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소년은 의심을 시작했다2020.09.07.
어두운 밤, 엔지는 빠른 걸음으로 저택의 현관을 지났다.
“아니, 도련님. 기별도 없이…….”
“어머니는 주무셔?”
“아직 깨어계십니다.”
루벨 가의 젊은 집사는 연락도 없이 돌아온 도련님을 급히 맞이했다. 엔지는 그에게 겉옷을 넘기고 곧장 어머니의 방으로 향했다.
“어머니, 저예요.”
“엔지?”
문을 두드리자 여인의 미성이 돌아왔다. 잠옷에 숄을 두른 여인이 문 뒤로 모습을 드러냈다. 단아한 인상의 귀부인, 루벨 후작 부인이었다.
“방금 온 거니?”
“네.”
“이런 시간에…….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지?”
후작 부인이 아들의 뺨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루벨 가의 본성은 북부에 있지만, 저택은 수도에도 있었다. 자작 가일 때부터 다듬어온 유서 깊은 저택이었다. 황궁에선 마차로 반시간밖에 걸리지 않아 후작과 엔지는 황궁에 머물다가도 이따금 집에 들렀다. 어머니의 염려에 엔지는 잠시 우물대다 말했다.
“어머니, 혹시 남부공 대리를 보셨어요?”
물음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건국기념일에도, 개전제와 승전제에도 남부공 대리는 가장 주목받는 자리에 있었다. 그러니 마땅히 보았을 것이다. 레나 루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사람을. 엔지의 물음에 후작 부인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사람 이름이 레나 루벨이래요. 그리고 누나랑 많이 닮았어요.”
“누나라니…….”
“어머니도 보셨죠? 네?”
“엔지야, 그 얘기는…….”
“복도에서 그러지 말고 들어오너라.”
그때 중후한 목소리가 후작 부인의 목소리를 뒤덮었다. 예상치 못한 음성에 엔지는 깜짝 놀랐다.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남자가 보였다. 루벨 후작이었다.
“그러다 또 기침을 하면 어쩌려고.”
후작이 걱정스럽게 말했고, 굳어 있던 후작 부인도 뒤늦게 문 앞에서 비켜섰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마땅한 일이지만 엔지는 저도 모르게 주춤했다.
“황궁에 계신 줄 알았어요.”
“쉬려고 잠시 들어왔다. 자넨 그만 가보게.”
후작은 태연히 답하며 아직 엔지의 등 뒤에 있는 집사를 물렸다. 표정을 숨기고 이야기를 엿듣던 집사는 주인의 명에 황급히 물러났다. 엔지는 머뭇대며 방에 들어갔다. 일순 아버지께 안부를 여쭈어야 하나 싶었지만 지금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입을 꼭 다물고 있자 후작이 먼저 운을 뗐다.
“소식 들었다. 공작회담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다지. 잘했다.”
후작의 칭찬에 엔지는 오히려 가슴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집에서 쉬는 중에도 아버지는 이토록 소식에 밝았다. 그런데도 남부공 대리인 레나 루벨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엔지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오늘 남부공 대리를 가까이서 봤어요.”
“그랬겠구나.”
“그 사람 이름이 왜 레나 루벨이죠? 혹시 아는 거 없으세요?”
“남부의 사정을 내가 어찌 알겠느냐.”
“그 사람 누나랑 닮았잖아요.”
엔지가 저도 모르게 따지듯 말했다.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게 남부공 대리의 등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건 계기일 뿐 엔지에겐 뿌리 깊은 의문이 있었다. 누나가 죽던 해 엔지는 여덟 살이었다. 아직 모르는 게 많지만, 모든 것을 지켜보고 기억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에게 누나인 레나 루벨은 치사하고, 잘 안 놀아주고, 틈만 나면 자신을 따돌리는 태생적 앙숙이자 어쨌든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성장의 동반자였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누나가 병에 걸렸다는 소릴 들었다. 놀라서 누나에게 가려하자 하인들이 막았다. 병이 옮을 수도 있으니 도련님은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했다. 엔지는 그 말을 믿었다. 그래서 정원을 기웃대며 누나 방의 창문만 쳐다보았다. 내일이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병에 걸렸다고 한 지 나흘 만에 누나가 죽었다. 집사가 조심히 전한 소식에 엔지는 어머니한테 달려가 진짜냐고 물었다. 누나를 보여 달라고 조르며 울었다. 하지만 엔지는 끝내 누나를 볼 수 없었다. 왜 안 보여 주냐고 절박하게 물었지만 어른들은 슬픈 표정으로 외면할 뿐이었다. 하인들이 이런저런 설명을 했지만, 전부 어린 아이가 듣기에도 이상한 핑계였다. 엔지는 결국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누나를 보냈다. 그리고 레나 루벨이라는 이름을 금기시하는 묘한 분위기에 억눌렸다.
“정말, 누나가 병으로 죽은 거 맞아요?”
그때 잠가둔 마음이 기어이 동기를 얻어 물꼬를 터트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 너무 이상해요.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의사도 온 적 없고, 누나를 보여준 적도 없었어요.”
“엔지야…….”
“잠깐만요, 어머니. 아버지께 직접 듣고 싶어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남부공 대리는 대체 누구죠?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누나랑 똑같은데 아버지는 정말 모르세요?”
엔지가 또박또박 물었다. 턱을 곧게 들고 말하는 투가 퍽 영리했다. 실제로 그는 똑똑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몸이 약한 대신 머리가 좋아서 장래가 기대되는 구석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순진해서야.’
후작은 우스운 기분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누나의 신변이 의심스럽다면서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가. 그런 가설을 세웠다면 몸부터 사려야 마땅할 텐데.
‘아무 대책 없이 밀고 들어오면 쓰나.’
후작은 자신의 어수룩한 아들을 향해 잔잔히 웃었다. 외동이라고 너무 곱게 키운 모양이다. 구김 없이 자라 천지 분간도 못 하는 지경이니. 이건 아비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해칠 리 없다고 철석같이 믿어 가능한 만용이었다. 후작은 아들의 앳된 얼굴을 보며 못 이기는 척 말했다.
“그래, 네 누나가 맞다.”
“그게 정말…….”
“만약 그렇다면 어쩔 셈이냐?”
“네?”
“내가 맞다 하면 대체 어쩌려고 그리 묻는 게냐.”
후작의 물음에 눈썹을 세우던 엔지가 주춤하고 눈을 깜빡였다.
“밤중에 찾아와 어미를 깨우고 다친 아비를 의심하면서 묻는 게 고작 그런 거라니.”
후작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고요했다. 하지만 그 안엔 짙은 실망감이 담겨 있었다. 엔지는 놀라서 변명했다.
“저는 그냥 확인하려고 한 거예요, 너무 이상하니까…….”
“이상하니 해명을 들어야겠다?”
후작이 기가 막힌 듯 중얼대자 엔지는 말문이 막혔다. 순식간에 벌 받는 기분이 되었다. 엔지가 쭈뼛대자 후작이 낮게 타일렀다.
“자식이라곤 너 하나다. 필요하거나 도움이 되면 당연히 알렸겠지. 내가 단 한 번이라도 네게 나쁜 일을 한 적이 있느냐?”
“아니요…….”
“남부공 대리를 보고 놀란 심정이야 이해한다. 이름도 같고 닮기도 닮았으니까. 하지만 다짜고짜 찾아와 아비를 채근해서 네게 무엇이 남느냐?”
후작의 훈계는 죄책감을 얹어 올리는 방식이었다. 자연히 엔지의 고개는 점점 숙여졌고, 그즈음 지켜보던 어머니가 속삭였다.
“아버지께 어서 사과드려.”
“……죄송해요. 밤중에.”
엔지는 결국 눈을 내리깔고 중얼댔다. 맹랑하게 묻던 태도가 무색하게 초라한 결말이었다. 후작은 그런 아들이 한심해 속으로 생각했다. 이 아이가 과연 레나의 절반만큼이나 될 수 있을까, 하고. 후작은 무덤에서 본 레나를 떠올리며 엔지를 관찰했다. 날을 곧게 세운 레나와 달리 엔지는 솜을 채운 인형 같았다. 벌써 열네 살인데 얼굴엔 솜털뿐이고 체구는 웬만한 여자아이만큼 작다. 무른 성격, 더 무른 몸. 영리하지만 영악하지는 못해 제값을 알아서 깎는 부족한 아들.
‘더 신중할 걸 그랬나.’
엔지를 보고 있자니 후작은 뒤늦게 레나가 아까워졌다. 아들이 이 모양일 줄 알았으면 딸을 끝까지 키웠을 텐데. 후작은 성에 차지 않는 아들을 바라보다 낮게 말했다.
“그만 들어가거라.”
“네, 아버지.”
엔지가 풀 죽은 얼굴로 돌아섰다. 후작은 본전도 못 찾고 물러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엔지는 복도로 나올 때까지 그 억울한 얼굴을 유지했다. 하지만 문을 닫은 직후 소년의 표정은 변했다. 엔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깨물었다. 결코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표정이 아니었다. *** 이른 아침, 유니는 야무진 손길로 늘어진 주렴과 커튼을 말끔히 걷었다. 차르르 소리와 함께 창문에서 볕이 들며 곤히 자던 레나의 얼굴에도 햇살이 비쳤다. 눈부심을 느낀 레나는 베개 밑으로 슬며시 숨었다. 더 자고 싶다는 무언의 호소였으나, 그의 하녀는 인정사정없었다.
“아가씨, 일어나세요!”
“아…….”
“어서요! 오늘 할 일 많아요!”
“흑…….”
“울지 말고요! 벌떡 일어나세요!”
어깨를 쪼물대는 손길에 레나는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잠기운이 가득한 얼굴과 마구 눌린 머리가 꽤 가관이었다. 하지만 유니는 이미 익숙한 듯 그 앞으로 찬물을 떠왔다. 그러곤 다시 꾸벅대는 레나의 얼굴에 물방울을 튕겼다.
“이 모습을 다른 사람도 봐야 할 텐데.”
“안 돼…….”
유니가 인사불성인 레나를 향해 푸념하자 레나는 잠에 취한 목소리로 신음했다. 평소의 레나는 빈틈이 없지만 아침의 레나는 빈틈뿐이었다. 그걸 깨우고 다듬어서 제대로 된 사람으로 만드는 게 매일 아침 유니의 일이었다.
“자요, 자. 어서 세수하고요. 일정이 세 개나 있어요.”
“무슨……?”
“여기요. 새벽에 시종 아저씨들이 가져다 줬어요.”
레나는 아직 가물가물한 눈을 억지로 뜨며 유니가 내민 카드를 받았다. 셋 다 레나를 호출하는 카드였고, 발신인은 각각 달랐다. 레나는 카드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다가 돌연 미간을 좁혔다.
“왜 그러세요?”
“반갑지 않은 초대가 있어서요.”
“영감님이요?”
“아뇨, 다른 사람.”
레나는 웃는 건지 찡그리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카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손을 놓고 힘껏 기지개를 켰다. 그 반갑지 않은 초대 덕분에 잠이 다 달아난 모양이었다.
“참.”
정신을 차린 레나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저 약혼해요.”
레나의 앞뒤 잘라먹은 고백에 유니의 입이 세모꼴로 다물어졌다. 유니는 고양이 입을 하고 눈동자를 굴리더니, 이내 진지하게 되물었다.
“아기도 생겼나요?”
“……너무 성급한 발상이에요.”
“세상을 열린 마음으로 보라고 배웠어요.”
유니의 과도한 조숙함에 레나는 애써 웃었다. 하지만 유니는 뻔뻔했다. 심지어 눈치도 빨랐다.
“린 씨예요?”
“네.”
“그럼 린 씨랑 사귀는 거예요?”
“설마요.”
연이은 물음에 레나는 곧장 긍정하고 부정했다. 특히 사귀냐는 말에는 선을 딱 그었다.
“그럴 상황이 아닌 거 알잖아요.”
“결혼도 아니고 연애인데요?”
“누군가에게 유일해지는 건 마찬가지죠.”
유니의 자그마한 항변에 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자조하듯 덧붙였다.
“책임지지 못할 일은 시작도 안 하는 게 맞아요.”
레나의 단언에 유니가 입술을 삐죽댔다.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차마 못 하는 표정이었다. 레나가 그 표정을 읽고 가볍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는 동맹이에요. 약혼은 대외적인 거고요.”
“어느 쪽이든 영감님은 뒷목을 잡겠네요.”
유니가 사악하게 큭큭 웃었다. 그러더니 어째 신난 얼굴로 되물었다.
“대외적 약혼이면 대외적으로 다정하게 지내야 하는데, 그러다 린 씨가 아가씨를 정말 좋아하면 어떡해요?”
“설마요.”
“사람 일 모르는 거예요.”
“맞는 말이지만 이번엔 아니에요.”
유니의 곤란한 가설에 레나가 손사래를 쳤다. 그래서 유니는 어떻게 확신하느냐는 투로 레나를 쳐다봤다.
“정말이에요. 린 씨도 누굴 만날 생각은 없대요.”
“그 사람은 허우대 멀쩡해서 왜요?”
“개인 사정이 있나 봐요.”
레나는 모르는 척 린의 비밀을 감췄다. 그러곤 유니가 더 묻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바쁘겠어요.”
“말 돌리는 거 티 나거든요.”
역시 유니는 눈치가 빨랐다. 하지만 레나 한정으로 매우 관대하기도 해서, 결국엔 레나를 따라 얌전히 일어났다. 말마따나 바쁜 하루였다. 일정을 다 소화하려면 이제 서둘러야 했다. . . . 유니는 레나를 살뜰히 챙겨 외출을 도왔다. 그로써 아가씨가 무사히 출타하시자, 유니는 또 부지런히 움직여 지하 세탁장으로 향했다. 뭉그적대는 아가씨와 달리 유니는 할 일을 먼저 끝내는 성격이었다.
‘침대 시트만 얼른 갈고 놀아야지!’
유니는 푹신한 침대 위에서 뒹굴거릴 생각에 들떠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자식이 들뜬 유니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녕?”
하얀 사제복을 입은, 초면인데 묘하게 낯익은 소년이었다. 유니는 그 소년을 위아래로 훑다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뉘신지.”
“어……. 음. 너 레나 루벨의 하녀 맞지?”
소년, 엔지 루벨은 그렇게 말하며 방긋 웃었다. 때문에 눈치 빠른 유니는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아가씨와 꼭 닮은 이 녀석의 정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