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시를 닮은 사람2020.10.01.
―공교롭기도 하지.
용서받지 못한 왕, 레지나가 말했다.
―하필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가 심연에 닿다니.
“심연……?”
―무엇이 그렇게 절절해 바닥까지 내려왔지? 그 어린 나이에.
레나는 레지나가 하는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눈을 깜빡이던 레나는, 곧 자신이 반항 중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도로 눈썹을 곤두세웠다.
“무슨 소리예요, 그게.”
―네가 방금 겪은 일에 대한 이야기다.
레나가 따져들자 레지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세상이 멈추고 의식만 남던 순간이 있었지?
“그건…….”
망자들만 멈춘 게 아니었나? 레나는 망자들이 자신을 따라서 움직이고 멈추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이 멈췄다니.
―나는 시간으로부터 별리된 자들을 그렇게 부른다. 심연에 닿은 자라고.
레나는 그 생소한 개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시간이 멈춘 와중에 레지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을 떠올렸다.
“그, 그럼 그쪽도 그래요?”
―그래, 나 또한 심연에 닿아서 이런 꼴이다.
레지나가 자신의 금간 다리를 손으로 쓸며 말했다.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다. 심연을 본 자들은 제각각 미쳐서 무덤의 왕 노릇을 하고 있지.
“무덤의 왕……?”
―아까 너를 둘러싼 망자들의 왕 말이다.
레지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무덤의 비밀을 폭로했다. 지상에서 멋대로 무덤이라 명명한 이곳은 사실 그렇게 비좁은 이름으로 불릴만한 곳이 아니었다. 산 자들의 세상이 호수라면 이곳은 비구름을 품은 하늘이자 시냇물을 흘려보내는 계곡, 그리고 모든 것을 품는 바다였다. 이곳은 보이는 세계를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세계. 산 자들이 무덤이라 부르는 것은 그 거대한 고리의 문턱, 현세의 침전물로 만들어진 작은 입구에 불과했다.
“그런…….”
헤아리기도 어려운 말에 레나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레나는 자신이 단지 구덩이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예 딴 세상으로 떨어졌다니. 그걸 깨닫자 망망대해에 버려진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두려우냐?
레나는 차마 아니라고 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너 같은 존재가 대체 어떻게 심연에 닿은 건지.
레지나가 탄식하듯 말했다.
―괴물이 될 만한 자들이나 거기까지 가라앉는다고 생각했는데.
“괴물……?”
―후회에 미치거나 신념에 매몰된, 쾌락에 빠지거나 피에 취한, 또는 복수에 모든 것을 바친, 그런 괴물들.
레지나는 말을 멈추며 손끝으로 레나의 턱을 들었다. 그러더니 안타깝다는 듯 속삭였다.
―그런데 너는 무슨 이유로 심연까지 내려와 닿은 것이냐. 심지어 죽지도 않고 산채로.
“……저는 아버지가 보내서 왔어요.”
―친부인가?
“네, 친아버지요…….”
레나의 짓눌린 대답에 레지나는 고요히 침음했다. 하지만 정작 레나에겐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은 이야기였다. 지난 열흘간 곱씹고 곱씹어 다 부스러진 일이라, 레나는 스스로의 말에 무던했다. 레나는 오히려 침묵하는 레지나에게 되물었다.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허락을 구하는 것이냐, 조언을 바라는 것이냐?
“네?”
―이제 너는 스스로 정할 수 있다. 무엇을 할지, 어떤 존재가 될지.
“그, 그럼 다시 돌아갈 수도 있나요?”
―산 자의 세계로 말인가?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던 레나는 기대를 품고 끄덕였다. 그러자 레지나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원한다면. 하지만 돌아간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게 무슨…….”
―이미 널 버린 세상이다. 돌아간들 널 반기지 않을 텐데, 차라리 안식하는 게 어떠하냐?
“안식?
―원한다면 고통 없이 안식하게 도와주마. 그 편이 산 자들에게 돌아가거나 망자들의 왕이 되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레나는 레지나가 말하는 안식이 죽음인 것을 곧 깨달았다. 비록 고통 없이 죽여주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레지나의 제안은 다정했다. 그리고 현실적이었다. 레나도 어쩌면 그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레나는 고민 끝에 고개를 저었다.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유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요.”
레나는 쥐어짜듯 말하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이 와중에도 마음을 다잡는 이유가 아버지라니. 조금 비참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궁금했다. 그날 밤, 생일 선물을 기대하고 아버지를 찾아갔던 레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넘겨졌다. 상상도 못한 날벼락이었다. 그래서 레나는 아버지에게 배신감을 느낀 만큼 아버지의 생각이 궁금했다. 어떻게 그렇게 딸을 팔아버릴 수 있는지. 예전부터 준비한 일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 그 일을 지금 후회하는지. 내가 과연 그렇게 팔려도 좋은 존재였는지. 레나는 안식을 얻기 전에 그 수수께끼를 먼저 풀고 싶었다.
―가장 험한 길을 택하는구나.
레지나는 레나를 말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산 자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도 선선히 알려주었다. 다행히 돌아가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레지나의 말대로 다시 돌아간 세계는 레나를 조금도 반기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레나를 배신했다. 아버지는 딸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사람을 보내 그 일대를 전부 태워버렸다. 부둣가의 다락에 갇혀 있었던 레나도 치솟는 불길과 연기에 꼼짝 없이 갇히고 말았다. 죽음이 다가왔고, 그 순간 레나는 또 다시 무덤으로 떨어졌다. 무덤에서 기다리던 레지나는 연기를 마시고 콜록대는 레나를 보고는,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는 듯 말없이 그를 안아주었다. 용서 받지 못한 왕의 다독임에 레나의 호흡은 차츰 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울음으로 변했다. 또 한 번 버림받은 레나는 서럽게 울었다. 자신의 얄팍한 기대가 한심해서 울고 왜 이렇게 미움받아야 하는지 몰라 또 울었다. 그렇게 울고 정신을 차렸을 때, 레나는 다시 현세로 돌아와 다 타버린 부둣가에 홀로 앉아 있었다.
. . . 심연에 닿았던 레나는 그 후 죽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더 정확히는 죽음 직전에 무덤으로 떨어져 숨이 끊기는 상황을 회피하게 되었다. 그래서 보통 사람이면 이미 죽고 끝났을 상황을, 일평생 한 번만 겪을 일을 무수히도 많이 겪었다. 수십 번의 간접 죽음. 그럼에도 레나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시와 레지나 덕분이었다. 버려진 레나를 지탱한 것이 한 편의 시였다면, 그런 레나를 이끌어준 것은 레지나였다. 레나는 레지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단지 아이가 어른에게 배워야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 세계의 구조와 비밀, 그리고 아버지의 모든 것을 그의 도움으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한때는 레지나를 원망하기도 했다.
‘세상엔 굳이 알 필요 없는 것도 있으니까.’
레나는 그때를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레지나는 레나에게 정말 많은 것을 알려주었고, 레나는 버거운 진실과 마주할 때마다 좌절하고 무너졌다. 아까 클라비스가 멋대로 드러낸 심정도 레나에겐 그와 비슷했다. 레나에게 클라비스의 상황과 입장은 굳이 알고 싶지 않은, 하지만 외면할 수도 없는, 그렇다고 감당하기도 싫은 그런 것이었다. 레나는 클라비스가 내비친 속내를 곱씹다가, 결국 넌더리가 나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걸음을 재촉하며 버릇처럼 시를 외웠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가 한숨이 되었다. 레나가 좋아하는 시에는 따뜻한 위로가 담겨 있었고, 발돋움하던 시절의 레나는 이 시를 외우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보니 조금 손해 보는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작 세상은 더없이 비열한데, 그리고 그 비열함에 적응한 자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리는데. 그 가운데서 홀로 시를 외우는 자신이 이따금 미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신념을 버리겠다는 건 아니었다. 레나는 여전히 그 시를 사랑했다. 비록 이 냉혹한 세상과 어울리지 않지만, 아니. 오히려 이 세상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레나는 그 시를 아꼈다. 다만 혼자서 시를 외우는 게 세상과 동떨어진 기분이라 새삼 쓸쓸할 뿐이었다.
‘혼자?’
자조하던 레나는 문득 스스로의 생각에 의문을 품었다. 혼자라니, 정말 혼자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 떠올랐다. 그래서 레나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 시는 선하다. 다정하고 강하고, 읽는 이를 위로하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레나는 그 시를 사랑해 닮고자 하였다. 하지만 세상과 사람들은 그런 레나를 인정하지 않았다. 버림받은 아이가 그렇게 될 수는 없다고, 분명 어딘가 망가졌지만 필사적으로 숨기는 거라고,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을 거라고 의심했다. 그래서 이해받지 못하는 기분에 조금 외로워질 뻔했다. 하지만 레나는 자신의 착각을 깨닫고 기쁘게 걸음을 옮겼다. 레나가 향한 곳은 황궁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두엄의 궁이었다. 레나는 폐허가 된 성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안으로 들었다. 무덤으로 향하는 붉은 균열과 그 주변을 지키는 검은 제복의 기사들이 보였다. 레나는 그 가운데서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이 비열한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마치 시를 닮은 사람을.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면 마치 시를 읽는 것처럼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 그래서 예쁘다고 진심으로 말하면 자길 놀리는 줄 아는 귀여운 사람이 저기 있었다. 레나가 두엄의 궁으로 들어오자, 균열을 지키던 동부공이 차갑게 물었다.
“남부의 대리인이 여긴 어쩐 일이지?”
그 고압적인 목소리에 레나도 본심을 숨기며 사무적으로 답했다.
“다음 원정을 위해 무덤을 살펴보려고 왔습니다.”
“누가 허락했지?”
“교회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오늘 새벽에 도착한 카드 중 하나인, 교회의 허가증을 꺼내 내밀었다. 동부공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레나를 쏘아보더니 차게 말했다.
“전해 들은 바 없다.”
“이곳의 전권은 교회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레나도 물러나지 않았다. 동부공은 뻣뻣하게 대드는 남부공 대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나도 가겠다.”
“저하, 호위할 기사들을…….”
“혼자 간다. 대열을 지켜라.”
동부공의 즉흥적인 결정에 비서가 움직이려하자 동부공은 손을 들어 막았다.
“무덤에서 뭘 하는지 확인하겠다.”
동부공은 비서의 염려를 뒤로하고 먼저 균열로 걸어갔다. 그 오만한 태도에 남부공 대리는 굳은 얼굴로 뒤를 따랐다. 이윽고 나란히 걷게 되자, 레나가 작게 속삭였다.
“린 씨 평소엔 말이 참 짧군요.”
“……쉿.”
린은 뭐라고 대답하는 대신 작게 바람소리를 냈다. 입 조심하라는 투가 아니라, 창피하니까 하지 말라는 투였다. 그래서 레나는 아랫입술을 물며 웃음을 참았고, 린은 더 근엄한 척하기 위해 미간에 힘을 주었다. 균열 앞에 도달한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서서 서로를 잠시 바라보았다. 비밀리에 동맹을 맺은 레나와 린은 그것을 기정사실화 하는 첫 단계로 무덤 정찰을 계획했다. 어차피 밖에선 무덤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도리가 없으니 되는대로 꾸며내기 좋은 탓이었다. 레나는 린에게 무덤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과거 레지나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라면 기꺼이 가르쳐주고 싶었다. 이유는 역시 그가 너무 예뻐서. 선을 넘지 않으려고 경계하고, 의심하며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이 냉혹한 세상에서 여전히 상냥한 보기 드문 사람이었고, 시를 사랑하는 레나는 시를 닮은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레나는 린을 선택했다. 그는 레나가 마지막으로 간직할 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