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당신이 너무 예뻐서2020.08.27.
―사이좋게 지내요. 서로를 찌르기 전까지.
일전에 레나가 린에게 했던 말이다. 두 사람은 심야의 우정을 이어가자고 약속하면서 이런 조건을 달았다. 레나는 마침 떠오른 그 말이 너무 공교로워 입술을 깨물었다. 앞에선 황제가 호수처럼 투명한 눈으로 레나를 종용하고 있었다. 린과 싸우라고.
‘잘했다고 할 때는 언제고.’
바로 어제 공을 세우고 돌아온 사람에게 이 무슨 행패인가 싶었다. 버거운 명령에 레나가 선뜻 나서지 못하자, 저편에 있던 린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레나와 달리 망설이지 않고 검을 든 시종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레나도 그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몸을 돌리자 바닥에 주저앉은 기사에게 시선이 잠깐 닿았다.
‘더 단호하게 혼내줄 걸 그랬나.’
레나는 그 기사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린과 함께 시종 앞에 섰다. 시종이 건넨 검은 황실의 품격에 어울리는 우아한 세검이었다. 하지만 장식용 검은 아니었다. 폭이 가늘지만 날은 충분히 예리했다. 똑같은 검을 린과 나누어 쥐자 만감이 교차했다. 그래서 레나는 연회장 중앙으로 나가며 린에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어제 우리가 한 얘기를 누가 들었나 봐요.”
그러니 이렇게 끊임없이 일이 꼬이지. 레나는 동맹 얘기가 나오자마자 파국으로 치닫는 이 관계가 어처구니없었다. 그래서 가볍게 농담을 던졌지만 린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심각해 보였다. 그게 단지 황제의 명령 때문인지, 아니면 아까 회담장 앞에서 있던 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린이 말이 없어서 레나도 조용히 황제의 명령을 곱씹었다.
‘둘 중 하나가 검을 못 잡게 될 때까지…….’
단지 승부를 가리라는 게 아니라, 둘 중 하나가 부상으로 쓰러질 때까지 싸우라는 뜻이었다.
‘손목이나 어깨를 노려야 하나. 아니면 잠깐 기절시키거나.’
레나는 린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치를 증명하라는 명령을 거부할 생각도 없었다. 린에게는 미안하지만, 일단은 이길 작정이었다. 그래서 레나는 린에게 가장 덜 위험한 방법을 궁리했다. 그때였다.
“레나.”
연회장 중앙에 다다르자, 말이 없던 린이 불현듯 레나를 불렀다. 그러더니 돌아보는 레나를 향해 나직이 속삭였다.
“최대한 버텨.”
‘버티라고?’
레나가 의아해할 겨를도 없이, 린은 거리를 벌리며 검을 들었다. 그의 임전 태세에 레나도 조용히 검을 세웠다. 그들이 대치한 곳은 원래 신사 숙녀들이 황홀하게 춤추던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함께 춤추자는 얘기도 했었지.’
설마 그게 검무가 될 줄이야. 레나는 이 역시 공교로워 자조를 삼켰다.
“시작하십시오.”
시종의 목소리와 함께 레나의 증명이 시작되었다. 레나는 우선 거리를 벌리려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린이 곧장 달려들었다. 린의 검이 카가각 소리를 내며 바닥을 긁었다. 밑에서부터 올려 쳐진 검이 무섭도록 맹렬히 날아들었다. 콰앙! 검과 검이 부딪혔는데 망치로 모루를 치는 소리가 났다.
‘윽……!’
시작과 함께 날아든 맹공에 레나는 당황했다. 린의 검격은 과할 만큼 무거웠다. 어깨가 삐걱댈 정도였다. 심지어 지금 레나의 어깨는 성한 상태도 아니었다. 아직 다 가시지 않은 독 기운이 아픈 뼈마디로 스며들었다. 타는 듯한 통증에 레나는 이를 악물며 물러났다. 그러자 린이 곧장 따라붙었다. 그는 힘으로 찍어 누르려는 듯 광포하게 검을 휘둘렀다. 단지 휘두를 뿐 아니라 연신 바닥을 긁으며 그 가느다란 검에 무게를 더했다. 게다가 저항을 받다가 튕겨 나온 검은 화살처럼 빠르기까지 했다.
‘린 씨, 진심인가?’
레나는 공격을 거듭 피하며 린을 바라보았다. 조금은 봐줄 줄 알았는데, 턱도 없는 기대였나 보다. 레나는 연거푸 공격을 피했다. 린의 공격은 매서웠지만, 다행히 피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바닥을 긁고 올려치는 바람에 궤도는 단순했다. 그럼에도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탓에 방심할 수는 없었다.
‘이러다 당하겠는데.’
위협을 느낀 레나는 눈빛을 바꿨다. 린이 적에게 얼마나 가차 없는지 이제 잘 알았다. 저쪽은 확실히 진심인 듯하니, 레나도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마음을 굳힌 레나는 뒷걸음질 치며 린을 유인했다. 레나가 연회장 구석으로 몸을 피하자 구경하던 귀족들이 놀라서 물러났다. 레나는 기둥이 있는 곳까지 린을 이끌었고, 맹렬히 공격하던 린은 갑자기 나타난 기둥 때문에 잠시 주춤했다. 레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춤추듯 한 바퀴 돌아 린의 팔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무렇지도 않게 적의 품에 안긴 레나는, 그대로 린의 팔뚝을 내리그었다.
“윽!”
린이 잇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가느다란 핏줄기가 그의 손목을 타고 흘렀다. 그럼에도 그는 검을 놓지 않았다.
‘얕았나.’
레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최대한 덜 아프게 끝내주고 싶은데. 그래서 더 단호해지기로 한 레나는, 틈을 주지 않고 다시 파고들었다. 남부공 대리의 과감한 반격에 형세는 곧장 역전되었다. 직전까지는 동부공이 무섭게 몰아쳤다면, 이제는 남부공 대리가 숨 쉴 틈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세상에…….’
끊임없이 맞부딪히는 검과 그 깨질듯한 소리에 귀족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저리도 무자비한 충돌이라니, 팔 근육이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레나의 공격은 빠르고도 정교했다. 그래서 린은 쳐냈다 싶으면 다시 날아드는 검을 피하느라 숨 쉴 틈도 없었다. 그 사이 칼날이 몇 번이나 스친 오른팔은 옷자락이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다. 두 사람의 검이 다시 맞부딪쳤다. 공격이 막힌 레나가 검을 물리려는데, 린이 힘으로 내리눌렀다. 갑작스러운 힘겨루기에 레나도 버텼다.
버거운 압력에 검들이 삐걱댔다. 레나의 어깨도 다시 통증을 호소했다. 레나가 고통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무는데, 린이 코앞에서 속삭였다.
“피해.”
뜻밖의 속삭임 직후, 린이 다시 한번 검을 힘껏 올려쳤다. 검과 검이 정면으로 충돌했고, 갑자기 바뀐 힘의 방향에 레나는 그만 검을 놓치고 말았다. 쇳소리와 함께 레나의 검이 날아갔다. 레나는 낭패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가, 천장의 샹들리에를 스치는 검이 하나가 아니라 둘인 것을 깨닫고 눈을 홉떴다. 검을 놓친 건 린도 마찬가지였다. 튕겨 나갔던 검이 카랑 대며 대리석 바닥에 떨어졌다. 레나는 검을 잡기 위해 달렸다. 그런데 레나의 손이 닿기 직전, 린이 그 검을 발로 차버렸다. 검이 빙빙 돌며 저 멀리까지 굴러갔다. 그리고 몸을 숙이고 있던 레나를 제치고 린이 그 검을 낚아챘다. 검을 빼앗긴 레나는 하는 수 없이 다른 검을 향해 몸을 굴렸다. 다행히 린이 돌진해오기 전에 또 다른 검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레나는 검이 바뀐 것을 깨달았다. 레나가 다시 잡은 검에는 린이 흘린 피가 엉겨 있었다. 그리고 손아귀에 들어오는 느낌이 묘하게 달랐다.
‘뭐지?’
레나는 위화감을 느끼고 여태 린이 휘두른 검을 바라보았다. 아름답던 검은 바닥을 긁고 기둥을 후려친 탓에 여기저기 상처가 나 있었다.
‘설마…….’
레나가 반신반의하는데, 다시금 린이 달려들었다. 그는 레나가 쓰던 멀쩡한 검으로도 바닥을 긁으며 돌진했다.
‘저래서는 팔이 남아나지 않을 텐데.’
레나는 린의 의도를 의심하며 몸을 피했다. 대리석을 깨트리며 날아온 검은 빠르기만 할 뿐, 궤도는 역시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린은 계속해서 벽과 바닥을 파괴하며 레나를 쫓았다. 구경꾼들에겐 그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포악하게 보였다. 눈이 뒤집혀 여자를 쫓는 모습이 동부공의 피비린내 나는 소문을 떠올리게도 했다. 하지만 정작 레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레나는 방울 소리에 쫓기는 여우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저건 요란하기만 할 뿐, 실질적인 위협은 거의 없었다. 린의 의도가 의심스러워진 레나는 공격을 멈추고 피하는 데만 집중했다. 그럼에도 사방으로 튀는 대리석 파편과 굉음 때문에 그들의 모습은 충분히 살벌했다. 그러길 얼마, 린에게 혹사당한 검이 또다시 삐걱대기 시작했다. 거슬리는 소리가 레나에게도 들렸다. 마침 레나는 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때 그가 눈으로 말했다.
‘받아.’
거칠기 짝이 없는 행동과 달리 그의 눈빛은 고요했다. 린이 검을 치켜들었다. 크게 내리칠 작정이었다. 비로소 확신을 얻은 레나는 피하지 않고 검을 눕혔다. 검과 검이 다시 한번 맞부딪혔다. 그리고 이번에는 와장창하고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나와 린의 검이 박살나는 소리였다. . . .
“오오!”
검이 깨져버리자 숨죽이고 지켜보던 귀족들이 탄성을 터트렸다. 레나의 검은 내리치는 무게를 이기지 못해 두 동강이 났고, 레나의 검을 깨트린 린의 검도 그대로 바닥을 치며 부서져 버렸다. 검이 부서질 때까지 싸우다니, 어디서도 보기 힘든 진귀한 광경이었다. 맨손이 된 레나와 린은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숨 가쁘게 달리며 검을 휘두른 탓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한계까지 몰아붙인 팔은 이제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지친 기색을 숨기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황제의 말대로 되었다. 검이 부러졌으니 둘 다 검을 못 잡는 신세다. 황제가 새 검을 가져오라고 하지만 않으면, 승자도 패자도 상처도 없이 이 광대놀이를 끝낼 수 있었다. 레나와 린은 황제의 판결을 기다렸다. 황제는 호흡을 고르는 두 사람을 무심히 바라보더니, 발밑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생각해?”
황제의 발밑엔 끌려 나온 기사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황제가 그에게 물었다.
“이래도 내 말이 틀린 것 같니?”
“폐, 폐하. 죽을죄를…….”
“응, 맞아. 반역은 죽을죄지.”
황제는 태연히 끄덕였다. 그러더니 다시 레나를 보며 말했다.
“흥미로웠다.”
그것은 끝을 고하는 말이었다.
“다음엔 춤추는 것도 보여주렴. 예쁜 드레스를 입고 말이야.”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손짓했다. 그만 물러가도 좋다는 뜻이었다. 요란한 증명은 그렇게 끝이 났다. 레나와 린은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서로를 잠깐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둘과 달리 아직 안심할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이건 어떡할까?”
황제가 발치의 기사를 보며 중얼댔다. 기사가 덜덜 떨며 자비를 구했다. 다행히 황제는 기분이 좋았다.
“나름 즐거웠으니 살려주마. 하지만 입을 잘못 놀린 벌은 받아라.”
마음을 정한 황제가 클라비스에게 눈짓했다. 그에 클라비스가 주저앉은 기사에게 다가갔다. 기사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불안하게 눈만 끔뻑였다.
“폐하의 자비를 마음 깊이 새기시길.”
“으…….”
클라비스가 신음하는 기사의 이마를 손으로 덮었다. 백의의 추기경이 기사에게 손을 뻗는 모습이 언뜻 신성해보였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으, 으아악……!”
클라비스의 손길 아래 기사가 절규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고문당하는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동시에 그의 두툼한 몸이 말라가기 시작했다.
“끄윽……!”
기사의 숨이 가빠지자 추기경은 비로소 손을 뗐다. 기사는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널브러진 그의 몸은 이전과 달리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클라비스의 잔혹한 권능에 귀족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그들을 향해 클라비스가 웃으며 말했다.
“폐하의 자비로우심에 경의를.”
귀족들은 소름이 돋았지만 온힘을 다해 입매를 끌어당겼다. 그러곤 따라했다.
“폐하의 자비로우심에 경의를.”
대체 무엇이 자비인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생각을 버리고 황족의 말에 동조하는 것. 그것이 황궁에서 살아남는 최선의 방법임을 모두가 아는 탓이었다. *** 승전제는 늦게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은 그 자리를 오래 지키지 않았다. 더 중요한 약속이 기다리는 탓이었다. 짙은 밤, 레나와 린은 호숫가에서 다시 만났다. 그들은 어김없이 나타난 서로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하루 동안 이미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왜 이리 반가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반가운 마음과 달리 선뜻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망설여졌고,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말없이 마주보길 한참, 결국 레나가 먼저 속삭였다.
“안 나오실 줄 알았어요.”
“왜?”
“사이좋게 지내는 건, 서로를 찌르기 전까지였으니까.”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미안한 듯 린을 보았다. 사실 서로 찌른 건 아니다. 찌른 건 레나 혼자. 린은 레나를 다치게 하지 않았다. 대신 부담을 떠안고 방법을 찾았다. 정말이지, 미련하게도. 레나가 미안해하자, 린이 넌지시 말을 돌렸다.
“팔은 괜찮아?”
“멀쩡해요. 린 씨는요?”
“나도.”
거짓말이다. 레나는 자신이 얼마나 집요하게 그를 베어댔는지 기억했다. 사과할까? 미안하다고 하면 당연히 용서하겠지. 괜찮다고 할 거다. 오히려 위로할지도 모른다. 그걸 알기에 레나는 사과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레나는 사과 대신 제안을 택했다.
“어제 했던 동맹 제안, 아직도 유효해요?”
뜻밖의 말에 린이 짐짓 놀랐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어서, 레나는 별 수 없이 털어놓았다.
“솔직히 말하면 어젠 별로 내키지 않았어요.”
“그런데?”
“마음이 변했어요. 린 씨가 너무 예뻐서.”
물음에 답하는 레나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하지만 린은 심장을 후려 맞는 기분이었다. 기습을 당한 린은 한참을 굳어 있다가, 억울한 듯 하소연했다.
“그 표현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싫어요?”
“……아니.”
“다행이에요.”
하지만 린은 레나를 당해낼 수 없었다. 린은 결국 입을 다물었고, 레나는 그 모습을 보며 더 짙게 웃었다. 아무래도 그는 모르는 듯했다. 레나가 왜 계속 예쁘다고 하는지.
“린 씨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동맹을 맺거나, 손을 잡아도.”
레나야말로 린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의심하고 경계하며 선을 그으려 해도 덤덤히 다가오는 그가 레나는 버거웠다. 이번에도 항복해버린 레나는 결국 곁을 내어주기로 하며 말을 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린 씨가 어제 하던 얘기를 마저 해주세요.”
린이 의아한 눈으로 레나를 바라보았다. 그 깊은 눈을 마주보며, 레나가 덧붙였다.
“린 씨가 반려를 얻을 수 없는 이유를 알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