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당신은 정말2020.07.23.
추기경의 만찬 초대는 사실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만찬회가 갑작스럽게 준비된 것은 몇 시간 전, 두엄의 궁으로 날아든 소식 때문이었다.
“남부에서 난리가 났대요!”
레나 경이 남부 기사를 줘팼다는 소식은 두엄의 궁과 그곳에 있던 북부 기사들에게도 어김없이 전해졌다. 수다스러운 소년 사제가 밖에서 듣고 온 이야기를 북부 사람들에게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그 파격적인 이야기에 루비드는 코웃음을 치고 기사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루벨 후작은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웃었다. 클라비스가 다가와, 은밀히 속삭이기 전까지만.
“당신이 관여한 일이죠?”
추기경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고, 그 질문은 후작을 다소 피곤하게 만들었다. 이 인간, 감이 지나치게 좋다. 추기경의 군더더기 없는 통찰에 후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괜히 둘러대 봐야 소용없는 것을 깨닫고 옅게 웃었다.
“필요하여 불가피하게.”
“당신도 참…….”
후작의 시인에 클라비스는 장난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전쟁이 막 끝난 남부는 여러 문제로 삐걱대고 있었는데, 무덤 정복 때문에 아들을 빼앗긴 귀족들의 불만도 상당히 컸다. 그리고 개중엔 남부를 등지고 북부로 편입하길 원하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그래서 후작은 사람을 시켜 그중 하나를 부추겼다. 그리고 빌미가 생기면 선정적인 소문이 퍼지게 손을 써뒀다.
“그게 단지 음해할 목적은 아닐 테고.”
클라비스는 후작의 속내를 다 아는 것처럼 중얼대더니, 이내 웃으며 되물었다.
“딸을 또 죽일 셈이에요?”
원정이 코앞인데 기사단의 결속을 방해하는 건 레나 루벨을 고립시키겠다는 의미. 그렇다면 목적은 뻔하다. 다시금 간파당한 후작은 잠시 눈치를 살폈다.
‘반대할 셈인가?’
후작은 클라비스가 레나에게 농밀한 호의를 내비치던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그런 거라면 도와줄게요.”
“진심이십니까?”
“그럼요.”
클라비스가 활짝 웃으며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에 후작이 의심하자 그는 안심하라는 듯 명랑하게 끄덕였다. 후작이 어떤 짓거리를 꾸미는지는 뻔했다. 그래서 클라비스도 이참에 확인해보고 싶었다. 레나 루벨이 정말 그가 원하는 대로 괴물이 되었는지. 고작 이런 함정에 빠져 죽을 정도라면 어차피 의미 없으니 말이다. *** 그렇게 준비된 만찬회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린과 루비드는 서로 죽도록 싫어하는 것을 전혀 감추지 않았고, 레나 루벨도 겉으로만 예의를 차릴 뿐 만찬의 주최자인 클라비스를 이따금 불한당 보듯이 쳐다봤다. 그 사이 식탁 위의 호화로운 요리는 아무 손길도 받지 못한 채 싸늘히 식어갔다. 고요한 난장판 속에서, 클라비스가 방긋대며 말했다.
“나란히 앉으니까 다들 친구 같네. 이참에 사이좋게 지내면 어떨까?”
“헛소리 말고 용건이나 꺼내.”
클라비스의 허튼 소리에 루비드가 벌컥 짜증을 냈다. 레나와 린도 동조의 시선을 보냈고, 결국 클라비스는 못 이기는 척 운을 뗐다.
“각박하긴. 용건은 뭐 뻔하지. 레나 경, 오늘 루비드 왕자와 동부공이 먼저 무덤을 둘러보고 왔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무덤의 지형이 지상하고 판이하게 다르다네. 참 큰일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레나는 묘한 낌새를 느끼고 클라비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클라비스는 더 짙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장소가 낯선 대신 익숙한 상대를 먼저 치면 어떨까 해서.”
“익숙한 상대라 하심은?”
“첫울음을 삼킨 자들 말이야.”
첫울음을 삼킨 자라면 남부를 피폐하게 만든 망자의 이름이다. 소리에 반응하는 습성으로 남부의 전쟁을 침묵 전쟁이라 불리게 만든 끔찍한 포식자들. 남부의 용병이었던 레나에겐 더없이 익숙한 이름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싸운 만큼 잘 알기도 하고, 무엇보다 남부는 설욕이 필요하잖아? 그러니 첫 번째 목표는 그들로 하려고 해.”
클라비스의 결정은 굳이 이견을 더할 필요 없이 합리적이었다. 실제로 첫울음을 삼킨 자를 상대하는 방법은 상당히 잘 연구되어 있었다. 레나가 의심하면서도 납득하자, 만찬 앞에서 클라비스가 말했다.
“그런 뜻에서, 첫 원정의 선봉은 남부가 맡으면 어떨까?”
마치 놀이를 제안하듯 가벼운 목소리였다.
“가장 앞에서 북부와 동부를 이끌어줘, 레나 경.”
명확한 지목, 그리고 명령에 가까운 권유에 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린도 내심 당황했다. 추기경이 남부 기사단의 현재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이건 결국 죽으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린은 클라비스의 속내를 깨닫고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레나는 할 말을 고르듯 시선을 잠시 내리깔았다. 이윽고 대답하기 위해 다시 고개를 들 때였다.
“누구 마음대로!”
아무도 예상 못 한 순간, 반전의 루비드가 식탁을 내리치며 외쳤다.
“선봉은 당연히 나다!”
아무도, 심지어 클라비스도 예상하지 못한 난입이었다. 클라비스는 루비드의 훼방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레나와 린도 어안이 벙벙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루비드는 완강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전혀 관심 없고, 그저 자신이 선봉 자리에서 밀린 것에만 극히 노여워하고 있었다.
“루비드 군…….”
클라비스는 눈을 깜빡이다가 조용히 루비드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루비드는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덕분에 클라비스는 조금 피곤해졌다. 천지 분간 못하는 건 진즉에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때와 장소를 못 가릴 줄이야. 그나마 다행인 건 이 망나니의 고삐를 잡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는 거였다. 클라비스가 루비드의 입을 막으려고 막 운을 뗄 때였다.
“추기경 전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한발 먼저 뜻밖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레나였다.
“첫 원정의 선봉이라니 남부로서도 큰 영광입니다.”
“웃기는 소리……!”
루비드가 다시 바락 소리치려 하자 클라비스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러곤 의아한 표정으로 레나를 돌아보았다.
‘이거 함정인데?’
클라비스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물었다. 그에 레나는 침착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알아, 나도.’
‘그런데 왜?’
‘무슨 상관이야.’
레나의 차가운 눈빛에 클라비스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레나는 그의 질척한 갈망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대신 요청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해봐.”
클라비스는 호기심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이 결정을 남부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여겨주세요.”
“그건 좋을 대로. 또?”
“첫 출정은 9일 후라고 하셨죠.”
“날짜를 미뤄달라고?”
“아니요.”
클라비스의 성급한 간섭에 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옅게 웃으며, 그와 정반대의 말을 했다.
“날짜를 당겨주세요. 이틀 후로.”
상상도 못 한 제안에 린과 루비드의 눈이 커졌다. 클라비스의 반응도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그 눈에 담긴 열락은 앞선 두 사람과 달리 지독히도 불순했다.
“진심이야?”
“네.”
재차 물었지만 레나의 대답은 여전했다. 그래서 클라비스는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숨 막히게 참아야 했다.
‘이건 또 뭐지?’
클라비스는 속내를 알아내려는 듯 레나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레나는 시치미를 떼며 아무런 실마리를 주지 않았다. 그게 클라비스를 더욱 들뜨게 만들었다. 그는 레나 루벨이 무슨 짓을 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애절한 희열을 느꼈다. 마치 사랑에 빠진 기분이었다. *** 만찬회가 끝나고 찾아온 밤은 유독 어두웠다. 달빛마저 흐린 그 밤, 어둠에 잠긴 호수는 마치 구덩이처럼 검기만 했다. 린이 혼란한 마음으로 그 새카만 호수를 바라볼 때였다.
“오늘도 먼저 와 계셨네요. 저도 나름 서둘렀는데.”
풀 밟는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목소리가 찾아왔다. 다정하고 조용한 목소리. 이제는 스치기만 해도 알아들을 수 있는 레나의 목소리였다. 소란스러운 하루를 보내고도 그의 음성은 여느 때처럼 여유로웠다. 그래서 린은 어둠에 감춰진 레나의 표정도 수월히 예상할 수 있었다.
“평소보다 일찍 나왔어.”
“왜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하긴, 오늘도 일이 많았죠.”
레나는 가볍게 푸념하며 덧붙였다.
“린 씨랑 밤마다 만나는 거, 어쩐지 일기 쓰는 기분이에요.”
“일기?”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고 나면 린 씨가 하나씩 물어보고 정리해주잖아요. 꼭 일기장 검사하는 선생님처럼.”
일기라니. 그 천진난만한 비유에 린은 실소를 터트렸다. 생각해보니 린은 늘 레나의 발상과 행동에 이유를 물었다. 그러니 레나 입장에선 검사받는 기분이 들만도 했다. 하지만 질문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저 예사로 넘기기엔 레나가 가진 존재감이 너무 큰 탓이었다. 그래서 린은 오늘도 물음으로 운을 뗐다.
“왜 이틀 후야?”
“그렇게 물어보면 제가 다 대답할 것 같죠? ……농담이에요, 린 씨. 시무룩해 하지 마세요.”
다소 짓궂게 되묻던 레나는 린의 시무룩한 그림자를 보고 곧장 말을 바꿨다. 그러곤 겸연쩍어하는 린을 위해 선선히 답했다.
“왜 이틀 후냐면, 시간이 있으면 다른 함정을 준비할 것 같아서요.”
“당신은 정말…….”
“정말?”
“이상한 것 같아. ……취소할게. 미안.”
무심코 중얼대던 린도 레나의 싸늘한 그림자를 보고 곧장 발언을 철회했다. 하지만 이상하다는 감상은 진심이었다. 레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꽤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주변에 함정과 음모가 가득한 것도, 그것이 매 순간 자신을 노리는 것도. 그래서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저 숙녀의, 무모하다 해도 좋을 만큼 파격적인 행보가. 말마따나 레나가 선봉에 서게 된 것은 명백한 함정이었다. 그런데 레나는 그걸 피하기는커녕 수락을 조건으로 안 그래도 촉박한 일정을 일주일이나 앞당겼다. 이건 동부에도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저 때문에 린 씨도 곤란하시죠?”
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레나가 물었다. 린은 차마 아니라고 할 수 없어, 고민 끝에 대답했다.
“맞아. 곤란해.”
“린 씨한테는 미안하게 생각해요.”
“그럴 필요는 없어. 사실 곤란한 것 이상으로 궁금하니까.”
“뭐가 궁금한데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지금 린에게 가장 중요한 건 동부의 입지를 세우고 자신의 기사들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린은 별안간 날벼락을 떨어트린 레나가 밉지 않았다. 그가 무작정 난장을 치는 사람이 아닌 걸 믿는 탓이었다. 린의 은근한 신뢰와 궁금하다는 소감에 레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곤 장난스레 물었다.
“린 씨가 보기엔 어떤 사람 같아요?”
“이상한 사람?”
“말하기 전에 생각했나요?”
“……마음이 조금 앞선 것 같아.”
레나는 기가 막혀 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건 까만 그림자뿐이어서, 레나는 그의 표정을 상상하다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농담도 할 줄 알아?’
마냥 얌전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능글맞은 구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도 모르게 웃어버린 레나는 입술을 앙 물고 커다란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황궁에 이 사람마저 없으면 얼마나 지루할까? 레나는 린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다가, 그 계기가 아주 사소했던 것을 새삼 떠올렸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두 사람은 우연히 같은 공간에 있었고, 우연한 사건으로 서로 알게 되었다. 만약 그 우연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동부공은 레나에게도 이빨을 드러냈을 거다. 남부공의 대리인은 린을 돕지 않았을 거고, 심야의 우정도 물론 없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순간이 더 각별해졌다. 그래서 레나는 즐겁게 되물었다.
“그럼 다른 질문이요. 린 씨는 제가 어떤 사람이면 좋겠어요?”
“위험한 짓은 안 하는 사람.”
“왜요?”
“다칠까 봐.”
린의 대답은 이번에도 쉬웠다. 하지만 레나에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레나는 말문이 막힌 채 린의 그림자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자그맣게 탄식했다.
“당신은 정말…….”
린의 담담한 목소리에 레나는 깨닫고 말았다. 그를 알게 된 계기가 전혀 사소하지 않은 것을, 우연도 아니었던 것을. 레나가 그를 알게 된 건 그가 친절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은 그가 레나를 지켜보고, 걱정하고, 도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걸 알아버린 레나는 괴로워졌다. 같은 소나기라도 바다에 내릴 때와 마른 땅에 내릴 때의 차이는 형언할 수 없이 크다. 그건 호의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를 비롯해 많은 사람의 악의를 겪고 있는 레나에게 린이 무심코 내민 호의는 무겁기를 넘어 버거웠다. 그래서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아 잠시 견뎌야 했다. 하지만 린은 그 까닭조차 몰라 레나의 그림자만 바라보았고, 레나는 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저도 그래요.”
“음?”
“저도 린 씨가 안 다치면 좋겠어요.”
결국 레나는 항복하는 심정으로 중얼댔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원래는 예정에 없던 일이지만, 레나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어 입을 열었다.
“이틀 후 무덤 원정에 관한 얘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