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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하극상 (23/208)

23화. 하극상2020.07.20.

우당탕 소리와 함께 기사는 또 한 번 넘어졌다.

16562801050215.jpg“망할!”

이미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었다. 또 한 번 비참하게 나가떨어진 남부의 기사는 제 분을 못 이겨 바닥을 내리쳤다.

16562801050222.jpg“정신 차리세요.”

누워서 발버둥 치는 기사의 머리 위로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긋지긋한 목소리에 기사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이글대는 시선 끝에서, 레나가 말했다.

16562801050222.jpg“군기가 빠졌으면 치기라도 있어야죠.”

레나의 도발에 기사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이 역시 셀 수 없이 반복된 일이었다. . . . 레나와 남부 기사단의 상견례가 여기까지 치닫는 데는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한 기사가 먼저 레나를 모욕했고, 레나는 걸려온 싸움을 도발로 맞받아쳤다. 먼저 덤벼든 것은 기사 쪽이었다.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레나를 잡으려고 달려들었다. 그때만 해도 그는 미처 몰랐다. 자신이 달리던 것과 똑같은 속도로 바닥을 구르게 될 거라고는. 레나는 몸을 틀어 그의 손길을 피하더니, 오히려 그의 발을 툭 걸었다. 그에 무작정 돌진했던 기사는 거창하게 나가떨어졌다. 이후 같은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러길 수차례, 또다시 드러눕게 된 기사는 괴성을 질렀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손에 잡히기만 하면 뼈도 못 추리게 박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레나는 마치 참새처럼 재빠르게 피하며 그를 약 올렸다.

16562801050222.jpg“이제라도 사과하세요. 그것도 용기예요.”

레나의 제안에 기사는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났다. 막 딛고 서는데 무릎에서 생소한 통증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하얀 제복 바지에 피가 스미고 있었다. 대리석 바닥에다 몇 번이고 찧은 무릎이 기어코 깨진 모양이었다. 피를 본 기사의 눈에 핏발이 섰다.

16562801050215.jpg“이런 씨…….”

기사는 눈이 뒤집혀서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스릉 하고 날붙이 스치는 소리가 울렸다.

16562801050215.jpg“이, 이봐!”

지켜보던 기사들이 덜컥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기어이 검을 뽑은 기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레나에게 달려들었다.

16562801050215.jpg“넌 죽었어!”

  *** 린은 책상에 앉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앞에 놓인 종이엔 오랜 고심의 흔적으로 까만 잉크 방울이 점점이 찍혀 있었다.

16562801050248.jpg‘어떡하지?’

무덤을 살펴보고 돌아온 동부공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린은 펜대를 까딱이며 몇 시간 전, 두엄의 궁에서 있던 일을 떠올렸다.

16562801050252.jpg―금방 왔네, 어디까지 보고 왔어요?

린이 무덤에서 돌아왔을 때 클라비스는 이렇게 말하며 그를 반겼다. 린에겐 상당히 어색한 인사였다. 린은 흥분한 말을 진정시키며 동부의 기사에게 물었다.

16562801050248.jpg―내가 들어가고 얼마나 지났지?

16562801050215.jpg―15분가량 지났습니다.

기사는 성실히 대답했다. 하지만 린의 입장에선 이 역시 말도 안 되는 대답이었다. 린은 균열을 넘어 무덤의 검은 대지와 성을 직접 확인했다. 그 와중에 망자들이 갑자기 쏟아져 나왔고, 때문에 성으로 곧장 돌아오지 못하고 한참을 우회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서너 시간은 족히 될 텐데, 고작 15분이라니. 린은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뻥 뚫린 천장 너머 하늘은 린의 의심을 꾸짖듯 여전히 파랗게 밝았다.

16562801050248.jpg‘시간의 흐름이 다르단 말이 진짜였나?’

클라비스가 말했다. 저 균열 안에선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그 말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걸 직접 확인한 동부공은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16562801050248.jpg‘통상의 방법은 쓸 수 없겠어.’

통상의 방법. 군대를 끌고 가서 성문을 부수고 약탈하는 방법. 린은 무심코 중얼댔다가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꼈다. 적진을 어떻게 점령할지 고민하다니. 아무리 망자의 땅이라지만 그 행위 자체는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하지만 그에겐 거부권도 감상에 빠질 겨를도 없었다.

16562801050248.jpg‘군대는 못 움직이겠지.’

린은 다시 정신을 다잡고 궁리했다. 두엄의 궁에 생긴 균열은 너비가 작은 성문 정도였다. 그걸 통과하려면 길게 줄을 지어야 하는데, 안팎의 시간 차를 통제하지 못하면 먼저 들어간 자들은 무덤에 방치될 수도 있다. 그 사이 망자들이 습격하거나 군량이 떨어진다면 정말 제 발로 무덤에 들어가는 꼴이다.

16562801050248.jpg‘소수 정예로 가야 하나?’

마지못해 대안을 찾았지만 그것도 정답은 아니었다. 망자들의 성엔 문이 없다. 소수 정예로 그 높은 성벽을 부수는 건 불가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린이 첩첩한 난관 앞에서 홀로 괴로워할 때였다.

16562801050215.jpg“저하, 클라비스 추기경이 만찬에 초대했습니다.”

또 무슨 지랄이냐. 비서인 데카가 전한 소식에, 린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불평을 애써 삼켰다.

16562801050248.jpg“대상은?”

16562801050215.jpg“동부공 저하와 루비드 왕자, 그리고 남부의 대리인인 레나 경. 이렇게 세 분입니다.”

16562801050248.jpg“무덤에 직접 가는 사람만 불렀군.”

그렇다는 건 뭔가 전할 말이 있다는 뜻이다. 정말 무슨 지랄인데? 린은 클라비스의 모든 것이 심히 지긋지긋했지만, 초대는 거부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정보에서 소외되어 있는데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알겠다는 뜻으로 손을 저었는데 데카가 나가지 않고 머뭇댔다. 그러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조심히 덧붙였다.

16562801050215.jpg“그리고 별개의 소식이 있습니다.”

16562801050248.jpg“뭐지?”

16562801050215.jpg“남부의 기사가 레나 경에게 검을 휘둘렀다고 합니다.”

피로가 차 있던 린의 눈이 돌연 커졌다. 데카는 보기 드물게 놀라는 린을 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16562801050215.jpg“처음 인사하는 자리에서 사소한 시비가 붙었는데, 한 기사가 대뜸 난동을 부렸다고……. 그 바람에 크게 다쳤다고 합니다.”

16562801050248.jpg“남부공 대리가?”

16562801050215.jpg“아니요…….”

급히 묻던 린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에 데카는 조금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16562801050215.jpg“레나 경에게 검을 휘두른 기사가, 레나 경에게 혹독히 폭행당해 지금 중태라고 합니다.”

16562801050248.jpg“폭행?”

16562801050215.jpg“네, 폭행.”

린은 멍한 얼굴로 폭행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16562801050248.jpg‘설마. 아니, 정말?’

린은 데카의 말을 선뜻 믿을 수 없었다. 물론 레나 루벨은 누군가를 반쯤 죽일만한 역량을 가진 숙녀가 맞다. 하지만 동시에 상식과 선을 지키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첫 대면에 자신의 기사를, 그것도 중태에 빠질 만큼 혹독히 폭행했다고? 린이 아는 레나는 그렇게 미련한 인물이 아니었다.

16562801050248.jpg“그 소식은 어디서 들었지?”

16562801050215.jpg“궁정 하인들 사이에서 말이 돌고 있습니다.”

16562801050248.jpg“진위 여부는?”

16562801050215.jpg“아직 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대면식 분위기가 안 좋았던 것과 기사 한 명이 도중에 실려 간 건 사실입니다.”

그럼 아주 헛소문은 아니라는 건데.

16562801050248.jpg‘그 기사단은 어제부터 불안하더니.’

린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그러곤 습관처럼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 이미 많은 일을 했는데, 하늘은 야속하게도 아직 밝았다. 밤이 되려면 더 기다려야 했다. *** 그 시각, 레나는 놀림을 받고 있었다.

16562801137201.jpg“공포정치의 시작인 거죠?”

16562801050222.jpg“공포정치라니…….”

16562801137201.jpg“아가씨가 남부의 기사님을 부숴버렸다는 얘기 들었어요. 비겁하게 흙을 뿌린 다음 둔기로 퍽퍽!”

16562801050222.jpg“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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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니의 발랄한 주먹질에 레나는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레나는 상견례를 엉망으로 끝내고 방에 돌아왔다. 그런 레나를 반긴 건 이미 소문을 주워들은 유니였다. 유니는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며 눈을 반짝 빛냈고, 덕분에 레나는 퍽 난감해졌다.

16562801050222.jpg“황궁은 말이 퍼지는 속도만큼 비약되는 속도도 빠른가 보네요.”

16562801137201.jpg“비약이에요?”

16562801050222.jpg“네. 우선 실내여서 흙도 없었고, 저는 둔기 사용을 선호하지 않아요.”

16562801137201.jpg“하긴 아가씨는 날붙이 쪽을 좋아하시죠.”

16562801050222.jpg“유니, 쉿.”

16562801137201.jpg“네, 쉿.”

신나서 조잘대던 유니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입만 다물었을 뿐, 눈은 여전히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서 레나는 한숨을 쉬며 해명했다.

16562801050222.jpg“기사들이 시작부터 저를 싫어했고, 그중 한 명이 덤볐어요. 그래서 발을 걸어 넘어트린 게 다예요.”

상견례는 대실패였다. 남부의 기사들은 황궁의 사교계만큼이나 레나를 반기지 않았다. 게다가 무도회장에 루비드 놈이 있던 것처럼 기사단에도 아주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 있었다. 보기 드문 개망나니였지만 그럼에도 레나는 상대방을 함부로 때리거나 패거나 걷어차지 않았다. 지휘관 대리라는 본분을 지키며, 그 녀석이 제풀에 나가떨어지게 유도할 뿐이었다. 그건 놈이 칼을 빼든 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기사는 맹렬히 달려든 만큼 맹렬하게 나가떨어져 뇌진탕을 일으켰다. 그리고 기절했다. 소란은 그게 다였고 그걸로 끝이었다. 레나의 고백에 유니는 얼빠진 표정으로 눈을 껌뻑였다.

16562801137201.jpg“저는 아가씨가 정말 화나서 난동 부리신 줄 알았어요.”

16562801050222.jpg“그럴 리가요…….”

16562801137201.jpg“사실에 비해 소문이 너무 무섭게 돌았네요.”

16562801050222.jpg“지나치게 빠르기도 하고요.”

16562801137201.jpg“누가 작정이라도 했나 봐요.”

유니의 말에 레나는 쓰게 웃었다. 일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설마 싶어서.

16562801137201.jpg“이 일로 영감님이 또 잔소리하겠네요.”

16562801050222.jpg“설마요, 염치가 있으면 안 그러겠죠.”

16562801137201.jpg“영감님 없잖아요, 그런 거.”

유니의 야박한 평가에 레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유니는 남부공을 괴롭히는 데 재미를 붙인 모양이었다. 괜히 통쾌해진 레나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16562801050222.jpg“그럼 잔소리 듣기 전에 기사님들하고 친해질 방법을 찾아야겠네요.”

16562801137201.jpg“좋은 생각이에요. 그런데 그전에 할 일이 있어요, 아가씨.”

16562801050222.jpg“할 일이요?”

16562801137201.jpg“추기경이 아가씨를 만찬에 초대했어요. 바로 오늘 저녁에요.”

뜻밖의 소식에 레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16562801050222.jpg“뭐라고 하면서 초대하던가요?”

16562801137201.jpg“무덤을 정복할 영웅들에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필히 참석해 달래요.”

16562801050222.jpg“저만 초대한 건 아니군요.”

레나가 조금 안심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묘한 낌새에 유니가 눈치를 살폈다.

16562801137201.jpg“왜 그러세요?”

레나는 대답 없이 혼자 곱씹더니, 이내 독백하듯 중얼댔다.

16562801050222.jpg“여기까지 오는 데 정말 오래 걸렸어요. 온갖 일이 다 있었고 매 순간이 위기였죠.”

버림받은 여자아이에겐 더없이 가혹한 세상이었다. 레나는 아무 준비 없이 그런 세상에 던져졌고, 생과 사를 넘나들며 여기까지 왔다.

16562801050222.jpg“그렇게 겨우 돌아왔는데, 절 무덤으로 밀어 넣은 사람이 기특하게 쳐다봐요. 이걸 어쩌면 좋을까요?”

레나는 그렇게 중얼대며 웃었다. 클라비스를 향한 비소였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레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했다. 그가 어리고 힘없던 자신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그런 주제에 이토록 스스럼없이 접근하는 그가 레나는 불쾌했다. 그래서 마음 밑바닥의 요동을 다스리기 위해 잠시 침묵했다. 유니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레나가 한숨을 내쉴 때쯤 진지하게 조언했다.

16562801137201.jpg“그냥 콱 죽여 버리세요, 아가씨.”

16562801050222.jpg“그럴까요?”

16562801137201.jpg“대신 계획은 신중히. 상대는 추기경이니까요.”

16562801050222.jpg“지당한 말씀이세요.”

악랄한 꼬드김에 레나는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앙큼하게 외쳤던 유니도 배시시 따라 웃었다. 역시 레나는 유니를 당해낼 수 없었다. 레나가 홀가분히 웃자 유니가 되물었다.

16562801137201.jpg“그럼 만찬 초대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16562801050222.jpg“그건 가야죠. 가서 무슨 얘길 하나 듣고 올게요.”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여느 때처럼 밝게 웃었다. *** 레나의 미소는 만찬회에서도 곧잘 이어졌다. 하지만 그 웃음의 결은 유니 앞에서 짓던 것과 확연히 달랐다.

16562801050252.jpg“첫 원정의 선봉은 남부가 맡으면 어떨까?”

만찬 앞에서 클라비스가 말했다. 마치 놀이를 제안하듯 가벼운 목소리였다.

16562801050252.jpg“가장 앞에서 북부와 동부를 이끌어줘, 레나 경.”

부탁처럼 말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명령이었다.

16562801137201.jpg―누가 작정이라도 했나 봐요.

불현듯 유니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레나는 입술을 깨문 채 묵묵히 웃었다. 하녀도 아는 남부 기사단의 하극상을 추기경이 모를 리 없었다. 선봉은커녕 원정에 나가기도 어려운 상황인 걸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불러 이런 이야기를 하는 목적은 뻔했다. 이 제안은 레나를 겨냥한 것이 분명한 함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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