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궁금해요?2020.10.12.
수풀 아래 뱀을 발견했을 때, 레나와 린은 이미 포위된 상태였다. 그걸 깨달은 두 사람은 지난 보름간 그랬던 것처럼 서로 등을 맞댔다.
“움직일 수 있겠어요?”
“그럭저럭.”
“그럼…….”
레나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건투를 빌 새도 없이 망자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검은 비늘과 붉은 눈을 가진, 온갖 파충류의 형상을 한 망자들이 날카로운 독니를 세우며 돌진했다. 부상 중인 린을 위해 레나가 먼저 움직였다. 예리한 단검이 화살처럼 날아온 뱀의 목 아래를 갈랐다. 동강 난 뱀이 퍼덕대며 몸을 뒤틀자 그 틈으로 다른 놈들이 기어들었다. 망자는 강했다. 두려움을 모르기에 물러나지 않고, 산 것을 시기하기에 그 생명을 탐하는. 죽음의 형상을 빌려 생명을 압도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들의 힘도 이 두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손에 뱀들이 족족 토막 나자 그들은 돌진을 멈추고 저들끼리 엉켜 들기 시작했다. 뱀들은 외피를 녹여 달라붙더니 이내 번데기가 우화하듯 형태를 바꿨다. 이윽고 몸을 일으킨 그것이 피막의 날개를 펼쳤다. 그 까마득한 위용에 레나와 린은 빠르게 물러났다.
“머리가 너무 높아요.”
“누가 칠까?”
“올려줄 수 있어요?”
린은 잠시 고민했다. 늑골에 금이 간 게 확실해서 팔을 함부로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팔 말고도 다른 쓸 만한 부분이 많았다.
“오른쪽 어깨로.”
“그럼 제가 갈게요.”
그때 형체를 다 갖춘 용이 포효하며 머리를 휘둘렀다. 굉음과 함께 땅이 움푹 파이며 사방으로 흙이 튀었다. 재빠르게 몸을 피한 레나와 린은 각각 용의 좌우로 흩어졌다. 용은 상대를 고르듯 머리를 빙 돌리더니 더 가깝게 접근한 레나에게로 주둥이를 내리꽂았다. 콰앙! 용의 단단한 머리가 다시금 바닥을 쳤다. 하지만 이번에도 헛수고였다. 연이어 허탕을 친 용은 화를 내듯 소리쳤다. 그러더니 무언가 뱉어내려는 듯 목을 울컥 부풀렸다.
“린 씨!”
레나는 망자가 독을 토하려는 걸 눈치채고 린에게 달려갔다. 린은 잠자코 다리를 벌리며 상체를 숙였다. 그의 등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자 레나는 그것을 사양하지 않고 밟았다. 린의 어깨를 차고 도약한 레나는 그대로 용의 눈높이까지 날아올랐고, 그 도마뱀이 엄한 것을 토해내기 전에 목덜미를 힘껏 베어냈다. 하지만 조금 얕았다. 용은 바로 죽지 않고 괴로워하며 몸을 뒤틀었다. 그때 지켜보던 린이 검을 돌려 바닥으로 내려온 용의 머리를 내리쳤다. 착지한 레나는 린의 뒤처리에 살포시 웃었다. 지난 보름간 레나는 린과 함께하며 새로운 즐거움을 깨달았다. 바로 함께 싸우는 즐거움이었다. 레나의 전장은 늘 고독했고, 싸우는 것도 지키는 것도 언제나 혼자의 몫이었다. 그런데 린과 함께 싸우며 레나는 난생처음 누군가에게 등을 맡겨보았다. 그건 든든할 뿐 아니라 꽤 재미있는 일이었다.
“또 온다.”
레나가 남몰래 뿌듯해하는 사이 린이 정원 너머를 보며 말했다. 말마따나 또 한 번 뱀들이 엉켜 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대뜸 덤벼들지 않았다. 몸을 꼬던 뱀들이 차츰 사람의 형상을 만들었고, 이내 완성된 그것이 붉은 눈으로 말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그대, 내 신부여.
섬뜩한 목소리와 달리 꽤 달콤한 어조였다. 그 뜬금없는 말에 레나는 한숨을 내쉬었고 린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것 치곤 인사가 너무 거치네요.”
―그대의 관심을 끌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런다고 관심 못 받을 텐데.”
레나의 태연한 대답에 린은 더 당황했다. 정황상 저 목소리의 주인은 많은 심장을 가진 왕, 그러니까 망자일 것이다. 하지만 린이 아는 망자는 무덤에서 기어 나온 괴물에 불과했다. 그런 존재와 말을 주고받다니,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레나는 그 생각을 비웃듯 저 존재와 멀쩡히 대화했다.
―말씀 낮추십시오, 그대. 전처럼 차갑게 꾸짖어 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저 존재는 레나에게 이상하리만치 설설 기고 있었다. 린은 황당한 눈으로 레나를 바라보았다. 레나는 그 시선을 눈치챘지만 미처 설명할 겨를이 없었다. 저쪽에서 멋대로 말을 이은 탓이었다.
―그대가 첼레스테의 심장을 목 잘린 여자에게 넘긴 것을 압니다.
의미심장한 말에 린의 눈은 또 한 번 커졌다. 그리고 레나는 여상히 딱딱한 태도로 왕을 다그쳤다.
“그래서 복수라도 하러 왔나요?”
―그대의 안위가 걱정될 따름입니다.
“걱정?”
―광신도와 전쟁광도 그대를 노리고 있습니다.
‘광신도’는 태움과 그을림의 왕, 히엠스 그라샤를 욕하는 말이다. 제 백성을 산채로 불태우고 신의 뜻이라 주장한 미치광이. 그 만행은 광신도라는 멸칭에 부족함이 없다. 그렇게 생각한 린은 ‘전쟁광’도 다른 망자의 왕을 가리키는 말이라 확신했다.
‘망자의 왕들이 레나를 노리고 있다는 건가?’
린은 막연한 가설에 경악하다가 이내 그것이 충분히 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지금 형체를 갖추고 말하는 존재가 정말 망자의 왕이라면, 그들에게 그만한 지성과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레나 루벨을 가장 먼저 노릴 것이다. 무덤의 비밀을 아는 인간이 무덤을 정복하겠다며 설치면 당연히 싫을 테니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린은 미묘한 기분으로 저 수상한 망자를 바라보았다.
‘레나에게 호감이 있는 건가?’
신부라는 호칭도 그렇고, 저 구애하는 태도도 그렇고, 다른 왕들의 계획을 알려주는 것도 그렇고. 모두 호의로 가득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정작 레나는 그것을 호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뜸 공격해놓고 안위가 걱정된다니, 앞뒤가 너무 안 맞네요.”
―그건…….
레나의 차가운 미소에 망자는 말문이 막힌 듯 머뭇댔다. 그러더니 곧 음산하게 웃기 시작했다. 드러난 본색에 레나는 짧게 혀를 찼다.
“그럼 그렇지.”
레나는 두말하지 않고 린의 팔을 잡았다. 두 사람이 함께 몸을 돌린 직후 망자의 몸이 찢기며 끔찍한 악취가 퍼졌다. 독이었다. . . . 독기를 피해 달리던 두 사람은 거대한 나무 밑에서 걸음을 멈췄다.
“계속 같은 장소야.”
“네, 아무래도 갇힌 것 같아요.”
린의 말마따나, 아무리 수풀을 헤쳐도 정원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 커다란 나무는 아까부터 몇 번을 지나쳤다. 같은 장소를 맴돌고 있다는 뜻이었다.
“일단 좀 쉬어요.”
레나는 한숨을 쉬며 나무 등치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래서 린도 근처에 풀썩 주저앉았다. 겨우 숨을 돌리게 되자 접어둔 의문이 마구 떠올랐다. 레나가 무덤에 대해 잘 아는 건 이제 놀랍지도 않다. 하지만 망자와 사담을 주고받을 만한 사이라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궁금한 게 가득했지만 린은 묻지 못했다. 그게 동맹의 기본조건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홀로 고민하는데, 레나가 돌연 평평한 바닥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린 씨도 누워요.”
“아니, 난…….”
“혼자 누우면 불편해서 그래요.”
레나의 청에 린은 마지못해 움직였다. 레나가 린이 있는 방향으로 머리를 둔 탓에 린도 하는 수 없이 레나가 있는 방향으로 머리를 뒀다. 결국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누운 꼴이 되었다.
“이 상황 조금 길어질지도 몰라요.”
“얼마나?”
“체감으로는 하루에서 이틀. 그러니까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해요.”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태연히 눈을 감았다. 린은 바로 옆에 놓인 얼굴을 바라보다가 곤혹스러운 기분에 고개를 돌렸다. 나무 아래 누운 탓에 위로 보이는 건 온통 나뭇잎이었다. 쓸데없이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그래서 린도 레나를 따라 눈을 감았다. 하지만 역시 쉬는 건 불가능했다. 망자의 왕에 대한 의문만이 아니라, 그 전의 사고까지 덩달아 떠오른 탓이었다. 기억은 안 나지만 린은 자신이 레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서 모르려 해도 모를 수 없었다. 요컨대 린은 레나에게 입을 맞췄다. 그 사실을 다시 떠올리자 린은 조금 죽고 싶어졌다. 입을 맞추다니, 입을 맞추다니. 입만 맞췄을까? 그 이상으로 어떤 파렴치한 짓을 하진 않았을까? 했을 것이다. 레나의 옷이 찢어진 걸 보면 분명 일선을 넘었을 것이다. 반려가 아닌 상대에게 키스한 것만으로도 선은 크게 넘은 셈이지만, 린은 자신이 그 이상의 일을 저질렀다고 확신했다. 그래놓고 그걸 기억조차 못 하다니. 린은 자괴감에 괴로워하며 레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와 달리 레나는 여전히 평화롭게 눈을 감고 있었다.
꽤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지만, 레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면 금방 몇 가지 수식어를 떠올릴 수 있다. 강하다, 단호하다, 예쁘다, 상냥하다 등. 하지만 이건 레나가 겉으로 보여주는 모습일 뿐, 레나의 생각이나 심경, 상태를 짐작할 만한 것은 언제나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래서 린은 언제나 궁금했다. 레나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무엇을 바라는지. 지금도 마찬가지다. 레나는 지금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태연한데, 린은 그게 정말 괜찮아서 그런 건지 궁금했다. 다 이해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넘긴 건지, 그것도 아니면 애써 혐오감을 참고 있는 건지, 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서, 너무 궁금해서.
“궁금해요?”
레나가 이렇게 물어볼 땐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어느새 눈을 뜬 레나가 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 한 뼘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다.
“아까 그 망자가 한 얘기, 궁금해요?”
묘하게 어긋난 질문이었다. 그래서 린은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응.”
“기왕 이렇게 됐으니까 설명해드릴게요.”
일부러 그러는 건지, 레나는 너그러운 척 곱게 웃었다. 그래서 린은 진짜 궁금한 걸 덮어둔 채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부터 얘길 해야…….”
“부군의 존함부터……?”
레나가 생긋 웃으며 린을 바라보았다. 그 가시 돋친 미소에 린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고, 레나는 그를 타박하듯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신부라는 건 그쪽에서 멋대로 하는 소리예요. 그리고 이름은 대충 눈치채지 않았어요?”
“많은 심장을 가진 왕.”
“네, 동부에 자주 나타나던 그 뱀들의 왕이에요.”
레나는 이제 감출 필요 없다는 듯 말했고, 린은 예측이 맞아떨어져 마음만 더 복잡해졌다.
“설마 망자의 왕하고 그렇게 친할 줄은 몰랐어.”
“안 친해요, 오직 악연뿐이에요.”
린은 눈으로 까닭을 물었다. 그에 레나는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설명하려면 좀 긴데 음, 린 씨도 배교자에 대해 아시죠?”
“배교자?”
뜻밖의 단어에 린이 되물었다. 몰라서가 아니라 놀라서였다. 배교자. 망자를 섬기거나 가까이하는 자들의 총칭. 100년 전 망자가 등장한 이래, 제국민에게 그들은 두려움의 대상이자 배척해야 하는 적이었다. 하지만 색다른 발상을 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법. 어떤 사람은 망자의 강함과 제단의 존재, 그리고 신화처럼 회자되는 망자의 왕에게 큰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망자를 사사로이 이용하거나 숭배하는 자들이 생겨났는데, 제국은 그들이 신을 저버렸다고 하여 배교자라 칭했다.
“어릴 때 그 배교자들한테 잡힌 적이 있어요.”
“뭐?”
린이 놀라서 쳐다봤지만, 레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하필 뱀을 불렀다가 오히려 사로잡힌 사람들이었죠.”
열세 살 때였다. 무덤에서 돌아왔지만 아버지에게 돌아갈 길이 요원하다는 걸 알게 된 레나는, 차라리 새 삶을 살기로 다짐한 적이 있었다. 자신을 연거푸 버린 아버지 따위 나도 같이 버려주겠다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레나는 실패했다. 많은 심장을 가진 왕 때문이었다. * * * 5년 전, 열세 살이 된 레나는 또 한 번 무덤으로 떨어졌다.
―또 왔네.
“시끄러…….”
―이번엔 또 뭐야?
“몰라.”
레지나가 모처럼 마중까지 나와 인사했지만 레나는 인상만 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레나가 무덤에서 레지나를 만난 건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는 의미. 그러니 레나는 이 만남이 결코 반가울 리 없었다. 더군다나 레나가 레지나를 만난 건 올해 들어서만 이미 다섯 번째였다. 그 해는 레나가 가장 많이 죽은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