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권능의 대가 (35/208)

35화. 권능의 대가2020.08.31.

16562804499693.jpg“이유를 알고 싶어요.”

레나가 밤처럼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16562804499693.jpg“린 씨가 반려를 얻을 수 없는 이유요.”

16562804499704.jpg“그건…….”

린이 주저하며 운을 뗐다. 하지만 그가 말을 채 잇기 전에, 거절의 기색을 읽은 레나가 먼저 덧붙였다.

16562804499693.jpg“말하기 곤란하면 강요하지는 않을게요. 하지만 가능하면 듣고 싶어요. 한편이 되기 전에 의심스러운 건 해결하고 싶으니까요.”

레나의 말은 완곡하면서도 분명했다.

16562804499693.jpg“무슨 이야기를 듣더라도 비밀로 할게요.”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어젯밤, 린은 반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이제껏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마치 상처받은 것처럼. 그래서 레나는 차마 더 묻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 이에 관해 이야기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타인의 아픈 사정을 캐묻는 건 실례라고 생각했으니까. 오늘까지도,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런 생각은 확고했다. 그런데 린은 이번에도 빗장 걸린 레나의 마음을 멋대로 비집고 들어왔다. 황제가 싸우라고 했을 때, 린이 진심으로 공격했어도 레나는 이해했을 거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레나도 상당히 진심이었으니까. 하지만 린은 갈등조차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공격받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폭군의 명령 앞에서도 여전히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레나도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그의 손을 잡아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를 더 알고 싶어졌다. 레나는 새롭게 생긴 바람을 숨기지 않고 린을 올려다보았다. 레나의 심경변화를 느낀 듯, 린 역시 레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길 한참, 그가 자그맣게 중얼댔다.

16562804499704.jpg“……혹시 들었어?”

16562804499693.jpg“뭘요?”

16562804499704.jpg“남부공에게, 내 얘기.”

16562804499693.jpg“대강은요.”

레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린은 먼 곳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남부공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얼추 아는 투였다. 그 반응으로 보아 남부공의 말이 완전한 날조는 아닌 모양이었다.

16562804499704.jpg“남부공하고는 사이가 별로 안 좋아.”

린이 난감한 얼굴로 뒷목을 매만지며 말했다.

16562804499704.jpg“그래서 아까도 보자마자 싸웠고.”

오늘 회담장 앞에서 남부공과 각을 세운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레나는 그냥 그렇구나 싶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과가 이어졌다.

16562804499704.jpg“회담장에서 한 말은 미안해.”

16562804499693.jpg“네?”

16562804499704.jpg“생각이 짧았어. 불쾌했다면 사과할게.”

16562804499693.jpg“......그걸 사과하면 칼로 찌른 전 어떡해요.”

린이 조심스레 꺼낸 말에 레나는 기가 막혀 중얼댔다. 그는 아직 마음에 두고 있던 모양이다. 회담장 앞에서 남부공과 레나를 싸잡아 깎아내렸던 일을. 그래서 오히려 까맣게 잊고 있었던 레나는 그의 성실함과 온순함에 미간을 좁히고 웃었다.

16562804499693.jpg“린 씨가 여자들을 다치게 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하지만 이래서야, 그를 둘러싼 소문을 더더욱 믿을 수가 없다.

16562804499693.jpg“이상하죠. 제가 아는 린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말이에요.”

그래서 레나는 솔직히 물었다.

16562804499693.jpg“왜 그런 소문이 생긴 거예요? 결혼을 할 수 없는 것과 관련이 있나요?”

레나의 상냥한 물음에 린은 눈을 감았다. 난감한 기색이었다. 입을 열지 말지 고민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16562804499704.jpg“근거 없는 소문은 아니야.”

한참 후, 그가 결국 대답했다.

16562804499704.jpg“실제로 여러 사람이 나 때문에 다쳤어.”

16562804499693.jpg“일부러 그런 거였어요?”

16562804499704.jpg“……아니.”

린이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16562804499704.jpg“일부러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함부로 해서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거듭 고민했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16562804499704.jpg“지금부터 하는 말은 비밀이야.”

같은 마음이었다. 레나가 린을 알고 싶어 하는 만큼 린은 레나에게 오해받고 싶지 않았다.

16562804499704.jpg“약속해줘.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16562804499693.jpg“그럴게요.”

그래서 그는 결국 레나의 또렷한 시선 앞에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기로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 하는 이야기여서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그래서 린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천천히 운을 뗐다.

16562804499704.jpg“제국 사람들은 황제의 권능이 신성하다고 생각하지.”

16562804499693.jpg“신에게 받은 힘이라고 하니까요.”

황제는 자서전을 통해 그렇게 밝혔다. 망자들로부터 세상을 구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그러기 위해 신께 권능을 받았다고.

16562804499704.jpg“그게 정말 신에게 받은 힘일까?”

16562804499693.jpg“네?”

16562804499704.jpg“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기괴하잖아.”

린의 자조 섞인 말에 레나는 아까 연회장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클라비스의 손길에 건장하던 남자가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졌다. 볼이 푹 꺼지며 얇아진 거죽 위로 해골의 형상이 드러나고, 두껍던 팔다리는 썩은 덩굴처럼 휘늘어졌다. 서부공의 권능인 쇠약이었다. 살아 있는 것의 생기를 빼앗는 힘이라니, 확실히 기괴하기는 했다. 그래서 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하지만 린이 지금부터 하려는 말은 고작 그런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16562804499704.jpg“혹시 처형강박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16562804499693.jpg“북부공에게 유전되는 정신병…… 말이죠?”

역대 북부공은 모두 기묘한 신경증을 앓았다. 이미 비밀이라 할 수 없는, 아주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레나도 어렴풋이 전해들은 것을 떠올리며 덧붙였다.

16562804499693.jpg“목이 잘릴까 봐 불안해하는 병으로 알고 있어요.”

16562804584638.jpg

  *** 바로 그 시간, 호수의 궁 가장 북쪽 빈실에서는 레나와 린이 말하는 처형강박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16562804584642.jpg“풀어!”

어두운 침실에서 고성이 울려 퍼졌다.

16562804584642.jpg“이거 풀라고!”

분노로 가득 찬, 동시에 겁에 잔뜩 질린 루비드의 목소리였다. 루비드는 침대에 묶여 몸부림치고 있었다. 긴 금발을 베개 위에 흩뿌린 채, 비단으로 결박된 손과 발을 비틀며 절규했다.

16562804584642.jpg“올 거야……! 이우라가, 내 목을 치러……!”

오만하던 왕자가 잔뜩 쉰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상기된 뺨을 적시는 게 식은땀인지 눈물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긴 잠에서 깨어난 루비드는 눈을 뜨자마자 난동을 부렸다. 그리고 왕자를 모시는 시종들은 그 모습이 익숙한 듯 먼발치에서 지켜만 보았다.

16562804584653.jpg“각하께 받은 약이 다 떨어졌습니다.”

16562804584653.jpg“안 그래도 루벨 각하께 사람을 보냈으니 기다려라. 곧 약을 가져올 테니…….”

시종들은 몰래 속삭이며 가슴을 졸였다. 최근 잠잠하다 싶었는데, 왕자의 광증이 다시 도졌다. 아마도 원인은 실패한 원정 때문일 것이다. 평소 기세가 등등한 왕자는, 조금이라도 기가 꺾이면 성미가 돌변해 애꿎은 형을 매도했다. 형인 이우라가 자신의 목을 벨 거라며 겁에 질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첫 원정에서 처참히 실패했지만 이우라는 동생을 비난하지 않았다. 책임을 묻거나, 처벌을 논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루비드는 지레 겁을 먹어 난동을 부렸다. 아마 손발이 묶여 있지 않았다면 진즉에 뛰쳐나가 어디론가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비단 루비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주 예전부터 북부의 공작들은 정신병을 앓았다. 그들은 아무 근거 없이 가족이나 친구, 혹은 하인이 자신의 목을 베어갈 거라고 믿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살해수단에는 독살이나 교살도 있는데, 그들은 오직 목이 잘리는 것만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북부공들이 가진 공통적이고 집착적인 불안을 일컬어 ‘처형강박’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그 깊은 밤, 루비드는 처형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에게서 평소의 오만한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곳엔 그저 몸부림치며 떠는, 덫에 걸린 짐승만 존재할 뿐이었다. *** 목이 잘릴까 봐 불안해하는, 북부공에게 유전되는 정신병. 처형강박에 대한 레나의 대답은 모범적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그대로여서 아주 상식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린이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다.

16562804499704.jpg“처형강박은 정신병 같은 게 아니야.”

16562804499693.jpg“그럼요?”

16562804499704.jpg“황제에게 권능을 받은 대가지.”

16562804499693.jpg“그걸 어떻게 확신하세요?”

16562804499704.jpg“나한테도 같은 문제가 있으니까.”

린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레나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아파, 린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 . . 역대 공작 중 가장 젊고, 야심차며, 무도한 동부공 리그난 아이테르너가 공작이 된 나이는 고작 열세 살이었다. 7년 전, 동부공 나자 아이테르너 그라샤가 죽었다. 그래서 황제는 그의 외아들에게 동부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나자의 아들은 사생아였고, 심지어 식민지 노예의 피가 섞인 잡종이었다. 그래서 나자의 아들인 리그난 아이테르너는 그라샤의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제국의 콧대 높은 귀족들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황제의 재가가 났기에 겉으로만 수긍하는 척할 뿐, 그가 공작으로서 제구실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제로 그들의 생각은 옳았다. 열세 살. 당시의 린은 제국어만 겨우 구사할 뿐, 제국의 상식이나 황실의 예법에 대해선 거의 무지한 이방 소년이었다.

16562804499704.jpg‘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이미 황궁에 도착했지만 린은 아직도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머리를 양손으로 천천히 훑어보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희미한 상처가 만져졌다. 불과 보름 전, 성에서 추락해서 생긴 상처였다. 나자 아이테르너가 죽기 하루 전날, 린은 동부공의 성에서 떨어졌다. 더 정확히는 뛰어내렸다. 죽기 위해서였다. 소년의 시도는 거의 성공했다. 5층 아래 돌바닥으로 뛰어내린 그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하게 다쳤다. 애써 숨은 쉬지만 길어야 하루 이틀 버틸 수준이었다. 하지만 다음날, 그 소년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멀쩡히 일어났다. 상처는 기적처럼 아물고 몸도 다 나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새로운 동부공이 되어 있었다. 아무 준비 없이, 이해도 동의도 없이. 그가 황궁까지 가련하게 끌려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16562804584653.jpg“저 애송이가 동부공이라고?”

16562804584653.jpg“나자의 아들이라기에 기대했더니.”

16562804584653.jpg“저 녀석이 동부공을 죽였다는 소문도 있던데.”

그렇게 발을 들인 황궁은 역시나 그를 반기지 않았다. 무수한 시선과 속삭임이 린의 어린 등에 꽂혔다. 하지만 린은 절대 얕잡아 보이면 안 된다는 충고를 떠올리며 애써 견뎠다. 그렇게 구경거리 취급을 받으며 입궁했다. 하지만 그리 특별한 경험은 아니었다. 3년 전, 고향에서 끌려올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을 이미 겪었다. 그래서 소년은 포로나 공작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자조했다. 하지만 그건 완벽한 착각이었다. 린이 황궁에 들어온 첫날 밤이었다. 종일 긴장했던 린은 침대에 누워서야 겨우 숨을 편히 쉴 수 있었다. 소년이 가물가물 잠들어갈 때였다. 어둠 속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스치듯 들려왔다.

16562804584653.jpg“안녕, 꼬마 공작님?”

이어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소리에 설핏 깼던 린은 놀라서 상체를 일으켰다. 방에 처음 보는 여자가 있었다. 어두워서 모습을 다 살필 수는 없었지만 어스름한 달빛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저 여인의 나긋한 몸매와 몸짓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아직 소년이었지만, 아니. 아직 소년이어서 린은 그 관능적인 분위기에 속수무책 사로잡혔다.

16562804499704.jpg“누구…….”

16562804584653.jpg“글쎄요, 누굴까요?”

린이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묻자, 여인은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린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여인은 더 과감하게 침대에 무릎을 대고 올라왔다. 여인이 상체를 숙이고 기어오는 모습에 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16562804584653.jpg“귀여워라.”

여인이 경직된 소년을 보며 달게 웃었다. 천천히 구워삶아 요리할 작정이었는데, 이래서야 손 쓸 필요도 없겠구나 싶었다. 기사들을 매수해서 린의 처소까지 들어온 여인은 어느 중견 귀족의 여식이었다. 동시에 대범하고 약삭빠른 야심가이기도 했다. 설령 이방 출신이어도 그는 무려 동부의 주인. 아이테르너의 이름을 물려받은 동부의 유일한 적자였다. 그러니 그 옆을 차지하면 동부의 안주인이 되고, 아이를 가지면 차기 동부공의 어미가 될 터였다. 포로일 때와 달리 대단히 매력적인 먹잇감이 된 셈이었다.

16562804584653.jpg“혼자 외로웠죠? 같이 있어 줄게요, 공작님.”

여인이 린의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길고 매끈한 손톱이 살갗을 스치자 쭈뼛하고 소름이 돋았다. 무서웠다. 하지만 거부할 수는 없었다. 눈앞의 사람은 아름다웠고, 손길은 따스했다. 그리고 머리를 꼭 안아주는 품 안은 부드러웠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던 소년은 결국 저항하지 못하고 파고드는 손을 방치했다.

1656280464214.jpg

  여인이 입을 맞추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린은 겁먹어 눈을 꼭 감았다. 이윽고 말랑말랑한 살덩이가 입술에 닿았다. 그 촉감과 온도, 그리고 스며드는 습기에 모든 사고가 날아갔다. 대신 생전 느껴본 적 없던 충동이 머릿속의 빈자리를 채웠다. 아니, 그건 단지 충동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동부공의 피가 소년에게 명했다. 지금 당장, 네 손아귀에 들어온 것을 물어 죽이라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