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같은 이름을 가진2020.09.28.
“그럼 차라리 자살을 하시죠.”
“말이 심해…….”
“죽고 싶다고 하시니까요.”
레나의 가감 없는 제안에 클라비스가 너무한다는 얼굴로 레나를 쳐다보았다. 물론 장난이었다. 장난이 어울리는 상황도 아닌데, 클라비스는 여상히 빙글대며 속삭였다.
“조언은 고맙지만, 그런 방법이 가능하면 나도 굳이 고생 안 하겠지?”
자살은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레나는 잠시 생각하다 되물었다.
“황제가 당신을 죽지 못하게 하나요? 아니면, 황제가 죽어야 당신도 죽나요?”
“역시 눈치가 빨라.”
분명 큰 비밀일 텐데, 레나의 물음에 답하는 클라비스의 대답은 가벼웠다. 그래서 오히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클라비스를 처음 봤을 때, 레나는 그가 성화 속 천사 같다고 생각했다. 그건 아름답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어딘지 이질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레나는 그 첫인상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오늘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죽고 싶다는 클라비스의 미소는 분명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것은 붓으로 그린 것 마냥, 남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전부인 양 텅 비어 있었다. 그것은 죽기를 바라는 자의, 그래서 온전히 살아 있지 못한 자의 비틀림이었다.
“당신, 얼마나 살았죠?”
레나가 묘한 예감에 물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클라비스의 얼굴은 6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화가 없었다. 어쩌면 니힐처럼 실제 나이와 겉모습이 크게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물었지만, 클라비스는 말없이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 침묵에서 모종의 답을 얻은 레나는 그와 상종하기 싫어했던 것을 잊고 재차 물었다.
“그럼 당신도 무덤을 정복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나요?”
“아니, 잘 몰라. 그건 니힐이 시켜서 하는 거야.”
클라비스는 선선히 대답하더니 잠깐 눈을 굴리고는 말을 바꿨다.
“음, 아닌가. 안다고 해야 하나? 대충 예상하는 건 있는데 확실하진 않아서. 그런데 레나 경이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맞나보네.”
클라비스가 레나의 눈치를 보며 가늘게 웃었다. 그러더니 여우 같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황제를 죽일 이유가 늘었네. 그치?”
“……당신은 본인의 목적 외엔 아무것도 상관없군요.”
“알면서 뭘 물어봐.”
“생각만큼 저질이네요, 당신.”
“응, 미워해도 돼. 레나 경한테는 미움받는 것도 좋아.”
레나의 매몰찬 경멸에도 클라비스는 여상히 다정했다. 그 꾸민 듯한 너그러움에 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죄송하지만 그건 사양할게요. 미워하는 것도 힘이 드는 일이라. 그리고 아까 하신 얘기도 못 들은 거로 할게요. 피차 부탁 같은 걸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니까요.”
레나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일으켰다. 황제를 시해해달라는 얘기까지 튀어나온 마당에 느긋하게 앉아 차나 마실 수는 없었다. 클라비스가 멋대로 이야기를 진척시키는 건 사양이었다. 그래서 그만 자리를 피하려 하자 클라비스가 턱을 괸 채 말했다.
“안 한다는 선택은 없어. 레나 경이 선택할 수 있는 건 황제를 죽이거나, 황제에게 죽거나. 둘 중 하나뿐이거든.”
“누구 마음대로?”
친절한 협박에 레나는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못 알아들으신 것 같은데, 당신이 원하는 일은 안 해요.”
“주변 사람이 위험해질 텐데? 레나 양은 착하잖아?”
“클라비스 씨.”
협박이 한층 비열해지자 레나는 무겁게 떨어지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리고 클라비스는 레나의 목소리보다 ‘클라비스 씨’라는, 난생처음 듣는 호칭에 더 놀랐다. 클라비스가 멈칫한 사이 레나가 눈을 곱게 접으며 속삭였다.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 의자만 넘어가도 깜짝 놀라면서. 제가 사람을 가두거나 파묻는 방법을 고민하게 만들지 마세요.”
레나의 협박은 클라비스의 것보다 훨씬 담백했다. 그래서 더 오싹했다.
“하여튼 만만하지가 않네. 우리 레나 경.”
결국 주변인으로 협박하던 클라비스도 꼬리를 내리고 한발 물러났다.
“뭐, 나도 당장 대답하라는 건 아니야.”
클라비스는 그렇게 말하며 작은 상자를 꺼냈다. 한 손에 들어가는 부피의, 벨벳과 금속으로 장식된 상자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마치 보석 반지나 목걸이 따위가 담겨 있을 법한 상자였다. 클라비스가 상자를 내밀었지만 레나는 받지 않고 쳐다만 보았다. 그래서 클라비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받아, 폐하께서 하사하신 거야.”
그제야 레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상자를 받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은으로 세공된 열쇠가 있었다. 레나도 이미 본 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첫 원정을 마친 직후, 레나가 무덤에서 반지를 가져오자 황제가 잘했다며 반지 대신 돌려보낸 열쇠였다.
“황제의 화랑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야.”
“화랑?”
“황제가 하루 대부분을 보내는 곳. 거기로 초대받은 거야. 영광이지?”
레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클라비스와 열쇠를 번갈아 보았다. 그가 이 열쇠를 보관하고 있었다는 건, 레나가 조만간 황제와 독대할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 와중에 황제를 죽이라는 소릴 하다니, 황제가 그에게 한없이 관대하다는 말이 허풍은 아닌 모양이었다. 당최 알 수 없는 상황에 레나가 고민하자 클라비스가 천연덕스럽게 덧붙였다.
“다음 수요일에 놀러 오라니까 한 번 만나 봐. 몇 마디 나누다 보면 죽이고 싶어질지도 모르지.”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에 레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클라비스의 표정은 여상히 밝았다. 성화 속 천사, 혹은 무대 위 광대 같은 모습이었다.
“고민할 시간은 충분히 줄게. 어차피 시간이라면 지겹도록 많으니까 말이야.”
“……부럽네요, 시간이 지겨울 정도로 많다니.”
레나는 그 말을 끝으로 열쇠를 챙기며 돌아섰다.
“아 참.”
그런데 몇 걸음 떼기도 전에 클라비스가 다시 레나의 등에 대고 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볼게. 전야제 때, 루비드에게 꽃을 준 거 말이야.”
뜻밖의 화제에 레나도 걸음을 멈췄다.
“혹시 시를 따라 한 거야?”
“……그 시를 알아요?”
“차라리 꽃을 바치겠습니다, 맞나?”
클라비스의 입에서 익숙한 시구가 흐르자 레나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그 얼굴을 본 클라비스가 즐거운 얼굴로 덧붙였다.
“맞구나.”
묘하게 즐거워하는 클라비스와 달리 레나의 표정은 더 싸늘해졌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시가 저 남자의 입으로 언급된 게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설마 시를 좋아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별로 좋아하는 건 아니야. 그냥 아는 거지.”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취향이 안 겹쳐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레나는 그 시를 별로 안 좋아한다는 소리에 또 한 번 언짢아졌다. 당신이 뭔데 그 시를 별로라고 하느냐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격 없는 사이가 아니기에 레나는 불만을 꾹 누르고, 대신 그를 마지막으로 노려본 후 몸을 돌렸다.
. . . 온실 정원에서 벗어난 레나는 새로 알게 된 사실을 묵묵히 곱씹었다. 예상치 않게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레나의 첫 번째 감정은 불쾌감이었다. 레나는 클라비스의 사정 따위 알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이유를 가져다 붙이든 그가 힘없는 아이를 조롱하며 사지로 밀어 넣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레나는 그 사실에 사족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의 비열함과 잔인함에 해석의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고, 일말의 이해도 더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불러다 놓고 멋대로 떠들다니…….’
레나는 클라비스가 기습처럼 털어놓은 비밀을 떠올리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불편함 속에서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레나는 그게 또 한 번 불쾌했지만, 실마리가 풀려나가는 이 감각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 황제의 곁에서 모든 것을 누리는 남자. 그런 주제에 황제를 죽이고 싶어 하는 남자. 실제로도 몇 번이나 시도해 본 적이 있는 남자. 그 대가로 황제의 분노를 사기는커녕, 오히려 죽고 싶다며 해맑게 웃는 남자. 바라는 것이 죽음이기에 잃을 것이 없는, 그래서 두려운 것도 절박한 것도 없이 광대놀음을 하는 남자. 레나는 클라비스의 면면을 떠올리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기분이었다. 그 묘한 기분에 예전 일이 다시 떠올랐다. 그때도 꼭 이런 기분이었다. ***
“이 개새끼야악!”
무덤에서 시작된 레나 루벨의 첫 반항은, 어린 소녀의 반항치고는 대가가 매우 혹독했다.
“으윽!”
레나가 소리치기 무섭게 망자들이 사지를 더 옥죄었다. 그 섬뜩한 감촉에 레나는 최후를 직감하고 눈을 꽉 감았다. 그때, 매서운 바람 소리가 귓전에 스쳤다. 핑, 핑, 피잉. 강한 바람이 창문 틈으로 밀려오는 듯한 소리였다. 그 직후 사지를 휘감은 것들이 툭툭 떨어졌고, 꼼짝없이 붙들려 있던 레나는 지탱해주던 것을 잃어 그대로 휘청 주저앉았다.
“으……. 아, 꺄악!”
풀려나 안도할 새도 없이, 레나는 눈을 뜨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레나를 에워쌌던 망자들이 조각나서 땅에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레나가 망자들의 시체 위에서 몸서리치자, 또 한 번 예의 그 바람 소리가 울렸다. 가벼운 소리와 함께 레나를 중심으로 망자들이 재차 분쇄되었다. 더 잘게 조각난 망자들은 곧 땅에 스며들어 사라졌고, 경기를 일으킬 것 같았던 레나는 망자들의 주검이 사라지는 걸 보고 겨우 정신을 차렸다. 조금 진정한 레나는 이게 어찌 된 일인지 확인하려고 두리번거렸다.
―더 위에.
레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망자와는 조금 다른, 아주 기묘한 존재를 발견했다.
―참신한 유언이었어. ‘명령하지 마, 이 개새끼야악’이라니.
그 존재가 말했다. 웃음기 섞인, 호쾌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레나는 차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저 존재의 기이한 형상 때문이었다. 레나가 그를 보고 처음 떠올린 것은 깨진 조각상이었다. 허공에 나타난 존재는 거대한 대리석을 쪼아 만든 조각상처럼 매끄러운 팔과 다리를 우아하게 늘어트리고 있었다.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흰 천도 마치 천사들이 입을법한 옷이었다. 만약 온전한 모습이라면 마땅히 아름답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저 존재는 여기저기 깨지고 부서진 채라 아름답기 전에 기괴했다. 특히 얼굴은 입만 남기고 위쪽이 다 날아간 상태였다. 그런 모습으로 움직이고 말을 하니 어린 레나는 또 한 번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꼼짝없이 굳어 있는데 그 존재가 허공에서 내려와 레나 앞에 몸을 숙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턱밖에 없는 얼굴로, 그럼에도 마치 눈이 있는 것처럼 레나를 찬찬히 살펴보다 말했다.
―너도 그 녀석이 보냈구나.
그가 탄식하며 레나의 뺨을 쓸었다. 차가운 대리석 같을 줄 알았는데 그의 손길은 의외로 부드러웠다.
―대신 사과하마. 아니, 대신이랄 것도 없지. 사과하마. 네가 겪은 모든 일을.
뜻밖의, 그리고 알 수 없는 사과에 레나는 당황했다. 그 사이 그가 물었다.
―네 이름은?
“레나…….”
평소라면 레나 루벨이라고 소개했겠지만, 어쩐지 지금은 루벨이라는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순순히 대답했던 레나는 뒤늦게 울컥해서 따졌다.
“대체 누군데 대신 사과를 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날을 세워봤자 귀여울 뿐이었다. 그 석상 같은 존재가 웃으며 대답했다.
―너희에게 알려진 대로라면 나는 용서받지 못한 왕. 이름은…….
용서받지 못한 왕은 잠시 주저하더니, 이내 더 짙게 웃으며 말했다.
―레지나다. 심연에 온 걸 환영하마.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