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초대2020.11.16.
“황제가 가끔 하는 짓이야. 눈에 든 인물이 있으면 벼랑 끝까지 몰아서 길들이는 거.”
“길들인다고요?”
레나가 되묻자 린은 불쾌한 기색으로 끄덕였다.
“관심이 식을 때까지 몰아붙일 거야. 노리개 취급 하면서. 황제가 널 불렀다고 해서 설마 했는데…….”
“혹시 나자 공에게도 그랬나요?”
나자의 이름이 나오자 린은 무겁게 끄덕였다. 그러더니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가 도로 꾹 닫았다. 실은 나자만이 아니었다. 나자가 죽자, 황제는 그 관심을 린에게도 돌린 적이 있었다.
―너 때문에 나자가 죽었으니 네가 그 빈자리를 채워라.
―명령이다. 가서 동부의 반란군을 소탕해라.
―네가 내 소유인 걸 증명해.
당시 소년이던 린에게 그건 죽으라는 말보다 더 끔찍한 명령이었다. 니힐이 지목한 동부의 반란군은 제국에 고국을 빼앗긴, 린의 동포들이었다.
“……따로 뭘 시키지는 않았어?”
“네, 무덤 정복 때문인지 달리 특별한 건…….”
레나는 그렇게 말하다 불현듯 깨달았다. 어제 니힐이 그토록 관대했던 이유. 봐준 거였다. 어차피 사지로 돌릴 예정이라서 굳이 자신이 처벌할 필요가 없던 거다.
“황제에게 노리개 취급을 당한 사람은 많았나요?”
“한두 명이 아니라고 예상만 하고 있어. 정확한 건 황제만 알 거야.”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죠?”
“대부분 죽었어. 풀려난 건 극히 일부.”
그리고 린은 풀려난 일부였다. 린이 묵묵히 명령에 따르자 니힐은 어느 순간 린에게 관심을 끊었다. 대신 다른 귀족을 골라 괴롭히는 걸 보고 린은 깨달았다. 자신이 그 악취미에서 비로소 풀려났음을.
“그거, 황궁 사람들도 아는 이야기인가요?”
“아니. 직접 당해본 사람밖에 모를 거야.”
이미 정상범주에서 까마득히 벗어난 제국에서 황제의 행보는 관료나 귀족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다. 특히 니힐의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더더욱.
“확실한 건 아니지만, 북부는 알지도 몰라. 선대 북부공도 황제에게 죽었으니까.”
“선대 북부공이…….”
레나는 린의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레나는 어제 황제와 독대했다. 그걸 보고 북부에서는 이 상황을 예측했을까?
‘그걸 아버지는 알까?’
알까? 정확히 알지는 못해도 의심은 할 거다. 자신을 누구보다 예의주시하고 있을 테니까.
‘그럼 설마…….’
레나는 몇 가지 의혹이 서로 맞물리는 걸 느꼈다.
“……아무래도 우리 기사 중에 아버지 쪽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뭐?”
린이 놀라서 바라보자 레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안 그래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첫 상견례 때, 기사들은 한마음으로 레나를 배척했다. 그리고 그건 모인지 얼마 안 된 오합지졸답지 않았다.
‘선동됐다고 보는 편이 옳겠지.’
게다가 어느 기사가 하극상을 저지르기 무섭게 악의적인 소문이 퍼졌고, 클라비스는 레나에게 원정의 선봉을 맡겼다. 이게 전부 우연일 리는 없었다. 게다가 오늘 기사들의 반응과 이든 피에타의 요청도.
“린 씨.”
레나는 린을 부르며, 몸을 일으킨 그를 다시 자신에게로 당겼다. 방심하고 있다가 덜컥 앞으로 쏠린 린은 레나를 덮치지 않으려고 나무를 급히 짚었다. 린이 놀라서 레나를 내려다보자, 레나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좀 갑작스럽지만, 내일 균열 감시에 대해 다시 논의하고 싶은 게 있어요.”
“……어떤?”
레나는 린의 뺨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어차피 멀리서 지켜보는 자들은 아무 소리도 못 듣겠지만, 레나는 은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답게 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래도 내일 동부의 조력은 필요 없을 것 같아요.”
*** 다음 날 아침, 레나와 남부 기사들은 두엄의 궁에서 감시 임무를 인계받았다. 물밑에서 협의하던 것과 달리 동부 기사들은 모두 철수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든이 기쁘게 말했다.
“경이라면 이해해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네, 고민해 봤는데 경의 말이 다 맞는 것 같아서요.”
레나가 무구하게 대답하자, 이든을 비롯한 기사들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때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치 참새가 짹짹대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 저는 저거 처음 봐요. 엄청 커!”
그렇게 소리친 것은 레나의 옆에서 두리번대는 어린 하녀였다. 그 하녀는 커다란 가방을 깔고 앉아 두엄의 궁과 균열을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저 아이는……?”
“제 친구예요. 혼자 심심하다고 해서 데려왔어요.”
“아, 그렇군요.”
이든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끄덕였다. 실은 왜 하녀를 데려왔냐고 묻고 싶지만, 레나가 부탁을 들어준 상황이라 그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다만 저 하녀가 깔고 앉은, 사람도 들어갈 만큼 커다란 가방이 궁금했지만 그에 대한 호기심도 곧 지웠다.
“그럼 각자 위치로 이동하겠습니다.”
남부 기사들이 텅 빈 두엄의 궁으로 삼삼오오 흩어졌다. 레나도 균열의 궁 한쪽에 마련된 소파에 유니와 함께 앉았다. 그렇게 반나절은 아주 평화로웠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밖이 소란해지더니, 대규모의 기사들이 두엄의 궁으로 난입했다. 모두 붉은 제복을 입은 북부의 기사들이었다. 북부 기사들이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자 레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무리 선두에 선, 간만에 보는 인물에게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죠, 루비드 씨?”
“호칭 똑바로 써라, 건방 떨지 말고.”
루비드는 레나를 보자마자 인상부터 쓰더니 거의 던지듯이 낱장의 서류를 떠넘겼다. 무덤 탐색을 허락한다는 교회의 허가증이었다. 붉은 제복을 맵시 좋게 빼입은 루비드가 보석 같은 눈으로 레나를 쏘아보며 짓씹었다.
“지난번엔 잘도 설쳤지.”
“딱히 설친 기억은 없는데요.”
“두고 봐, 전부 열 배로 갚아줄 테니까.”
루비드는 그렇게 으르렁대며 레나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북부 기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붉은 제복을 입은 그들은 첫 원정 때만큼이나 기세가 등등했고, 그 바람에 남부의 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구석으로 내몰렸다. 루비드가 균열 앞에 섰다. 기사들은 왕자의 등에 경의를 표하며 무덤으로 향했다. ***
“저 사람들은 마을이라도 지을 셈인 걸까요?”
유니가 커다란 가방에 턱을 괸 채 중얼댔다. 그리고 아이의 말마따나, 북부 기사들은 정말 마을 하나는 뚝딱 짓고도 남을 물자를 연일 무덤으로 퍼다 나르고 있었다.
“북부는 부자라더니 정말 그런가 봐요. 저럴 여유가 있으면 차라리 변두리 사람들 집이나 지어주지.”
“그러게요, 무덤에다가는 뭘 해도 남는 게 없는데.”
유니가 툴툴대자 옆에 앉은 레나가 살며시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남부가 경계 임무를 맡은 지 사흘이 지났다. 하지만 남부 기사들이 그동안 한 일은 균열에서 망자들이 나오는지 감시하는 것보다 북부 기사들이 들락거리는 걸 구경하는 일에 더 가까웠다. 북부는 자신들의 무한한 물량과 무덤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 특성을 십분 활용해 무서운 기세로 무덤을 탐색해 나가고 있었다.
“저 사람도 꽤 필사적이네요.”
“루비드 씨요?”
“네, 쉬는 걸 한 번도 못 봤어요. 사람한테 술 뿌리는 호로잡놈이라고 해서 뺀질대는 양아치일 줄 알았는데 의외…….”
“유니 쉿…….”
“걱정 마세요, 아가씨. 충분히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어요.”
유니가 속닥대며 힐끗대는 건 다름 아닌 루비드였다. 루비드는 지난 사흘간 균열 앞을 지키며 무덤에서 돌아온 기사들에게 보고를 받고 다시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그 모습은 유니 뿐 아니라 레나에게 꽤 의외였다.
‘별생각 없는 도련님인 줄 알았는데…….’
진득이 정보를 수집하는 모습이 의외로 착실해 보였다. 아니, 착실한 정도가 아니라 어딘지 필사적으로 보였다. 레나가 그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는데, 시선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루비드가 레나 쪽을 홱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눈이 마주친 레나를 향해 노골적으로 으르렁댔다. 너무 노골적이어서 화도 안 나는 적개심에 레나는 그만 헛웃음을 터트렸다.
“성깔하고는.”
“그러게요.”
레나는 다시 찻잔을 들었고 유니도 맞은편에서 쿠키를 오독오독 씹었다. 하여튼 북부 덕분에 경계 임무는 느슨했다. 물론 레나는 이게 단순히 행운이나 우연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언제쯤 일이 터질까 기다리는데, 유니가 옆에서 레나의 옷자락을 톡톡 잡아당겼다.
“아, 아가씨.”
유니의 자그마한 부름에 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뜻밖의 인물과 마주했다.
“잠시 차를 얻어 마실까 해서 왔소.”
어느새 다가와 다정히 말을 건넨 것은, 다름 아닌 루벨 후작이었다.
“앉아도 되겠소? 레나 경.”
“……감히 박대하면 안 되겠죠. 루벨 각하.”
다소 갑작스러운 접근이었지만 레나는 놀라지 않고 기꺼이 화답했다.
“유니, 잠깐만 비켜줄래요?”
“네, 아가씨.”
유니는 종종걸음으로 얌전히 물러났고, 후작은 레나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레나와 후작이 마주 앉자 기사들이 소리 없이 주목하는 것이 느껴졌다. 안 그래도 요 며칠 레나와 후작은 종종 마주쳤고 그때마다 의미심장한 시선이 쏟아졌었다. 하지만 서로 아는 척하지 않고 각자의 진영에 머물렀는데, 갑자기 무슨 변덕인지 후작이 이쪽으로 건너왔다. 레나는 아버지의 꿍꿍이를 기대하며, 직접 차를 따라 찻잔을 밀었다.
“독이 들었을지도 몰라요.”
“그럴 리가.”
레나의 섬뜩한 농담에, 후작은 빙그레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러곤 보란 듯이 향을 음미했다.
“좋은 차를 마시는군.”
“무슨 용건이시죠? 보는 눈도 많은데.”
레나가 눈을 곱게 접으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드디어 제게 용서받을 마음이 생기신 건가요?”
물음이 갑작스러웠는지 후작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레나는 너그럽게 덧붙였다.
“천천히 결정하세요, 시간은 아직 많으니까.”
“경은 정말 대범한 사람이군.”
후작이 못 당하겠다는 듯 중얼댔다. 그러더니 웃음을 지우고 대답했다.
“맞소. 이제라도 그대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소. 하지만…….”
“하지만?”
“그대의 방식으로는 죄 없는 이들까지 다치게 되오.”
“저도 물론 그런 일은 바라지 않아요. 하지만 각하, 지금 말씀하신 게 진심인지 핑계인지는 스스로 생각해 보셨으면 해요.”
레나는 여상히 웃으며 대답했고, 후작도 다시 찡그리듯 웃었다.
“여긴 보는 눈이 너무 많군.”
후작이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여기서는 어렵겠다고 판단했는지, 그는 목소리를 한층 낮춰 속삭였다.
“가까운 시일 내에 경을 초대하고 싶소. 내 집으로.”
집으로 초대한다는 말에 레나의 눈이 커졌다. 이건 레나에게도 뜻밖이었다.
“불편한가?”
“……사양은 하지 않을게요.”
“조만간 초대장을 보내겠소. 그럼…….”
후작이 말을 맺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레나가 막 떠나려는 그를 다시 불렀다.
“그런데 각하.”
후작이 걸음을 멈추고 레나를 바라보았다.
“전부터 죄 없는 이들을 걱정하시는데, 만약 그들에게는 피해가 없다면요?”
“그럼 더는 거리낄 것이 없지.”
“……거짓말을 너무 잘하시네요.”
까닭 모를 질문을 던진 레나는, 후작의 대답에 또다시 까닭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조금 피로한 얼굴로 덧붙였다.
“정말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뒤에서 일을 꾸미지 않아요.”
레나의 말에 후작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하지만 레나는 모르는 척 덤덤히 말을 이었다.
“이것도 이해할게요. 시간은 아직 많으니까. 생각해 보니 아직 제대로 보여드린 적도 없는 것 같고요.”
“뭘 말이오?”
“제가 싸우는 모습이요.”
레나의 의미심장한 말에 후작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뭘 눈치챘나 싶었다. 하지만 눈치챘다면 동부의 지원을 물리지 않았을 텐데. 아니면, 그때처럼 또 장난을 치는 건가? 묘한 예감에 소름이 돋았지만 후작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짙게 웃었다.
“……기대하고 있겠소.”
*** 이틀 후, 소식을 듣고 달려온 린은 무너진 궁전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레나…….”
린은 그 폐허, 한때 두엄의 궁이라 불렸던 잔해를 보며 탄식했다. 전해 들은 대로였다. 두엄의 궁은 처참하게 부서졌다. 이변이 있었다. 균열에서 갑자기 많은 수의 망자들이 몰려나왔다고 했다. 기사들은 망자들이 황궁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았지만 역부족이었고, 그것들은 기어이 두엄의 궁을 무너트렸다. 남부가 균열 감시 임무를 시작한 지 닷새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