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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동부 싫어! (38/208)

38화. 동부 싫어!2020.09.10.

16562805240734.jpg“너 레나 루벨의 하녀 맞지?”

사제복 차림의 소년, 엔지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물었다. 갑작스러운 접근과 질문에 유니는 언짢은 얼굴로 그의 위아래를 훑었다. 하녀치고는 지나치게 불량한 태도였다. 그래서 엔지는 그 행동에 놀란 듯 곤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16562805240734.jpg“음, 있잖아. 황궁에 출입하는 사제들은 전부 귀족이야.”

16562805240745.jpg“근데?”

16562805240734.jpg“어?”

16562805240745.jpg“그런데 뭐. 이래 봬도 귀족이니까 조아리라고?”

유니가 뾰족한 목소리로 되물었고, 엔지는 그 반응에 더 당황했다. 아직 어려서 뭘 모르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 하녀는 대뜸 말을 걸어온 소년이 사제든 귀족이든 관계없이 드잡이할 기세였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적대와 푸대접에 엔지는 눈을 깜빡대다가 해명했다.

16562805240734.jpg“그런 뜻이 아니라, 난 그냥 물어볼 게 있어서…….”

16562805240745.jpg“그럼 본인 소개부터 하고 상황 설명을 하든가. 대뜸 뭐야?”

유니의 반박에 엔지는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 하녀에게 이런 식으로 훈계를 듣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비단 하녀만이 아니라 후작인 아버지나 왕자인 루비드, 그리고 추기경 전하를 제외하면 엔지를 대놓고 하대하는 이는 세상에 없었다.

16562805240745.jpg“혹시 소개할 거리가 귀족인 것밖에 없어서 그런 거면 이해할게. 바쁘니까 비켜.”

16562805240734.jpg“이해한다며?”

16562805240745.jpg“이해랑 상종은 다르지.”

유니는 후작가의 후계자를 상종 못 할 놈으로 전락시키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 두고 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막 지나치려는 찰나, 옆에서 푸핫 하고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16562805240734.jpg“너 말 진짜 잘한다.”

엔지가 웃으며 감탄했다. 전혀 언짢은 투가 아니어서 이번엔 유니가 당황했다.

16562805240745.jpg‘이놈 뭐야?’

유니는 적당히 쏘아붙여 주면 이 귀족 도련님이 화를 내며 부들댈 거라고 생각했다.

16562805240734.jpg“그러네. 물어볼 게 있으면 소개랑 설명부터 해야지, 응.”

그런데 화를 내기는커녕, 아가씨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녀석은 하하 웃더니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러곤 여상히 밝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16562805240734.jpg“저기, 많이 바빠?”

16562805240745.jpg“바빠.”

16562805240734.jpg“그럼 내가 좀 도와줄까?”

예상치 못한 말에 유니는 입을 꾹 다물고 엔지를 쳐다봤다. 아가씨는 접근하는 사람이 있으면 피하라고 했다. 하지만 별로 안 위험하면 친해지라고 했다. 이 녀석은 확실히 후자다. 게다가 루벨 가의 노집사처럼 음흉한 기색도 없었다. 멍청한 건지 대범한 건지, 민낯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엔지를 보던 유니의 뺨이 살짝 부풀었다. 아가씨를 닮은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시에 아가씨를 닮아서 더 모질게 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니는 결국 못 이기는 척 종알댔다.

16562805240745.jpg“너 침대 시트는 갈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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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시각, 레나는 제복을 갖춰 입고 그날의 바쁜 일정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첫 번째 일정은 남부공을 만나는 일이었다. 레나는 남부공의 시종을 따라 궁내의 한 빈실에 도착했다. 그 앞에서 남부공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16562805269408.jpg“왔군.”

남부공의 목소리는 어두웠다. 실없이 벙긋대던 어제와는 영 딴판이었다. 레나 역시 웃음기를 지우고 눈으로만 인사했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달랐다. 문 너머에 위독한 환자가 있는 탓이었다.

16562805269478.jpg“여기까지 걸음을 해주시다니…….”

시종이 기별을 넣자 기다리던 하인들이 서둘러 나왔다. 그들은 황송해하며 남부공과 레나를 방 안으로 모셨다. 그대로 침실까지 들어가자 쌕쌕대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남부공이 몸소 찾아 왔지만 침대에 누운 사람은 일어나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일어날 수 없었다. 근육이 모두 말라비틀어져,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꼴이었으니까.

16562805269408.jpg“상태는 좀 어떤가?”

16562805269478.jpg“손을 쓸 방도가 없어 묽은 죽만 드리고 있습니다.”

침대에 누운 사람은 전날 클라비스에게 생기를 빼앗긴 남부의 기사였다. 유독 목이 굵고 어깨가 다부지던, 하지만 더 이상은 그렇게 표현할 수 없게 된 사내가 초라하게 누워 있었다.

16562805269478.jpg“의료사의 말로는 영양실조라고 합니다. 잘 드시면 차차 회복하겠지만, 한계까지 쇠약해진 터라 이전처럼 돌아오긴 어려울 거라 했습니다.”

남부공은 말없이 긴 숨을 내쉬었다. 침묵하는 노인의 눈에 서린 것은 이 비정한 상황에 대한 책임감과 분노였다.

16562805269408.jpg“내 말 들리나?”

남부공이 침대에 누운 사내에게 몸을 숙이며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간신히 눈을 떴다.

16562805269408.jpg“사람과 마차를 준비할 테니 움직일 수 있게 되면 집으로 돌아가게. 부친에겐 내가 미리 서신을 보내두겠네.”

남자는 잠에 취한 사람처럼 천천히 눈동자를 움직여 남부공과 그 뒤에 선 레나를 번갈아보았다. 그러더니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울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짐승처럼 울었다. 눈에도 입에도 물기가 없어 힘겹게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러곤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남부공과 레나 둘 다에게 하는 말이었다. . . . 지푸라기 인형 꼴이 된 기사를 보고 나온 레나와 남부공은 착잡한 얼굴로 마주 앉았다. 전장에서 살았던 두 사람은 부상과 죽음이 익숙했다. 그럼에도 이번엔 초연할 수 없었다. 벌어질 필요가 없는 일이 벌어진 탓이었다. 차라리 망자에게 잃었다면 그러려니 할 텐데, 황제의 억지에 기사를 잃고 나니 전장에서보다 더한 패배감이 밀려왔다. 더 미칠 노릇인 건 황제의 그러한 폭거에 항의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거였다. 제국의 모든 것은 황제의 손바닥 안에 있었고, 공작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남부공은 쓰린 마음에 거뭇해진 눈가를 손으로 짚었다. 그때 레나가 침묵을 깨며 말했다.

16562805298186.jpg“추기경의 권능은 망자가 아니라 사람을 해치는 힘 같네요.”

남부공은 레나가 클라비스를 비난하는 줄 알고 끄덕여 동조했다. 하지만 레나가 하고 싶은 얘기는 고작 그런 불평이 아니었다.

16562805298186.jpg“생기를 거두는 힘이라니, 망자에겐 아무 소용없지 않나요?”

레나가 덧붙여 말하자 남부공의 표정도 짐짓 바뀌었다. 황제의 권능은 신이 망자와 싸우라고 부여한 힘. 그러면 당연히 망자들에게 유효한 능력이어야 한다. 하지만 클라비스의 쇠약은 망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에게나 통할 힘이었다.

16562805269408.jpg“……권능을 사용하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네.”

레나의 의심에 남부공은 저도 모르게 해명했다.

16562805269408.jpg“그 방법은 공작들만이 알고 있지. 클라비스도 마찬가지일 걸세. 어제 본 것이 그의 능력 전부라고 속단하지 말게.”

황제의 권능을 함부로 의심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태도는 경솔한 젊은이를 타이르는 것보다 두려운 사실을 외면하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묘한 낌새에 레나가 되물었다.

16562805298186.jpg“저하께서도 여러 방법으로 권능을 사용하셨나요? 생각해보니 권능을 쓰시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레나는 용병 시절을 잠시 떠올렸다. 말마따나 남부공은 전장에서 권능을 쓰지 않았다. 남부의 업화는 북부의 참격과 더불어 망자 떼를 상대하기에 더 없이 좋은 능력인데, 정작 레나는 남부에서 작은 불씨조차 본 일이 없었다. 레나의 물음에 남부공이 불편한 얼굴로 대답했다.

16562805269408.jpg“불엔 이성이 없네. 태워야 할 것과 태우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할 줄 모르지.”

16562805298186.jpg“병사들이 휘말릴까 봐 못 쓰셨다는 건가요?”

16562805269408.jpg“단지 그런 거라면 혼자 멀리 나가 불덩이라도 던지고 왔겠지. 하지만 아닐세.”

16562805298186.jpg“그럼…….”

16562805269408.jpg“불을 자주 일으키면 불에 홀리게 되네. 그래서 종국엔 닥치는 대로 태우게 되지.”

아리송한 말에 레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 남부공은 덤덤히 덧붙였다.

16562805269408.jpg“내 조부의 얘길세. 매번 망자들을 태우다가 종국엔 식솔들까지 태우고 스스로도 불타서 돌아가셨지.”

남부공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미 반백 년이나 지나서 새삼 괴로워할 필요도 없는 옛날이야기였다. 남부공은 불에 홀린 조부의 손에 일가족을 잃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과 누이들도. 첫 번째 아내와 자식도. 이후 그는 조부의 뒤를 이어 권능을 물려받았으나 그 힘을 끔찍이 여겨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16562805298186.jpg‘남부는 이거구나.’

레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몰래 생각했다. 린의 가학심과 북부의 처형강박 같은 권능 이면의 저주. 린의 말대로 다들 드러내지만 않을 뿐이었다. 하나둘 맞춰지는 정황에 레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타인의 생명을 훌쩍 앗아가는 클라비스에겐 과연 어떤 저주가 내렸을까? 어지간히 끔찍한 저주여도 그 인간이라면 기분 나쁘게 실실대며 웃을 것 같았다. 그럴싸한 가설과 함께 클라비스의 생글대는 낯이 떠올라 레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한편 남부공은 레나의 생각을 까맣게 모르고 탄식했다.

16562805269408.jpg“하여튼 난감하게 됐군. 기사들의 기강을 잡아야 할 텐데 이래서야.”

어제 오전만 해도 이제 기사들이 레나를 고분고분 따르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일이 터졌다. 남부공은 어제 일로 그 애송이들의 심경이 또 널뛰겠구나 생각하며 이마를 짚었다. 그래서 레나는 차라리 잘됐다 싶어 말했다.

16562805298186.jpg“원정은 그렇다 쳐도, 곧 균열을 지키는 순서가 올 텐데 난감하네요.”

16562805269408.jpg“아무렴 보초도 못 설까.”

16562805298186.jpg“가만히 서 있는 건 가능하겠죠. 하지만 균열로 망자들이 접근이라도 하면…….”

레나의 염려에 남부공은 입을 굳게 닫았다. 두엄의 궁에 생긴 균열은 각 진영에서 한주씩 돌아가며 지키기로 했다. 그리고 이미 한 주간 균열을 경계한 북부는, 그사이 꽤 많은 수의 망자를 처단했다. 그 사실을 떠올린 남부공은 금세 심각해졌다. 그 옆에서 레나가 눈치껏 덧붙였다.

16562805298186.jpg“저 혼자 균열을 지키기는 힘들어요. 싸우는 것과 막는 건 별개니까요.”

맞는 말이다. 집행자는 덤벼드는 망자들을 얼마든 도륙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황궁으로 돌진하는 놈들을 혼자서 다 잡아둘 수는 없었다. 만약 레나의 옆으로 빠져나간 망자가 황궁을 어지럽힌다면 그건 전부 남부의 무능이자 과실, 그리고 책임이 될 것이다. 레나의 고백에 남부공의 얼굴은 고뇌로 물들었고, 미끼를 던지고 뜸을 들이던 레나는 그쯤에서 본론을 꺼냈다.

16562805298186.jpg“빈틈을 메우려면 외부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겠어요.”

16562805269408.jpg“외부라 함은?”

16562805298186.jpg“예를 들어 동부라든가…….”

16562805269408.jpg“동부? 그 개놈이 퍽이나 돕겠군!”

하지만 레나의 밑그림이 무색하게, 남부공은 동부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욕부터 내질렀다.

16562805269408.jpg“되도 않는 소리 말게! 동부에게 도움을 청하느니 망자들과 협정을 맺지!”

심지어 남부공은 동부공을 망자보다 몹쓸 상대로 여겼다. 그 격렬한 거부에 레나도 슬슬 궁금해졌다. 남부공은 왜 동부 얘기만 나오면 경기를 일으키며 화를 내는 걸까? 혈기왕성한 꼬맹이도 아니고 다 크다 못해 가실 날이 머지않은 어르신께서. 단지 성미가 안 맞아서라기엔 너무 과민해 보여, 레나는 솔직히 물어보았다.

16562805298186.jpg“혹시 동부공하고 무슨 일 있으세요?”

16562805269408.jpg“일? 허! 그깟 놈하고 일은 무슨 일! 공작의 품위는커녕 사람 된 도리도 저버린 금수 같은 놈과 상종하고 싶지 않을 뿐일세!”

새하얀 눈썹과 수염 사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것으로 보아 진심으로 열 받은 모양이었다. 남부공은 그렇게 소리치고도 분이 안 풀리는지 한참을 더 씨근덕대며 린을 욕했다. 그러더니 동부라는 화제를 꺼낸 레나에게도 화살을 돌렸다.

16562805269408.jpg“그런데 경은 요사이 왜 계속 동부 타령인가?”

설상가상 이 영감님은 눈치도 빨랐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레나가 주춤하자 남부공이 험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16562805269408.jpg“북부에 루벨이 있어서 동부로 눈을 돌리는 건가, 아니면 그 망할 종자에게 개인적인 관심이라도 있는 건가?

정말이지 빠져나갈 구멍 없는, 노인네답게 꼬장꼬장한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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