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비 내리는 밤 (51/208)

51화. 비 내리는 밤20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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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2808268652.jpg“저는 밖에서 잘게요.”

유니의 뜬금없는 선언에 레나가 놀라 되물었다.

16562808268657.jpg“이 시간에 어딜 간다고 그래요?”

16562808268652.jpg“설마 이 넓은 황궁에 제 한 몸 누일 곳 없을까요.”

16562808268657.jpg“네?”

16562808268652.jpg“두 분, 부디 좋은 시간 보내시길…….”

유니는 그렇게 말하고 여보란 듯 베개를 챙겨들어 눈앞의 두 사람, 레나와 린에게 수치를 안겼다. 그 잠옷 바람의 꼬마는 한술 더 떠 다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보다 못한 레나가 유니를 침대에 다시 고이 눕히는 것으로 일련의 도발은 끝이 났다. 그 후 레나는 린과 함께 침실 밖으로 나왔다. 유니를 침실에 가두고 둘이 되자, 영문도 모른 채 놀림당한 린이 자그맣게 물었다.

16562808268673.jpg“쟤는 진짜 하녀야?”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느낀 거지만, 유니는 별로 하녀답지 않았다. 하녀라기엔 너무 어린 데다가 레나와 격이 없고, 게다가 묘하게 사나웠다. 린이 유니의 정체를 의심하자 레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16562808268657.jpg“일단은요.”

16562808268673.jpg“일단은?”

16562808268657.jpg“유니는 제 친구예요. 절 도와주려고 잠시 하녀 역할을 해주는 거고요.”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린에게 수건을 건넸다. 린은 그걸로 잠자코 얼굴의 물기를 닦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16562808268657.jpg“옷은 벗어서 말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16562808268673.jpg“싫어…….”

16562808268657.jpg“떼쓰는 거예요? 밤중에 그러고 와서?”

16562808268673.jpg“떼쓰다니…….”

16562808268657.jpg“위에 옷만 벗어요. 감기 걸릴까 봐 그래요.”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담요를 가져왔고, 고민하던 린은 자신의 흰 셔츠가 제구실을 못 하는 것을 깨닫고 조심히 단추를 풀었다. 하지만 목에서 세 번째 단추까지 풀었을 때 린은 행동을 멈추고 레나를 쳐다봤다.

16562808268673.jpg“……왜 보고 있는 거야.”

16562808268657.jpg“아.”

린을 가만히 쳐다보던 레나는 그가 창피해하는 걸 알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본인이 민망해하기보단 린을 배려해준다는 투였다. 린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며 젖은 셔츠를 벗고 담요를 뒤집어썼다. 린이 담요에 말린 사람이 되자 레나는 그를 의자에 앉혔다. 그러곤 두 팔로 담요를 여민 그를 위해 머리를 대신 말려주기 시작했다. 레나가 수건으로 머리를 손수 닦아주자 린은 짐짓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긴장을 풀고 레나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16562808268673.jpg“익숙한가 봐.”

16562808268657.jpg“뭐가요?”

16562808268673.jpg“다른 사람 돌봐주는 거.”

16562808268657.jpg“음, 아니요. 원래는 돌봄 받는 입장이에요. 유니가 저보다 훨씬 꼼꼼하거든요.”

레나가 수건으로 린의 귀를 매만지며 덧붙였다.

16562808268657.jpg“그런데 린 씨는 저보다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니까.”

레나의 손길에 간지러워하던 린은 그 매몰찬 평가에 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자신이 그렇게 변변치 못한 놈인가 고민했다. 스스로 평가하긴 그렇지만, 동부공 리그난 아이테르너는 매사에 철저하고 일 처리에 확실한 사람이다. 그래서 손 많이 간다는 표현은 그에게 적절치 않지만, 린은 레나에게 반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레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풀어지는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대로 과연 괜찮은가 고민하는데, 레나가 물었다.

16562808268657.jpg“무슨 얘기가 하고 싶어서 비까지 맞으면서 온 거예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린은 잠깐 생각했다. 레나처럼 아슬아슬하게 장난을 쳐볼까. 보고 싶어서 왔다던가 하는 말로. 제법 혹한다. 늘 당하기만 했는데 한 번쯤은. 린은 잠시 못된 생각을 했지만 곧 겸손히 포기했다. 그는 레나처럼 뻔뻔하지 못했다.

16562808268673.jpg“하고 싶은 얘기는 많지만…….”

16562808268657.jpg“많지만?”

16562808268673.jpg“어차피 대답 안 할 것 같아서 나도 그냥 안 하려고.”

레나가 머리를 말리던 손으로 린의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꽤 아파서 린은 레나의 팔을 탁탁 치며 진정을 요구했다.

16562808268657.jpg“다행히 멀쩡한가 보네요. 어젠 많이 놀란 것 같더니.”

린의 시답잖은 말장난을 한차례 응징하고, 레나가 다시 운을 뗐다.

16562808268657.jpg“어제 무덤에서 본 사람, 아는 사람이었어요?”

16562808268673.jpg“응. 그런데 이것도 말 안 할래.”

16562808268657.jpg“왜요?”

16562808268673.jpg“그래야 공평하니까, ……아파.”

레나가 이번엔 린의 양 뺨을 꼬집었다. 한 겹 수건이 있어서 가능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 응징은 반은 장난이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오늘따라 린이 비싸게 군다. 예전엔 뭐든 착실히 대답했는데. 레나는 그게 얄밉다고 생각하다가, 그래야 공평하다는 린의 대답을 떠올리고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렇게 나오면 확실히 레나는 할 말이 없다. 레나야말로 그가 뭘 물어볼 때마다 어물쩍 웃어넘기니까. 결국 레나는 더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몇 마디 나누는 동안 린의 머리도 거의 말라 더 닦아줄 필요가 없었다. 레나가 손을 멈추자 침묵은 더 선명해졌다. 그 고요가 무거워지려던 차에, 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16562808268673.jpg“하루 종일 생각했어.”

정말 종일 생각했다. 자신이 무덤에서 본 게 대체 뭔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16562808268673.jpg“어쩌면 내가 아는 것들이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국이 말하는 황제의 업적, 그가 나눠준 위대한 축복, 그리고 망자들과 맞서야 하는 인간들의 숙명도. 이 모든 게 어쩌면 거대한 연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6562808268673.jpg“그리고 정말 그렇다면, 너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겠지.”

아버지를 만나러 황궁까지 찾아온 레나 루벨. 단지 레나 루벨로 존재하고 싶다며 무덤 정복에 앞장선 숙녀. 그런 현재에 도달하기까지 레나 루벨이 무엇을 경험했는지, 또 그 이면에 어떤 결심이 있는지 그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린은 머리를 덮은 수건을 끌어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시야가 트이며 레나의 얼굴이 보였다. 레나는 추궁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회피와 거절을 준비한 그 눈빛을 보며, 린은 덤덤히 속삭였다.

16562808268673.jpg“궁금하지만 말해주기 전까진 묻지 않을게.”

16562808268657.jpg“……왜요?”

16562808268673.jpg“말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리고 알아내는 건 내 몫이니까.”

린의 고요한 대답에 레나의 눈에서 이채가 피어났다. 사실 레나는 각오하고 있었다. 린이 온갖 질문을 쏟아내며 자신에게 대답을 요구할 거라고. 그래서 자신과의 약속을 무참히 내팽개치고 그걸 깨닫지도 못할 거라고.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린은 약속을 지켰다. 어제 그토록 혼란스러워했으면서, 끝내 무너지지 않고 어떻게든 중심을 잡았다. 레나는 린에게 기대를 짓밟혀 퍽 묘한 기분이 되었다. 그가 이렇게 나오니 차라리 모든 걸 말하고 싶어졌다. 자신이 왜 황궁으로 왔는지, 왜 아버지에게 기회를 주는지, 왜 존재를 인정받으려 하는지. 그 이유를 낱낱이 밝히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아직은 그럴 수 없어, 레나는 작게 중얼댔다.

16562808268657.jpg“린 씨를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그 무수한 순간들, 이런 사람이 옆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레나는 잠시 상상하다 미간을 좁히고 웃었다.

16562808268657.jpg“음, 아닌가?”

레나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되돌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이라고 과연 처음부터 강했을까? 아니, 그 역시 수많은 일을 겪으며 강해진 거다. 거기 대가 없이 기대는 건 안 될 일. 게다가 레나 역시 그 숱한 일을 견뎌서 강해졌다. 그것은 레나의 자부심이었고, 레나는 자신이 얻은 그 힘을 버거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후회하지 않았다.

16562808268657.jpg“다시 생각해보니까 차라리 지금이 낫네요.”

더 일찍 만나본들 불쌍한 아이가 둘이 될 뿐이다. 그래서 레나는 잠깐 떠올린 가정을 곧 철회했다. 그러자 린이 까닭을 물었다.

16562808268673.jpg“왜?”

16562808268657.jpg“지금은 린 씨가 물면 때릴 수 있으니까요. 예전의 저라면 못했을 거예요.”

레나는 가볍게 대답했고, 그 바람에 린의 얼굴은 다시 창백해졌다. 린은 레나가 갑자기 꺼낸 화제를 믿을 수 없어 한참 동안 굳어 있다가, 이내 목 졸린 사람처럼 신음했다.

16562808268673.jpg“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16562808268657.jpg“뭐가요?”

16562808268673.jpg“그…….”

린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그 일련의 행위를 직접 논하기에 그는 너무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린이 차마 입을 떼지 못하자 레나가 대신 말했다.

16562808268657.jpg“아프긴 했어요.”

연이은 직언에 하얗던 린의 얼굴이 이번엔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레나는 여상한 얼굴로 조곤조곤 설명했다.

16562808268657.jpg“하지만 그걸 린 씨의 의지나 의사, 혹은 잘못으로 여길 순 없으니까 그냥 큰 개한테 물린 셈 치려고요.”

16562808268673.jpg“큰 개…….”

린은 큰 개라는 말에 약간 충격을 받았다.

16562808268657.jpg“그러니까 특별히 의미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그리고 이어진 말에는 조금 더한 충격을 받았다. 린은 여느 때처럼 순수하게 웃는 레나를 보며 심정이 꽤 복잡해졌다. 그러고 보니 레나는 계속 ‘물렸다’고 표현할 뿐, 그 일을 입맞춤으로 명명하지 않았다. 말마따나 못된 동네 개한테 물린 셈 치려는 모양이었다. 린은 이 심상치 않은 강아지 취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수긍했다. 그래, 차라리 그 편이 다행이다. 끔찍한 일로 기억에 남는 것보단 하찮게 대해지는 편이 낫다. 린은 그게 자신의 최선임을 인정했다. 그래서 레나가 앞서 한 말에도 동의했다. 이제야 만나 정말 다행이다. 만약 더 일찍 만났다면, 레나도 여느 사람들처럼 그의 날카로운 그림자를 견디지 못해 달아났을 테니까. 그러지 않아 다행이다. 이미 닳고 닳아 너덜너덜하지만, 대신 어떤 일이든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만나 다행이다. 그래서 서로에게 비밀이 가득하고, 이 관계도 살얼음 위에 선 것처럼 위태롭지만 그래도 그저 다행이다. 이렇게나마 함께 할 수 있어서. 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힘없이 웃었다. 그렇게 웃으며 위를 보니 레나도 비슷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레나가 왜 항상 저렇게 웃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밖에선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짙어지는 빗소리 속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분명 다행이었다. . . . 이른 새벽, 유니는 힘껏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그러곤 눈을 비비며 아가씨의 침대 쪽을 돌아보았는데, 어쩐 일인지 아가씨의 침대가 텅 비어 있었다.

16562808268652.jpg‘응?’

유니는 덜 깬 눈으로 침실을 둘러보며 아가씨를 찾았다. 하지만 아침잠 많은 아가씨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유니는 결국 거실로 나갔고, 거기서 뜻밖의 것을 보았다.

16562808268652.jpg“엥?”

햇살과 커튼이 일렁이는 창가 아래, 레나와 린이 소파에 앉아 자고 있었다. 불편해 보이진 않았다. 서로에게 기대어 잠든 모습이 꽤 안락해 보였다.

16562808268652.jpg“이 사람들이…….”

유니는 원치 않게 목격한 어른들의 파렴치에 치를 떨다가 툴툴대며 돌아섰다. 그러곤 침실에서 침대시트를 끌고 나와 두 사람을 덮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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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밤새 내리던 비는 새벽에 그쳤다. 햇살이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드리우자, 침대에 묶여 있던 청년이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그는 손으로 빛을 막으려다가 자신이 묶여 있는 걸 깨닫고 짜증을 냈다.

16562808411247.jpg“풀어.”

청년의 잠긴 목소리에 방 안의 시종들이 서둘러 달려왔다.

16562808411251.jpg“저하, 정신이 드십니까?”

16562808411247.jpg“이거 풀라고.”

하지만 인상을 쓴 청년, 루비드는 대답도 않고 그들을 다그쳤다. 그 또렷한 독기에 시종들은 왕자의 팔을 묶은 비단을 급히 풀었다. 매듭이 헐거워지자 루비드는 짜증을 내며 시종들을 뿌리쳤다. 그러곤 저릿한 손목을 돌리며 부득 이를 갈았다.

16562808411247.jpg“망할, 누가 이따위로 묶은 거야.”

루비드는 신경질을 내며 애꿎은 시종들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종들은 찔끔하면서도 저 성질머리가 돌아온 것에 안심했다. 일주일 만이었다. 형이 제 목을 칠 거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던 루비드는, 일주일 만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시종들이 몰래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루비드는 제 손목을 묶었던 비단을 쫙쫙 찢으며 화풀이를 했다. 그러곤 그것을 집어던지며 물었다.

16562808411247.jpg“이우라는?”

16562808411251.jpg“처소에 계십니다.”

16562808411247.jpg“여기 온 적은.”

16562808411251.jpg“없습니다.”

시종은 그렇게 대답하며 루비드의 안색을 살폈다. 루비드는 지난 엿새간 이우라를 두려워하며 발광했다. 그래서 이우라가 밤중에 그를 보러 왔었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아, 그가 온 적 없다고 거짓말했다. 그러자 루비드의 얼굴은 더 사납게 일그러졌다.

16562808411247.jpg‘실패작은 필요 없다는 거냐.’

그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를 악물더니, 이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16562808411247.jpg“루벨을 불러.”

16562808411251.jpg“저하, 일단 몸을 추스르시는 게…….”

16562808411247.jpg“불러.”

시종의 만류에 루비드가 눈을 부릅떴다. 그 차가운 시선과 무겁게 떨어진 명령에 시종은 하는 수 없이 몸을 물렸다. 이어 다른 시종들이 와서 루비드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오랫동안 묶여 있던 몸이 성치 않았지만 루비드는 고고하게 몸을 세웠다. 한가하게 요양이나 할 겨를은 없었다. 지금 루비드의 머릿속엔 치욕을 씻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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