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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가치 증명 (55/208)

55화. 가치 증명2020.11.09.

16562809266619.jpg“혹시 내가 널 죽여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황제의 목소리는 단조로웠다.

16562809266619.jpg“말해봐, 레나 루벨.”

하지만 단호하게 떨어지는 그 어조는 명백한 추궁이었다. 니힐의 온도 없는 물음에 레나는 짐짓 당황했다. 죽여야 하는 이유가 있냐고?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당장 몇 가지가 떠올랐다. 때문에 내심 놀랐지만 레나는 속내를 숨기고 바쁘게 생각했다. 니힐이 왜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대체 뭘 알고? 단지 북부 후작의 딸일지도 모른다는 소문? 아니면 과거 클라비스와 루벨이 가졌던 비밀스러운 회동? 그것도 아니면, 혹시 며칠 전 클라비스가 황제를 죽여 달라고 한 걸 알았나?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레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별 수 없이 도박을 시작했다.

1656280926663.jpg“그건 아직 밝힐 수 없습니다.”

16562809266619.jpg“밝힐 수 없다?”

1656280926663.jpg“네.”

16562809266619.jpg“죽여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돼? 아니면, 죽고 싶다는 말인가?”

되묻는 니힐의 음성은 여상히 차분했다. 그 무미건조함에 레나는 더 공손히 대답했다.

1656280926663.jpg“그건 아니에요.”

16562809266619.jpg“그럼 뭐야?”

1656280926663.jpg“구구절절 말할 필요가 없다 하셔서 결론만 고했습니다.”

16562809266619.jpg“건방지네.”

니힐은 질책조차 단조로웠다. 하지만 레나는 그것을 온화함으로 착각하지 않았다. 니힐은 바로 저 표정으로 레나와 린을 싸우게 했고, 한 기사의 생기를 빼앗았다. 그래서 레나는 니힐이 무슨 짓을 해도 놀라지 않을 각오로 덧붙였다.

1656280926663.jpg“허락하신다면 설명하겠습니다.”

니힐의 하늘색 눈동자가 레나를 빤히 주시했다. 그 예민한 폭군은 마치 사냥을 고민하는 포식자처럼 레나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작게 중얼댔다.

16562809266619.jpg“짖어봐.”

다행히 니힐은 레나를 곧장 벌하지 않았다.

16562809266619.jpg“나는 자비로우니, 너에 대한 처분도 듣고 판단하겠다.”

그저 쿠션에 몸을 파묻으며, 어디 해보라는 듯 고개를 기울일 뿐이었다. 니힐의 반응에 레나는 힘내서 웃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목에 칼이 들어온 기분이었다. 하지만 저 느긋한 태도를 통해 한 가지는 확인했다. 황제는 레나와 클라비스의 연관성을 아직 모른다. 만약 안다면 듣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진즉에 목을 벴을 터. 레나는 니힐의 의혹이 아주 얕다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운을 뗐다.

1656280926663.jpg“저는 어릴 때 부모에게 버려졌습니다. 이후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법을 배웠고, 남부의 전쟁터까지 흘러가게 됐습니다.”

16562809266619.jpg“거기서 남부공의 눈에 들었다?”

1656280926663.jpg“네.”

레나는 얌전히 끄덕이며 니힐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니힐은 여전히 정물같이 무감각할 따름이었다.

1656280926663.jpg“그 후 남부공께 대리인 자리를 제안받았습니다. 분명 과분한 자리지만,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수락했습니다.”

16562809266619.jpg“그렇게 황궁까지 왔는데 아비라는 자는 만나주지도 않았다, 이건가?”

니힐의 물음에 레나는 확신했다. 니힐이 아는 건 이 정도다. 침묵 전쟁에 참전한 용병이 북부 후작의 딸이라는 소문, 딱 거기까지. 그래서 레나는 한결 가볍게 말을 이었다.

1656280926663.jpg“네. 그분은 자기 딸이 병으로 죽었다고 주장하고 계시니까요.”

16562809266619.jpg“웃기는군.”

1656280926663.jpg“그렇죠. 저는 그분이 제 아버지 같은데 그분은 제가 딸이 아니라고 하세요. 이건 둘 중 하나가 거짓말을 하거나 착각하고 있다는 뜻이겠죠.”

16562809266619.jpg“그래서?”

1656280926663.jpg“그래서 폐하께도 아직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제가 폐하께 죽을 이유가 있는지는, 제가 누구인지부터 확인해야 알 수 있는 문제니까요.”

레나의 이야기가 자신의 첫 질문으로 귀결되자 니힐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1656280926663.jpg“그러니 진위가 가려질 때까지 기다려주시면, 폐하께도 제대로 된 대답을 돌려드리겠습니다.”

16562809266619.jpg“역시 건방져.”

레나가 그렇게 말을 맺자 니힐은 턱을 괴고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16562809266619.jpg“그러니까 네 아비인지 뭔지 모를 자와 결판을 내기 전까진 참견 말라는 뜻이잖아.”

뜻밖에도 니힐은 상당히 예리했다. 정신이 반쯤 나간 모습이라 생각도 깊게 안 하는 줄 알았는데, 그의 판단은 의외로 온전했다. 아니, 온전할 뿐 아니라 정확했다. 말마따나 레나는 원치 않았다. 황제가 자신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절대로. 자신과 아버지 사이에 누가 끼어들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레나는 속내를 감추며 예쁘게 대답했다.

1656280926663.jpg“제 개인사로 폐하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으니까요.”

16562809266619.jpg“말은.”

니힐이 허튼소리를 한다는 투로 중얼댔다. 기분 탓인지 그 짧은 질책이 웃음처럼 느껴졌다.

16562809266619.jpg“기이한 짓을 하는구나. 버릇없는 아비를 독 안에 든 쥐처럼 가지고 놀겠다는 건가?”

니힐의 말은 이번에도 정확해 레나는 심정이 곤란해졌다. 동시에 깨달았다. 이 정신 나간 황제가 100년도 더 된 존재라는 걸. 그 긴 시간 황제로 군림해온 자의 통찰이 범인들보다 뛰어난 것은 당연했다. 비록 반쯤 미쳐 있어도, 모든 일에 무감해졌어도 그의 지성은 여전히 날카롭게 작동했다. 다만 무료함이라는 녹이 끼어 사용하는 일이 드물 뿐. 그런데 늘 무료하던 황제가 오늘은 모처럼 생각과 말을 아끼지 않는다.

16562809266619.jpg“그렇게 일을 꾸미는 인간은 두 부류지. 독이 오를 대로 올랐거나, 그럴 만한 힘이 있거나. 너는 어느 쪽이지?”

모든 걸 간파하는 물음에 레나는 눈을 곱게 접었다. 그러곤 솔직히 대답했다.

1656280926663.jpg“둘 다인 것 같아요.”

16562809266619.jpg“넌 정말 나자를 닮았어.”

나자. 니힐이 유독 많이 언급하는 이름. 연이어 들려오는 이름에 레나는 호기심을 느꼈다.

1656280926663.jpg“전대 동부공을 많이 아끼셨나 봐요.”

16562809266619.jpg“관심을 많이 두기는 했지. 미천해서 상종할 가치가 없던 것들에 비하면.”

1656280926663.jpg“친구……신가요?”

16562809266619.jpg“친구?”

레나의 물음에 니힐이 희한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16562809266619.jpg“친구는 서로 대등해야 성립되는 관계다.”

1656280926663.jpg“그럼 나자공은…….”

16562809266619.jpg“소유물.”

니힐이 망설임 없이 말했다.

16562809266619.jpg“희소가치 높은 소유물이었어.”

그러더니 레나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권태롭기 짝이 없는 입술로 속삭였다.

16562809266619.jpg“너도 마찬가지다.”

1656280926663.jpg“네?”

16562809266619.jpg“나자가 죽고 무료했는데 간만에 흥미가 동했다. 그러니 굳이 죽여야 할 이유가 없다면 너 역시 내 소유로 삼아주마.”

갑작스러운 제안에 레나의 눈이 커졌다. 레나가 뭐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자 니힐이 덧붙였다.

16562809266619.jpg“대답은 필요 없어.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이제 나 외에 널 벌할 자는 없다. 그러니 앞으로 패하지 말고, 허하지 말고,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니힐의 한없는 격려에 레나는 또 한 번 당황했다. 좀 과했다. 한 번 공을 세운 것 치고는 너무 파격적인 대우라, 레나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

1656280926663.jpg“외람된 말이지만, 만약 제가 패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16562809266619.jpg“죽여야지.”

이어진 대답은 쉬웠다.

16562809266619.jpg“내가 흥미를 거두는 날 너는 죽을 거다. 그러니 계속 가치를 증명해라. 나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랬다. 한 겹 벗겨낸 니힐의 말은 치하보다는 차라리 위협에 가까웠다. 그로써 레나는 니힐의 의도를 비로소 전부 이해했다. 니힐은 자신의 무료한 삶을 달래려고 레나를 골랐다. 그것은 단지 흥미에서 비롯된 간택이자 흥미가 가시면 언제든 내버릴 수 있는 여흥, 한마디로 장난감 취급이었다. 레나는 그걸 깨닫고 쓰게 웃었다. 그러곤 니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미 한 세기를 살아냈지만 황제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형상의 미일 뿐, 살아 있는 인간이 가진 애틋함 같은 것은 없었다. 그가 표정을 잃은 건 견뎌온 시간 때문일까 잘라낸 마음 때문일까, 그의 투명한 눈동자는 마치 얼음을 깎아 끼운 것처럼 차갑기만 했다. 레나는 저 냉혹한 시선 앞에 어떤 대답을 바쳐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비위를 적당히 맞춰주는 건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조용히 생각을 곱씹던 레나는, 결국 해야 하는 말보다 하고 싶은 말을 선택했다.

1656280926663.jpg“제안은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장난감이라니, 안 될 말이다. 고작 이런 취급을 받자고 지옥에서 돌아왔을까. 레나가 곱게 웃으며 말하자 니힐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가 처음으로 드러낸 표정이었다. 니힐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다시 말했다.

16562809266619.jpg“제안이 아니라 명령이야.”

1656280926663.jpg“그럼 거부하겠습니다.”

16562809266619.jpg“죽고 싶니?”

1656280926663.jpg“아니요.”

16562809266619.jpg“그럼 뭐야?”

1656280926663.jpg“존재하고 싶을 뿐이에요.”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옅게 웃었다.

1656280926663.jpg“소유물도 장난감도 아닌 한 사람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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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끼익 쇳소리를 내며 창살 문이 열렸다. 들어갈 때처럼 나올 때도 손수 창살 문을 연 레나는, 비로소 황제의 영역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긴긴 숨을 내쉬었다.

1656280926663.jpg‘가시방석이었어…….’

황제와 독대하는 건 정말 가시방석에 앉는 기분이었다. 멀쩡히 나올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불과 몇 분 전, 레나는 니힐의 명령을 거부했다. 꽤 무모한, 남부공은 물론이고 린이나 유니도 절대 잘했다고 해주지 않을 만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레나도 그렇게 말하고 뒷감당을 각오했다. 황제가 죽인다고 하면 차라리 무덤으로 보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그런 극단적인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니힐은 그저 레나를 뚫어지라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16562809266619.jpg―다행으로 여겨라. 지금 나와 단둘인 걸.

16562809266619.jpg―네 방종을 다른 이가 봤다면 널 죽였을 거야.

16562809266619.jpg―하지만 나 외엔 아무도 모르니 자비를 베푸마.

  승전제 때처럼 가차 없이 처벌할 줄 알았는데, 니힐은 의외로 관대했다. 아니, 오히려 원해서 패악을 부리는 게 아니라는 투였다. 그래서 니힐의 성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려는 찰나 그가 더 고압적인 눈빛으로 말했다.

16562809266619.jpg―다시 말하지만 네 대답은 필요 없어.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16562809266619.jpg―좋든 싫든 가치를 증명해라. 그게 네가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야.

16562809266619.jpg―실패하거나 패하거나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날, 너는 반드시 내게 죽을 거다.

  레나의 거부 따위 아무렴 상관없다는 소리였다. 황제의 단호한 선언에 레나가 할 말을 잃은 사이, 니힐은 그만 꺼지라며 레나를 쫓아냈다. 그래서 레나는 황제의 뜻을 거스르고도 멀쩡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뜻밖에도. 창살 문을 넘은 레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1656280926663.jpg‘생각보다 말이 안 통하는 상태는 아니었어.’

고압적이고 괴팍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비이성적인 건 아니었다. 사실 아까 이성적이지 못했던 건 오히려 레나였다. 그냥 알겠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어차피 실패할 생각도 패배할 마음도 없으니, 평소처럼 내숭을 떨어서 좋게 넘기면 서로 좋을 일이었다. 하지만 레나는 끝내 입 발린 소리를 하지 않았다. 기대에 부응하라는 말이, 그리고 가치를 증명하라는 말이 마음에 너무 깊게 박혀 차마 알겠다고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대답하면 이제껏 쌓아온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것 같아서. 창살 너머 황제의 백색 궁을 바라보던 레나는 이내 몸을 돌렸다. 그러곤 황제의 엄중한 선언을 다시 곱씹었다.

16562809266619.jpg―실패하거나 패하거나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날, 너는 반드시 내게 죽을 거다.

  과연 폭군다운 언변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레나는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무척 좋아하실 것 같다고. *** 레나가 황제를 독대한 날, 클라비스 추기경은 황제의 이름으로 각 공작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는 첫 원정에서 동부공이 가져온 유물이 성주 시대의 왕인 첼레스테의 것임을 확인했다고 하며, 남부공 대리가 첼레스테의 이름을 불러 망자의 성으로 들어갔다는 증언에도 신빙성이 충분하다고 선언했다. 그로써 다음 원정일도 드디어 확정되었다. 열흘 후, 제국은 다시 무덤에 내려가 또 다른 왕을 정복하기로 했다. 그들의 두 번째 표적은 바로 태움과 그을림의 왕. 황제 니힐 그라샤의 직계 조상인 히엠스 그라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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