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어디까지 알아냈어?2020.09.14.
“북부에 루벨이 있어서 동부로 눈을 돌리는 건가, 아니면 그 망할 종자에게 개인적인 관심이라도 있는 건가?
남부공의 가감 없는 물음에 레나도 가감 없이 대답하고 싶었다. ‘둘 다요’라고. 하지만 그랬다가는 남부공이 정말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것 같아 차마 그러지 못하고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러자 남부공이 더 험악해진 얼굴로 외쳤다.
“누차 말했지만 다시 하겠네, 동부공과 상종하지 말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대리인이! 겉모습만 보고 홀릴 만큼! 모자라다고 생각하고 싶진 않으니!”
남부공은 탁자까지 탕탕 내리치며 음절마다 힘을 주어 말했다. 그 강력한 거부에 레나는 더 곱게 웃었다.
‘미치겠네.’
웃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남부공의 린 기피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심지어 유치하게 내 편 네 편을 갈라 동부공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말을 하면 곧장 적으로 간주할 기세였다. 그래서 난처함을 숨기고 할 말을 고르는데, 마침 구원의 손길이 내려왔다.
“말씀 중 죄송합니다. 레나 경, 이제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남부공의 격양을 뚫고 차분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곁에서 지켜보던 남부공의 비서가 요령껏 말을 끊어준 거였다.
“클라비스 추기경이 온실 정원에 초대하셨다고요.”
“아, 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네요.”
비서가 일부러 다음 일정을 말하며 열기를 식혔고, 레나는 냉큼 끄덕이며 일어날 준비를 했다. 레나는 남부공을 만난 이후 클라비스와의 티타임을 가질 예정이었다. 그게 오늘의 두 번째 일정이자, 이른 아침 레나의 잠을 깨운 불편한 초대였다.
“온실 정원엔 가본 적이 없으실 테니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비서가 정중히 앞장섰고, 마침 필요한 도움이라 레나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부공은 그만 가보겠다고 인사하는 레나를 끝까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로써 추궁에서 벗어난 레나는 복도로 나오자마자 긴 숨을 내쉬었다. 그에 지켜보던 비서가 달래듯 말했다.
“곤혹스러우셨죠. 저하께서 워낙 쌓인 게 많으셔서.”
“그래 보이세요. 정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동부공의 불손함에 대해서라면 유명한 일화가 잔뜩 있지요.”
황제가 건국기념일마다 불러들이는 탓에 공작들은 좋든 싫든 매년 만났다. 그때마다 동부공은 거만하고 집요하게 시비를 걸며 다른 공작들을 자극했다. 얼음 같은 이우라가 아직 소년이던 동부공의 멱살을 잡은 적도 있을 정도이니, 얼마나 안하무인하게 굴었는지는 말 다한 셈이다. 하지만 남부공이 린을 혐오하는 이유는 단지 불손한 태도 때문이 아니었다.
“함부로 언급하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만, 사실 저하께서 동부공에게 구혼장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구혼장을요?”
“네. 동부공이 막 성년이 됐을 때, 경이 용병으로 오기 직전에 말이죠.”
상상도 못 한 말에 레나의 눈이 커졌다. 구혼장이라니, 저 자존심 강한 남부공이 동부공에게?
“저하의 친족은 아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따님도 손녀 분도 안 계시니까요.”
“그럼 대체 누구의……?”
“남부의 어느 영애였습니다. 황궁에 머물던 그 레이디가 동부공에게 반했다며 아버지를 졸랐고, 그 아버지가 저하께 졸랐죠.”
“조른다고 들어줄 일인가요?”
“당시엔 그만큼 절박했으니까요.”
집행자라는 용병이 나타나기 전이였다. 망자들은 끝없이 몰려오고 북부의 도움은 갈수록 요원해져 하루하루 벼랑 끝으로 밀려나던 시기였다. 그러던 중 동부공에게 구혼장을 보내달라는 귀족의 청은 남부공을 갈등하게 했다. 우선 싫었다. 그 망나니 같은 놈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구혼장을 보내는 게 자존심 상했다. 그리고 놈을 둘러싼 지저분한 소문 때문에라도 남부의 딸을 보내는 게 꺼려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혹했다. 동부공이 남부의 사위가 된다면 이쪽 상황을 지금처럼 관망하진 않을 터. 게다가 동부공을 둘러싼 소문도 최근엔 잠잠했고, 여자 쪽에서 먼저 좋다고 하니 억지로 등을 떠미는 것도 아니었다. 동부공은 여전히 싫지만 그의 힘은 탐이 났다. 어린놈이 제법 그럴싸하게 영토를 꾸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때였다. 결국 남부공은 못 이기는 척 동부로 구혼장을 보냈다. 그러자 동부공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이렇게 답해왔다.
―남부 여자에겐 관심 없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더 공손히 청하도록.
동부로부터의 회신은 그게 다였다. 그것은 도발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모욕이자, 남부공의 긴 생애를 통틀어 가장 처참한 거절이었다.
“그 일로 동부공이라면 치를 떨게 되셨죠.”
“……그럴 만하네요.”
비서의 설명에 레나는 결국 수긍했다. 남부공은 그 일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동부공을 잠깐이라도 탐냈던 자신을 혐오했고, 그 일을 지우려고 린을 더 격렬히 미워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지난 이야기고, 저하께서 과민하게 반응하시는 건 동부공보다는 경 때문입니다.”
“저요?”
“이런 말씀 외람되지만, 저하께서는 경을 아들로 삼고 싶어 하셨습니다.”
“……딸이 아니라?”
“그땐 남자인 줄 아셨으니까요.”
비서의 뜬금없는 말에 레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그랬는데 경의 사정을 듣고 포기하셨죠. 내색은 안 하셨지만 경이 루벨 후작의 딸이라고 할 때 꽤 난감해 하셨습니다.”
단지 성별이 다를 뿐이면 아들이 아니라 딸로 삼아도 괜찮았다. 하지만 루벨 후작이라는 아버지가 멀쩡히 존재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름 모를 귀족도 아니고 루벨 후작 정도면 일이 복잡해지죠. 그래서 경을 슬하로 들이는 일은 결국 단념하셨습니다.”
비서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웃었다. 마치 개나 고양이를 키우려다 말았다는 듯 가벼운 투였다. 하지만 레나는 전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이런 얘기 다 해도 괜찮으세요?”
“숨겨 뭐 하겠습니까, 이제 와서.”
레나가 염려했지만 그는 비서답지 않게 솔직했다. 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남부공은 늙은 부모가 자식에게 기대듯 레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레나가 앞서 저지른 여러 차례의 독단을 처벌하지 않은 게 그 증거였다. 레나는 남부공의 초대로 입궁했으면서 멋대로 후작을 찾아가고, 제복 차림으로 무도회를 휘젓고, 첫 원정에 대한 모든 것을 즉흥적으로 결정했다. 만약 다른 이가 그랬다면 진즉에 처벌받고 쫓겨날 일이었다. 하지만 레나는 남부공에게 허락은커녕 양해조차 구하지 않았고, 남부공은 뒤늦은 해명만 요구할 뿐 그에게 어떤 불이익도 주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남부의 권력이 어디에 쏠려있는지는 자명했다.
“그래서 걱정이 크신 겁니다. 경이 혹여 동부로 가실까 봐.”
남부공을 오랫동안 보좌하고, 그 못지않게 남부를 염려하는 비서는 레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어차피 네가 결정하면 우리는 막지 못하니, 알아서 헤아려주라는 심정으로. 비서는 그렇게 말하며 레나의 안색을 살폈다. 늘 침착하던 레나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언가 불편한 구석이 생긴, 그래서 기분이 복잡한데 애써 웃어내는 표정이었다.
“버림받는 기분을 알아요.”
레나가 그런 얼굴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니 제가 먼저 배신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안심하세요.”
“그렇게 말씀해주신다면야…….”
비서는 레나가 혹시 언짢아하는지 염려했다. 그래서 레나는 잠시 머금었던 쓴웃음을 삼키고 다시 말짱히 웃었다. 그 사이 그들은 호수의 궁 외부에 있는 온실 정원에 도착했다. 더 이상 안내가 필요 없게 되자 비서는 인사하며 돌아섰다. 그로써 잠시 혼자가 된 레나는 방금 들은 이야기를 가만히 곱씹었다.
‘설마 그런 생각을 하셨을 줄은.’
자식으로 들이려 했다니. 상상도 못 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딸을 팔아 후작이 된 친부 앞에 공작의 수양딸이 되어 등장할 수도 있었던 건가? 유치한 상상이지만 조금 짜릿하다. 덩달아 양부가 된 남부공과 약혼자가 된 린, 그리고 동생이나 다름없는 유니가 한 식탁에 둘러앉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가족 놀이를 하면 재미있긴 하겠다. 린과 남부공은 애매해진 관계에 어색해하다가 덜컥 싸우고, 유니는 그 모습을 구경하다 말 몇 마디로 어른들을 부끄럽게 하겠지. 그때 레나가 할 일은 그 사이에서 웃는 것뿐이다. 그런 광경이 눈앞에 선히 그려져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이 달콤함을 조금 더 누리고 싶었지만, 레나는 숨을 길게 내쉬어 들뜬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곤 신기루처럼 반짝이는 온실 정원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만개한 꽃이 어우러진 길 끝에 한 남자가 보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를 보자 애쓸 필요도 없이 마음이 식었다. 클라비스가 티 테이블에 앉아 레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옷차림이 평소와 달랐다. 그는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추기경의 성복 대신 화려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마치 추기경이 아니라 서부공이던 시절의 그를 과거에서 꺼내온 듯한 차림새였다. 달리 말하면 6년 전 레나를 균열로 밀어 넣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를 본 레나는 일순 기가 막혔다. 양심이 있는 인간이라면 차마 못 할 짓이다. 하지만 클라비스는 악마 새끼나 할 법한 발상을 실행에 옮겨놓고 뻔뻔히 웃었다. 마치 성화 속 천사처럼, 아름답고도 고결하게.
. . .
“정말 왔네.”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클라비스가 눈을 곱게 접으며 말했다.
“안 올까 봐 걱정했어.”
“올 수밖에요. 누구의 명인데.”
“고분고분 착하네.”
레나는 테이블 앞에 서서 적당히 예의만 차리는 수준으로 답했다. 클라비스는 그마저도 기꺼운지 짙게 웃었다. 하지만 일어나서 레나를 에스코트해주지는 않았다.
“더 예쁘게 입고 왔으면 의자를 빼줬을 텐데.”
대신 아쉬움이 물씬 담긴 목소리로 중얼댔다. 마치 소홀한 모습으로 나타난 연인에게 서운해하는 투였다.
“의자 정도는 직접 뺄 수 있어서요.”
미친 건가 싶었지만 레나는 태연히 화답했다. 그러곤 일부러 드르륵 소리가 나게 의자를 끌어당겨 사뿐 앉았다. 그 거친 소리에 클라비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힐끗 보니 레나의 행동이 귀여워 미치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름다운 남자가 맑게 웃는 모습은 객관적으로 보기에 좋았다. 하지만 레나의 얼굴에선 오히려 웃음기가 싹 가셨다. 레나의 눈빛이 싸늘해지자, 클라비스는 더 농염하게 눈웃음을 쳤다.
“인상 펴, 첫날엔 잘 웃어줬잖아.”
“그땐 이 정도일 줄 몰랐으니까요.”
“뭐가?”
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클라비스는 테이블에 몸을 숙이며 되물었다.
“응? 뭐가 이 정도인 줄 몰랐어?”
“그쪽의 변태성이요.”
“푸핫!”
레나의 대답에 클라비스는 아예 폭소를 터트렸다. 그는 큰소리로 한참이나 웃더니, 웃느라 젖은 눈가를 쓸며 신음했다.
“그런 얘기 살면서 처음 들어봐.”
“감사할 일이네요. 주변에 예의 바른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니.”
“아니, 비굴한 사람이 많았지. 우리 레나 양하고는 다르게 말이야.”
누가 너희 레나야. 레나는 지나치게 살가운 클라비스를 보며 괜히 나왔나 생각했다. 사실 웬만하면 나오고 싶지 않았다. 싫다는 감정보다는, 무가치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레나가 초대에 응한 이유는 거절해도 계속 귀찮게 굴 것 같아 한 번 보고 끝내는 편이 나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런 얘기 하려고 부르신 건가요?”
“으응, 다른 중요한 얘기도 많지만 이런 얘기도 하고 싶었어.”
레나는 그만 본론으로 넘어가고 싶었지만 클라비스는 끝까지 능글거렸다.
“레나 양은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하고 싶은 말은 불러낸 쪽에 있겠죠?”
“차갑긴. 이래서 더 좋아하면 손해야.”
“그럼 더 할 말이 없으신 줄 알고…….”
연이은 허튼소리에 레나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거의 동시에 클라비스가 손을 뻗어 레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레나는 놀라지 않고 클라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하고 싶은 말이 없어?”
클라비스는 애교 부리듯 올려다보며 물었다.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한껏 내리깐 목소리마저 달콤했다.
“그거 너무 이상하잖아. 따져야지,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지. 안 그래? 응?”
하지만 정작 초승달 모양으로 꾸며 웃는 그의 두 눈은 아무 감정 없이 시렸다.
“그런데 넌 왜 다 끝난 얼굴이지? 나하곤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는데. 미워하지도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고, 관심 갖지도 않고.”
클라비스가 붙잡은 레나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그러곤 레나의 작은 손톱에 입을 맞추며 중얼댔다.
“정말 이상하잖아.”
다음 순간 가늘게 웃던 클라비스의 눈빛이 바뀌었다.
“레나 루벨.”
클라비스가 나긋하던 목소리의 결을 바꿔 추궁했다.
“어디까지 알아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