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시는 지금도 좋아한다2020.09.24.
마지막 시구를 읊조린 순간 레나를 둘러싼 세상이 변했다. 소리가 그치고 공기의 흐름마저 멎었다. 감각이 둔해지며 더 이상 두렵지도 슬프지도 않게 되었다. 직전까지 울던 것이 거짓말처럼 마음이 차분했다.
‘죽은 건가……?’
레나가 멍하니 생각하는 순간 꼭 감아 아무것도 보일 리 없는 눈앞에 여러 장면이 떠올랐다. 레나가 이제껏 보고 겪은 과거의 기억들이었다.
‘이게 주마등이구나…….’
레나는 책에서 본 것을 떠올리며 펼쳐지는 기억들을 바라보았다. 레나가 여러 감정을 느꼈던 순간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가장 좋아했던 유모, 너무 무서웠던 마당의 큰 개, 부끄럽게 넘어졌던 일, 아버지의 칭찬에 하늘을 날 것처럼 뿌듯해했던 일도. 모든 순간이 바람처럼 일어나 레나를 스쳐 갔다.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한 레나의 마음도 한차례 술렁였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별로 재미없는 책을 읽은 것처럼 그냥 그렇구나 싶을 뿐이었다. 한걸음 떨어져서 본 레나 루벨의 인생은 참 보잘 것이 없었다. 뭔가 늘 열심히 하긴 했는데 좋아서 한 일은 없었다. 그보다는 누군가가 좋아해주기를 바라며 한 일이 대부분이었다. 레나 루벨은 저렇게 살았다. 그 짧은 인생을, 저렇게 미련하게 살았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책이나 실컷 읽을걸.’
그나마 좋아했던 게 책을 읽는 거였는데. 정작 그 일은 눈치가 보여서 많이 못 했다. 여자아이가 똑똑해봐야 쓸모가 없다며, 책 읽을 시간에 춤이나 연주 실력을 더 갈고닦는 편이 낫다며 잔소리를 해대는 통에 몰래 숨겨둔 책을 달빛에 비추어 보고는 했다.
‘읽고 싶은 게 잔뜩 있었는데.’
하지만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해봤자 늦었다. 이미 다 끝났다. 레나 루벨의 초라한 인생은 아버지가 팔아넘기는 것으로 종말을 맞이했다. 레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쓸쓸히 죽음을 기다렸다. 기다렸다. 또 기다렸다.
‘……왜 안 죽지?’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끝나지 않았다. 목이 날아가는 기분이나 팔다리가 떨어져나가는 고통을 상상했는데 도통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벌써 죽었나?’
너무 그럴싸한 가설이다. 레나는 자신의 생사여부를 의심하며 살며시 실눈을 떴다.
‘히익!’
그러곤 곧장 다시 눈을 감았다. 코앞에는 여전히 망자들이 있었다. 그 악마 같은 형상에 레나는 기겁하며 눈을 감았다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 가만히 있지?’
당장 사람을 토막 내 가져갈 것처럼 굴었으면서. 머뭇대던 레나는 다시 용기 내어 눈을 떴다.
‘징그러워…….’
레나는 망자들을 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다시 봐도 흉측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으니 그나마 참고 봐줄 만했다. 레나는 석상처럼 멈춘 망자들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들의 발톱과 촉수 따위가 여전히 자신의 팔다리를 휘감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목에는 낫처럼 커다란 발톱이 걸려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망자들은 멈췄고, 레나는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걸 확인한 순간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레나는 우선 발목을 휘감은 뱀을 떨쳐내려고 한쪽 다리를 들었다.
“으앗!”
그 순간 정물처럼 굳어 있던 망자들이 다시 움칫하며 레나의 몸을 조이고 팔다리를 억압했다. 다시 가해진 힘에 레나는 놀라서 덜컥 얼어붙었다. 그러자 꿈틀대던 망자들도 다시 멈췄다.
‘……뭐지?’
레나는 다시 그림처럼 멈춘 망자들을 쳐다보다가, 설마하며 팔을 움직여보았다. 그러자 망자들도 다시 꿈틀댔고, 레나가 멈추자 그들도 도로 멈추었다.
‘어떻게 된 거지?’
레나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살짝살짝 움직였다가 멈추길 반복해보았다. 그때마다 망자들도 같이 움직이다 멈추었고, 레나는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망자들은 레나가 움직여야 움직이고 레나가 멈추면 덩달아 멈추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레나에게 가능한 일은 숨죽이고 서서 멈춘 망자들을 감상하는 것뿐, 레나를 찢어가려고 하는 이들의 의지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뭐야, 이게…….’
레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고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잠시 멈춘 것뿐이었다. 때문에 레나는 결정해야 했다. 이대로 꼼짝도 않고 버틸지, 움직여서 예정대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할지.
‘왜 이런 것만 선택권을 주는 건데……?’
레나는 억울해졌다. 평소라면 ‘아니야, 이런 생각하지 말자.’혹은 ‘나는 괜찮아!’라고 스스로를 다독였겠지만, 이 지경까지 오니 모든 상황이 못 견디게 억울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 싶었다. 더 이상 눈치 보는 건 지긋지긋했다. 눈치 본다고 봐주는 놈도 없는데, 내가 뭐 하러. 그렇게 생각한 레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팔다리를 휘감은 것들을 뿌리치려 했다. 그때였다.
―멈춰.
압도적인 음성이 레나를 관통했다.
―움직이지 마라.
낯선 음성이, 아니. 낯선 의지가 귓전이 아니라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움직이지 말고 내게 집중해라.
위엄이 넘치는, 명령이 한없이 자연스러운 투였다. 평소의 레나라면 그 위세에 눌려 알아서 바짝 엎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부서지고 부서져 완전히 바스러진 직후 자기 인생을 돌아보던 찰나였다. 보통은 체념할 만한 상황이지만, 언제나 체념했던 레나는 오히려 점점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연이어 벌어진 알 수 없는 상황에 더 놀라는 대신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명령이 재차 내려질 때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다.
―지금부터 내가…….
“싫어.”
―뭐?
“싫다고.”
아, 이제껏 누군가에게 싫다고 해본 적이 있었나? 아니, 없었다. 처음이다. 이를 악물고 중얼댄 레나는 그 낯선 발음에 묘한 쾌감마저 느꼈다. 그래서 레나는 내친김에 싫다는 말을 있는 힘껏 소리쳤다.
“싫어, 싫어, 싫어!”
―움직이지 마……!
“명령하지 마, 이 개새끼야악!”
교양을 배운 숙녀의 입에 오를 리 없는 험한 말이 울려 퍼졌다. 레나 루벨, 그 생에 첫 반항이었다.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택한 최악의 반항이었고, 자신의 생애를 완벽히 반추한 끝에 선택한 최선의 반항이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진행 중인, 여타의 질풍노도와 비교하면 무척이나 수명이 긴 반항이기도 했다. . . . 그날 처음으로 폭발한 이후, 반항은 레나에게 중요한 삶의 기조가 되었다. 가령 불한당들이 무고한 여자애들을 위협한다던가, 지체 높은 도련님이 얼굴에 샴페인을 끼얹는다던가, 기사들이 웃기지도 않는 이유로 하극상을 저지를 때 레나는 굳이 참지 않았다. 이미 평생 참을 것을 어린 시절에 다 참아서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렇다고 레나가 사자처럼 흉포해지거나 고슴도치처럼 일일이 가시를 세우지 않는 건 역시 시를 외운 까닭이었다. 레나는 연약할 때 사랑했던 시들을 강해진 후에도 외면하지 않았다. 레나가 마지막 순간 매달렸던, 그리고 레나를 두려움에서 지켜줬던 그 시는 다정할 뿐 아니라 강인하기도 했다. 이미 한번 죽음에 다가갔던 레나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초라했는지 깨달은 레나는 남은 삶은 그 시처럼 사는 데 쓰고 싶었다. 그래서였다. 레나가 지금 클라비스의 머리채를 잡고 그의 안면을 탁자에 쿵쿵 찧지 않는 이유는, 그가 어떤 개소리를 해도 대충 웃어주는 이유는 한 편의 시를 마음에 새긴 까닭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놈은 그걸 까맣게 모르고 능글능글 웃어대고 있으니, 레나로서는 정말 가소로울 수밖에.
“이 정도 보여줬는데 확인이 더 필요하냐는 뜻이지?”
레나의 싸늘한 눈초리에 클라비스가 은근슬쩍 한발 물러났다.
“맞네, 이 이상 레나 경을 의심하면 실례지. 어떻게 돌아왔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뭐 그 얘긴 천천히 들어도 되니까.”
“대체 누구한테 천천히 듣겠다는 말씀이신지.”
“그야 물론 야박하고 귀여운 레나 경이지. ……알겠어, 진정해.”
클라비스의 말장난이 또 길어지려 하자 레나의 시선이 더 차가워졌다. 그에 클라비스는 슬슬 끓는점에 도달한 걸 알고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경이 훌륭히 완성된 걸 확인했으니 정식으로 부탁할게. 황제를 죽여줘.”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너무 평온하고 단조로워서, 레나는 마지막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황제를 죽여 달라고 했어.”
클라비스는 다시 한번 태연하게 말했다. 이미 자신이 황제시해범인 것을 밝혔으니, 황제를 죽여달라는 말 자체는 크게 어색하지 않았다. 레나를 기막히게 만든 건 오히려 다른 부분이었다.
“조금 착각을 하고 계신듯한데, 당신은 내게 뭘 부탁할 입장이 아니에요.”
레나는 클라비스의 뻔뻔한 요청에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제가 아버지께 기회를 드린다고 당신한테도 기회가 있는 건 아니에요. 당신을 그냥 두는 건 굳이 상대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부탁이라니.”
부탁도 보통 부탁이 아니고 사람을 죽이라니. 레나가 거부감을 드러내자 클라비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오히려 못 믿겠다는 듯 물었다.
“설마 아직 경험이 없어?”
어쩐지 묘한 뉘앙스에 레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되물었다.
“나한테 살인할 각오가 생기면 그 첫 번째가 누구일 것 같아요?”
“누군지 모르겠지만 부럽네. 레나의 첫 번째가 될 수 있다니.”
미친놈. 험한 말이 혀뿌리 밑까지 올라왔다.
“지금 눈으로 욕하는 거야?”
그 기색을 읽은 클라비스가 킥킥 웃었다. 그러더니 결을 바꿔 다시 차분히 말했다.
“대충 미친놈이라고 생각하나 본데 오해야. 음, 못 믿네. 그럼 지금 내가 하는 부탁이 얼마나 합리적인지 알려줄게. 첫째, 니힐이 황제 노릇을 하는 건 재앙이야. 대륙에도, 제국에도, 동서남북과 당장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에게도.”
“……그런 걸 신경 쓰는 분이셨나요?”
“나름?”
클라비스의 가벼운 대꾸에 레나는 그만 실소했다. 황궁의 파티 주최자가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어처구니없어서. 설득력이 없는 건 클라비스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더 본격적인 근거를 꺼냈다.
“둘째, 황제를 죽이지 않으면 레나 경이 황제에게 죽게 될 거야. 왜냐하면 내가 조만간 루벨과 작당한 걸 니힐에게 말할 거거든.”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에 레나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클라비스의 태도는 여상했다.
“그럼 니힐은 레나 경과 관련된 사람들을 깨끗이 죽여 버리겠지. 남부공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데려온 하녀나 귀여운 엔지 군은 확실히.”
“그런 짓을 하면 당신은…….”
“응, 그게 셋째. 어차피 난 안 죽어.”
레나가 너는 무사할 것 같으냐고 물으려 하자, 클라비스가 그 말을 가로챘다. 그러더니 가벼운 수다를 떨 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황제의 총애가 어지간해서 말이야. 독을 먹였을 때도 안 죽었고, 서부가 박살나도 오히려 추기경이 됐잖아? 아마 제국을 다 부숴도 나는 안 건드릴 거야.”
“……부럽네요, 폐하께 그토록 사랑받으시다니.”
“응, 좋아. 레나 경은 모르지? 사랑받는 기분 같은 거.”
클라비스의 도발에 레나의 어금니가 소리 없이 맞물렸다. 남의 아픈 지점을 정확히 찔러놓고서, 클라비스는 얄밉게도 생글생글 잘만 웃었다. 레나는 그 모습을 노려보다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물었다.
“그런데 왜 황제를 죽이려고 하죠?”
“황제가 날 안 죽여서.”
클라비스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하지만 이어진 설명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너무너무 죽고 싶거든.”
클라비스가 하얗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웃는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천사처럼 아름다웠고, 그 얼굴에 피어난 미소도 성화 속의 그것처럼 성스럽기 그지없었다. 남자가 그토록 신성한 얼굴로 속삭였다.
“지금도 오직 그 생각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