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치하 (54/208)

54화. 치하2020.11.05.

5년 전, 레지나는 레나에게 약속했다.

16562809022428.jpg―강해지게 해주마. 망자의 왕도 갈가리 찢을 수 있을 만큼.

무덤의 붉은 하늘 아래서,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의 표적이 된 레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레나는 그 말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강함이라니, 그건 레나와 너무 동떨어진 말이었다. 그래서 레나는 미심쩍게 되물었다.

16562809022434.jpg“내가 강해질 수 있어?”

16562809022428.jpg―내 표현이 틀렸군. 넌 이미 강하다. 망자의 왕을 찢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레지나가 단언했다. 하지만 레나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이제 열세 살인 레나는 아직 어렸다. 약간 마른 몸은 빠르지도 단단하지도 않고, 무기는 잡아본 적도 없었다. 무언가와 싸워본 경험 역시 전무했다.

16562809022428.jpg―의심스럽다면 보여주마.

레지나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바닥에 놓인 단검이 떠오르더니 돌연 칼날을 앞세워 레나에게 날아들었다.

16562809022434.jpg“꺄아!”

흉기가 날아오자 레나는 기겁하며 반사적으로 앞을 막았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주저하는데, 레지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62809022428.jpg―움직이지 말고 앞을 봐.

레나는 그 말을 따라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곤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16562809022434.jpg“히익…….”

날카로운 칼끝이 레나의 코앞에서 멈춰 있었다. 레지나가 멈춘 것은 아니었다.

16562809022434.jpg‘이거, 또……?’

그때와 같았다. 레나가 무덤에 떨어진 첫날, 망자들에게 에워싸였을 때. 그때도 이렇게 세상이 멈췄었다.

16562809022428.jpg―움직이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의식만 깨운 채 봐라.

레지나의 명령이 아니어도 레나는 이미 꼼짝할 수 없었다. 칼날이 헐거운 팔 사이를 비집고 레나의 얼굴을 찌를 듯이 들어와 있었다. 지금 움직이면 이 단검도 다시 움직인다는 걸, 레나는 지난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16562809022428.jpg―이게 바로 네 강함이다. 시간을 멈추고 사고할 수 있는 힘. 산 채로 심연에 다다른 네게 허락된 무한이다.

죽음과 마주한 인간은 이따금 시간이 멈추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그 짧은 찰나 자신의 생을 회고하고, 후회하며, 비로소 죽음을 받아들인다. 망자들에게 포위됐을 때 레나 역시 그런 순간을 경험했다. 다만 보통 사람과는 몇 가지 차이가 있었다. 첫째는 심연에 닿아 의식이 크게 확장됐다는 것. 둘째는 이미 죽음에 익숙하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그로써 위기의 순간마다 시간을 멈추고 의식을 깨우는 게 가능해졌다는 것이었다.

16562809022428.jpg―네가 움직이기 전까지 세상은 움직이지 않을 거다. 그러니 널 위협하는 것을 보고 생각해라. 그걸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레나는 혼란스러웠지만 레지나의 말을 따라 그 날카로운 단검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가린 팔 사이로 이미 파고든 단검. 잡을까? 아니, 자신이 없다. 그럼 피해야 하나? 팔에 걸릴 텐데. 잘 보니 방향이 조금 왼쪽으로 치우쳤다. 왼쪽으로 피하면 쫓아올 거야. 오른쪽으로 피해야 돼. 그럼 오른쪽으로 피하고, 왼팔은 내려서, 단검이 빗겨갈 수 있게 하면 될까?

16562809022428.jpg―판단을 내렸으면 움직여라. 그 단검보다 빠르게.

레나는 결심을 굳히고 있는 힘껏 몸을 틀었다. 그러자 멈춰 있던 단검도 가차 없이 움직여 레나의 귀 옆을 스쳤다.

16562809022434.jpg“아……!”

차가운 날붙이가 피부에 닿는 감각에 레나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단검은 아슬아슬하게 레나를 스치고 날아갔고, 레나는 스스로 해낸 일에 놀랐다.

16562809022434.jpg“아윽!”

하지만 기뻐할 새도 없이 아찔한 충격이 발목을 때렸다. 발을 접질린 레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무 준비 없이 급하게 움직인 다리가 덜컥 꺾인 모양이었다.

16562809022428.jpg―단련이 필요하긴 하겠군. 자기 다리에 자기가 걸려 넘어지는 몸이라면.

레지나가 웃으며 손짓했다. 그러자 레나의 몸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레나는 놀라서 허우적대다가 이내 알 수 없는 힘에 몸을 맡겼다. 레지나는 레나를 그대로 당겨 자신의 코앞까지 끌고왔다.

16562809022428.jpg―이제 이해했느냐? 네가 강한 이유를.

16562809022434.jpg“……잘 모르겠어. 이게 정말 통할까?”

16562809022428.jpg―물론. 네 적들은 네가 목을 치기 전까지 그 사실조차 모를 거다.

레지나가 다시 손짓했다. 그러자 레나의 낡은 블라우스와 치마가 뻣뻣한 셔츠와 가죽바지로 바뀌었다.

16562809022428.jpg―걱정 마라. 내가 충분히 단련시켜주마.

레지나의 말과 함께 레나의 앞으로 단검이 날아왔다. 이번엔 칼끝이 아니라 손잡이 방향이었다. 레나는 머뭇대며 그것을 쥐었다. 작은 단검이지만 그마저도 레나에겐 조금 무거웠다. 그래서 레나는 주저하는 표정으로 레지나에게 물었다.

16562809022434.jpg“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16562809022428.jpg―뭐가 말이냐?

16562809022434.jpg“왜 이렇게 도와줘? 장난치는 거야?”

그렇게 묻는 레나의 얼굴은 벌 받기 직전의 아이처럼 가련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유 없이 도울 리 없다고 믿는, 그럼에도 한 번쯤은 그랬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아이의 표정이었다.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그 얼굴을 보며 레지나가 천천히 답했다.

16562809022428.jpg―장난은 아니야.

16562809022434.jpg“그럼?”

16562809022428.jpg―그건…….

레지나는 말끝을 흐리더니, 이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16562809022428.jpg―네가 충분히 강해지면 알려주마.

16562809022434.jpg“뭐?”

16562809022428.jpg―그러니 대답을 듣고 싶으면 어서 강해져.

16562809022434.jpg“뭐야, 치사하게!”

레나가 원성을 쏟아냈지만 레지나는 웃기만 할 뿐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제법 흘렀을 때, 레지나는 약속을 지켰다. 레나를 강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약속도, 레나를 왜 돕는지 알려주겠다는 약속도. 그 약속이었다. 바로 그 약속 때문에 레나는 침묵을 깨고 자신을 지워버린 세계로 돌아왔다. 그것은 아직 레나 루벨 밖에 모르지만, 곧 모두가 알게 될 비밀이었다. *** 레나는 이미 빈틈없는 옷매무새를 다시 정돈했다. 그러곤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창살문을 바라보았다. 창살 너머로 우거진 수풀과 눈부시게 하얀 궁전이 보였다.

16562809022434.jpg‘저기구나.’

백색의 궁, 황제 니힐의 처소. 레나는 여기까지 오면서 몇 겹의 문과 몇 무리의 경비대를 거쳤다. 그토록 삼엄한 길을 지나 도달한 이곳은 그라샤 황궁에서 가장 깊숙한 곳, 황제 니힐이 기거하는 궁이었다. 레나는 창살문 앞에서 클라비스에게 받은 은 열쇠를 꺼냈다. 과연 그 열쇠는 창살문의 열쇠구멍과 꼭 맞아떨어졌다. 황제는 클라비스를 통해 이 열쇠를 주며 레나를 불렀다. 정확한 용무는 아직 모른다. 다만 황제가 따로 치하할 거라고 건너 듣기만 했다. 레나는 창살문을 손수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햇살이 켜켜이 쌓인 회랑을 건너, 거대한 돔형의 홀에 도달했다. 레나는 홀에 발을 들이며 눈부심을 견디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이윽고 다시 눈을 뜬 레나의 앞에, 막막하게 하얀 공간이 펼쳐졌다. 원통형인 홀은 모든 벽이 하얀 커튼으로 덮여 있었다. 그 뒤로 액자로 보이는 틀의 양각이 두드러져, 레나는 클라비스가 이곳을 ‘황제의 화랑’이라 일컬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벽뿐만 아니라 바닥에도 하얀 시트가 가득 깔려 있었는데 돔형으로 개방된 천장에서 내리는 빛이 그 흰 천을 가득 비춰, 마치 구름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황제는 그 가운데 있었다. 장식 없는 무명 원피스를 입고, 폭이 넓은 리본으로 목을 감싸고 맨발을 자유롭게 늘어트린 여인. 황제 니힐은 커다란 쿠션이 쌓인 보금자리에 누워 고양이처럼 낮잠을 자고 있었다. 레나가 입구에 서 있자 니힐이 인기척을 느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침소인지 둥지인지 알 수 없는 그곳에서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16562809106563.jpg

16562809106569.jpg“왔구나. 레나 루벨.”

교양도 위엄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지만, 레나는 침착하게 치마 끝을 들어 인사했다.

16562809022434.jpg“지고하신 폐하께 영광을.”

16562809106569.jpg“됐으니까 이리 와.”

니힐은 인사를 받는 듯 마는 듯하며 쿠션 하나를 걷어찼다. 니힐에게 다가간 레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쿠션을 깔고 앉았다.

16562809106569.jpg“잠깐 보려고 불렀어. 너 같은 거 오랜만이라.”

16562809022434.jpg“황송합니다.”

16562809106569.jpg“그래, 그런 셈 쳐.”

레나의 공손한 대답에 니힐은 지겹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러더니 다시 격 없이 말했다.

16562809106569.jpg“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봐.”

16562809022434.jpg“무슨 말씀이신지…….”

16562809106569.jpg“소원을 하나 들어주마. 공을 세웠으니 치하를 받아야지.”

니힐의 담담한, 하지만 파격적인 제안에 레나는 고민하다 운을 뗐다.

16562809022434.jpg“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16562809106569.jpg“지랄.”

16562809022434.jpg“……당장은 떠오르는 것이 없는데, 생각할 시간을 주시면…….”

16562809106569.jpg“어지간히도 머리를 굴리는구나.”

니힐이 레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레나를 꿰뚫을 듯 주시했고, 레나는 비위를 거슬렀나 싶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니힐이 그 모습을 보며 중얼댔다.

16562809106569.jpg“널 보면 나자가 생각나.”

갑자기 나온 이름에 레나는 조금 놀랐다. 나자라면 린의 어머니인 전대 동부공의 이름이다. 레나가 뜻밖의 말에 고개를 들자, 더 뜻밖의 말이 이어졌다.

16562809106569.jpg“나자의 아들과 사귄다지?”

과연 황궁은 소문이 빨랐다. 하지만 황제가 그런 가십에 관심이 있을 줄은 몰라서, 레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16562809022434.jpg“송구합니다.”

16562809106569.jpg“그거 하지 마.”

16562809022434.jpg“네?”

16562809106569.jpg“황송하다느니 송구하다느니, 한 번만 더 궁중어를 쓰면 혀를 묶어버리겠다.”

니힐의 선뜩한 위협에 레나는 잠깐 고민했다. 포악한 언사와 달리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그래서 이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 소탈한 듯 고압적인 명령에 레나는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니힐은 언제 정색했냐는 듯 다시 나른하게 중얼댔다.

16562809106569.jpg“재밌군, 나자를 닮은 자가 나자의 아들과 사귄다니. 음, 그럼 내 앞에서 싸울 때도?”

니힐이 문득 생각난 듯 레나를 쳐다봤다. 대답을 바라는 시선에 레나는 신중히 입을 뗐다.

16562809022434.jpg“그땐 서로 알아가는 단계였어요.”

16562809106569.jpg“아.”

니힐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혼잣말을 중얼댔다.

16562809106569.jpg“이런다니까.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항상 이런 식이야. 대충 찍어도 다 걸리지. 굳이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니힐은 그렇게 푸념하더니 다시 레나를 바라보았다.

16562809106569.jpg“내가 연인에게 시련을 줬구나.”

듣기에 따라 상냥하게도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래서 레나도 조금 살갑게 화답했다.

16562809022434.jpg“그래도, 덕분에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16562809106569.jpg“다행이네. 그런데 걔네 발정하면 덤비지 않나?”

니힐의 직언에 레나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많은 것을 추론할 수 있는 문장이었지만, 레나는 발정이라는 말에 놀라 잠깐 굳었다. 그러자 니힐이 도로 손을 내저었다.

16562809106569.jpg“뭐, 알아서 잘 하겠지. 그 얘긴 됐어. 그리고 소원, 시간을 달라고. 그래, 그것도 그렇게 해. 오늘은 상을 주려고 부른 거지 벌을 주려고 부른 게 아니니까. 생각하고 싶은 만큼 생각해라, 내 마음이 변하기 전까지.”

니힐은 그렇게 말하며 화제를 돌렸다.

16562809106569.jpg“그보다 레나 루벨, 네게 묻고 싶은 게 있다.”

16562809022434.jpg“말씀하십시오.”

16562809106569.jpg“아비가 북부 후작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일부러 이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대충 찍어도 다 걸리는 건지, 니힐이 새로 꺼낸 화제는 레나의 허를 또 한 번 찔렀다. 북부에 후작은 셋뿐이지만 니힐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동부공의 이름도 곧장 떠올리지 못해 나자의 아들이라 부르는 마당에, 그가 북부 번견의 이름까지 기억할 리 없었다. 이유는 물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레나 루벨에게는 모처럼 흥미가 생겨, 니힐은 레나의 출신과 그를 둘러싼 소문에 대해 간단히 알아본 차였다.

16562809106569.jpg“사실인가? 그렇다면 너는 왜 남부에서 대리인 노릇을 하고 있지?”

니힐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16562809106569.jpg“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다. 내가 궁금한 건 하나야.”

도무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감정이 있기는 한지 의심스러운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16562809106569.jpg“혹시 내가 널 죽여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16562809189514.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