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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망자는 한때 인간이었다 (48/208)

48화. 망자는 한때 인간이었다2020.10.15.

16562807253784.jpg―흐음.

레나가 목을 어루만지며 멍하니 앉아만 있자, 레지나가 내려와 그의 목깃을 살짝 건드렸다.

16562807253789.jpg“윽!”

레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 손을 뿌리쳤다. 과민한 반응에 레지나가 무심히 물었다.

16562807253784.jpg―또 목 졸려 죽은 거냐?

16562807253789.jpg“아직 안 죽었어.”

레나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애써 강한 척하지만 레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16562807253784.jpg―저번에 떨어지고 얼마 만이지?

16562807253789.jpg“한 달…….”

16562807253784.jpg―그 전엔 보름이었지. 어디 현상금이라도 걸린 건가?

16562807253789.jpg“말이 되는 소릴 해.”

어느 부인의 잔심부름을 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레나였다. 그런 여자애한테 현상금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16562807253784.jpg―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자주 살해될 리가. 도시의 치안을 탓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하지만 레지나는 진지했다.

16562807253784.jpg―혹 네 아비가 널 찾아낸 거라면…….

16562807253789.jpg“그건 아니야.”

16562807253784.jpg―어떻게 확신하지?

16562807253789.jpg“그런 심부름하는 사람 같진 않았으니까.

레나는 조금 비참한 기분으로 말했다.

16562807253789.jpg“날 찾아온 사람들, 다 제정신이 아니었어.”

지난 다섯 번의 습격. 세 번은 같은 사람이고 두 번은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 같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초점이 흐렸고, 레나가 때리고 깨물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16562807253784.jpg―혹시 다른 특징은?

16562807253789.jpg“계속 쌕쌕거렸어. 무슨 뱀처럼.”

16562807253784.jpg―미쳤군.

레지나가 거칠게 탄식했다. 대번에 험해진 목소리에 레나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래서 레지나는 혀를 차며 해명했다.

16562807253784.jpg―안 그래도 놈이 네게 눈독을 들인다 싶었는데.

놈? 눈독?

16562807253784.jpg―기억하느냐? 네가 처음 떨어진 날, 널 첩으로 삼겠다던 놈.

레나는 눈을 동그랗고 뜨고 끄덕였다. 당연히 기억했다. 첩으로 데려갈 수 없다면 얼굴이라도 잘라가겠다고 한, 망자의 왕 중에서도 특별히 징그럽던 자.

16562807253784.jpg―아무래도 놈이 수를 쓴 모양이다.

16562807253789.jpg“그게 무슨…….”

16562807253784.jpg―놈의 재주다. 다른 존재를 장악해서 조종하는 것. 그놈이 널 무덤으로 끌어내리려고 인간들을 움직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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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62807311505.jpg“그게 가능해?”

린의 물음에 레나는 태연히 끄덕였다.

16562807253789.jpg“망자의 왕들은 제국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어요. 다만 사람들이 모를 뿐이죠.”

그러곤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그에게 덧붙였다.

16562807253789.jpg“생각해봐요. 이상하지 않아요? 왜 제단이 제국 뒷골목을 굴러다니는지.”

16562807311505.jpg“어떤 의도가 있다는 뜻이야?”

16562807253789.jpg“그러지 않고서야 그런 괴상한 게 돌아다닐 리 없잖아요. 접경지역에선 망자와의 전쟁이 한창인데 도시에선 제단이 돌아다닌다니. 부자연스럽지 않아요?”

린의 얼굴이 한층 심각해졌다. 그가 고뇌하는 사이 레나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16562807253789.jpg“하여튼 그 왕은 사람들을 이용해서 저를 무덤으로 끌어내렸어요.”

16562807311505.jpg“그래서 어떻게 했어?”

16562807253789.jpg“노력했죠.”

16562807311505.jpg“노력?”

레나는 그 시절을 노력이라는 단어로 축약하며 웃었다. 린에게 레지나의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게 유감이었다. 그럼 그 지옥 같은 시절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레지나에 대한 건 비밀이었고, 레나는 앞서 그랬던 것처럼 조금 각색해 말을 이었다. ***

16562807253789.jpg“말도 안 돼…….”

레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한테 버려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그런 이상한 게 달라붙다니.

16562807253789.jpg“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16562807253784.jpg―세상은 네 잘잘못에 별 관심 없을 거다.

16562807253789.jpg“시끄러!”

레나는 천연덕스럽게 중얼대는 레지나에게 빽 소리쳤다. 그러곤 아예 엉엉 울었다.

16562807253784.jpg―지금이라도 선택하고 싶으면 말해라. 편히 죽거나, 망자의 왕이 되거나. 어느 쪽이든 지금보단 나을 거다.

레지나가 허공에 누워 말했다.

16562807253784.jpg―물론 내가 있으니 놈에게 끌려갈 일은 없지만, 이대로라면 지상에서의 삶은 아주 고될 거다.

레나는 더 억울해져서 레지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차오른 서러움에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16562807253789.jpg“난 죽기 싫어…….”

안식이니 왕이니, 아무리 좋게 포장한들 죽음은 죽음이다. 언젠가는 맞이해야겠지만 아직은 싫었다. 레나는 자신의 시간을 더 살고 싶었다.

16562807253784.jpg―정녕 살아야겠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지.

레나가 계속 울자 레지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동시에 레나의 앞에 무언가 떨어졌다. 그것은 날이 예리하게 선 검이었다.

16562807253784.jpg―강해져라. 놈들보다 더.

16562807253789.jpg“이걸로 사람을 찌르라고?”

16562807253784.jpg―아니, 내게 사사 받아 고작 인간과 싸우면 곤란하지.

레나가 불안하게 쳐다보자, 레지나는 반쪽짜리 얼굴로 씨익 웃었다.

16562807253784.jpg―강해지게 해주마. 망자의 왕도 갈가리 찢을 수 있을 만큼.

그때 레나는 묘한 예감을 느꼈다. 왠지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큰 낭패를 볼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하지만 레나에겐 대안이 없었다. 그래서 레자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후 죽도록 후회했다. 그래도 결과만 말하자면 무덤의 시간으로 3년 후, 레나는 많은 심장의 왕을 쓰러트리는 데 성공했다. ***

16562807311505.jpg“……그게 가능해?”

16562807253789.jpg“뭐든 하면 되더라고요.”

린은 얼이 빠져서 아까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고, 레나는 먼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흐리게 웃는 레나의 얼굴엔 알 수 없는 회한이 가득했다. 레지나는 강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말을 착실히 지켰다. 그 방법이 매우 난폭하긴 했지만, 어쨌든 덕분에 레나는 차고 넘치도록 강해졌다. 그래서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을 힘으로 찍어 누르는 데도 성공했다. 그리고 약 반년 동안은 놈이 부활할 때마다 쫓아다니며 다시 죽였다. 이유는 물론 분풀이였다. 놈에게 당한 일, 놈 때문에 레지나에게 당한 일, 그리고 하는 김에 아버지에게 당한 일까지 눌러 담은 원한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쌓인 게 많던 레나는 정말 집요하게 놈을 쫓아다녔고, 놈을 조진 횟수가 스무 번을 넘겼을 때는 더이상 세지도 않았다. 한편 망자의 왕은 갑자기 미쳐서 덤비는 레나 때문에 몹시 당황했다. 레나에게 처음 살해당한 날, 왕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이 수모를 갑절로 되돌려주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하지만 호기롭게 소리치던 것도 잠시, 세 번째로 죽던 날엔 빌었고 일곱 번째로 죽던 날엔 울었다. 그러더니 서른 번 정도 죽게 되자 오히려 묘한 심경의 변화가 생겨 레나에게 점점 순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국엔 이렇게 고백했다.

16562807253784.jpg―살아생전 죽이는 쾌락만 알았는데, 그대를 통해 죽임당하는 쾌락을 배웠습니다.

왕은 그렇게 말하며 오히려 레나가 죽이러 오는 걸 즐겼다. 그렇다고 본질이 사라진 건 아니어서 틈틈이 레나를 죽이려 들기도 했다. 그래서 레나는 황홀한 얼굴로 죽어가는 그놈을 보며 생각했다. 이 짓도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놈에게 흥미를 잃은 레나는 다시 지상으로 돌아갔다. 무덤의 시간으로 3년 6개월 만이었다.

16562807311505.jpg“죽임당하는 쾌락…….”

린은 복잡한 기분으로 레나의 말을 곱씹었다. 모든 부분에서 난국이지만, 린은 그게 하필 동부를 장악했던 왕의 이야기인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에게 어떤 연대의식을 가진 건 아니지만, 동부의 숙적이 그런 기이한 변태라는 사실은 심히 당혹스러웠다.

16562807311505.jpg“망자의 왕이라는 건, 다들 그래?”

16562807253789.jpg“어떤 의미예요?”

16562807311505.jpg“대단히 이상한데 의외로 소탈한…….”

린은 적당한 말을 고르다가 결국 포기했다. 그러곤 어지러운 기분으로 하소연했다.

16562807311505.jpg“그들과 평범하게 소통이 될 줄 몰랐어.”

16562807253789.jpg“왜요, 폐하의 전기에도 나오잖아요.”

16562807311505.jpg“그건…….”

16562807253789.jpg“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망자는 한때 인간이었어요. 아니, 지금도 인간이죠. 다만 죽었을 뿐.”

레나의 설명에 린은 마지못해 납득 했다. 그럼에도 뒤통수 맞은 기분은 여전했다. 사실 더 점입가경은 레나였다. 무덤에 대해 이상하게 잘 안다 싶더니, 여기서 몇 년이나 살았을 줄이야. 린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불현듯 물었다.

16562807311505.jpg“그럼 너 지금 몇 살이야?”

16562807253789.jpg“저요?”

린의 진지한 물음에 레나는 놀란 척 되물었다. 그러더니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16562807253789.jpg“이제 법적 성인이에요.”

16562807311505.jpg“그거 말고, 무덤에서 지낸 시간까지 합치면.”

16562807253789.jpg“음…….”

하지만 린은 그 농담 같은 대답에 속지 않았고, 레나는 눈을 다시 곱게 접혔다. 숙녀의 나이를 함부로 묻다니. 평소라면 입을 때려줬겠지만, 레나는 모처럼 아량을 베풀었다.

16562807253789.jpg“무덤에서 보낸 건 7년 정도예요.”

7년. 그럼 레나의 진짜 나이는 열여덟이 아니라 스물다섯, 어쩌면 그 이상이라고 봐야 했다. 이 또한 놀랄 일이지만 린은 오히려 쉽게 납득했다. 레나가 평소에 보여준 면모 때문이었다. 레나는 평소에도 이따금, 아니. 꽤 자주 연상처럼 느껴졌다. 어린 나이에 공작위를 물려받은 린도 나이에 비하면 성숙한 편이다. 그럼에도 레나와 함께 있으면 주도하기보다는 따르는 상황이 잦았다. 싫다는 뜻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이끌어주는 건 아주 어릴 때 이후 처음이어서, 린은 레나와 함께 있을 때면 평소의 부담을 반 이상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래서 편했고, 그래서 좋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신기한 적도 많았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16562807311505.jpg‘연상이었어.’

그렇게 이해한 린은 자신의 얄팍함에 몰래 한숨을 쉬었다.

16562807311505.jpg‘어쩐지…….’

정말 어쩐지. 사실 린은 레나와 함께하며 조금 이상하다고 느낀 일이 있었다. 아무에게도 밝힌 적 없지만, 이제껏 린이 좋아한 이성은 모두 연상이었다. 일부러 나이를 본 건 물론 아니다. 다만 그를 안심시키는 여유에 끌리고 보면 어김없이 나이가 더 많았다. 그래서 이번엔 정말 웬일인가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린은 자신의 쓸데없이 대쪽 같은 취향에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잠시 입을 다물자, 그 뜻을 오해한 레나가 얼굴을 가까이하며 물었다.

16562807253789.jpg“나이는 왜요? 누나라고 부르고 싶어요?”

레나의 속삭임에 린은 미간을 좁히며 살짝 물러났다. 가슴이 안팎으로 아팠다. 자기 갈비뼈를 부러트린 여자에게 이토록 설레다니, 어디에 말도 못 할 일이었다. 린은 마음의 동요를 애써 진정시키며 둘러댈 말을 찾았다.

16562807311505.jpg“누나…….”

그래서 막 운을 떼는데, 레나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뒤이어 린도 수상한 기척을 느꼈다. 나무 주변의 수풀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눈치챘을 때, 두 사람은 또다시 포위된 후였다.

16562807311505.jpg“계속 이렇게 쫓겨야 해?”

16562807253789.jpg“반대 방법도 있죠. 이 공간의 망자를 먼저 몰살시킨다던가.”

린도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크고 작은 뱀들이 사방에서 우글거렸다. 하지만 레나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정말 먼저 몰살시킬 생각까지 하는 것 같았다. 이러니까 좋아할 수밖에 없는 거다. 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레나에게 등을 맡겼다. 그리고 아까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지켰다. 두 사람의 호흡에 뱀의 망자들은 역시나 속수무책 썰려 나갔다.

16562807311505.jpg‘뭐지?’

그래서 린은 오히려 위화감을 느꼈다.

16562807311505.jpg‘이래선 아까하고 다를 바가…….’

직전에 그렇게 당했으면 방법을 바꾸거나 대안을 마련할 법도 한데, 뱀들은 직전과 다를 바 없이 무작정 돌진했다. 사실 이게 지상에서 봐온 망자의 모습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곳에 망자의 왕이 있다면, 그리고 그 왕이 지성을 가졌다면 무언가 다른 것이 있어야 했다.

16562807311505.jpg‘천천히 피를 말릴 셈인가? 아니면 다른 노림수가 있나?’

린이 왕의 의중을 의심할 때였다.

16562807311505.jpg“큭……!”

갑작스러운 충격이 린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망자를 치던 린은 검을 떨어트리고 무릎을 꺾었다. 레나가 소리를 듣고 린을 돌아보았다. 레나의 당황한 얼굴이 보였다. 그 모습이 미치도록 색정적이었다.

16562807311505.jpg‘안 돼…….’

린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또다. 또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16562807253789.jpg“린 씨……!”

레나의 목소리가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대신 낯선 웃음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잔뜩 갈라진 뱀 같은 웃음소리. 그 순간 의문 일부가 해소되었다. 뱀의 왕이 가진 노림수가 무엇인지. 그건 바로 린, 자신이었다. 동시에 새로운 의문이 떠올랐다. 뱀의 왕은 대체 무슨 수로 나를……. 그때 바닥에 닿을 듯 낮아졌던 눈높이가 도로 점점 높아졌다. 두려웠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몸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것 같았다. 뱀들은 계속해서 쏟아졌고, 그사이에 놓인 레나 루벨이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충분히 위기인데, 또 한 번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첨탑처럼 거대한 뱀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린은 저것이 이대로 날아와 자신들을 집어삼키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직후, 굉음과 함께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그 거대한 뱀이 머리를 메치며 다른 뱀들을 모조리 깔아뭉개버린 것이다.

16562807311505.jpg‘무슨…….’

뜻밖의 상황에 레나도 린도 당황했다. 머리가 너무 무거워서 넘어진 건가? 그런 것치고 저 큰 뱀의 기세는 매서웠다. 큰 뱀은 레나와 린을 에워싼 뱀들을 단숨에 치워버리더니, 거대한 독니를 드러내며 허공을 물어뜯었다. 그러자 우거진 정원이 찢기며 균열이 생겨났다. 붉은 하늘을 비추는 균열, 출구였다.

16562807253789.jpg“린 씨! 정신 차려요!”

출구를 본 레나가 린을 잡아당겼다. 그가 날뛰면 억지로라도 끌고 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린은 이미 제정신이었다. 저 뱀이 허공을 찢는 순간 정신이 돌아왔다. 역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린은 일단 레나와 함께 균열로 내달렸다.

16562807253784.jpg―네가 감히!

그때 등 뒤에서 노성이 울려 퍼졌다.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의 목소리였다. 레나와 린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뱀들이 서로 충돌하더니, 레나와 린을 도왔던 큰 뱀이 갈가리 찢겼다. 이어 그 몸에서 새카만 연기가 피어올랐다. 레나와 린은 독기를 피해 균열 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린은 묘한 예감에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찢어진 뱀들 사이에 무언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 여자였다. 그 순간 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동시에 거짓말처럼 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16562807253784.jpg―네가 살아 있는 줄 알았으면.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악몽 같은 목소리가, 주인을 반기듯 린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16562807311505.jpg“말도 안 돼…….”

린은 점차 아물어가는 균열을 보며 신음했다. 점점 좁아지는 틈으로 보이는 저 여자를 그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는 린의 생모이자 전대 동부공. 나자 아이테르너 그라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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