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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하늘이 버린 왕 (32/208)

32화. 하늘이 버린 왕2020.08.20.

16562803819806.jpg“첼레스테는 왕의 이름입니다.”

소년 사제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62803819806.jpg“고대에, 대륙 끝자락에 살던 왕이요.”

뜻밖의 말에 클라비스가 흥미를 보이며 되물었다.

16562803819816.jpg“어떤 왕이었죠?”

16562803819806.jpg“그게, 큰 성을 다스리는 왕이었습니다.”

허무한 대답에 클라비스의 고개가 기울었다. 그래서 엔지는 허둥대며 덧붙였다.

16562803819806.jpg“앗, 그러니까 고대에는 성마다 왕이 있었는데, 강줄기를 중심으로 성 여러 개가 모여 있었습니다. 큰 성도 있고 작은 성도 있고, 어, 물론 크다는 것도 당시 기준이긴 한데…….”

16562803819816.jpg“그중에서 큰 성을 가진 왕이었다?”

16562803819806.jpg“아, 네.”

클라비스의 도움에 엔지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래서 클라비스도 마주 끄덕이며 웃었다. 어디 더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얼떨결에 발언하게 된 엔지는 마른침을 삼켰다. 공작 저하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데, 공작들 사이에 앉은 레나와 눈이 마주쳤다.

16562803819806.jpg‘어…….’

엔지는 또다시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높은 곳에서 바람을 맞을 때처럼 가슴이 술렁였다. 떨림이 멈췄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음도 놓였다. 그래서 소년은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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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2803819806.jpg“첼레스테 왕은 큰 성을 다스리며 인근의 비옥한 땅과 사냥터를 독차지했습니다. 그는 무력으로 이웃 성을 위협했고, 종국엔 다른 왕들을 적으로 돌린 어리석은 정복자였습니다.”

그는 군대를 앞세워 먹이를 독점한 왕이었다. 그로써 그의 성은 점점 더 부강해졌으나, 약탈한 풍요가 영원할 리는 없었다. 창과 군대는 분명 두렵지만 굶주림만큼은 아니었다. 한계에 달한 이웃 성들은 결국 연합하여 들고 일어났다.

16562803819806.jpg“연합군이 결성되어 첼레스테 왕의 성을 포위했습니다. 왕은 성문을 닫고 군대가 물러나기를 기다렸지만, 연합군은 왕이 목을 내놓기 전까지는 물러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식탁을 빼앗긴 자들의 원한은 처절했다. 그들은 왕에게 복수하길 원했고, 왕은 두려움에 떨며 성문을 더 굳게 잠갔다.

16562803819806.jpg“포위는 반년 넘게 이어졌고, 고립이 길어지자 성의 식량도 바닥이 났습니다. 그래서 굶주린 백성들은 왕에게 투항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16562803819816.jpg“저런.”

클라비스가 돌연 웃었다. 미간을 좁힌 채 머금은 미소가 무언가를 조롱하는 듯했다. 그 날카로움에 엔지가 당황하자 클라비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말짱한 얼굴로 말했다.

16562803819816.jpg“계속해요.”

16562803819806.jpg“아, 네. 어, 결국 백성들은 왕을 직접 끌어내려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왕에게는 만삭의 아내가 있었고, 왕은 사람들에게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때 클라비스가 무언가 눈치챈 듯 눈을 곱게 접었다.

16562803819806.jpg“며칠 후 왕의 아이가 태어났고…….”

16562803819816.jpg“왕은 그 갓난아이에게 왕위를 넘겼죠.”

클라비스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엔지가 깜짝 놀라 쳐다보자, 그는 나긋이 덧붙였다.

16562803819816.jpg“듣다 보니 기억났어요. 대단히 오래된 얘긴데, 용케도 알고 있네요.”

소년 사제가 읊은 것은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고대사였다. 그래서 제국엔 아는 사람이 얼마 없는, 클라비스조차도 거의 잊어버린 옛이야기였다. 클라비스는 엔지가 일깨워준 기억을 더듬어 말을 이었다.

16562803819816.jpg“그로써 왕위가 계승되었고, 선왕이 된 첼레스테는 아직 눈도 못 뜬 아이를 백성들에게 넘겼죠. 너희가 원하는 대로 왕을 줄 테니, 적에게 갖다 바치라면서.”

16562803819806.jpg“네, 맞습니다. 첼레스테 왕은 갓 태어난 아기에게 자신의 인장이 새겨진…….”

침착하게 설명하던 엔지가 돌연 말을 멈췄다. 소년은 무언가 짚이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대더니, 이내 얼떨떨해하며 중얼댔다.

16562803819806.jpg“인장이 새겨진 반지를 아이에게 넘겼습니다. 그 당시엔 왕의 증표가 인장 반지였으니까요.”

16562803819816.jpg“재밌네요.”

마침 어제 레나가 왕의 심장이라며 가져온 것이 인장 반지였다. 그래서 클라비스는 공교롭다는 듯 웃었다. 다른 공작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표정이었다.

16562803819816.jpg“그래서 어떻게 됐죠?”

16562803819806.jpg“굶주린 사람들은 아기를 데려갔습니다. 그러곤 기어이 성벽 밖으로 아기를 던졌습니다…….”

엔지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적이 원하는 것은 왕의 목.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인장을 얻은 아기는 이 성의 왕. 조건은 갖춰졌다. 분별력을 잃은 사람들은 적의 자비를 바라며 아기를 데리고 성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자비가 필요했던 아기는, 마치 자신의 운명을 아는 것처럼 크게 울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지 않았다. 그저 기근에서 해방되기만을 바라며, 그 작은 왕의 첫울음 소리를 삼켜버렸다.

16562803819806.jpg“아기 왕이 떨어지자 연합군은 비로소 물러났습니다.”

그게 항복을 받아들여서인지, 불길함을 피하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왕은 자신의 목숨과 제 아이의 목숨을 맞바꿔 살아남았다. 비단 왕뿐일까, 그 성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영원히 저주받아도 모자랄 일이었다.

16562803819806.jpg“그로써 첼레스테 왕은 목숨을 건졌지만 비겁자로 낙인찍혔고, 끝내는 형제의 손에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16562803819816.jpg“그러니까, 첫울음을 삼킨 자들이 말한 게 바로 그 왕의 이름이다?”

클라비스가 다시 레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레나의 생각보다 이야기의 진척이 빨랐다. 하지만 레나는 속내를 감추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16562803882402.jpg“그런 역사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리를 들은 건 사실이에요.”

16562803819816.jpg“그래서요?”

16562803882402.jpg“그래서 망자들의 말을 따라 해봤습니다. 망자들이 성에서 나오며 중얼대는 말이 열쇠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요.”

16562803819816.jpg“그랬더니?”

16562803882402.jpg“성 앞에서 ‘첼레스테’를 부르자 길이 생겼고, 다른 세상이 나타났습니다. 거기에 첫울음을 삼킨 왕이 있었습니다.”

레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고, 클라비스의 얼굴엔 묘한 미소가 맺혔다.

16562803819816.jpg“정말?”

클라비스가 레나 쪽으로 몸을 숙이며 중얼댔다. 우연히 소리를 들었고, 혹시나 해서 따라 했더니 난공불락의 성이 열렸다. 누가 봐도 허술한 주장이었다. 거짓말이면 무성의하고, 진짜여도 어처구니없다.

16562803819816.jpg“괜찮겠어? 폐하께선 거짓말을 싫어하시는데.”

16562803882402.jpg“의심스러우시다면 직접 확인해보셔도 괜찮아요.”

16562803819816.jpg“어떻게 확인을 하겠어, 그 성은 이제 없는걸.”

클라비스가 은근히 추궁했다. 그러자 지켜보던 남부공이 끼어들었다.

1656280391087.jpg“내 대리자는 바보가 아닐세, 설마 이런 자리에서 거짓을 고하겠는가.”

16562803819816.jpg“편들긴.”

남부공의 가세에 클라비스가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원탁 반대편을 돌아보았다.

16562803819816.jpg“북부와 동부의 생각은 어때요?”

16562803910886.jpg“다음 원정 때 확인해보면 알겠지.”

클라비스가 견해를 묻자, 동부공이 귀찮은 얼굴로 말했다. 쓸데없는 실랑이가 성가시다는 투였다. 반면 북부공은 말이 없었다. 이 촌극에 수긍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자색 눈동자는 잠잠한 분노로 끓고 있었다.

16562803819816.jpg“이래서야 혼자 물고 늘어지는 꼴이네.”

이견이 없자 클라비스도 선뜻 물러났다. 애당초 진지하게 따져들 작정도 아니었다.

16562803819816.jpg“좋아요, 대충 신의 가호가 있던 셈 치죠. 계시도 좋고. 어차피 중요한 건 결과니까?”

레나의 주장은 얼토당토않지만, 어쨌든 성은 정복되었다. 게다가 진위를 확인할 방법도 없으니, 공작들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6562803819816.jpg“얘기가 재미있게 돌아가네요. 만약 레나 경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첫울음을 삼킨 왕이 첼레스테 왕이라고 봐도 무방할까요?”

클라비스가 원탁을 돌아보며 물었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모두 나름의 추측 속에서 바삐 궁리할 뿐이었다.

16562803819816.jpg“하긴, 그 정도는 해야 하늘도 버리겠죠.”

클라비스가 가늘어진 눈으로 조롱했다. 굶주림에 미쳐 죄 없는 아기를 제물로 바친 자들. 그들의 말로는 무덤 속에서 영원히 굶주리는 것이었다. 아기의 첫울음 소리를 무시한 대가로, 모든 소리에 처절하게 반응하면서. 정황이 하나둘 맞아떨어지자, 마지못해 수긍하는 분위기가 흘렀다. 모두 레나가 의도한 대로였다. 레나가 말한 방법은 어쨌든 진짜였다. 사방이 막힌 무덤의 성. 그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성주의 진짜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레나는 이 사실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때문에 원정에서도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16562803882402.jpg‘아버지는 까맣게 모르시겠지만.’

레나는 어제 본 후작의 얼굴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삼켰다. 원정에서 돌아왔을 때, 후작은 마치 유령을 본 것처럼 레나를 쳐다봤다. 그 하얗게 질린 얼굴이 대체 왜 살아있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이게 바로 그 답이다. 레나는 괴물도 불사도 아니었다. 레나가 살아 돌아온 건, 망자의 성에 들어가는 법을 알기 때문이었다. 마침 후작이 레나를 독으로 찔러 민 곳도 망자의 성 위였다. 그래서 레나는 추락하는 순간 첼레스테의 이름을 불렀고, 그대로 성 안으로 끌려 들어가 위기를 면했다. 원정의 전말은 이렇지만 레나는 그것을 다 밝히지 않았다. 밝힐 수도 없었다. 그래서 공작들에겐 ‘왕의 진짜 이름을 부르면 성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만 흘리기로 했다. 다행히 이야기는 순조로웠다. 하지만 첼레스테의 정체가 바로 밝혀진 건 레나에게도 뜻밖이었다.

16562803882402.jpg‘황궁의 학자들이 며칠은 고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침 고대사에 해박한 사람이 여기 있을 줄이야. 그리고 그게 하필 엔지 루벨일 줄이야. 레나는 감정을 최대한 숨긴 채 자신과 닮은 소년 사제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 클라비스가 말을 이었다.

16562803819816.jpg“망자의 왕은 하늘이 버린 왕이고, 그들의 성에 들어가려면 왕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해야 할 일도 자연스럽게 정해지네요.”

클라비스는 느긋하게 손가락을 꼽았다.

16562803819816.jpg“하나는 왕들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 또 하나는 이미 이름이 밝혀진 왕을 치는 것.”

이름이 밝혀진 왕. 황제의 고조부이자 ‘태움과 그을림의 왕’인 히엠스 그라샤의 이야기였다.

16562803819816.jpg“그럴듯하죠, 히엠스 그라샤도 분명 하늘이 버릴만한 왕이었으니.”

히엠스 그라샤라면 제 직계 조상이기도 할 텐데, 클라비스는 아무 거리낌 없이 말했다. 그리고 공작들은 떠올렸다. 200년 전 히엠스 그라샤가 저지른 만행을. 그는 전염병을 핑계로 무고한 왕국민들을 불로 태워 죽인 왕이었다. 갓난아이를 내다 버린 첫울음을 삼킨 왕, 화형을 일삼은 태움과 그을림의 왕.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16562803819816.jpg“이만하면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다들 납득하는 분위기에, 클라비스는 레나를 향해 짙게 웃었다.

16562803819816.jpg“무덤의 비밀을 풀어낸 레나 경에게 경의를. 역시 그대가 정답이었어.”

  . . . 회담이 끝나자 이우라가 가장 먼저 원탁을 등지고 돌아섰다. 남부공이 북부의 심기 불편을 통쾌해하는 사이, 클라비스가 레나에게 다가와 은근히 속삭였다.

16562803819816.jpg“인상적이었어, 레나 경.”

그는 여느 때처럼 다정히 지분대더니, 목소리를 더 낮춰 덧붙였다.

16562803819816.jpg“그런데 이야기를 짓는 데는 소질이 없네.”

공작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다만 레나의 발언 중 유의미한 부분이 있어서 사소한 문제는 눈감아 준 것뿐이었다. 그건 레나도 알고 있다. 피차 필요에 따라 연기한 건데, 굳이 이렇게 다가와 시비를 거는 이유는 뭘까. 은근한 도발에 레나가 생긋 웃었다.

16562803882402.jpg“조심하세요. 다른 소질은 충분하니까.”

16562803819816.jpg“가령?”

16562803882402.jpg“굳이 말해야 아나?”

레나는 눈빛을 바꿔 그를 한차례 쏘아보았다. 그러곤 멋대로 거리를 좁혀온 클라비스를 냉랭히 지나쳤다. 레나가 내비친 살벌함에 클라비스는 웃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단맛을 본 아이처럼 레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저 숙녀를 관찰하는 사람이 또 있는 걸 눈치챘다. 영리한 소년 사제, 엔지 루벨이 먼발치서 레나를 향해 머뭇대고 있었다. 엔지는 궁금했다. 저 사람이 대체 누군지. 왜 죽은 누나와 똑같은 이름을 쓰는지, 또 기억 속 누나와 왜 저렇게 닮았는지. 그리고 아버지는 왜 아무런 말씀도 안 해주시는지. 주저하던 엔지는 마음을 굳힌 듯 레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었다. 혹시 자길 아냐고 묻고 싶었다. 그래서 잰걸음으로 레나의 뒤를 쫓는데, 뜻밖의 인물이 앞을 막아섰다.

16562803819816.jpg“어디가게?”

16562803819806.jpg“전하…….”

16562803819816.jpg“저 중에 그대가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엔지를 막아선 클라비스가 다정한 듯 무겁게 말했다.

16562803819816.jpg“조심해야지, 아무리 후작가의 도련님이어도 말이야.”

클라비스의 경고에 엔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당황스럽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공작들이나 그의 대리인은, 한낱 사제가 함부로 부르면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엔지는 하는 수 없이 회담장 밖으로 나가는 레나의 뒷모습을 눈으로만 쫓았다. 아까 그랬던 것처럼 묘한 동요가 가슴을 스쳤다. 하지만 아직 어린 엔지는, 그것이 그리움인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 공작회담은 무사히 끝났다. 말을 꾸며야 했던 레나는 예정보다 순조로운 회담에 만족하며 회담장을 나섰다. 그런데 막 복도로 나왔을 때, 레나는 예기치 않게 린과 마주쳤다. 한발 먼저 나간 동부공이 아직 문 앞에 있었다. 하지만 딱히 레나를 기다리거나 한 것은 아닌지, 린도 레나를 보고 짐짓 놀란 기색이었다.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각자 할 말이 있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잠시 마주 보고 있을 때였다.

1656280391087.jpg“시선을 거둬라.”

불현듯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1656280391087.jpg“금수만도 못한 눈으로 어딜 감히.”

그것은 경멸로 가득한, 남부공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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