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동맹은커녕2020.08.24.
“금수만도 못한 눈으로 어딜 감히.”
남부공의 나직한 경고가 울려 퍼졌다. 마치 서릿발처럼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레나와 린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놀라 남부공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에겐 날벼락이지만, 사실 남부공은 이미 회담장에서부터 벼르던 중이었다.
“원탁에 앉고 싶다면 최소한의 예의부터 갖추라 했거늘.”
남부공이 흉흉한 목소리로 동부공을 다시 비난했다. 그는 동부의 리그난 아이테르너가 자신의 대리인을 집요하게 주시하는 것을 아까부터 보고 있었다. 저 짐승 같은 놈은 레나 루벨이 원탁에 앉을 때부터 묘한 눈으로 레나를 바라보았다. 레나가 눈을 피하며 불편한 기색을 보여도 마찬가지였다. 남부공은 그 시선이 더없이 저속한 것으로 느껴졌다. 동부공이 난잡하고 천박한 놈이라는 뿌리 깊은 편견 때문이었다. 그런데 복도에서까지 이렇게 마주치니, 노인은 더 이상 좌시할 수가 없었다.
“너와 동등한 자에게 더러운 본성을 드러내지 마라.”
“……금수에 더러운 본성이라.”
남부공이 이를 갈듯 경고하자, 린은 억지로 웃으며 그의 말을 되뇌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지?”
그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하지만 그건 가까스로 가장한 평정이었고, 그 속은 말도 못 할 만큼 엉망이었다. 여느 때와 비교하면 특별할 것도 없는 모욕이다. 하지만 그는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심한 수치심을 느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레나 때문이었다. 린은 진심으로 화가 나서 이를 악물고 웃었다.
“뭘 상상했는지 들어보고 싶은데.”
그가 나른하게 휘어진 눈으로 남부공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저 노인이 그토록 혐오하는, 뱀처럼 저열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본인의 욕망을 애꿎은 사람에게 덮어씌우면 쓰나.”
“너 이놈……!”
“이놈이라니.”
그야말로 참람한 말에, 남부공의 이마에도 핏대가 섰다. 하지만 린은 여상히 웃는 낯으로 남부공의 노호를 조롱했다. 그러더니 돌연 분위기를 바꿔, 살벌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그의 말을 따라 읊조렸다.
“너와 동등한 자에게 더러운 본성을 드러내지 마라.”
“이……!”
“그만.”
살벌하게 충돌하는 동부공과 남부공 사이로 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레나였다.
“보는 눈도 많은데 그만하시죠. 두 분 다.”
레나는 여기서 공작들의 싸움에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의 차분한 중재에 복도를 가득 메우던 긴장이 툭 끊어졌다. 두 공작의 송곳 같은 기세도 덩달아 누그러지자, 레나가 동부공을 보며 말했다.
“사과는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가장 사과받아야 할 사람은 저인 듯하니까요.”
레나의 건조한 말에 린이 흠칫 놀랐다. 그는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해명하듯 레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를 마주 보는 레나의 시선은 차가웠다. 그 눈빛에 린의 당황도 차게 가라앉았다. 심장이 베이는 기분이었지만, 그는 상처받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귀하가 추궁할 사람은 따로 있지 싶은데.”
린은 우습다는 듯 중얼대더니, 레나의 등 뒤에 선 남부공을 바라보았다.
“노망난 늙은이를 돌보는 게 귀하의 몫은 아니겠지만.”
린은 그렇게 비웃으며 기사들과 돌아섰다. 동부공이 싸늘한 기운만 남기고 가버리자 남부공은 이를 부득 갈았다. 그래서 레나는 아직도 씩씩대는 남부공에게 한숨 쉬듯 말했다.
“감사해요. 제 체면을 열심히 깎아주셨어요.”
“무슨…….”
“제 할 말 못 하는 어린애 취급에 불한당의 먹잇감 취급까지, 참 다채롭게도 면이 상했네요. 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레나의 덤덤한 힐난에 남부공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남부공이 자신의 경솔함을 비로소 인지했지만 레나는 조금도 통쾌하지 않았다. 차갑게 돌아선 린 때문이었다.
‘정말 화난 것 같던데.’
레나는 그의 감정 변화를 여실히 느꼈다. 갑작스러운 비난에 그는 분명 동요했고, 이후엔 이제껏 본 적 없는 날카로움을 내비쳤다. 하지만 레나는 그를 순전히 걱정할 수 없었다. 뇌리에 남은 그의 발언 때문이었다.
―본인의 욕망을 애꿎은 사람에게 덮어씌우면 쓰나.
그건 남부공 뿐만 아니라 레나에 대한 모독이기도 했다. 린이 남부공의 말을 받아쳐야 했던 건 이해하지만, 싸잡혀 욕을 먹은 심정이 가히 좋지는 않았다. 언짢음이 가라앉지 않아 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왜 하필 마주쳐서…….’
기분이 복잡해진 레나는 애꿎은 상황을 탓하려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이건 단지 재수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레나가 남부공 대리이고 린이 동부공인 한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다. 레나는 그 사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고, 덕분에 기분만 더 복잡해졌다. 그와 만난 어젯밤이 아득히도 멀게 느껴졌다. 이래서야 동맹은커녕 밤 산책도 어렵겠지 싶었다.
*** 공작회담이 이루어지던 시간, 황궁 한쪽에선 승전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승전제가 열릴 연회장은 황제 니힐이 사랑하는 들꽃으로 가득 채워졌다. 황제의 기분이 그만큼 좋다는 의미였다. 해가 저물자 고아한 차림의 귀족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자리가 거의 다 채워졌을 때 승전제의 주인공도 모습을 드러냈다. 혼자 승리를 거머쥐고 돌아온 남부의 영웅, 레나 루벨이었다. 제복 차림으로 입장한 레나는 귀족들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것을 느꼈다. 레나를 신기해하던 중년 귀족들의 시선은 온화해졌고, 막연한 반감을 품었던 젊은 귀족들은 기세가 한풀 꺾여 시치미를 뗐다. 그리고 이 자리가 가시방석 같은 남부 기사단은 레나와 남부공의 눈을 피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레나는 자신을 향한 시선 변화를 느끼며 연회장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 사람을 발견했다.
‘린 씨…….’
린과 동부의 기사들이 저편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레나는 남부공이 눈치채지 못하게 린을 몰래 바라보았다. 하지만 린은 레나를 보지 않았다. 분위기만으로도 레나의 등장을 알 수 있을 텐데, 그는 아예 귀를 닫은 것처럼 연회장 저편의 휘장만 응시했다. 레나가 그 모습을 조심히 살필 때였다. 잔잔히 흐르던 음악이 뚝 그치고 적막이 내렸다. 직후 장엄한 화음이 일시에 터져 나왔고, 연회장의 중앙 계단 위로 황제 니힐이 모습을 드러냈다. 클라비스와 함께 나타난 그는 거의 헐벗다시피 한 건국기념일과 달리, 순백색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때문에 황제와 추기경은 마치 쌍둥이처럼 닮아 보였다. 귀족들이 허리를 깊이 숙였지만 니힐은 그들에게 일어나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말없이 홀까지 내려와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황제의 돌발행동에 귀족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윽고 황제가 걸음을 멈춘 곳은, 남부의 레나 루벨 앞이었다. 바닥을 향한 레나의 시야에 황제의 하얀 구두가 들어왔다. 레나는 이대로 있어야 할지 몸을 더 낮춰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였다.
“레나 루벨.”
황제가 손을 뻗어 레나의 턱을 들어올렸다. 얼떨결에 고개를 들게 된 레나는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너의 이름을 기억했다.”
황제가 아무 표정 없이 레나를 보며 읊조렸다.
“잘했다.”
뜻밖의 말에 레나는 황제의 유리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모두 일어나십시오.”
그때 클라비스가 황제를 대신해 귀족을 일으켰다.
“폐하의 자비로우심에 경의를.”
클라비스의 제안에 눈치를 보던 귀족들이 박수와 함성을 쏟아냈다. 대체 뭐가 자비인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일단은 그렇게 했다. 생각을 버리고 황족의 말에 동조하는 것. 황궁에서 살아남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 . . 황제의 기묘한 치하가 끝나자 연회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젊은 신사와 숙녀는 음악에 맞춰 춤을 췄고, 곳곳에서 담소가 이어졌다. 레나도 남부공을 통해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린 역시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레나와 린에게 접근하는 사람의 결은 확연히 달랐다. 어울리는 사람마저 달라지자 레나와 린은 정말 다른 세상의 존재처럼 서로 멀어졌다. 두 사람 역시 그것을 여실히 느꼈지만, 일단은 모르는 척 역할에 충실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연회장 구석엔 점점 취해가는 남자가 있었다. 남부 자작가의 차남이자 남부 기사단 소속인, 그리고 상견례 때 레나에게 덤볐던 바로 그 기사였다. 목이 굻고 어깨가 다부진 그 기사는 불편한 심기를 술로 다스리고 있었다.
‘제길…….’
그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믿기지가 않았다. 레나 루벨이라는 시건방진 여자가 무덤에서 혼자 공을 세우고 돌아왔다니.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저 여자가 무슨 거짓말을 했거나.
“다들 머리가 텅텅 비었냐고!”
참다못한 기사가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레이디가 대충 어울려주었다.
“무슨 말이에요?”
“도대체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나뿐이냐는 소립니다!”
기사는 이미 많이 취해 있었다. 그래서 주변에서 웃으며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불만을 토해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그러니까 뭐가 말이 안 되는데요?”
“저 여자, 레나 루벨!”
기사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저딴 계집이 정말 무덤을 정복했다고 믿는 겁니까? 여기저기 알랑대기나 하는 여자 따위가? 다들 눈이 제대로 달린 게 맞느냔 말입니…….”
불만을 토로하던 기사는 묘한 낌새에 말끝을 흐렸다. 뭔가 이상했다. 직전까지 그를 웃으며 바라보던 귀족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기사들은 이들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건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주변의 젊은 귀족들뿐만 아니라, 연회장에 있던 모두가 말을 멈추고 그 기사를 쳐다봤다. 잔잔히 흐르던 음악도 뚝 그쳐버렸다.
“뭐…….”
기사가 갑작스러운 주목과 적막에 당황하는데, 궁중 관리들이 와서 그를 일으켰다. 관리들이 귀족에게 손을 대는 경우는 죄인을 끌고 갈 때뿐이었다. 그래서 기사는 벌컥 화를 내며 그들을 밀쳤다. 하지만 관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단호히 끌고갔다. 이윽고 그가 내팽개쳐진 곳은 연회장의 중앙계단 앞이었다. 기사는 격분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화…….”
그의 코앞에, 계단에 걸터앉은 황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를 마주한 기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멍청하게 바라보자, 황제가 중얼댔다.
“이 반역자.”
“바……!”
기사는 너무 놀라서 반박도 못 하고 얼어 붙였다. 반역이라니,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돌처럼 굳어있는데, 옆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도 크시지.”
계단 난간에 기대선 추기경의 목소리였다.
“폐하께서 잘했다고 하신 일에 토를 다는 게 반역이 아니면 뭔가요?”
폐하께서 잘했다고 하신 일. 레나 루벨에 대한 이야기였다. 기사는 자신이 레나를 욕한 것 때문에 이렇게 불려나온 걸 알고 턱을 툭 떨어트렸다.
“말도 안 돼…….”
“그 또한 반역.”
클라비스가 웃으며 한 말에 기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모두 빠져나갔다. 고작 말 한마디로 반역이라니, 악몽이라도 꾸는 기분이었다. 황궁과 연이 없던 하위귀족은 이곳의 생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폐하, 판결을.”
“그 전에, 레나 루벨은?”
클라비스가 판결을 청했지만 니힐은 레나를 먼저 찾았다. 황제의 부름에 지켜보던 레나가 앞으로 나왔다.
“네 잘못이다.”
황제가 무표정하게 레나를 힐난했다.
“네 모자란 평판이 내 말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증명해라. 네가 과연 내게 치하받을 만한 자인지.”
황제는 나른히 말하며 시종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시종들이 근위병에게 가서 그들의 검을 받아왔다. 검 뽑히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서슬 퍼런 검을 보며 레나는 황제가 말한 ‘증명’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상대는 나자의 아들이면 충분하겠지.”
게다가 황제는 친절하게 상대까지 정해주었다. 하지만 레나는 나자의 아들이 누군지 몰랐다. 그래서 눈치껏 귀족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뜻밖의 인물과 눈이 마주쳤다. 린이 굳은 얼굴로 레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분주한 시선들이 레나에게 알렸다. 저 자가가 바로 ‘나자의 아들’이라고. 검이 뽑혀 나올 때도 침착했던 레나의 두 눈이 린을 보는 순간 잘게 떨렸다.
“싸워.”
그 와중에 황제가 느긋이 명했다.
“둘 중 하나가 검을 못 잡게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