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레나 루벨의 장난2020.08.03.
붉은 하늘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걸 본 레나의 첫 심정은 당혹감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정말이지 결단력만큼은 세상 최고인 아버지. 레나는 아버지의 한결같은 태도에 감탄하며 날아드는 화살을 바라보았다.
‘곤란하네.’
레나가 가진 짧은 검은 화살을 쳐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당장 몸을 피할 엄폐물도 주위에 없었다. 그래서 레나는 차라리 크게 소리쳤다.
“이리 와!”
레나가 소리를 지르자 가까이 있던 망자들이 발작하며 몰려들었다. 의도적으로 망자를 끌어들인 레나는 그들의 밑으로 몸을 날렸고, 화살은 레나 대신 망자들을 무참히 꿰뚫었다. 레나는 망자들을 방패 삼으며 생각했다.
‘여기서 끝을 볼 셈인가?’
레나는 아버지의 의도를 확인하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곤 억지로 입매를 끌어올려 웃었다.
‘정 그러시다면, 어울려 드려야겠지.’
*** 후작은 레나가 망자들 사이로 숨는 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망자를 방패로 삼다니.’
놀랄 만큼 대범한 행동이다. 첫울음을 삼킨 자들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남부공과의 연은 전우의 연이었군.’
남부공과의 긴밀한 인연, 그리고 첫울음을 삼킨 자들을 능숙히 이용하는 재주. 이 두 가지를 통해 후작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레나가 침묵 전쟁의 참전자였다는, 확신에 가까운 추측으로.
‘그간 어디서 뭘 했나 했더니…….’
후작은 비로소 알게 된 딸의 이력이 가소롭고도 씁쓸했다. 전쟁터에서 조금 굴렀다고 아비를 잡아먹으려 들다니.
‘확실히 끝을 봐야겠군.’
후작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레나를 찾았다. 하지만 쏟아지는 화살 비와 아우성치는 망자들 속에서 딸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망자들을 제법 소탕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성은 또 한 번 망자들을 토해냈다.
“각하, 망자들이 더 몰려옵니다!”
레나를 찾느라 바쁜 후작에게 부관이 외쳤다. 말마따나 더 불어난 망자들이 계곡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화살만으로는 저지할 수 없는 기세였다. 그래서 후작은 기사들에게 진격을 명했다. 루비드의 참격이 대지를 할퀴는 가운데, 기사들이 그 사이로 치고 나가 망자들과 한데 뒤엉켰다. 치열한 전투가 시작됐지만 후작은 여전히 레나만 찾았다.
‘어디 있지?’
남부공 대리가 무덤에 혼자 고립된 순간은 앞으로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후작에게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어디냐, 대체…….’
두리번대던 후작의 시야에 푸른빛이 비쳤다. 푸른색은 남부의 상징. 남부의 제복을 입은 레나였다. 레나는 망자들이 우글대는 계곡에서 다급히 몸을 피하고 있었다. 한쪽 팔을 쥐고 비틀대는 것으로 보아 부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후작은 그 가련한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잠시 지휘를 맡아주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레나를 발견한 후작은 부관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부관이 난색하며 되물었지만, 후작은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다.
“경들은 따르도록.”
대신 소수의 기사들과 함께 말머리를 돌렸다. 지휘관이 자리를 이탈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후작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필요하다면 측근 기사들에게 일을 맡길 예정이었지만 레나의 비틀대는 뒷모습을 보자 마음이 변했다. 누굴 보내는 대신 직접 끝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에게 맡겨서 일을 그르친 것이 이미 두 번이다. 처음은 클라비스, 그 다음은 집사. 그들의 허술함 때문에 레나는 아직 살아 있고, 저런 고통과 수모를 겪는다. 후작은 발버둥치는 딸의 모습에 마음이 쓰렸다. 그래서 모든 일을 제쳐둔 채, 제 손으로 끝을 보고자 딸의 뒤를 쫓았다. . . . 계곡에서의 전투가 격렬해지자, 레나는 싸움을 피해 성 쪽으로 이동했다. 그때 레나의 제복은 성한 곳 하나 없이 너덜너덜하게 찢겨 있었다. 그 옷만 봐도 몸이 성치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와중에 후작과 마주친 레나는, 퍽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다친 모양이구나.”
“……큰 부상은 아니에요.”
후작의 물음에 레나는 나직이 대답했다. 경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첫울음을 삼킨 왕의 성, 그 문드러진 성벽 위였다. 레나는 전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기 올랐고, 후작은 레나를 쫓아 북부의 기사들과 함께 능선을 타고 달려왔다. 그로써 조우한 부녀는 발아래 아비규환을 외면하고 상대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큰소리치던 것에 비해 초라하구나.”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후작이었다. 말마따나 지금 레나의 상태는 허무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초라했다. 용서받을 기회를 주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혼자 선봉에 선다며 강짜를 부리더니 결국엔 이 꼴. 혹시 함정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후작이 굳은 얼굴로 부족한 딸을 바라보자 레나는 오른쪽 어깨를 감싸 쥔 채 속삭이듯 물었다.
“절 죽이실 건가요?”
“아니.”
“그럼…….”
“널 죽인 건 망자들이다.”
후작은 그렇게 단언하며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북부의 왕보다, 심지어 황제보다 루벨에게 더 충성하는 기사들은 잠자코 말에서 내렸다. 그러곤 검을 뽑아 들며 레나를 천천히 에워쌌다. 기사들이 거리를 좁혀오자 레나도 검을 들었다. 하지만 왼손으로만 검을 말아 쥘 뿐, 어쩐 일인지 오른손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아까 어깨를 부여잡고 있던 것으로 보아, 망자들과 뒤엉키면서 팔을 다친 모양이었다. 후작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나직이 읊조렸다.
“편히 가거라.”
직후 기사들이 달려들었다. 일 대 다수, 단검과 장검. 게다가 부상을 입은 레나 루벨. 이것만 봐도 결과는 자명했다. 하지만 레나는 만신창이인 주제에 제법 선전했다. 레나는 날아든 기사의 검을 가까스로 흘려내더니, 성벽에 등을 대고 후작을 불렀다.
“아버지.”
아버지라는 호칭에 기사들의 검이 잠시 멈췄다. 하지만 그것은 후작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후작이 기사들을 채근하려고 하는데, 레나가 먼저 물었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후회?”
“제가 눈앞에서 죽어도 정말 아무렇지 않을 것 같으세요?”
덧없는 물음에 후작은 미간을 좁혔다. 이 와중에 저리 초연한 태도라니. 때문에 헷갈렸다. 단지 허세를 부리는 건지, 아니면 뭘 숨겨둔 건지. 후작은 레나의 태도가 영 개운치 않아 굳이 대답했다.
“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죠?”
“살고 싶었으면 내 눈에 띄지 말았어야지.”
“틀려요, 아버지. 저는 단지 살고 싶은 게 아니에요.”
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싸늘한 얼굴의 아버지에게 속삭였다.
“존재하고 싶은 거예요. 당신이 지어준 레나 루벨이라는 이름으로.”
레나의 담담한 목소리에 후작은 확신했다. 레나는 위험하다. 반역의 증거인 것을 제하더라도, 저 기묘한 집착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하다. 후작은 저런 집착을 지닌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끝내라.”
후작은 싹을 자르는 심정으로 기사들을 재촉했다. 단호한 후작의 명에 레나는 서글피 웃었다. 그러더니 돌연 소리쳤다.
“이리 와!”
레나의 외침에 인근의 망자들이 절규하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건 아까 레나가 화살을 피할 때와 똑같은 수법. 굳이 또 놀랄 이유는 없었다. 기사들은 레나부터 치고 대응할 생각으로 곧장 달려들었다. 그러자 레나의 입가에 애석한 미소가 번졌다. 후작에겐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레나가 부른 건 단지 망자가 아니었다. 루비드 왕자는 후작이 진영을 이탈한 것을 과연 알까? 설령 알더라도 이 동떨어진 곳에 있는지는 모를 것이다. 그리고 저편에선 기사와 망자들이 뒤엉켜 싸우는 바람에 참격의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 그럼 한가해진 루비드 왕자가 할 행동은?
‘더 멀리 있는 망자를 친다.’
레나는 어렵지 않게 예측했고, 그것은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몰려드는 망자의 뒤를 따라, 루비드의 참격이 날아온 걸 보면 말이다. 핑, 예리한 파공음과 함께 레나를 향해 달려들던 망자들이 동강 났다. 그리고 레나와 후작이 서 있던 성벽도 덧없이 갈려 나가며 기울어졌다.
“큭!”
발밑이 꺼짐과 동시에 토사가 덮쳐들었다. 기사들은 순식간에 휩쓸렸고 말에 타고 있던 후작은 가까스로 고삐를 당겼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말이 거꾸러지며 후작을 튕겨냈다. 안장에서 떨어진 그의 앞에 까마득한 허공이 펼쳐졌다. 이어 예정된 것은 추락이었고, 후작은 죽음을 직감했다.
‘왜…….’
절망 같은 중력이 쏟아졌다. 이어 내장이 위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남은 건 추락이었다. 그런데 본격적인 낙하가 막 시작되려는 순간, 몸이 덜컥하고 멈추었다. 그리고 어깨와 허리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유감이에요, 또 실패하셨어요.”
후작이 상황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머리 위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절 죽이는 것도, 용서받는 것도.”
후작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자신의 손목을 붙든 손이었다. 그 뒤로 레나의 웃는 얼굴이 있었고, 또 그 뒤로 성벽에 매달린 레나의 반대편 손이 있었다. 레나는 제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후작까지 붙잡고 버티고 있었다. 후작은 레나의 말간 얼굴을 쳐다보더니 그리 놀라지도 않고 중얼댔다.
“팔을 다친 게 아니었나.”
“장난 좀 쳐봤어요.”
“……언제부터?”
“아마 처음부터?”
레나의 목소리는 느긋했다. 아버지가 보자마자 화살을 퍼붓기에 잠깐 다친 척을 해보았다. 안 그러면 이렇게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아서. 레나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레나는 그게 즐겁고도 서글펐다.
“화나신 건 아니죠? 당연히 아니겠죠.”
후작이 말없이 바라만 보자 레나가 웃으며 물었다. 그러곤 안심하라는 듯 덧붙였다.
“저도 화 안 났어요. 애당초 기회를 주겠다고 한 건 저니까요.”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후작을 끌어당겼다. 반동을 이용해 아버지를 던지듯이 위로 올리고, 이어 본인도 가뿐한 몸놀림으로 성벽에 올라섰다. 레나는 거짓말처럼 멀쩡하게 서서, 아직 일어나지 못하는 후작에게 말했다.
“그리고 무덤 정복이 끝나기 전까지는, 아버지를 해치지 않겠다고도 했죠.”
해치지 않겠다니, 활을 퍼붓고 칼로 에워쌌는데 그냥 두겠다니. 관대하다기보다는 지독한 처사였다. 레나가 베푼 자비에는 일말의 연민도 없었다. 그저 때를 기다리며 죄를 세는 대법관처럼 한없이 냉정할 뿐이었다. 후작은 태연히 웃는 레나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상황이 역전되었지만, 그의 얼굴은 조금 창백해졌을 뿐 여전히 침착했다.
‘그랬구나, 너는…….’
실은 마음 한편에 남아 있던 의혹이 해소되어 오히려 후련한 상태였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지옥에서 돌아온 어린 딸. 아무 연고도 없이 전장에서 견디고, 남부공에게 선택된 아이. 죽어 마땅한 상황에서 매번 살아 돌아와, 이젠 자신을 죽여보라며 아비를 시험하는 레나 루벨. 후작은 레나를 죽이고 싶은 한편 궁금했다. 저 아이가 대체 무슨 수로 여기까지 왔는지. 대체 뭘 믿고 저렇게 기고만장한지. 후작은 내리 궁금해하던 것의 실체를 비로소 깨달았다. 클라비스가 말한 대로였다.
‘너는 정말 괴물이 됐구나.’
레나 루벨은 괴물이 되어 돌아왔다. 후작이 된 제 아비를 손바닥에 올리고 놀 만큼 흉악한 괴물이.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괴물이 말했다.
“또 저를 죽이실 건가요?”
그리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