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여인을 홀리는2020.08.17.
첫 원정이 끝난 다음 날 아침, 남부공은 레나와 유니를 조찬에 초대했다.
“간밤 평안하셨습니까, 저하.”
“물어 뭐해요, 당연히 평안하셨겠죠.”
“정녕 한결같은 버르장머리로다.”
인사하는 레나 옆에서 유니가 어김없이 삐죽댔다. 하지만 오늘의 남부공은 유니의 도발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평소보다 훨씬 너그러운 대답에 유니의 눈이 가늘어졌다.
“좋아 보이시네요, 엊그제는 버럭버럭 화만 내시더니.”
“크흠.”
“세상의 냉혹함을 또 이렇게 배우네요.”
유니가 또 빈정댔지만 남부공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체통을 지키기 위해 꿈틀대는 입가에 힘을 주고 근엄한 척할 뿐이었다. 사실 그는 저 쪼끄만 하녀를 던졌다 받아서 빙빙 돌리고 싶을 만큼 기뻤다. 이유는 물론 레나의 활약 때문이었다.
“어제는 수고가 많았네.”
“할 일을 했을 뿐이죠.”
“겸손이 과하군. 그런 공을 세워놓고 할 일을 했다니.”
남부공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레나를 칭찬했다. 옆에서 유니가 어처구니없어했지만 남부공에겐 그마저도 소소한 기쁨이었다. 남부공은 레나와 유니를 앉게 했다. 그러곤 막 나온 전채요리를 권하며 말했다.
“황제가 크게 만족했다 들었네. 오후 공작회담에서 정복 결과를 복기하고 저녁엔 연회가 열릴 걸세. 그때 황제가 경의 공로를 정식으로 치하할걸세.”
노인은 안 먹어도 이미 배가 부른 듯 앞으로의 일정을 느긋하게 읊었다. 그러곤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건가?”
“무슨 말씀이신지.”
“시치미 떼지 말게. 동부와 북부는 무덤의 성에 들어가는 방법조차 알 수 없었다고 했네. 경은 대체 무슨 수로 그 성을 정복하고 왕의 심장을 가져온 겐가?”
“글쎄요, 그냥 운이 좋았다고밖에는.”
레나는 웃으며 말을 아꼈다.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자세한 내용은 회담장에서 말씀드릴게요.”
남부공의 수염이 슬쩍 들렸다. 입을 삐죽대신 모양이지만 레나는 모르는 척 말을 돌렸다.
“기사들의 상황은 어떤가요?”
“그 모지리들 말인가?”
다행히 남부공은 레나가 던진 미끼를 냉큼 삼켰다. 그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경이 무덤에 혼자 간다고 할 땐 밤새 술판을 벌였고 경이 무덤에서 혼자 돌아왔을 땐 겁에 질렸지. 지금은 틀어박혀 눈치만 보고 있다더군.”
레나 때문에 모처럼 활짝 폈던 남부공의 얼굴이 기사단 때문에 도로 시들었다. 남부공은 골치가 아픈 듯 이마를 짚으며 말을 이었다.
“경은 어쩔 건가? 앞으로도 혼자 다닐 셈인가?”
“글쎄요…….”
“다음 원정까지는 그래도 시간이 있네.”
제국의 귀족들은 사치스럽고 요란했다. 그들은 이미 승전제라는 이름으로 앞으로 한 달간 술판을 벌일 계획이었다.
“그래봤자 한두 달 아닌가요?”
하지만 레나는 시간이 있다는 말에 회의적이었다. 고작 한두 달의 시간이 생겼다 한들, 그 사이 무기만 고급인 도련님들을 진짜 기사로 만들기는 어려웠다. 고민하던 레나의 뇌리로 린의 동맹 제의가 떠올랐다.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린과의 동맹은 기사단의 부재도 채울 수 있었다. 생각이 난 김에 레나는 남부공의 눈치를 살폈다. 린을 아주 싫어하던데, 만약 동맹 얘기를 꺼내면 어떻게 될까? 때마침 남부공이 먼저 동부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한두 달로 나아질 놈들이 아니긴 하지. 그래도 동부가 가져온 황금을 보니 영 아쉽더군. 경이 정복한 성을 털다니, 그 개놈들은 손도 안 대고 코를 푼 격이 아닌가?”
동부 이야기를 하며 남부공의 얼굴이 버릇처럼 일그러졌다. 그는 아무래도 동부가 가져온 황금이 원래는 남부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그분들의 행운이죠.”
“그래. 이미 지난 일, 그저 충돌이 없던 걸 다행이라 여겨야지. 놈은 아무한테나 짖는 개니까.”
레나가 조심히 편을 들자, 남부공이 마지못해 마음을 누그러트리고 푸념했다. 그러면서도 동부를 향한 욕은 빼놓지 않았다.
‘린 씨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난감해진 레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웃기만 했다. 그러자 달걀 샐러드를 야금대던 유니가 눈치껏 끼어들었다.
“그래도 생긴 건 착해 보이던데.”
“누가 말이냐?”
“동부공이요. 지나가다 봤어요. 사람은 멀쩡해 보이던데요?”
“허우대만 멀쩡하고 싹수는 노랗지.”
“왜요, 전에 영감님 도와주기도 했다면서요.”
“그건…….”
유니의 대꾸에 남부공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동부공을 실컷 욕하던 그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우물대더니, 결국 한풀 누그러져 중얼댔다.
“모를 일이다. 원래 그런 놈이 아닌데 그날따라 무슨 변덕이었는지.”
남부공은 무심코 중얼대다가 뭔가 떠오른 듯 레나를 돌아보았다. 레나가 갸웃대며 마주 보자, 남부공이 짐짓 목소리를 바꿔 말했다.
“노파심에 하는 말일세. 혹시라도 동부공과는 엮이지 않도록 조심하게.”
“네?”
“경도 한창때이니 다양한 교류가 필요하겠지만 동부공은 안되네. 겉모습에 속지 말고 최대한 거리를 두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미 감은 다 떨어졌지만, 남부공에겐 연륜에 어울리는 눈치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레나 루벨과 리그난 아이테르너가 객관적으로 예쁘고 잘생긴 젊은이라는 것과, 그들이 서로를 마음에 들어 할 가능성이 얼마든 있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남부공이 웃으며 시치미를 떼는 레나에게 더 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허투루 듣지 말게. 그자에겐 여인을 홀리는 힘이 있네.”
“푸!”
유니가 막 떠먹던 감자 수프를 뿜어버렸다. 상상도 못 한 말에 유니는 수프를 뚝뚝 흘리며 남부공을 쳐다봤고, 레나도 놀란 토끼 눈이 되어 속눈썹을 깜빡였다. 그리고 남부공은 소녀들의 반응에 미묘한 환멸을 느꼈다.
“내 반의반도 안 산 자들과 나눌 말거리는 아니네만…….”
“법적 성인이에요.”
“알 건 다 알아요!”
남부공이 비겁하게 내빼려 하자 레나와 유니가 냉큼 붙들었다. 그들은 이제껏 없던 공손함으로 남부공의 말을 기다렸고, 그 기대에 찬 눈빛에 남부공은 하는 수 없이 말을 이었다.
“……동부가 황제에게 어떤 권능을 받았는지 알고 있나?”
황제가 공작들에게 각각 나눠준 네 개의 권능.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북부의 참격이다. 그리고 동부는…….
“지배라고 들었어요.”
“맞네. 황제가 내린 권능 중에서 가장 비밀이 많은 힘이지.”
남부공은 그렇게 말하며 식탁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길 잠깐, 타닥대는 소리와 함께 식탁에 놓인 초에 불이 붙었다.
“아직 되긴 되는군.”
남부공은 도구 없이 초에 불을 붙이고 무심히 중얼댔다.
“내 받은 업화나 북부의 참격, 그리고 서부의 쇠약은 결과가 명확하네. 저렇게 바로 눈에 보이지.”
남부공이 펼쳤던 손을 도로 꾹 쥐었다. 그러자 촛불이 도로 꺼지며 그을음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동부의 능력은 볼 수 없네. 그가 뭘 지배하고 조종하는지 본인이 밝히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지.”
“확실히 위험한 능력이네요.”
“그래, 위험하네. 하지만 능력보다 더 위험한 건 놈의 성미지.”
“성미요?”
“놈에겐 더러운 성벽이 있네. 여인을 유혹해서 피투성이로 만드는…….”
남부공이 언급을 꺼리던 대목이 드디어 나왔다. 사실 최대한 완곡히 표현한 말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유니가 없었다면 남부공은 있는 그대로 말했을 것이다. 동부의 리그난 아이테르너는 여자를 학대하며 범하는 광인이라고. 하지만 레나와 유니는 남부공이 에둘러 한 말에도 충분히 놀랐다.
“……들은 얘기인가요?”
“아니, 직접 보았네.”
7년 전이었다. 아직 솜털 밖에 안 난 애송이가 새로운 동부공이라며 황궁을 찾은 것은. 당시 그는 고작 열세 살 소년이었다. 너무 어렸기 때문일까, 이방족의 혼혈이라는 독특한 이력에도 남부공은 그에게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저 소년의 기구한 삶을 어렴풋이 동정했다. 하지만 남부공의 생각과 달리 리그난 아이테르너는 결코 불쌍한 소년이 아니었다. 그건 그가 황궁에 들어온 첫날 밤 증명되었다. 겁도 없는 잡종은 그날 밤 저보다 몇 살 많은 레이디를 제 침실로 끌어들였다. 그날도 사교모임이 늦게까지 이어졌기에 수많은 사람이 보았다. 반라의 귀족 영애가 피를 흘리며 도움을 청하는 모습을. 그리고 웃으며 그 뒤를 따라온, 마찬가지로 피투성이인 소년의 모습도.
“이후 듣기도 여러 번 들었지. 제 영토에서도 똑같은 짓거리를 했다고.”
남부공은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찼다. 아직도 기억에 선했다. 눈이 붉게 물들어 여자를 사냥하던 놈의 모습이. 주변에서 말리자 짐승처럼 반항했고, 결국 기사들이 나서서 놈을 제압해야 했다.
“더 가관인 건 여인들이 침실로 억지로 불려간 적이 없다는 걸세. 그게 어떻게 가능했겠나?”
“동부공이 권능을 썼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맞네. 여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물어뜯길 걸 알면서 제 발로 찾아가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남부공의 목소리는 추측 이상의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때문에 레나와 유니는 말없이 눈치를 살폈다. 남부공의 말이 너무 뜻밖이어서, 하지만 그가 괜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긴 어려워서.
“그러니 혹시라도 동부공과 엮이지 않게 조심하게. 난폭한 개는 멀리하는 게 상책일세.”
남부공이 재차 당부했고, 레나는 하는 수 없이 끄덕였다. 레나는 남부공의 기이한 이야기를 곱씹으며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린은 자신이 반려를 맞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곤 처연히 웃었다.
‘혹시 이 얘기와 연관이 있는 걸까?’
의심이 들었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하나였다. 린이 그렇게 웃을 때, 레나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의 머리를 만져주고 싶다고. 만약 남부공이 안다면 이미 홀렸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 오후가 되자 회담장으로 제국의 공작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서부공이자 추기경인 클라비스는 사제들과 함께, 동부공은 기사들을 대동했다. 그리고 남부공은 자신의 대리인인 레나 루벨을 곁에 두었다. 원탁을 사이에 두고 레나와 린은 하필 마주 앉았다. 고개를 들면 상대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이는 자리여서, 레나와 린은 각자의 이유로 어색했다. 고민하던 린이 먼저 눈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레나는 못 본 척 시선을 피했다. 기분 탓인지 진짜인지 옆얼굴로 린의 가련함이 마구 느껴졌지만,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레나는 한사코 그를 외면했다. 그 사이 북부공 이우라가 회담장으로 들어왔다. 어쩐 일인지 그 곁엔 기사들뿐이었다.
“루비드 군이 안 보이네?”
“요양 중이다.”
클라비스의 물음에 이우라는 짤막하게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앉기 전에 레나를 찌르듯이 노려보았고, 덕분에 회담장의 분위기는 삽시에 얼어붙었다.
“자, 그럼 시작할까요?”
그 분위기를 즐기듯, 클라비스가 가벼운 목소리로 운을 뗐다.
“어제 원정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어요. 몇 번의 재진입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단숨에 정복해주다니. 황제 폐하께서도 크게 만족하셨어요.”
클라비스는 북부의 피해를 무시한 채 오직 승자들만 칭찬했다.
“우선 남부가 가져온 왕의 심장은 폐하께서 기쁘게 취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선 또 따로 불러 칭찬하실 테니 준비하고 기다리세요.”
“그리 하지.”
“그리고 동부가 가져온 황금은 사제들이 연대를 조사 중이에요. 아무래도 유물인 듯하여, 뭔가 알아내면 동부에 가장 먼저 알려드리죠.”
린은 고개만 끄덕여 대답했다. 이어서 클라비스는 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레나 경, 이제 경의 차례예요. 성을 어떻게 정복했는지 말해볼까요?”
공작들의 시선이 레나에게 꽂혔다. 뜨거운 열망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그래서 레나는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무덤의 비밀을 조금 더 독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들킨 비밀을 계속 안고 있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어서, 레나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제가 성에 들어간 건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우연?”
“첫울음을 삼킨 왕의 성을 탐색하는데 북부의 군대가 성을 공격했습니다. 아마, 저를 미처 못 보고 한 행동이겠죠.”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까 자신을 쏘아본 이우라를 잠시 바라보았다.
“공격 받은 성에서 망자들이 쏟아져 나왔고, 근처에 있던 저는 소리를 참고 망자들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러다 우연히 망자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망자들이 말을 했어요?”
“말은 아니고, 어떤 단어였어요. ‘첼레스테’라는.”
생소한 단어에 공작들의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그때였다.
“어……?”
엉뚱한 방향에서 감탄사가 울려 퍼졌다. 레나의 말을 경청하던 공작들이 원탁 밖으로 고개를 돌렸고, 소리를 낸 소년 사제는 공작들의 시선에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평소라면 어린 사제의 실수로 여기고 넘어갈 일이었다. 하지만 클라비스는 마침 소리 낸 소년이 루벨 후작의 아들인 걸 알고, 일부러 짓궂게 물었다.
“혹시 할 말이 있나요?”
추기경의 물음에 엔지 루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엔지는 사죄하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마침 원탁에 앉은 레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엔지는 묘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저, 그게 뭔지 알 것 같습니다.”
“흐음?”
엔지는 레나에게 시선을 빼앗긴 채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추기경이 나긋한 미소로 영문을 물었고, 그에 엔지는 다시 한번 분명히 고했다.
“남부공 대리께서 말씀하신 단어가 뭔지 제가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