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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악몽 (46/208)

46화. 악몽2020.10.08.

그의 건조한 입술은 아무 예고 없이 레나에게 닿았다. 낯선 촉감이 입가를 거칠게 눌렀지만 레나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미처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머뭇대는 찰나 미지근하고 부드러운 것이 입술을 훑었다. 그러더니 뒤이어 날카로운 통증이 그 자리를 채웠다.

16562806910993.jpg“읍!”

아찔한 감각에 레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린을 떨쳐낸 레나의 입술에서 피가 배어났다. 린이 사납게 깨물어서 흐르는 피였다. 갑자기 입을 맞추고 물어뜯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린이 그랬다는 사실에 레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서 잠시 틈을 보인 사이 시야가 뒤집혔다. 등으로 둔탁한 충격이 올라오며, 한 뼘 아래 있던 린의 얼굴이 한 뼘 위로 위치를 바꿨다. 레나를 순식간에 넘어트리고 그 위에 올라탄 린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레나의 어깨를 억세게 눌러 제압했다. 순식간에 금빛 융단 위에 등을 대고 눕게 된 레나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린을 바라보았다. 선홍빛으로 물든 눈동자가 낯설었다. 린은 단둘이 있을 땐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사나운 얼굴로 레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6562806910993.jpg“린…….”

레나가 입을 여는 순간 또 한 번 호흡이 엉키며 말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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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스라고 해야 할지 시식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접촉이 이어졌다.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또 언제 깨물릴지 몰라서 레나는 린의 턱과 어깨를 힘껏 밀었다. 계속 압박해오던 린은 의외로 쉽게 밀려났다. 어쩌면 스스로 물러난 건지도 몰랐다.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타는 듯 붉었다. 새빨간 시선이 레나의 피맺힌 입술에서 턱으로, 목으로, 그리고 하얀 어깨 위로 미끄러졌다. 레나는 그의 눈이 혼탁한 무언가로 요동치는 걸 보았다. 그리고 린은, 레나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 . . 눈앞이 깜깜했다. 정신은 흐리고,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린은 이 상황에 만족했다. 곁에 무언가가 있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맞닿는 부분마다 만족감을 일으키는 것이 그의 품 안에 있었다. 린은 언제나 이것을 원했다. 이 열락을, 그 이상의 안락을. 사랑스러운 것을 꼭 안아보는 호사를, 누군가의 품에 기대 쉬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기쁨을. 그것은 금지된 일이었다. 하지만 왜 금지되었는지 지금으로선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렇게 온기를 받아 잠든다면, 더 이상 악몽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1656280691101.jpg―네가 있는 줄 알았으면…….

아, 또 그 목소리다.

1656280691101.jpg―네가 살아 있는 줄 알았으면……!

과거 그를 죽고싶게 만든 목소리. 그 한 문장의 악몽이 또 그의 가슴을 길게 찢었다. 그래서 린은 제 앞에 놓인 품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래야 저 소리가 들리지 않을 테니까. 이 따스함이 저 냉혹한 기억을 덮어줄 테니까. 린은 그를 사로잡은 저주를 떨치기 위해 손안의 것을 다시 움켜쥐었다. 정말이지 기분 좋았다. 따스한, 부드러운, 향기로운, 달콤한. 그리고 맛있는, 이…….

16562806910993.jpg“……린……!”

몸.

16562806910993.jpg“린 씨!”

다급한 목소리에 린은 칼에 찔린 사람처럼 눈을 홉떴다. 아늑한 어둠이 꺼지며 공간감이 돌아왔고, 뒤이어 눈이 떠졌다. 눈앞이 밝아지며 린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아주 천천히 깨달았다. 어째선지 그는 두꺼운 융단 위에 누워 있었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누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멍하니 기억을 더듬는데, 린을 깨웠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16562806910993.jpg“정신이 들어요?”

린은 애써 초점을 맞추며 위를 보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레나가 보였다. 그래서 그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그의 입가에 난 상처를 발견하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16562806911042.jpg“방금 무슨 일이…….”

놀라서 중얼대던 린은 입안에서 맴도는 피맛을 뒤늦게 느꼈다. 비릿한 혈향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16562806911042.jpg“내가 너한테 무슨 짓 했어……?”

16562806910993.jpg“저는 괜찮아요.”

린이 벼랑 끝에 몰린 얼굴로 묻자 레나는 그가 절망하기 전에 말했다.

16562806910993.jpg“정말이에요, 괜찮아요.”

그러더니 아직 혼란스러워하는 린의 손을 꼭 잡고, 그와 시선을 맞추며 덧붙였다.

16562806910993.jpg“저는 정말 괜찮지만…….”

레나가 조금 미안한 얼굴로 묘하게 말을 흐렸다. 그래서 린은 더 불안해하다가 돌연 인상을 찌푸렸다. 아팠다. 어디가 아프냐면, 온몸이 아팠다. 적당히 아픈 것도 아니고 되게 아팠다. 예상치 못한 통증에 린이 주춤대자, 레나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16562806910993.jpg“아마 린 씨는 별로 안 괜찮으실 거예요.”

레나의 이실직고와 함께,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통증이 와르르 쏟아졌다. 고통이 엄습하자 린은 소리 없이 경악했다. 그리고 지켜보던 레나는 안타깝게 중얼댔다.

16562806910993.jpg“아프시죠…….”

16562806911042.jpg“대체…… 윽!”

린은 몸을 일으키다가 도로 허리를 꺾었다. 갈비뼈 근처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진 탓이었다. 그래서 린은 무심코 제 옆구리를 더듬다가 손에 닿는 감촉에 또 한 번 당황했다. 그의 손에 닿은 것은 마땅히 있어야 하는 옷이 아니라 맨살이었다.

16562806911042.jpg“왜…….”

린은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는 잠시 정신을 잃었고, 깨어나 보니 전신이 아팠다. 게다가 윗옷은 다 벗고 있었다. 자신의 맨 가슴팍을 내려다보던 린은 황급히 고개를 더 숙였고, 바지는 멀쩡히 입은 걸 확인한 후에야 겨우 가슴을 쓸었다. 린은 자신의 상의가 어디로 갔는지 찾다가 곧 눈치챘다. 레나가 더 이상 튜닉 차림이 아닌 것을. 린의 셔츠는 뜻밖에도 레나가 입고 있었다.

16562806911042.jpg“왜 내 옷을……?”

16562806910993.jpg“아무것도 기억 안 나세요?”

린이 머뭇대며 끄덕이자 레나는 바닥 한구석을 고갯짓했다. 그곳엔 웬 천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얇고, 하얗고, 찢어진. 레나의 튜닉이었다. 그게 뭔지 알아챈 린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16562806911042.jpg“저거, 내가……?”

16562806910993.jpg“네.”

린은 사색이 되었고, 레나는 그를 위해 서둘러 말을 이었다.

16562806910993.jpg“눈이 빨갛게 변했었어요.”

하늘에서 금빛 휘장이 내려오고 공간이 뒤집힌 직후, 린은 마치 무언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괴로워했다. 그래서 레나가 돕기 위해 다가가자 그는 갑자기 돌변해 레나를 덮쳤다. 그때 레나는 린이 자신을 먹으려 든다고 느꼈다. 입을 맞추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깨물고, 옷 안으로 파고들어 가장 여린 부분에 이를 박았다. 예상은커녕 상상도 못 한 행동에 레나도 적잖이 당황했다. 그래서 밑에 깔린 채 속수무책 당하고 있다가, 린이 튜닉을 찢어버린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위기감을 느낀 레나는 린을 깨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까 다시 정신을 차린 그가 철퇴로 맞았다고 생각할 만큼 무자비하게 패버렸다.

16562806910993.jpg“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일단 깨우거나 안 되면 쓰러트려야겠다는 생각 밖에는…….”

레나가 침착한 목소리로 내가 너를 폭행했노라 고백했지만, 린은 언짢아하거나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대신 긴 숨을 내쉬었다.

16562806911042.jpg“다행이다…….”

넝마가 된 주제에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린은 아직 모르겠지만 그의 꼴은 아주 가관이었다. 입술은 다 터져서 피가 흐르고 한쪽 광대엔 멍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몸에도 맞고 차인 흔적이 가득했다. 아까 움찔하며 옆구리를 부여잡은 것도 갈빗대에 금이 간 탓이었다. 그러니 말도 못 하게 아플 텐데, 린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중얼댔다.

16562806911042.jpg“다행이다.”

16562806910993.jpg“과연 다행일지…….”

16562806911042.jpg“미안해.”

레나의 중얼거림을 뒤로하고, 린이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16562806911042.jpg“정말 미안.”

린은 그렇게 말하며 레나의 피맺힌 입술을 바라보았다.

16562806911042.jpg“기분…… 나빴지.”

죄책감이 가득한 목소리에 레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 의미를 오해한 린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16562806911042.jpg“화나면 때려도 돼.”

여기서 더 맞으면 죽을 텐데. 레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린이 너무 심각해서 차마 농담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충 웃어넘기려 했던 레나는 린의 사과에 오히려 기분이 복잡해졌다. 레나라고 이 난데없는 폭력이 달가운 건 아니었다. 당황스럽고 수치스럽고 아팠다. 그래서 그를 떼어놓는 손길에 감정이 실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해서 대충 넘어가려고 했는데, 린이 너무 진지하게 사과해서 레나도 더는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16562806910993.jpg“놀라긴 했지만 화는 안 났어요.”

그래서 레나도 웃음기를 지우고, 고개를 들지 못하는 린에게 속삭였다.

16562806910993.jpg“린 씨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닌 거 알아요. 게다가 전혀 안 다쳤으니까, 그렇게 풀 죽을 필요 없어요.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에 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의심과 걱정이 뒤섞인 얼굴로 레나를 보았고, 그 벌서는 표정에 레나는 힘없이 웃었다. 그러곤 일부러 짓궂게 말했다.

16562806910993.jpg“안전장치가 이래서 필요했군요.”

가벼운 농담인데 린은 어윽 하고 정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레나는 더 웃으며 말했다.

16562806910993.jpg“그보다 파렴치해졌어요, 린 씨.”

파렴치라는 말에 린은 와르르 쏟아질 것 같은 눈으로 레나를 쳐다보더니, 괴로운 목소리로 인정했다.

16562806911042.jpg“알아…….”

16562806910993.jpg“그래도 옷은 못 돌려드려요.”

16562806911042.jpg“제발 돌려주지 마…….”

린이 쥐어짜듯이 대답했다. 심경이 아주 복잡해 보이긴 하지만, 말하는 투를 보니 마음이 적게나마 달래진 모양이었다. 그래서 레나도 비로소 편히 웃었다. 그러곤 쭉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16562806910993.jpg“어떻게 된 일인지, 혹시 기억나는 거 있어요?”

16562806911042.jpg“잘 모르겠어.”

레나의 물음에 린은 도로 심각해져서 대답했다. 하지만 더 이상 자책하는 투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신을 추스르고 상황을 파악하려는 쪽이었다.

16562806911042.jpg“갑자기 어두워지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 마치…….”

린은 직전의 일을 천천히 곱씹었다. 어두워졌고, 몸이 들떴다. 마치 여인들이 다가와 유혹할 때처럼 피가 끓었다. 필사적으로 충동을 눌러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자극도 접촉도 없었는데 흥분이 치솟아 눈앞을 깜깜하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곁에 있는 레나가 지독하게 의식되어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오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레나는 무슨 일인지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가왔고, 손을 뻗었다. 직후 린의 기억은 끊겼다. 어렴풋이, 아주 어렴풋이 레나를 끌어당긴 일이 기억났지만, 그마저도 현실인지 환상인지 불분명했다.

16562806911042.jpg“아무 전조 없이 이렇게 된 건 나도 처음이야.”

린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처음이었다. 이 저주의 특징인지, 아니면 린의 성격 때문인지 그 포악함이 드러나는 건 상대가 자신을 오롯이 맡길 때뿐이었다. 그래서 더 잔인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조짐도 없이 튀어나오다니. 린이 새삼 아찔해 하는 사이, 레나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끄덕였다.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린은 혹시나 하며 물었다.

16562806911042.jpg“여기가 어딘지 알아?”

16562806910993.jpg“여기는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의 영역이에요.”

반신반의하며 물어본 건데, 레나의 대답은 뜻밖에도 명료했다.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이라면 한때 동부에 들끓던, 뱀과 용의 형상을 한 망자를 다스리는 왕이었다. 레나가 우거진 열대 정원과 금빛 캐노피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16562806910993.jpg“그자가 우릴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어요.”

16562806911042.jpg“어째서?”

16562806910993.jpg“저 때문에요. 저를 갖고 싶어 하거든요.”

16562806911042.jpg“너를?”

연이은 폭로에 린의 눈이 커졌다. 가지고 싶어 하다니. 린은 얼떨떨해하다가 아까 귓전에 울린 목소리를 퍼뜩 떠올렸다.

1656280691101.jpg―찾았다. 내 신부.

분명 그런 말을 들었다.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탐욕이 가득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신부라 칭했다. 그런데 그게 레나에게 한 말이었다니. 차마 내색할 순 없었지만 린은 마음이 술렁이며 기분이 나빠졌다. 레나도 마찬가지였다. 린에겐 차마 쏟지 못한 분노가 자연히 이 사태의 원흉에게로 향했다.

16562806910993.jpg“그 왕하고는 악연이 좀 있어요. 그래서 안 그래도 조만간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레나는 차게 웃으며 우거진 수풀 사이로 눈을 돌렸다.

16562806910993.jpg“이렇게 먼저 나타나 줬네요, 고맙게도.”

레나의 시선이 닿자, 정원에 만발한 화려한 꽃들이 일렁이며 율동했다. 꽃이 스스로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저 커다란 잎사귀를 흔드는 건 화단 밑으로 숨어든 뱀들이었다. 서로 뒤엉킨 뱀들이 그림자 아래서 꿈틀대고 있었다. 그것들은 무언가를 닮은 새빨간 눈동자로, 레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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