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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 (36/208)

36화.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2020.09.03.

16562804713612.jpg“그, 그만! 아파, 아악!”

여인이 애원하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린은 그 소리를 무시했다. 머릿속을 채운 명령이 너무 시끄러워서, 울며 비는 여자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근원에서부터 솟구치는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물어라, 찢어라, 파괴해라, 굴복시켜라, 지배해라, 여린 살을 씹고 피를 핥아라. 그리고 웃어라. 린은 시키는 대로 했다. 이 갈증을 해소하려면 그 말을 따라야 할 것 같았다. 온몸이 뜨거웠다. 그 열기는 고통 같기도 하고, 쾌락 같기도 했다. 그래서 린은 크게 웃었다. 몰아치는 열락 속에서 몸을 적신 피가 향기롭다고 느꼈다. 그게 그날 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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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6562804713624.jpg“정신을 차렸을 땐 아침이었어.”

지난날을 되뇌는 린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벌써 7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린은 그날 아침의 일을 생생히 기억했다.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햇살을 보며 린은 멍하니 생각했다. 참 이상한 꿈을 꿨다고. 황궁이 낯설어 그랬나보다고. 그러다 옷에 말라붙은 피를 발견했을 땐 소스라치게 놀랐다. 게다가 일어나보니 방 안은 난장판이었다. 린은 그게 자신의 짓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 하고 기사와 시종들을 급히 불렀다. 그러곤 밤중에 누가 난리를 쳐놨다고 호소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기가 막힌 듯 린을 바라보았다. 구경거리가 되는 건 이미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그토록 징그러워하는 시선은 또 처음이었다.

16562804713628.jpg“아무것도 기억이 안 났던 거예요?”

16562804713624.jpg“단편적인 기억은 있지만 다 꿈같았어.”

린의 나직한 대답에 레나는 남부공에게 들은 이야기를 곱씹었다.

16562804713635.jpg―놈에겐 더러운 성벽이 있네. 여인을 유혹해서 피투성이로 만드는…….

  남부공이 무엇을 보고 어떤 오해를 했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기억이 끊긴 사이 다가온 여인을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확실히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그 한 번의 일로 평생 혼자 지내기로 결심하는 건 너무 극단적이다. 레나는 설명이 더 필요했다.

16562804713628.jpg“그래서 결혼을 안 하기로 하신 거예요?”

16562804713624.jpg“그 일 때문만은 아니야.”

16562804713628.jpg“그럼요?”

16562804713624.jpg“그런 일이 계속 일어나서.”

레나의 물음에 린이 더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16562804713624.jpg“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서 결심한 거야.”

  . . . 린은 황궁의 귀족들에게 최악의 첫인상을 남기고 동부로 돌아왔다. 황궁에서의 일로 안 좋은 이야기가 돌기는 했지만, 동부공의 위세는 고작 그 정도로 꺾일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린은 그날의 사건을 덮어둔 채 착실히 앞에 놓인 일을 해나갔고, 동부의 주인으로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가 여전히 먹음직스럽다는 점이었다. 피붙이 하나 없는 소년 공작. 노리지 않는 게 이상한 금맥이었다.

16562804713612.jpg“제 여동생입니다. 제 입으로 말하긴 민망하지만, 동부에서 가장 미인이라더군요.”

16562804713612.jpg“인사드려라. 아, 제 여식인데 주악에 기교가 있어 데려왔습니다. 저하께 즐거움이 될까 하여…….”

16562804713612.jpg“저하, 그렇게 정무만 보다간 몸이 상할 거예요. 그러지 말고 오늘은 저와…….”

권력을 탐내는 귀족들은 동부공과 연을 맺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린은 황궁에서의 기억 때문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다가오는 사람을 모두 쳐낼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아직 어리고 여렸다. 게다가 외로운 소년은 다정히 웃어주는 사람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음이 넘어가면 곁을 내주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누구와도 오래가진 못했다. 마음을 나누는 것에 만족하는 린과 달리 그들은 더 확실한 관계를 원했다. 그래서 황궁의 숙녀처럼 성급히 파고들었고, 같은 결말을 맞이했다.

16562804713612.jpg“저하, 놔주세요! 아, 악!”

16562804713612.jpg“아파요, 꺄악, 살려……!”

평소 얌전하던 소년은 관계가 농익으면 돌변했다. 부드러운 팔이 목을 감는 순간, 달콤한 입술이 살갗에 닿는 순간, 아찔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는 순간마다 폭발하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제게 다가온 여인들을 상처 입혔다. 그로써 그들이 다치면, 그리고 도망치면 홀로 정신을 차리고 절망했다. 린은 같은 실수를 몇 번이나 반복한 후에야 자신의 몸 안에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역대 동부공들이 그와 같은 문제를 겪어온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동부공들은 연인을 온전히 만질 수 없었다. 사랑하는 마음이 들면 그보다 더한 가학심에 휩싸였다. 그로써 연인을 다치게 하고, 때로는 죽였다. 린은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힘 때문에 그 가혹한 운명을 떠안게 되었다. 고독에 몸부림치는 소년에겐 더없이 잔인한 일이었다. 진실을 알게 된 린은 더 이상 아무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았다. 그리고 평생 혼자 지낼 것을 결심했다. 그가 열일곱 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 . . 린은 말을 맺으며 불안한 눈으로 레나를 바라보았다. 치부를 모두 드러낸 기분이었다. 동부공으로서도, 한 개인으로서도. 하지만 다행히 레나의 눈빛은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여상히 차분했다.

16562804713628.jpg“그렇군요.”

레나는 그저 이해한 표정이었다. 그를 둘러싼 소문의 실체도, 황제의 권능이 신의 축복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도.

16562804713628.jpg“린 씨 말이 맞네요. 능력 뒤에 저주가 있는데 그게 어떻게 축복이겠어요.”

레나의 수긍에 린은 조용히 안도했다.

16562804713628.jpg“하지만 조금 뜻밖이네요. 동부공에게도 북부공처럼 유전되는 문제가 있다니.”

16562804713624.jpg“남부나 서부도 마찬가지일 거야. 북부만 운 나쁘게 들켰을 뿐, 나머진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겠지. 알려져 봐야 약점밖에 되지 않으니까.”

레나는 린의 대답을 되뇌다 웃었다. 달리 말하면, 지금 린은 필사적으로 숨겨야 하는 약점을 밝힌 셈이다. 이걸 귀엽다고 해야 할지,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레나는 한 뼘 높이 있는 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16562804713628.jpg“조금만 만질게요.”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그러곤 린이 허락하기도 전에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16562804713624.jpg“……뭐 하는 거야?”

16562804713628.jpg“격려요.”

뜻밖의 행동과 대답에 린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머리를 다독이는 손길을 피하거나 막지는 않았다.

16562804713628.jpg“혹시 이렇게 만지는 것도 안 돼요?”

16562804713624.jpg“이건 괜찮아.”

16562804713628.jpg“그럼 어떻게 만져야 문제가 되는 거예요?”

린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레나는 진지했다. 레나는 맑은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렸고, 고민하던 린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16562804713624.jpg“나쁘게.”

16562804713628.jpg“나쁘게?”

16562804713624.jpg“……불순하게.”

16562804713628.jpg“불순하게?”

16562804713624.jpg“대충 알아듣지……?”

16562804713628.jpg“그러니까, 야하게 말씀이시죠?”

가감 없는 표현에 린이 질색하며 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민망한 모양이었다. 민망할 만했다. 연인과 애정을 나누는 건 매우 사적인 부분이니까.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는 고백 자체도 아주 내밀한 이야기니까. 그러니 낯 뜨거운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레나는 그의 순박한 반응이 조금 웃겼다.

16562804713628.jpg‘경험도 많은 주제에.’

들어보니 어릴 적부터 이런저런 경험을 꽤 하셨던데, 그래놓고 말 한마디에 수줍어하다니. 레나는 이 동부 녀석의 반응이 진짜인지 내숭인지 궁금해하다가, 불현듯 떠올렸다.

16562804713624.jpg―나를 너무 좋아하지 마.

  일전에 그가 레나에게 했던 아리송한 경고.

16562804713624.jpg―그렇게 좋아하는 건 괜찮아. 대신 서…….

16562804713628.jpg―서?

16562804713624.jpg―……연애 감정 같은 걸 느끼게 되면 말해 줘.

  그때 린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얼버무렸다. 하지만 앞뒤 말도 충분히 어이없어서 하려다가 멈춘 말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이 뭐였는지 방금 깨달았다.

16562804713628.jpg“전에 린 씨가 그랬죠. 연애 감정을 느끼면 말해달라고.”

레나가 미심쩍게 운을 뗐다. 그러곤 설마 하는 눈으로 린을 보며 물었다.

16562804713628.jpg“혹시 그때 원래 하려던 말이 성…….”

직후 린의 손이 레나의 입을 막았다. 한 손도 아니고 두 손이었다. 린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레나의 입을 막았고, 졸지에 입이 막힌 레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시선으로 그를 추궁했다. 린은 식은땀을 흘리며 버텼다. 하지만 무언의 압박이 이어지자, 그는 결국 괴로워하며 실토했다.

16562804713624.jpg“맞아.”

16562804713628.jpg“무…….”

16562804713624.jpg“……맞으니까 말하지 마.”

린의 자백에 더 황당해진 레나는 ‘이 새끼가’ 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연애 감정이 아니라 성욕이었다. 그가 원래 하려던 말은 ‘내게 성욕을 느끼면 말해’였다. 그러니까 네가 성욕을 품고 달려들면 내가 때릴 수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 거다. 모종의 사정이 있다지만, 만난 지 일주일도 안 된 숙녀에게 성욕을 자제하라고 경고한 남자가 여기 있다. 사실을 확인한 레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입이 막힌 채 말했다.

16562804713628.jpg“린 씨 착한 척하면서 은근히 무례한 거 알아요?”

16562804713624.jpg“미안…….”

린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레나는 그럼에도 기막혀하다가, 아까보다 가까워진 린의 팔을 보고 움찔 인상을 풀었다. 그가 입을 막는 바람에 소매 안쪽이 보였다. 그리고 옷 안으로 보이는 그의 팔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레나는 자신이 낸 상처를 발견하고서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괘씸하지만 뭐라고 할 입장이 아니었다.

16562804713628.jpg“그래요, 이미 지난 일이니까.”

결국 레나는 못 이기는 척 린의 손을 떼어냈다. 린은 얌전히 물러나며 손에 남은 촉감을 꼭 쥐었다.

16562804713628.jpg“……고마워요, 어려운 이야기였을 텐데.”

성욕이 아니라 그가 밝힌 비밀에 대한 이야기였다. 레나는 린이 반려를 맞을 수 없다고 한 이유를 비로소 납득했다. 그래서 그에게 한발 다가가기로 결심했다.

16562804713628.jpg“솔직히 말씀해주셨으니까 저도 고백할게요. 어제 말한 약혼은 사실 구실이었어요.”

16562804713624.jpg“구실?”

16562804713628.jpg“그런 조건을 걸면 린 씨가 동맹을 포기할 줄 알았거든요.”

앞날이 창창한 동부공께는 정치적으로 얽힌 상대도 많을 테니, 당연히 동부에 혼약자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꼭 한 명이 정해진 게 아니면 후보라도. 하지만 레나의 예상은 시작부터 틀렸고 결국 괜한 오해만 쌓았다. 레나가 미안한 듯 고백하자 린은 허탈하게 웃었다. 지난 고뇌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레나의 오판이 황당해서. 약혼이 거절의 구실이었다니, 아무래도 이 숙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듯했다.

16562804713624.jpg“그럼 그건 없던 일로……?”

16562804713628.jpg“아뇨. 린 씨만 괜찮다면 하고 싶어요.”

16562804713624.jpg“그 편이 낫겠지. 서로 도울 당위성이 되니까.”

린의 이성적인 대답에 레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말마따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둘러대면 두 사람의 협력에 대해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남부공이 거품 물고 쓰러질 가능성만 빼면 여러모로 편리하다. 하지만 레나가 약혼을 결심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레나는 린이 정중한 사람인 걸 알려주고 싶었다. 남부공 같은 사람에게, 그러니까 그를 오해하고 매도하는 사람들에게. 하지만 레나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괜한 참견 같아서, 실제로 쓸데없는 참견이어서. 레나를 움직인 건 딱 그 정도 마음이었다. 레나는 린이 착해서 좋았다. 그래서 도와주고 싶어졌다. 가벼운 마음이지만 진심이었다.

16562804713628.jpg“그럼 잘 부탁드려요, 약혼자님.”

레나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린은 레나의 웃는 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그를 따라 하듯 어색하게 마주 웃었다. 그러곤 내밀어진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레나의 손은 역시 작았다. 자신에 비하면 한참이나 작아 신기할 정도였다. 린은 잔잔히 밀려오는 마음을 감추려고 적당한 힘으로 레나의 손을 맞잡았다. 힘을 주면 긴장을 들킬 것이다. 힘을 빼면 떨림이 전해질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고 못내 눈부신 그 숙녀의 손을 잡았다. 달빛 아래 레나의 미소가 짙어졌다. 린은 가슴이 아파 미간을 조금 일그러트렸다. 레나는 린이 동맹을 제안한 게 동부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린은 레나가 어떤 오해를 하는지 알지만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실은 해명할 수 없었다. 레나와 힘을 합치면 물론 동부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린이 동맹을 제안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누가 알면 동부공 실격이라 할 수도 있지만, 그때 린의 안중에 동부는 없었다. 레나가 죽었다는 소식에 그는 정말 놀랐었다. 믿을 수 없었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 사람이 없을지도 모르는 세상에 홀로 선 기분이 당혹스러웠다. 하늘에서 달이 사라져도 이처럼 허망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 살아 있는 레나를 봤을 땐 맥이 풀려서 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우스운 일이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알면 얼마나 안다고. 린은 자신의 마음을 비웃었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부정할 필요도 없었다. 있든 없든 달라질 것이 없으니까. 그는 어차피 반려를 맞을 수 없다. 만질 수 없고 안을 수 없고 사랑할 수 없으므로, 그의 마음은 비밀이나 약점처럼 영영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에 속했다. 다행히 린은 참는 것에 익숙했다. 그리고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았다. 동맹을 제안한 것도 그 때문이다. 린은 단지 레나가 사라지는 걸 막고 싶었다. 그가 사는 세상 어딘가에 있어 주길 바랐다. 가능하면 가까운 곳에서, 할 수 없다면 먼 곳에서라도. 이러니 해명할 수 있을 리가. 린은 마음을 잘 눌러 담으며 레나를 바라보았다. 레나는 그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린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담담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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