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가치 인정2020.11.12.
이른 아침, 남부의 기사들이 모처럼 집결했다. 레나는 기사들을 소집해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지만, 제복이 아닌 가벼운 숙녀복 차림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어차피 좋은 대접은 못 받을 텐데, 굳이 지휘관의 옷을 입어야 하나 싶은 마음이었다.
‘분위기는 전보다 더 나쁘겠지.’
레나는 기사들이 첫 상견례 때보다 더 냉담하게 굴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첫 원정이 끝난 후에도 레나를 껄끄러워했고, 그러다가 한 기사는 황제에게 화를 입기도 했다. 어쩌면 기사들은 그게 레나의 탓이라 생각할지도 몰랐다. 이 와중에 동부공과 열애중이라는 소문까지 났으니, 그들의 입장에선 레나가 몇 배는 더 아니꼬울 것이다.
‘그래도 이상한 소리는 안 들었으면 좋겠는데.’
저번엔 뭐라고 했더라, 혀 잘 쓰는 여자라고 했나? 그렇게 말하고 웃는 자들이라면 레나의 연애사도 얼마든 비하할 수 있을 터. 레나는 린과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취급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필요한 이야기만 빨리 하고 나올 생각으로 서둘러 회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정작 현실은 레나의 예상과 아주 달랐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레나 경.”
절도 넘치는 경례와 함께 한 기사가 레나를 깍듯이 맞이했다. 그는 지난 상견례 때, 레나에게 너를 지휘관으로 인정할 수 없노라 이야기하던 자였다. 레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대열을 갖추고 자신에게 경례하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죠?”
“일전엔 실례가 많았습니다.”
기사는 레나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정중히 사과했다. 그래서 레나는 고개를 갸웃대며 되물었다.
“미신을 신봉하는 건 그만두셨나요?”
“그때도 미신을 신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뭐죠?”
레나가 되묻자 기사는 레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고했다.
“경이 집행자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집행자라는 말에 레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집행자라니, 레나는 그 별명이 정말 부담스러웠다. 레나가 수치스러워하자 기사가 숙연한 얼굴로 덧붙였다.
“더 일찍 말씀해주셨다면 그런 결례를 범하지 않았을 겁니다.”
“말 안 해도 범하지 말아야죠, 그런 결례는.”
레나가 힘없이 중얼댔지만 기사들은 분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겸허한 얼굴로 동의하고 수긍할 따름이었다. 때문에 레나는 내심 기가 막혔다.
‘그래서 이렇게 태도가 변한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말할 걸 싶었다.
‘아니, 그땐 얘기해도 소용없었겠지.’
불신과 불만이 가득한 와중에 내가 사실 집행자라고 말해본들 비웃음만 샀을 거다. 오히려 첫 원정이 끝난 후여서 집행자라는 이름이 먹혔다고 봐야 했다. 혼자 공을 세우고 온 수상한 여자, 알고 보니 집행자.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퍽 그럴싸한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나?
‘순진한 사람들인 건 알았지만…….’
레나는 손바닥처럼 뒤집힌 기사들의 자세에 힘없이 웃었다. 그걸 비난할 마음은 없었다. 상황에 따라 숙이기도 하고 굽히기도 하는 게 세상의 이치이니 저들의 변화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사과는 받을게요. 어쨌든 함께 해야 하는 사이니까요.”
결국 레나는 한결 온화하게 말했고, 뻣뻣하게 서 있던 기사들은 몰래 안도했다. 레나도 잘됐다고 생각하며 옹기종기 모인 손가락들에게 말했다.
“오늘 모인 이유는 다들 아실 거예요. 다음 원정 일정이 나왔습니다. 또 익일부터는 우리도 균열의 감시 임무를 맡아야 해요.”
레나는 지체 않고 용건을 꺼냈다. 그들이 걱정하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들 부담이 클 텐데,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음 원정도 저 혼자 다녀올 예정이니까요. 그리고 감시 임무도 동부에서 지원을 받기로 했어요. 그러니 경들은 각자 위치에서 동부 기사들을 도우면 될 거예요.”
레나는 남부의 겁 많은 기사들이 이 말을 듣고 안심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레나의 예상은 또 빗나갔다. 어쩐 일인지 기사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들은 안심하기는커녕 선물을 빼앗긴 아이처럼 레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문제 있나요?”
레나가 영문을 묻자 기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뒤늦게 아니라며 시선을 떨어트릴 뿐이었다.
. . . 레나는 기사들에게 앞으로의 일정과 임무에 대해 설명하고 교대 순서는 그들이 직접 짜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서 나오는데, 한 기사가 레나를 쫓아왔다.
“레나 경!”
복도에서 레나를 불러 세운 건 늘 기사들을 대표해서 말하던 그 기사였다. 부름에 멈춘 레나는 그에게 대답하려다가, 아직 그의 이름을 모른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경은…….”
“피에타 백작가의 장남 이든 피에타입니다.”
“아, 그러…….”
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남부공이 보여준 기사단 명단을 문득 떠올렸다. 거기서 아버지랑 열 살 밖에 차이가 안 나는 아들을 보고 웃었는데, 그 가문이 피에타 백작가였다. 레나가 그 보고서를 떠올리고 눈을 깜빡대자 이든이 자백했다.
“사실 백작의 동생입니다.”
“아.”
“이복동생이요.”
“아…….”
갑자기 알게 된 속사정에 레나가 감명 깊게 끄덕이자, 이든은 겸연쩍은 듯 화제를 돌렸다.
“이번 임무에 대해 논의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뭐죠?”
“우선 원정에 대한 경의 판단은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다만 균열 감시 임무는, 꼭 동부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레나가 까닭을 묻자 이든은 잠시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러더니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부의 도움을 받으면 우리 체면은 정말 바닥에 떨어집니다.”
이든의 말에 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미안한 말이지만, 레나는 이들이 체면이나 평판 같은 걸 신경 쓸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솔직히 말했다.
“체면을 지키는 것보단 목숨을 부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경, 때로는 목숨보다 중요한 것도 있습니다.”
“그게 체면인가요?”
“아니요, 인정입니다.”
이든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각 가문에서 차출되어 왔습니다. 대부분 원치 않게 떠밀려 나온 신세라 다들 목숨 부지만 하자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경을 보며 우리가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감에 물들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건 패배감이 아니라…….”
현실감 아닐까요? 레나는 이 뒷말을 애써 참았다. 하지만 이든은 레나의 자그마한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계속해서 힘주어 말했다.
“경도 뼈저리게 아실 겁니다. 가족들에게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버려지는 고통을.”
이든의 말에 레나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이든은 레나의 동요를 깨닫고 다시금 청했다.
“우리는 가문으로 자랑스럽게 돌아갈 기회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부디 재고를 부탁드립니다.”
이든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고, 레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레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도박을 할 수는 없어요.”
거절의 말에 이든이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가 입을 떼기 전에, 레나가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경의 의견은 충분히 고민해볼게요.”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낮게 울려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레나는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며 빙긋 웃었다. 짙은 어둠 사이로 달처럼 예쁜 사람이 보였다. 린이었다. 오늘도 심야의 정원에서는 밀회가 이어졌다. 더 이상 비밀도 아닌, 동부공과 남부공 대리의 공공연한 밀회였다.
“어제 오늘 일이 많아서요.”
“무슨 일?”
“어제 폐하를 만난 것도 그렇고, 오늘 기사들을 본 것도 그렇고.”
“……황제하고 무슨 얘기 했는지 물어봐도 돼?”
“음, 안 그래도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레나는 말끝을 흐리며 우거진 나뭇가지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곤 궁전 창가에 드리운 그림자들을 향해 중얼댔다.
“보는 눈이 좀 많네요.”
그에 린도 레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 둘만의 시간이었던 심야의 밀회는 이제 더 이상 은밀하지도 고요하지도 않았다. 동부공과 남부공 대리의 교제가 공식화되며 그들이 밤마다 정원에서 만난다는 소문까지 암암리에 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몇 귀족들이 소문을 눈으로 확인하겠다며 염탐을 시작했고, 덕분에 레나와 린은 호수의 궁 창문에 달라붙은 귀족들에게 구경당하는 신세였다.
“자리를 옮길까?”
“그럼 소문이 더 커질 텐데.”
“뭐 어때.”
린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쪽으로 오라는 의미였다. 레나는 그 손짓을 바르게 이해했다. 하지만 걸음을 옮기는 대신 그 손을 잠자코 바라보더니, 이내 가볍게 마주 잡았다. 뜻밖의 손길에 린이 놀라자 레나는 담담히 덧붙였다.
“이상하잖아요, 따로 걸어가면. 명색이 연인인데.”
팔짱을 끼지 못하면 손이라도 잡아야지. 레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린의 옆에 섰다. 그러곤 말이 없는 그에게 물었다.
“혹시 불편해요?”
“아니…….”
린은 작게 대답하더니 이내 레나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더니 딴청을 피우듯 중얼댔다.
“보여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 사람들이 의심하거든.”
“무슨 의심이요?”
“내가 널 이용한다고.”
“풉!”
린의 속삭임에 레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린이 더 억울하게 덧붙였다.
“동부에서도 날 별로 안 믿는 것 같아…….”
린의 서운한 목소리에 레나는 아예 배를 잡고 웃었다. 아무렴 냉혹하고 오만방자한 동부공이 연애를 한다고 하니 사람들이 다들 흐린 눈으로 의심하는 모양이다. 남부공 대리에게 애정은 없고 몸과 능력만 노린다거나, 남부공을 엿 먹이려고 저런다거나 하는 말을 덧붙여서.
“사람들이 린 씨를 너무 모르네요.”
레나가 웃음을 겨우 멈추며 말했다. 그러곤 린의 손에 깍지를 끼며 다짐했다.
“사이좋은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줘야겠어요.”
레나가 그렇게 말하며 활짝 웃자, 린도 힘겹게 마주 웃었다. 사실 린은 레나의 손가락이 파고드는 감각 때문에 더없이 심란한 상황이었다. 레나가 다정하게 손을 잡아줬다. 밝게 웃어주고, 깍지도 껴줬다. 하나같이 좋은 표시였다. 덕분에 은근히 마음이 들뜬 린은, 심박이 고조되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손에 담긴 레나의 손을 바라보았다. 보고 있자니 어쩐지 욕심이 났다. 그래서 린은 저도 모르게 움직였다.
“단지 사이좋은 게 아니라…….”
린은 그렇게 말하며 레나의 손을 당겼다. 갑작스러운 힘에 레나가 속절없이 끌려오자, 린은 레나를 옆에 있는 아름드리나무로 가볍게 밀었다. 레나의 등이 나무에 닿자 린은 그 앞으로 한발 다가가 레나의 어깨 위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작게 속삭였다.
“내가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야지.”
그렇게 포개 선 두 사람의 모습은 영락없이 입을 맞추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닿은 부분은 깍지 낀 손과 서로의 발끝뿐, 오히려 닿지 않아 긴장이 치솟는 상황이었다. 순식간에 몰린 레나는 놀라서 잠시 말을 잃었다. 레나의 시야로 내려온 린의 어깨가 달빛을 가렸다. 그의 두꺼운 어깨가 괜히 낯설어 레나는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레나가 말이 없자 린이 조심히 물었다.
“혹시 불편해?”
“……아뇨.”
사실 불편했다. 불편하다 못해 당혹스러웠지만, 레나는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아 작게 대답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목소리가 떨렸다.
“정말?”
그에 린이 눈치 없이 되물었고, 레나는 조금 짜증이 났다. 그래서 몰래 아랫입술을 씹다가 여보라는 듯 그의 목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이번엔 린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 긴장을 여실히 느낀 레나는, 이번에야말로 태연하게 말했다.
“네, 정말. 린 씨는요?”
“……나도.”
괜찮다고는 했지만, 린은 자신의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낯빛을 숨기기 위해 나무에 이마를 박았다. 덕분에 두 사람 사이는 한결 더 밀착되었다. 두 사람은 그 상태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실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둘이어도 난감할 판인데 보는 눈도 많았다. 그래서 레나와 린은 키스하는 척, 그렇게 한참 동안 몸을 포개고 있었다.
“……어제 폐하가 나자 공 얘기를 많이 했어요.”
잠시 후, 어색함을 밀어내려는 듯 레나가 운을 뗐다. 린도 동조하듯 살짝 끄덕였다.
“제게 나자 공의 자리를 주겠다고 했어요.”
“……너한테?”
“동부공이 되라는 말은 아니었어요. 그렇다기보다는…….”
그때 린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레나가 놀라서 말을 멈추자, 린이 더없이 심각한 얼굴로 되물었다.
“혹시 실망시키면 죽인다고 했어?”
정확한 물음에 레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