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죽음의 천사2020.10.29.
성전의 스테인드글라스가 투명하게 빛나는 새벽, 한 남자가 떨어지는 빛 아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산란하는 빛 가운데 고요히 기도하는 남자, 추기경 클라비스의 신성한 모습에 지켜보는 이들은 모두 말을 잃었다. 그대로 화폭에 담아도 손색이 없는 모습이지만, 사실 그를 보좌하는 사제들은 알고 있었다. 저 추기경의 난잡한 실체를. 앞에서는 아름다운 껍데기로 경건한 척하지만 뒤에선 외설스러운 생활을 즐기는, 신을 경배하기는커녕 모욕하고 비웃기를 더 좋아하는 자라는 것을.
긴 침묵 끝에 클라비스가 성호를 그리며 눈을 떴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기다리던 사제들이 보좌하며 고했다.
“전하, 동부공이 가져온 유물의 조사가 끝났습니다.”
“응, 그래요?”
“엔지 루벨의 말이 맞았습니다. 전부 성주 시대에 제작된 유물이었습니다.”
“그럼 첫울음을 삼킨 왕이 누군지도 특정됐나요?”
“네, 짐작하신 대로 첼레스테 왕이었습니다. 고문서에서 인장을 찾았습니다.”
사제의 보고에 클라비스는 기분 좋게 끄덕였다.
“레나 경의 말이 다 맞았군요. 큰 수확이네요. 황제 폐하께서도 정말 기뻐하시겠어요.”
클라비스는 그렇게 말하며 곱게 웃었다. 그건 추기경의 말버릇이었다. 그는 모든 일을 황제의 기준으로 평가했다. 폐하께서 좋아하실 거다, 싫어하실 거다. 실망하실 거다. 때문에 사람들은 클라비스가 황제를 지극히 존경한다고 여길 뿐, 그가 황제를 죽이고 싶어 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망자의 성으로 들어가는 법을 알아냈으니 이제 날을 잡아야겠군요. 공작들에게 연락해 다음 원정 날짜를 조율하세요.”
추기경의 명에 사제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런데 그중 한 사제가 다시 운을 뗐다.
“별개의 보고가 있습니다.”
“뭐죠?”
“서쪽의 까마귀가 수상합니다.”
“그 배교자는 또 왜?”
보고하는 사제의 목소리는 심각했지만, 보고받는 클라비스의 태도는 여상히 가벼웠다. 서쪽의 까마귀. 그는 신을 저버리고 망자의 편에 선 배교자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인물로 꼽히는 자였다. 그는 약 3년 전 등장해 폐허가 된 서부를 장악하고 제단을 이용해 세를 불렸다. 이에 북부에서 몇 차례 토벌에 나섰으나 번번이 살아남은, 명실상부 제국 최악의 공적이었다.
“이틀 전 그 일대 망자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다행히 인근의 민가를 덮치는 일은 없었지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다들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사제는 문제를 고하며 클라비스를 은근히 바라보았다. 서부의 혼란을 해결하는 척이라도 하라는 무언의 청원이었다. 5년 전 망자에게 먹힌 이후 서부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둑처럼 위험했다. 망자 소굴이 되어 인접한 북부를 위협함은 물론이고, 까마귀라는 정체불명의 인물까지 둥지를 틀었다. 그런데 정작 전 서부공인 클라비스 시렌치움은 그 문제를 완전히 무시한 채 추기경 놀이나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강직한 사제는 클라비스가 이제라도 문제를 직시하고 수습에 나서 주길 바랐다.
“음, 이우라 군이 황궁으로 내려와서 심심했나?”
하지만 역시나 클라비스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무덤을 더 부지런히 정복해야겠어요. 그럼 서부의 망자들도 알아서 사라지지 않을까요?”
그 대책 없는 제안에 사제의 얼굴이 차게 굳었다.
“접경지의 거주민들은 하루하루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불안해할 게 뭐 있죠? 죽으면 신의 품에 안길 텐데. 그건 기뻐할 일이죠.”
“전하…….”
“사제님.”
사제가 재차 항의하려 하자, 클라비스가 웃으며 그를 불렀다. 바닥까지 뚝 떨어지는 차가운 호명이었다.
“신을 믿는 자라면 죽음 앞에서도 담대해야 하는 법입니다.”
클라비스가 사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벼운 손길이었지만 사제는 오싹함을 느꼈다. 그는 이 손이 인간의 생기를 빨아들이는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두렵다면 기도하라 전하세요. 운이 좋으면 신께서 도우시겠죠.”
클라비스는 얼어붙은 사제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그러더니 다시 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어차피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무심한 신께서 드디어 제 기도를 들어주셨거든요.”
클라비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구세주의 형상을 기쁘게 바라보았다. 그는 꼭 저렇게 빛나는 숙녀를 알고 있었다. 레나 루벨이라는 이름의, 그가 만들어낸 괴물. 이 지긋지긋한 제국을 박살 내고 그에게 안식을 선사할 죽음의 천사. 클라비스는 그를 경배하듯 두 팔을 벌렸다. 반짝이는 스테인드글라스 아래 다채로운 빛을 밟고 선 그는 역시나 아름다웠다. 아름다워서 더 형편없는 존재가 제국의 추기경 노릇을 하고 있었다. *** 비슷한 시각, 루벨 후작은 간만에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루비드 왕자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그를 불렀기 때문이다.
“어깨는 좀 괜찮으십니까?”
“글쎄, 썩 좋지는 않군.”
노집사가 재킷을 걸쳐주며 묻자 후작은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곤 아직 삐걱대는 어깨를 살짝 돌려보았다. 후작은 지난 원정에서 어깨를 다쳤다. 루비드의 참격에 휩쓸려 추락할 때 레나가 팔을 낚아채며 어깨가 심하게 탈구되었다. 그래서 그는 원정 후 내내 요양 중이었다.
“요즘엔 무덤을 탐색한다지?”
“네, 동부공과 함께 다닌다고 들었습니다.
집사는 후작이 레나의 이야기를 하는 걸 알고 눈치껏 말을 받았다.
“게다가 들리는 소문으로는 둘 사이가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동부공과?”
노집사는 후작에게 동부공과 남부공 대리를 둘러싼 소문을 낱낱이 고했다. 그러자 후작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럴만하지. 어디 빠지는 곳 없는 아이니까. 천하의 동부공이 드디어 임자를 만났군.”
후작은 짐짓 자랑스러운 투로 말했다. 때문에 노집사는 내심 당황했다.
“참 잘 크지 않았나?”
“레나 아가씨 말씀이십니까?”
“그래, 어릴 때부터 장래가 기대되는 아이였지. 그런데 이건 기대 이상 아닌가?”
노집사는 후작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어색하게 웃는데 후작이 덧붙였다.
“잘 큰 딸 덕에 동부공 사위가 생길지도 모르겠군.”
그 느긋한 말에 집사는 소름이 돋았다. 아무래도 후작은 자신이 레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멀쩡하게 아비 노릇을 하려 들 수는 없었다. 집사는 당혹감을 숨기기 위해 더 바쁘게 손을 놀렸다. 어째선지 후작은 묘하게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리고 집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자신의 냉정한 주인이 무언가를 꾸밀 때 유독 너그러워진다는 것을. 그래서 집사는 이 자리를 그만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겐 아직 보고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고, 결국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 엔지 도련님에 대해서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도련님께서도 아가씨께 관심이 생기신 것 같습니다. 그 하녀와 함께 계신 걸 봤습니다.”
“그 하녀?”
“레나 아가씨와 함께 입궁한 그 어린 하녀 말입니다.”
집사의 설명에 후작은 뒤늦게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댔다.
“장차 후작이 될 녀석이 하녀와…….”
“대화를 들어보니 종종 어울리신 것 같습니다.”
“하인들에게도 이것저것 물으며 옛날 일을 캐는 것 같던데.”
“경고하시겠습니까?”
“됐네. 그런다고 듣겠나?”
엔지의 이야기가 나오자 들떠 있던 후작의 얼굴이 도로 차게 가라앉았다.
“꼬리가 밟히는 줄도 모르고 들쑤시고 다니다니, 제 누나를 반만이라도 닮으면 좋으련만.”
후작은 엔지의 어수룩함을 향해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그 와중에도 레나를 향한 자부심이 드러나, 노집사는 주인의 머릿속이 더더욱 궁금해졌다. 그리고 집사의 예상대로, 후작은 막 계산을 마친 상태였다. 며칠 전, 무덤에서 발밑이 무너진 순간 후작은 죽음을 직감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거라는 확신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 그를 덮쳤다. 그런데 별안간 죽음보다 더 강한 힘이 후작을 낚아챘다. 팔이 찢어지는 충격과 함께 딸아이의 선연한 얼굴을 마주했을 때, 후작은 마치 신이나 악마, 혹은 그에 준하는 절대자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를 붙잡은 손은 사자처럼 강했다. 또 아비를 구하고 웃는 얼굴은 어떻던가. 후작은 그토록 고고하게 웃는 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때 이미 압도되었지만, 후작은 기어이 마지막 무기로 레나를 다시 죽이려 들었다. 하지만 레나는 또다시 살아 돌아왔다. 후작은 무덤에서 먼저 돌아와 자신을 맞이하는 딸을 보며 악몽에 갇힌 기분마저 느꼈다. 그 후 후작은 요양을 핑계 삼아 칩거하고 고뇌했다. 반역의 증거인 딸. 그것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라는 딸. 죽여도 죽지 않는 딸. 그리고 몇 번이고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한 딸.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하던 후작은 어느 순간 깨달았다. 레나가 자신을 멀쩡히 놔두고 있음을. 아무런 보복도 고발도 하고 있지 않음을. 레나는 정말 후작에게 기회를 줄 셈이었다. 무덤 정복이 끝날 때까지. 허튼소리라 여겼던 제안이 사실인 것을 깨닫자 후작의 생각도 변했다. 이건 분명 위기지만, 동시에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나의 조건대로라면 그는 무덤 정복이 끝날 때까지 보복을 걱정하지 않고 레나를 몇 번이고 죽여 볼 수 있었다. 정 여의치 않으면 용서를 구하는 길도 남아 있다. 그렇게 되면 그는 공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딸을 되찾게 되는 셈이었다.
‘황제의 문책만 피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높이 오르는 것도 가능할 터.’
어차피 제국의 상하고저는 혈통으로 결정된다. 철없는 왕자의 치다꺼리나 하는 후작보단 남부공 대리의 아비, 동부공의 장인이 훨씬 더 나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후작은 차라리 이 기회를 마음껏 써보기로 했다. 틈이 생길 때마다 레나를 죽일 것이다. 하지만 끝내 죽지 않을 때를 대비해 레나의 아비 노릇을 하며 황제의 진노를 피할 방법도 찾아둘 것이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시궁창 밑바닥에서 여기까지 오르기 위해 그는 무수히도 많은 위기를 극복했다. 이 또한 그 일환일 뿐, 그를 더 높이 올려줄 계기가 될 뿐. 후작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악운을 믿었다.
“그래서 그 하녀는, 쓸 만해 보이던가?”
후작이 물었다. 과거 딸아이를 대할 때처럼 옅게 웃으며, 더없이 온화한 목소리로. 그래서 노집사는 잠시 눈을 감았다. 또 죄를 지어야 하는 처지를 슬퍼하듯이. ***
“아가씨, 이제 일어나세요!”
유니가 짹짹대는 소리에 레나는 나른히 눈을 떴다. 레나는 꽤 푹 잤다고 생각하며 기지개를 켜다가,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는 걸 깨닫고 조금 당황했다.
‘왜 침대지?’
레나는 잠이 덜 깬 눈으로 앉아 기억을 더듬었다. 레나는 어제 침대에 누운 기억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천천히 생각해보자. 어제 린이 비를 맞고 찾아왔다. 그래서 올라오게 했고, 몸을 말리는 동안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고 어떻게 됐지?’
레나는 아직 멍한 머리로 열심히 생각했다.
‘잠들었나?’
가능성 높은 추측에 레나는 속으로 끄덕였다. 그러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왜 침대지?’
사실 간단한 문제지만 아직 잠에 취한 레나는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유니가 가련한 아가씨를 구제했다.
“린 씨가 옮겨줬어요.”
“린 씨가요?”
유니의 말에 레나의 눈이 번쩍 커졌다.
“린 씨는요?”
“진즉에 가셨죠. 새벽에, 아가씨를 침대에 옮겨주고 나서요.”
“아…….”
유니의 설명에 레나는 짧게 탄식했다. 생각해보니 잠결에 누가 들어 올리는 느낌을 받은 것도 같다. 그게 린이었나 보다.
‘그런데 왜 안 깼지?’
레나는 어이가 없어서 자문했다. 평소 레나는 문밖에서 발소리만 들려도 눈을 떴다. 그런데 누가 안아서 옮기는데도 자고 있었다니.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긴장을 너무 풀었나.’
레나는 스스로의 태만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반성하는 마음으로 앉아 있는데, 옆에서 유니가 작게 종알댔다.
“동맹이라더니.”
옆을 보니 유니가 배신당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장난이었지만 레나는 그 말과 행동이 괜히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레나는 심정을 감추기 위해 애써 웃었다.
“오해예요.”
“변명은 아껴두세요. 어차피 오늘 실컷 하셔야 하니까요.”
어느새 뒤돌아 선 유니는 레나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한 채 옷장에서 옷을 꺼내왔다. 간만에 제복이 아닌 숙녀복이었다.
“오늘 영감님 만나는 거 아시죠?”
그 한마디에 레나는 오히려 당혹감을 잊었다. 드디어 올 게 왔다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