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귀엽고 불쌍하던 아이는2020.09.17.
“어디까지 알아냈지?”
그렇게 묻는 클라비스의 목소리는 심문하는 왕처럼 무거웠다.
“무덤에서 어디까지 보고 온 거야?”
생글대던 평소의 얼굴은 전부 가짜였던 것처럼, 적막이 내린 그의 안면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레나는 봄에서 겨울로 바뀐 그의 얼굴을 낯설게 바라보다 속삭였다.
“궁금하세요?”
“그러니 불러서 묻겠지?”
“그럼 더 공손하게 물어봐야죠.”
레나의 담담한 질책에 클라비스가 소리 내지 않고 웃었다. 불처럼 화를 내거나 서릿발처럼 몰아붙여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오히려 신기하다는 듯 중얼댔다.
“어떻게 이런 대장부가 됐지? 무서워서 숨소리도 크게 못 내던 아가씨가.”
“어린애한테 이겨서 많이 자랑스러우신가 봐요.”
“자랑스럽다기보다는 신기해서. 본질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니거든.”
클라비스의 말에 레나는 조용히 미소했다. 이렇게 뻔뻔하고 외람된 인간과 굳이 말을 섞어야 하나 싶은 표정이었다. 노골적인 경멸보다 더한 무시였지만, 클라비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레나의 손을 만지작대며 말을 이었다.
“그땐 참 귀여웠는데. 강아지처럼 사랑해달라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찾아왔다가, 팔아넘긴다고 하니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울었지. 열두 살이나 돼서 말이야.”
열두 살. 클라비스는 후작과 달리 레나의 나이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레나가 스스로 밝힌 일이니까.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보통은 화를 내야 정상 아닌가?”
열두 살, 나름의 주관이 서는 나이다. 아직 미숙할지언정 판단할 수 있는 나이이고, 자신을 해치려는 손길에 저항하고 화낼 수 있는 나이다. 하지만 당시의 레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왜 이러냐고 미쳤냐고 따지지 않았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다른 사람을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덜덜 떨며 빌기만 했다. 마치, 신에게 버림받은 것처럼.
“그런 애였어요, 레나 루벨 양은. 연약하고 의존적이고 눈치 보고 매달리기에 급급한, 그런 귀엽고 불쌍한 아이였다고.”
클라비스가 레나의 손을 지분거리며 즐겁게 속삭였다. 그러더니 그날의 기억을 부추기려는 듯 더 은근히 말했다.
“기억나? 나한테도 그랬잖아. 마차에서, 울면서도 미움받지 않으려고 애쓰고, 어떻게든 동정받고 싶어서 아양을 떨고.”
루벨 저택에서 서부공의 성까지는 마차로 열흘이 걸렸다. 그래서 6년 전의 레나와 클라비스도 제법 긴밀한 시간을 보냈다. 비좁은 마차에서 한나절을 마주 보고, 좋은 싫든 함께 먹고 함께 쉬었다. 무려 열흘간. 팔려온 입장에선 소름 끼치게 싫은 일이겠지만, 의외로 레나는 자신을 사들인 클라비스를 싫어하지 않았다. 증오하거나, 대들거나, 반항하지 않았다. 도망치려고 하지도 않았다. 레나는 자신의 처지에 충격을 받아 울더라도 클라비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호감을 사려는 듯 꼼지락대며 눈치를 봤다. 레나가 클라비스에게 자신의 진짜 나이를 말해준 까닭도 그 때문이었다.
―경, 저는 사실 열두 살이에요. 열 살이 아니에요.
레나는 떨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팔려가는 게 싫어서 괜히 꾀를 부리는 게 아니라, 경께서 잘못 알고 계신 사실 때문에 곤란해지실까 봐 걱정된다는 투로. 그에 클라비스가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자, 어린 레나는 뺨을 발갛게 물들였다. 심지어 그렇게 우물대는 모습에도 애교가 가득했다. 힐끗대며 눈을 맞추는 게 자길 좀 봐달라는 것 같았다. 우습게도 사랑스러운 행동이었다.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그럼에도 상대의 마음을 녹이는. 모르고 한 거면 천상 여우고, 알고 한 행동이면 장래가 심히 걱정스러운 행동이었다.
“솔직히 귀여웠어. 키우고 싶을 만큼. 다른 사람이었으면 깜빡 넘어갔을 거야.”
클라비스는 그렇게 말하며 레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랬던 애가 고작 몇 살 더 먹었다고 강한 척하는데 왜 안 신기하겠어. 그치? 어떻게 겁을 줘야 전처럼 앙앙 울까?”
클라비스의 눈이 묘한 웃음을 머금고 레나를 담았다. 네 본 모습을 다 아는 사람에게 그렇게 뻣뻣하게 굴 거냐는 듯, 거만하기 짝이 없는 눈빛이었다. 레나는 표정 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더니 아직 자신의 손을 꼭 쥔 클라비스의 손을 잠자코 잡았다. 뜻밖의 손길에 클라비스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물으려는데, 직후 클라비스의 시야가 덜컥 뒤집혔다.
“힉……!?”
클라비스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저도 모르게 다리를 뻗었다. 하지만 이미 땅에서 떨어진 두 발은 허공을 휘저었고, 대신 뒤로 확 넘어간 상체는 하체보다 땅에 가까워져 균형감을 완전히 잃었다. 떨어진다고 생각한 찰나, 턱 소리가 나며 기울던 몸이 멈췄다. 클라비스는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앞에 보이는 건 자신을 내려다보는 레나의 얼굴과 온실의 천장이었다. 개소리에 지친 레나가 클라비스의 손을 잡아 의자째로 넘겨버리고, 그가 완전히 넘어가기 전에 반대편 손으로 의자 등받이를 잡아준 거였다. 덕분에 의자는 네 개의 다리가 아니라 두 개의 다리로 클라비스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클라비스를 엎어버린 레나는, 기울어진 의자에 눕듯이 앉은 클라비스의 위로 상체를 숙였다. 그러더니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물었다.
“그래서?”
“뭐……?”
“그래서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거야?”
숨결과 함께 와 닿는 레나의 속삭임은 차분했다. 앞의 맥락을 잘라낸다면 상냥하게도 들릴 지경이었다.
“옛날얘기로 본심을 떠볼 생각이야?”
레나가 나긋이 웃으며 중얼댔다.
“도발하려면 제대로 하던가, 이래선 혼만 나지.”
클라비스는 정말 놀란 눈으로 레나를 바라보았다. 레나는 불쾌한 기색 없이, 그저 유감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바보 같은 어린애를 훈계하는 투였다. 클라비스가 그 얼굴을 보고 입을 달싹이자, 레나가 먼저 말했다.
“하지만 예쁘게 입고 왔으니까 의자는 넣어줄게.”
직후 탕 소리가 나며 기울었던 의자가 다시 세워졌다. 레나는 의자 등받이를 던지듯 밀었고, 누웠다가 도로 앉게 된 클라비스는 또 한 번 얼떨떨한 얼굴이 되었다.
“표정 한 번 가관이네요.”
“하…….”
“안정이 필요하신 듯하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레나는 클라비스를 뒤집었다가 다시 일으켜놓고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다. 클라비스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아, 기다려, 가지 마. 미안해. 앞서 한 얘긴 사과할게.”
그는 아까 변태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보다 더 신나게 웃어대더니, 미안하다는 말까지 하며 레나를 붙잡았다.
“정말 신기해서 그런 거야. 그런데 이건 더 놀랍네.”
“뭐가 그렇게 신기하죠?”
“음?”
“제가 더 이상 연약하고 의존적이고 눈치 보기에 급급하지 않은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아, 말이 그렇게 되나?”
레나의 반문에 클라비스는 더 즐겁게 웃었다. 그에 대한 레나의 태도가 어떻든, 그는 레나가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투였다. 실제로 그는 레나가 보여주는 반응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좋았다. 무덤에 던져진 지 6년 만에 나타난 레나 루벨. 클라비스에게 레나는 땅 깊숙이 묻었다가 다시 파낸 보물과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누군가를 무덤으로 밀어 넣을 때마다, 이 가련한 희생양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바랐으니까.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한 아이가 돌아왔다. 클라비스는 그것만으로도 미치게 기뻤지만, 무작정 희망을 품지는 않았다. 앞서 무수히 실망했던 그는 신중을 기하며, 최대한 불리한 조건으로 레나를 또 한 번 무덤에 밀어 넣었다. 맨몸으로 얼마나 해낼지 지켜볼 셈이었다. 그 결과 레나는 혼자 망자의 성을 함락하고 왕의 심장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으로도 증명은 충분했지만 클라비스는 조금 더 확인하고 싶었다. 혹시 황제처럼 미치광이가 된 건 아닐까, 이빨을 감추고 조용히 미쳐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긁어보았다. 결코 평범하다고 볼 수 없는 레나의 초연함을 벗겨내기 위해 가장 아픈 구석을 들춰보았다. 하지만 레나의 반응은 여상했다. 치욕을 느낄법한 말에도 의연하며, 끝까지 평정을 잃지 않고 자신의 비열한 언사를 루비드의 버릇없는 장난과 같은 급으로 대했다. 그래서 레나를 부단히 시험하던 클라비스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레나의 강인함을, 그 안팎의 견고함을.
“앉아, 중요한 얘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클라비스가 한층 담백해진 태도로 레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레나는 가만히 서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무언의 항의에, 클라비스는 잠깐 눈치를 살피다 도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곤 기꺼이 정정했다.
“부디 앉아 주시겠습니까, 레나 경?”
“정 원하신다면.”
레나는 그제야 다시 자리에 앉았고, 그 천연덕스러운 모습에 클라비스는 다시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잡설이 길었으니까 솔직히 말할게. 경에게 부탁이 있어.”
그가 환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부탁이라는 말에 레나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절대 호의적이라 할 수 없는, 어디 계속해 보라는 식의 미소였다. 클라비스는 그 야박함을 즐기며 말을 이었다.
“있잖아, 87년 7월 30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
“……황제 폐하가 독살 시도를 당했던 날 아닌가요?”
뜻밖의 화두에 레나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87년 7월 30일. 제국민이라면 모두가 기억하는 날이다.
“맞아. 그날 누가 황제의 차에 독을 넣었어. 이유야 뻔하지. 사실 반역이 안 일어나는 게 이상한 꼴이잖아?”
클라비스의 표현은 신랄하고도 정확했다. 오로지 힘으로 군림하는 폭군과 양심을 지키다 처형된 충신들, 대신 요직을 차지한 간신들, 그로써 사리사욕만 추구하게 된 위정자들, 그 아래 갖은 이유로 착취당하는 제국민들, 그럼에도 놀아나기 바쁜 귀족들. 모두가 익히 아는 제국의 실상이라, 황제가 시해당해야 하는 이유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날 황제는 독을 삼켰지만 죽지는 않았어. 피를 토하고 고통스러워했지만 끝내 살아남았지.”
“그 얘길 지금 왜 하는 거죠?”
“응, 그거 내가 한 거거든.”
클라비스의 말에 레나의 눈이 커졌다. 그걸 놓치지 않고 클라비스가 웃었다.
“놀라네. 이건 몰랐구나?”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물론 알지. 그때 니힐이 한 짓도 옆에서 똑똑히 봤고.”
니힐은 독살 시도를 당한 날, 피맺힌 기침을 하며 말했다. 내 고통을 제국과 나누고, 모든 제국민이 반역자를 원망하게 만들겠다고. 니힐은 자신의 선언을 지키기 위해 귀족 87명과 관료 7명, 그리고 황궁 밖의 제국민 30명을 처형했다. 그날이 87년 7월 30일인 탓이었다.
“설마 그것도 안 통할 줄은 몰랐어. 남부의 큰 곰도 단숨에 죽이는 독이었거든.”
제국의 가장 경악스러운 사건에 대해 말하면서, 정작 그 원흉인 클라비스는 아무런 가책도 없어 보였다.
“사실 독만 안 통한 것도 아니야. 별별 수를 다 써도 소용이 없더라고.”
다만 자신의 실패를 소소하게 아쉬워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 거야.”
“그래서?”
“황제가 도무지 죽지를 않아서, 널 사다가 무덤에 밀어 넣은 거라고. 황제하고 똑같은 괴물을 만들어 보려고 말이야.”
게다가 그의 뻔뻔함은 눈앞의 상대에게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괴물이라는 말에 레나의 시선이 한층 차가워졌지만, 클라비스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무덤에서 후작이 독을 썼지?”
“다 알면서 왜 묻죠?”
“으응, 궁금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알려주려고. 그거 니힐이 마신 것과 같은 독이야.”
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신 클라비스의 입술은 유려한 호를 그렸다.
“그 독을 이겨낸 사람은 황제뿐이었어. 며칠 전까진 말이야.”
클라비스는 그 사실이 행복해 미치겠다는 듯, 레나를 보며 속삭였다.
“너도 죽지 않게 된 거지? 황제처럼.”
생과 사의 절대적인 경계를 거슬러 돌아온 레나 루벨. 갑자기 나타나 여봐란듯이 제국의 실력자들을 농락하는 그 모습은 클라비스가 오랜 시간 상상해온, 위대한 구원자의 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클라비스는 기대와 열망을 숨기지 않고 레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에 침묵하던 레나는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걸 왜 또 묻는지 모르겠네요.”
클라비스가 바보 같은 질문을 한다는 투로, 힐난하듯 덧붙였다.
“이미 몇 번이나 봤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