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시를 좋아했다 (41/208)

41화. 시를 좋아했다2020.09.21.

16562805842003.jpg“너도 죽지 않게 된 거지? 황제처럼.”

클라비스가 중대한 일을 논하듯 은밀히 물어왔다. 그래서 레나는 비웃지 않을 수 없었다.

16562805842009.jpg“그걸 왜 또 묻는지 모르겠네요. 이미 몇 번이나 봤으면서.”

참으로 가소로워서, 연거푸 확인하는 행동 저변에 어떤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지 뻔히 보여서. 그래서 레나는 아직도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 남자를 차라리 동정했다. 마음만 먹으면 이 남자에게도 고통을 줄 수 있지만, 과거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무자비하게 굴 수도 있지만 레나는 그러지 않았다. 레나가 받아본 적 없는 자비를 베푸는 이유는 단순했다. 그건 레나가 한 편의 시를 외운 까닭이었다.

16562805842013.jpg

  *** 사는 동안 무수히도 많은 금이 생겼습니다. 마음의 잔금이 햇살에 찔린 물결만큼 많지만 상처 입었다는 이유로 망가지진 않으려 합니다. 나를 강하게 하는 것도 약하게 하는 것도 당신이 아닌 내 자신임을 알기에 그럼에도 나를 미워하는 당신에겐 차라리 꽃을 바치겠습니다. 레나는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다. 수필이나 산문집도 좋아하고, 소설이나 시도 좋아했다. 예쁜 표현으로 지어진 문장은 가리지 않고 아꼈다. 그 중에서 레나가 가장 사랑한 건 제국의 고전작가인 비트라의 시였다. 그의 문장은 한낮의 볕처럼 따스해서, 레나는 그 많은 시구들을 전부 외우고 다녔다. 그래야만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16562805842017.jpg“주인님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

16562805842017.jpg“이건 주인님께서 지시한 일이에요.”

16562805842017.jpg“이러시면 주인님께서 실망하실 거예요.”

별장에서 지내던 시절, 어린 레나를 움직이는 말은 언제나 ‘주인님께서’로 시작했다. 직접 만나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레나의 모든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좌우되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절대적인 지배력을 발휘하는 존재. 세간에선 그런 존재를 신이라 불렀다. 마찬가지였다. 어린 레나에게 아버지란 마치 신과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신처럼 경외하던 시절의 레나는, 가련하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얌전한 몸짓, 조심스러운 손짓, 그리고 애교를 담은 눈짓. 모든 것이 사랑해달라는 외침이었고, 애정을 갈망하는 그 모습은 참으로 가련했다. 자작 가의 귀한 아가씨가 이토록 불쌍하게 구는 건 그의 유년 시절과 관련이 있었다. 레나는 아주 어릴 적에, 그러니까 막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 교외의 별장으로 보내졌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남동생에게 어머니의 품을 양보하기 위해서였다. 대신 유모가 있었지만, 레나는 그 유모에게도 마음껏 안길 수가 없었다.

16562805842017.jpg“오늘이 마지막이네요, 레나 아가씨.”

16562805842017.jpg“그동안 감사했어요, 아가씨. 부디 건강하세요.”

16562805842017.jpg“안녕히 계세요, 아가씨. 내일부터 새로운 유모가 올 거예요.”

레나의 유모는 하루가 멀다고 바뀌었다. 너무 자주 바뀌는 통에 레나는 그들에게 정붙일 겨를이 없었고, 그래서 다른 집안의 아이들처럼 유모에게 마음껏 어리광부리지도 못했다. 유모가 그토록 빈번히 교체된 건 아버지의 방침 때문이었다. 루벨 자작은 비록 어린아이라도 제 핏줄이 주인으로 대우받길 원했다. 그래서 주제넘은 유모들이 레나에게 격 없는 애정을 쏟지 못하도록, 또는 레나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따르지 않도록 길게는 1년, 짧게는 반년마다 돌보는 사람을 바꾸었다. 덕분에 레나는 말을 다 배우기 전부터 사랑하고 실연하기를 무수히 반복했다. 그러니 그 속이 멀쩡할 리 없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레나가 제법 영리하다는 점이었다.

16562805842009.jpg‘괜찮아.’

레나는 어리지만 외로움을 다스릴 줄 알았다.

16562805842009.jpg‘나한텐 가족이 있는걸.’

쪽배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았다.

16562805842009.jpg‘나도 언젠가 집으로 가게 될 거야.’

레나는 자신이 마음 둘 상대가 익숙해질 만하면 바뀌는 유모도 아니고, 분기마다 상황을 살피러 오는 집사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비록 초상화로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레나에겐 가족이 있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존칭하고, 이 별장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마치 신과 같은 존재가 바로 레나의 아버지였다. 어린 레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내가 사랑해야 하는 건 바로 아버지라고, 그에게 사랑받아야 한다고. 그래서 사랑받을 만한 아이가 되기 위해 준비했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법을 익히고, 완벽한 예법을 구사하기 위해 연습했다. 아버지가 음악 감상을 좋아하신다는 이야길 듣고는 바이올린도 더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드디어 아버지를 만났을 때, 레나는 온몸으로 환희했다.

16562805871373.jpg“어서 오렴, 레나야.”

난생처음이었다. 아가씨라는 호칭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린 것은. 그 한 번의 부름으로 레나의 세상은 바뀌었다. 드디어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더 이상 내쳐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왈칵 울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6년 후, 열두 번째 생일을 앞둔 그 날 밤은 더 지독했다. 왜냐하면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레나는 의지하던 사람에게 버림받는 일이 익숙했다. 하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아픔이 없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실체를 알기에 더 두려운 일도 있었다. 레나에겐 그날의 일이 바로 그러했다. . . . 연거푸 버림받은 아이가 또다시 애정을 갈망하는 건,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16562805842009.jpg“경, 저는 사실 열두 살이에요. 열 살이 아니에요.”

서부로 향하는 마차에서, 레나가 팔려온 주제에 공손히 말한 것도 그 탓이었다.

16562805842003.jpg“응?”

16562805842009.jpg“저, 경께서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아서요.”

16562805842003.jpg“그래서?”

16562805842009.jpg“그것 때문에 준비하시는 일이 잘못될까 봐…….”

자존심도 밑바닥이 있어야 세우는 법이다.

16562805842009.jpg“걱정되어서요…….”

조각나다 못해 바스러진 마음을 간신히 긁어모아 유지하는 아이에겐 자존심이랄 게 없었다. 실은 이 새로운 사람에게 잘 보이는 일이 더 급했다. 어린 레나 루벨의 삶은 이제껏 그렇게 연명되어 왔으므로, 레나는 자신을 납치하듯 사들인 괴한을 향해서도 참으로 사랑스럽게 행동했다.

16562805842003.jpg“지금 내 걱정해주는 거야?”

클라비스가 황당하다는 듯 묻자 레나는 쑥스러워하며 끄덕였다. 클라비스는 그런 레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돌연 실소를 터트렸다.

16562805842003.jpg“어떻게 딸을 이렇게 키웠지?”

클라비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으며 레나의 턱을 들어올렸다. 그러곤 낯선 남자의 손길도 기꺼워하는 레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16562805842003.jpg“아비 자격이 없는 줄은 알았지만 이건 좀 너무하네.”

레나는 클라비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안에 섞인 조롱은 여실히 느꼈고, 그럼에도 수치스러워하는 대신 그의 기분만 살폈다. 그 역시 한숨을 자아내는 모습이었다. 이 나긋한 비굴함은 귀족의 애첩들이 갖는 자세와도 비슷했다. 의도가 있고 없고를 떠나, 고작 열 살 남짓한 아이가 가질 만한 태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루벨 자작은 제 딸을 돌봐주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사랑스러운 동물로 길러놓았다. 그 의도가 너무 뻔해서 클라비스는 눈썹을 찡그리고 웃었다.

16562805842003.jpg“네 아버지는 딸을 비싸게 팔아치울 생각만 했나 봐.”

그는 그렇게 말하며 레나의 보드라운 뺨을 어루만졌다.

16562805842003.jpg“차라리 나한테 팔려서 다행이다. 그치?”

클라비스의 목소리는 웃음기가 섞여 다정했으나, 그것은 실체 없이 공허한 다정함이었다. 일평생 눈치를 살피며 살아온 아이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레나는 모르는 척했다. 레나가 연습한 사랑받는 법은 얌전히 기다리는 것이어서, 이번에도 그에게 잘 보이면 무언가 달라질 거라고 빌듯이 믿었다. 하지만 그 기다림과 믿음의 결말은 깊고 붉은 균열이었고, 그로써 레나는 또 한 번 바스라지고 말았다. . . .

16562805842009.jpg‘사는 동안 무수히도 많은 금이 생겼습니다.’

레나는 덜덜 떨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16562805842009.jpg‘상처 입었다는 이유로 망가지진 않으려 합니다.’

속으로는 시를 외우며 새빨간 하늘을 마주 보았다.

16562805842009.jpg‘나를 약하게 하는 것이 내 자신임을 알기에…….’

꽉 막힌 숨을 억지로 몰아쉬며 필사적으로 시를 외웠다.

16562805842009.jpg‘미워하는 당신에겐 꽃을 바치겠습니다.’

애써 토해낸 마지막 구절과 함께 한줄기 눈물이 레나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수많은 혀가 그것을 핥으려는 듯 달싹였다. 레나는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그렇다고 완전히 외면할 수도 없어 고개를 힘껏 들었다. 그러자 레나를 에워싼 새까만 망자들은 그 모습을 비웃듯 저들끼리 쑥덕댔다.

16562805842017.jpg―살아 있는 것이다.

16562805842017.jpg―산 제물.

16562805842017.jpg―여자.

16562805842017.jpg―어린아이…….

  마치 뱀이 쉭쉭 대듯 소름 끼치는 소리에 레나는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참았다. 무덤 한복판에 떨어진 레나가 망자들에게 포위당하는 데는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낯선 질감의 땅과 피 같은 하늘을 보며 놀랄 겨를도 없었다. 냄새를 맡은 망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레나를 가두었다. 온갖 종류의 망자가 다 있었다. 말라죽은 인간의 모습을 한 것, 뿔이 왕관처럼 돋은 것, 용과 뱀처럼 생긴 것, 네 발로 땅을 딛고 선 것. 그 흉측한 존재들과 조우하고도 레나가 아직 살아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망자들은 레나를 두고 그들끼리 싸우고 있었다.

16562805842017.jpg―짐의 것이다. 저 피도 살도, 모두 내 만찬이다.

16562805842017.jpg―갈증을 느끼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 독식하려 들지 마시오.

16562805842017.jpg―아까운 짓이다. 여자를 찢고 태운다니. 내게 넘겨라, 내 처로 삼겠다.

16562805842017.jpg―아직 어린아이입니다. 부디 자비를…….

  망자들이, 아니. 망자를 지배하는 어떤 존재들이 망자의 입을 빌려 으르렁댔다. 그들은 레나를 찢거나, 태우거나, 첩으로 삼겠다면서 실랑이를 벌였다. 그들을 말리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다른 잔인한 목소리에 비하면 너무 작고 연약했다. 레나는 그 가운데서 시를 외웠다. 차라리 기절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아름다운 구절을 곱씹었다.

16562805842017.jpg―그럼 차라리 나누어 가지는 게 어떤지.

  긴 다툼 끝에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 응했다.

16562805842017.jpg―내장을 갖겠다.

16562805842017.jpg―나는 기름기가 충분하면 어디든 좋소.

16562805842017.jpg―얼굴은 내게, 모처럼 고운 얼굴이니 상처 내지 말고 가져와라.

  그들은 빠르게 타협했고, 그들을 말리던 미약한 목소리는 더이상 들리지도 않았다. 결론이 나자 목소리가 그쳤다. 동시에 서로 견제하던 망자들이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16562805842009.jpg‘그대는 한여름의 차가운 꿈이어라.’

레나는 미칠 것 같아서 다시 시를 외웠다.

16562805842009.jpg‘첫눈 같은 그대가 온 줄 알고 손을 뻗으면…….’

긴 뱀이 레나의 다리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비늘이 피부를 긁는 감촉이 선명히 느껴졌다. 그래서 레나는 더 필사적으로 시구를 되뇌었다.

16562805842009.jpg‘깨, 깨진 꿈자리에 그리움만 차게 남아.’

망자들의 접근에 레나의 숨이 멈췄다. 폐부에서 흐느낌이 치고 올라와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고,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토해냈다.

16562805842009.jpg“덧없는 밤에 나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16562805842009.jpg“홀로 남아 길 잃은 나만…….”

어쩌면 이 낭독은 울음을 터트리는 대신인지도 몰랐다. 희미하게 속삭이는 레나의 목에 커다란 갈고리 같은 것이 걸렸다. 낯선 감촉에 레나는 간절히 빌었다. 도와줘, 구해줘, 싫어, 살려줘, 누가 좀, 제발 좀……. 하지만 아무리 빌어본들 구원자는 없었다. 또다시 버림받은 레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돌봐줄 사람도 지켜줄 사람도 없는 그곳에서 레나에게 남은 건 오직 시 한 구절뿐이었다. 서러움에 복받친 레나는, 다 끝났다는 생각에 시의 마지막 구절을 짜내듯이 읊조렸다.

16562805842009.jpg“……나만 또 울며 그대를 찾노라.”

16562805952785.jpg

  그럼에도 레나를 돕는 손길은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상상도 못 한 방향으로 세상이 뒤틀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