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선 남부의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황제에게 성의를 보일 수 있는, 제법 까다로운 인선이 필요했다.
“황제의 칙명이니 이름 있는 귀족을 보내야 하는데, 돌아올 희망이 없으니 대를 이을 장남은 빼고 차남이나 삼남을 보냈군요. 여의치 않으면 양자까지 들이면서.”
레나의 분석에 남부공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전부 레나가 말한 대로였다. 자비 없는 충성요구에 남부의 귀족들은 한차례 반발했고, 겨우 타협해서 내놓은 안이 이 모양이었다. 노인이 그것을 퍽 비통해하자 레나는 웃으며 말했다.
“다들 비정한 선택을 했네요. 아니, 합리적인 결정인가?”
“비꼬지 말게. 어느 부모가 제 자식을 편히 보냈겠나?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는 법일세.”
“손가락이라니, 말이 심하시네.”
레나가 웃으며 중얼댔고, 남부공은 그게 빈정대는 말인 줄 알고 혀를 찼다. 하지만 유니는 보았다. 레나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린 것을. 레나는 이들의 처지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덜 아픈 손가락, 선별된 희생양, 버림받은 자식. 오직 그렇게 기억되거나 곧 잊힐 존재들. 아니, 비슷한 게 아니라 다를 바 없었다. 그 사실이 레나의 마음을 건드렸고, 유니는 그 심정을 눈치채 불안해졌다. 하지만 정작 남부공은 아무것도 모르고 말을 이었다.
“뭐라 하든 좋네. 하지만 버리는 패 취급은 말게. 버리지 않으려고 경을 부른 것일세.”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열심히 해야겠네요.”
레나는 다시 고요해진 눈으로 답했다. 진심이었다.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여정, 준비되지 않은 기사단, 다 알면서도 난파선에 오른 이들. 그들의 결정은 가족을 향한 사랑일까, 가문에 대한 의무일까, 아니면 거스를 수 없는 강압이었을까. 레나는 과거의 자신과 다를 바 없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키고자 마음먹었다. . . . 하지만 그로부터 한 시간 후, 레나 루벨의 결심은 시작도 전에 좌절당했다. 남부의 기사가 말했다.
“우리는 당신을 지휘관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것이 레나가 상견례 자리에서 들은 첫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