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덫2020.10.05.
첫 원정을 승리로 이끈 남부공 대리는 원정의 피로를 풀 새도 없이 무덤 정찰에 나섰다. 그것은 모든 기사와 신하에게 귀감이 될 행동이지만, 역시 이방인인 레나에 대한 이야기는 좋은 쪽보다는 자극적인 쪽으로 먼저 흘렀다. 게다가 마침 들레기 좋은 소재가 딸려있기도 했다. 남부공 대리는 지난 나흘간 매일 무덤을 정찰했는데, 그때마다 균열을 지키던 동부공이 뒤따라갔다는 것이다. 동부공에겐 여인을 개처럼 취급한다는 소문이 아직 남아 있기에, 귀족들은 그 행동 역시 다분히 불순한 것으로 넘겨짚었다. 그러곤 틈만 나면 남부공 대리와 동부공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상사에 대해 떠들었다. 제법 자극적인 소문이 나돌았지만, 그 소문의 당사자들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사실 레나와 린은 오히려 그것을 의도하고 있었다. 동맹을 맺은 두 사람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약혼까지 타결하기로 했고, 그에 어울리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구설을 피워대는 중이었다. 사실 이렇게 번거로운 짓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벼르는 남부공을 위해서라도 적당한 계기를 만들 셈이었다. 그래서 레나와 린은 나흘 동안 여보라는 듯 단둘이 무덤에 들어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
“옷이 아주 잘 탔네요.”
레나는 푸념하며 잿더미가 된 망토와 소매를 털었다.
“다친 데는?”
“없어요. 옷만 버렸어요.”
“다행…….”
다행이라고 말하려던 린은 그만 혀를 깨물고 말았다. 레나가 다 타서 넝마가 된 망토와 상의를 함께 벗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셔츠 아래엔 한 겹의 튜닉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튜닉은 매우 얇은데다가 소매가 없어서 거의 속옷처럼 보였다. 린이 당황해서 물러나자 레나가 의아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왜요?”
“아니…….”
린이 주저하며 시선을 피했지만 레나는 잠자코 대답을 기다렸다. 레나가 이런 상황에서 그냥 넘어가지 않는 걸 알기에, 린은 결국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옷 벗어줄까?”
린의 조심스러운 제안에 레나는 자신의 가슴팍을 살짝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눈을 곱게 접으며 대답했다.
“큰 옷으로 어설프게 가리는 편이 더 야하지 않아요?”
레나의 과격한 발언에 린은 덜컥 굳더니, 이내 경직된 얼굴로 들릴 듯 말 듯하게 중얼댔다.
“파렴치…….”
“숙녀한테 그런 말하면 못 써요.”
“숙녀는 아무 데서나 옷을 벗지 않아.”
“편견이에요.”
린은 레나의 아무 말에 고뇌했고, 레나는 그 얼굴을 보다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레나와 린이 사이좋게 노닥대는 장소는 무덤이었다. 붉은 하늘 아래 거대한 악충이 날며, 매캐한 연기와 이글대는 불길이 곳곳에서 도사리는 이곳은 태움과 그을림의 왕, 히엠스 그라샤의 영역이었다. . . . 레나와 린이 함께 무덤을 탐색하기 시작한 건 나흘 전부터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바깥의 시간 개념이고, 레나와 린이 무덤에서 실제로 보낸 시간은 보름 가까이 되었다. 보름간 함께 무덤을 누빈 두 사람이 이전보다 부쩍 가까워진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 친구 수준에 머물 뿐, 그 이상은 다가가지 않고 거리를 지켰다. 레나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무덤에 대해 제가 아는 것을 알려드릴게요. 대신 그걸 어떻게 아는지는 묻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탐색을 시작한 첫날, 레나는 무덤의 초입에서 린에게 약속을 얻어냈다. 그 자체가 선은 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였다. 린은 별수 없이 조건을 수락했고, 이후 레나는 린에게 정말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이곳은 우리가 지내던 세계와는 달라요. 고정된 세계가 아니어서 눈 깜짝할 사이에 변하기도 하죠.”
“이미 죽은 존재를 죽일 수는 없어요. 그러니 망자들과의 싸움은 피하는 게 최선이에요.”
“첫울음을 삼킨 왕은 그나마 온순한 편이었어요. 하지만 다른 왕들은 전혀 달라요.”
레나는 이토록 중요한 이야기들을 아낌없이 해주었다. 린은 레나가 이것들을 대체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했지만, 미리 약속했기에 그에 대해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다 알려줘도 괜찮나 싶어, 혹시 이게 남부공에 대한 배신행위가 되는 것이 아닌지 넌지시 물었다. 그에 레나는 곱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감당할 수 있으니까 알려드리는 거예요.”
더 없이 레나 루벨다운 대답에, 린도 결국 마음 편히 레나가 주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후 그들은 클라비스가 다음 목표로 거론한 ‘태움과 그을림의 왕’을 찾아 무덤을 탐색했고, 비로소 그의 성에 다다랐다. 바깥 시간으로는 나흘, 무덤에서의 시간으로는 보름 만이었다. . . . 태움과 그을림의 왕은 그 이름과 어울리는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저 멀리 우뚝 선 성은 첫 울음을 삼킨 왕의 성처럼 사방이 막혀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악충의 형상을 지닌 망자들이 그 주변을 빠르게 날며 주변을 경계했다. 니힐의 전기에서 저들은 ‘재를 옮기는 자’라고 불렸다. 재를 옮기는 자들은 마치 파리와 메뚜기를 섞어놓은 모습이었는데, 횃불을 스친 불나방처럼 날개에 불똥까지 달고 다녔다. 레나의 제복이 다 타버린 것도 저들과 한바탕 충돌한 탓이었다.
“이러고 돌아가면 이래저래 시끄럽긴 하겠어요.”
레나는 자신의 튜닉이 파렴치하다는 건 인정하지 않았지만, 황궁의 호사가들이 이 모습에 열광하고도 남을 것은 기꺼이 인정했다.
“그렇다고 린 씨 옷을 입고 가면 더 시끄럽겠죠?”
“좋은 기회네.”
“그렇긴 한데, 그러다 영감님이 쓰러지면 큰일이잖아요.”
영감님이라는 말에 옅게 웃던 린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레나가 말하는 영감님은 남부공이었고, 린은 최근 남부공이 묘하게 어려웠다. 승전제 이후 따로 마주친 적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가 막연한 부담을 느끼게 된 건, 레나가 남부공을 영감님이라 부르는 걸 알게 된 이후부터였다. 단지 주종관계인 줄 알았는데 레나는 의외로 남부공을 격 없이 대했고, 덕분에 린은 그가 마치 레나의 집안 어른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껏 그에게 각을 세웠던 순간이 점점 후회되며 몹시도 난감해졌다. 이번에도 린은 남부공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급격히 조용해졌다. 그 어색한 낌새에 레나가 태연히 물었다.
“린 씨는 남부공 저하를 별로 안 좋아하죠?”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니야.”
“정말요?”
“악감정은 없어. 입장상 그랬던 거지.”
레나는 린의 온순한 대답에 조금 놀랐다. 남부공이 너무 질색해서 당연히 서로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감정을 쌓아둔 건 의외로 남부공 혼자였던 모양이다.
“그럼 린 씨는 싫은 사람 없어요?”
“있어.”
“누구?”
“루비드 플레누스.”
“아…….”
린은 고민 없이 답했고, 크게 와 닿는 대답이라 레나는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 그 도련놈이 안 보인다.
‘요양 중이라고 듣긴 했는데.’
하지만 루비드는 원정이 끝나고도 멀쩡했다.
‘정말 요양 중일까? 차라리 근신 중이라고 보는 편이…….’
레나는 북부의 실패를 떠올리며 다시 먼 곳의 성을 바라보았다.
“린 씨는 재를 옮기는 자들을 상대해 본 적 있으세요?”
“아니. 동부에 나온 건 용과 뱀이었어.”
“그랬죠. 그래도 여기까지 오셨으니 아실 거예요. 저들은 눈으로 적을 식별하고 무리 지어 공격해요. 그리고 살아 있는 건 맹목적으로 불태우죠.”
“군대를 끌고 오는 건 자살행위겠군.”
“네, 몰려와봤자 저번에 북부가 그랬던 것처럼 피해만 키울 거예요.”
“결국 개인의 역량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건가?”
린은 저 날쌘 불덩어리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고민하며 턱을 짚었다. 그러다 무심코 옆에 선 레나를 돌아보았다. 키가 큰 린은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는 것에 익숙했다. 레나라고 예외는 아니었고, 특히 이렇게 가까이 서 있을 땐 고개까지 숙여야 했다. 그래서 린은 평소처럼 턱을 옆으로 기울였다. 하지만 오늘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레나는 얇은 튜닉 차림이었고 그 가벼운 재질의 천은 몸의 굴곡을 따라 살짝 들려 있었다. 심지어 위에서 내려다본 탓에 벌어진 틈 사이로 시선이 닿아 평소라면 보일 리 없는 속이 언뜻 비쳤다. 뜻밖의 광경에 린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먼 성을 보던 레나는 그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말을 이었다.
“아마 개별로 움직일 때 가장 유리한 건 북부일 거예요. 참격이라면 날아다니는 상대도 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린 씨의 권능은, ……어디 불편하세요?”
“아니…….”
린이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지만 레나는 의아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서 린은 구차하게 변명했다.
“더워서.”
“그럼 겉옷을 좀 벗으세요.”
“싫어.”
린은 레나의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며 오히려 옷깃을 꼭 여몄다. 그러더니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들어오고 시간이 꽤 된 것 같은데, 이만 돌아가는 편이…….”
한창 중요한 얘기 중인데 돌아가자니. 레나는 왜 이러나 싶어 갸웃대다가, 그의 얼굴이 평소보다 붉은 것을 깨달았다. 단지 더워서 달아올랐다고 하기엔 곤란한 기색이 짙어, 레나는 자신의 차림새를 다시 내려다보고는 이내 한숨 쉬듯 웃었다. 고작 이걸로 저리 보수적인 반응이라니. 다른 남자가 그랬다면 너희는 당당하게 벗어대는 주제에 왜 내게만 그리 의미부여를 하느냐고 정중히 따졌을 것이다. 하지만 린이니까 봐주기로 했다. 개인적인 애정 때문이기도 하고, 그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요. 여기서 더 타버리면 곤란하니까요.”
나보단 네가. 레나는 이 뒷말을 삼키며 웃었다. 린은 그 얼굴을 차마 마주 볼 수 없어 먼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그 사이 레나가 먼저 발길을 돌렸다. 린은 그 뒤를 따르려다가, 무언가 발견하고 그 자리에 우뚝 멈췄다.
“레나.”
“네?”
린의 부름에 레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정작 린은 레나가 아니라 하늘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저기.”
린이 하늘 한 구석을 가리켰고, 레나는 무슨 일인가 하며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러곤 린이 그런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불벌레들이 날아다니는 광활한 하늘 위로 금빛 휘장이 폭포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이미 많은 것이 비현실적인 무덤이지만, 폭을 헤아릴 수도 없는 융단이 붉은 하늘을 덧씌우는 광경은 더 압도적으로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그 광경을 덧없이 바라보는데, 두 사람의 귓가로 낯선 음성이 울렸다.
―찾았다.
―내 신부.
더 정확히는 린에게만 낯설었다. 레나는 귀에 익은, 하지만 전혀 반갑지 않은 목소리에 눈을 홉떴다. 그 사이 금빛 휘장이 하늘을 완전히 장악했고, 세상의 불이 꺼졌다. . . .
“린 씨, 여기 있어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레나는 린을 찾았다. 직전까진 사방에서 불길이 이글댔는데, 지금은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사방이 다 컴컴했다. 열기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고, 아까부터 묘한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갑자기 세상이 뒤집혔지만 레나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너무 뻔한 단서를 조합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한 거지? 아까 거긴 히엠스의 영역이었는데.’
레나는 이 일의 원흉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금빛 휘장도 이 농염한 향기도, 그리고 레나를 신부라 부르는 뻔뻔함도 모두 그의 상징이었으니까. 그래서 레나는 놀라서 허둥대는 대신 침착하게 린을 찾았다. 그 순간 눈앞의 칠흑이 점차 걷히더니, 찬란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짙은 녹음이 번지며 색색의 꽃이 피어났다. 그 열대 정원 가운데 금빛 캐노피가 드리웠다. 캐노피의 아늑한 그늘 밑엔 금사로 수놓은 융단과 넉넉한 크기의 쿠션이 제법 안락한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레나는 그것을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 옆에 웅크린 사람을 발견했다. 린이었다.
“린 씨!”
“오지 마!”
린은 칼에 찔린 사람처럼 바닥에 무릎을 댄 채 무언가를 견디고 있었다. 그래서 레나가 달려갔지만, 그는 오히려 버럭 소리치며 접근을 막았다. 처음 듣는 고성에 레나는 깜짝 놀라 멈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레나는 린이 이를 악문 걸 보고 다시 조심히 다가갔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 건…….”
레나는 그의 등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린이 돌연 몸을 세우며 레나의 손을 낚아채 잡아당겼다.
“윽!”
예상치 못한 완력에 레나는 속절없이 끌려갔다. 그리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순간, 레나는 린의 눈동자가 붉게 물든 것을 깨달았다.
“린…….”
그 희미한 부름은 완성되지 못했다. 린이 레나의 목을 쥐며, 그 입을 잡아먹을 듯이 삼켜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