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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가치 시험 (58/208)

58화. 가치 시험2020.11.19.

린은 허망한 눈으로 무너진 궁전을 바라보았다.

16562810122421.jpg“레나…….”

그는 희게 질려 레나를 찾았다. 형편없이 무너진 궁전의 외벽, 그 틈에서 이글대는 붉은 균열, 피 흘리며 신음하는 남부의 기사들. 하지만 그 가운데 레나는 없었다.

16562810122429.jpg“내려줘요!”

린에게 안겨 있던 유니가 빽 소리쳤다. 린은 한 팔로 들고 있던 유니를 힘없이 내려주었고, 유니는 곧장 폐허로 달려가 레나를 찾았다.

16562810122429.jpg“아가씨! 아가씨! 아저씨, 우리 아가씨 어디 있어요? 네?”

유니가 부상을 입은 남부 기사에게 물었다. 하지만 기사는 큰 충격을 받은 듯 넋이 나가 아이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조급해진 유니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리고 린은 늪에 빠진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서 그 모든 광경을 바라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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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그날 아침만 해도 두엄의 궁이 무너질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두엄의 궁이 무너지기 다섯 시간 전, 그날 아침. 두엄의 궁은 적당히 활기차고 적당히 여유로웠다. 남부 기사들은 어느덧 익숙해진 경계 임무를 느슨히 수행했고, 북부 기사들은 여전히 바쁘게 균열을 오고갔다. 그리고 할 일 없이 나타난 클라비스가 레나에게 집적거리고 있었다.

16562810122442.jpg“진짜야?”

클라비스가 레나가 앉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 징징댔다.

16562810122442.jpg“동부공하고 사귀는 거 진짜?”

레나는 안 들리는 척 다른 곳을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16562810122442.jpg“농담이지? 설마, 지금 연애할 여유가 있어?”

클라비스는 굴하지 않고 치근덕대며 레나를 괴롭혔다.

16562810122442.jpg“어떻게 그래, 나한테는 그렇게 차가웠으면서.”

마치 연인에게 배신당한 듯한 투정에, 레나는 참다못해 클라비스를 쏘아보았다. 드디어 관심을 얻어낸 클라비스는 기쁘게 웃었고, 레나는 진심으로 짜증이 나서 나직이 고했다.

16562810122466.jpg“경계 임무 중입니다. 방해가 되니 나가주시죠.”

16562810122442.jpg“여기 총괄은 난데?”

사실에 근거한 깐족거림에 레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 얼굴을 본 클라비스는 레나가 앉은 소파의 표면을 손으로 쓸며 덧붙였다.

16562810122442.jpg“이 소파도 내가 가져다놓은 거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레나가 벌떡 일어났다. 그 질색하는 반응에 클라비스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16562810122442.jpg“아, 알겠어. 안 괴롭힐게. 앉아, 앉아. 명색이 지휘관인데 서 있으면 안 되지.”

16562810122466.jpg“손대면 다쳐요.”

클라비스가 달래는 척 손을 뻗자 레나가 엄중히 경고했다. 그래서 클라비스는 레나를 향해 뻗던 손을 슬쩍 거뒀다. 대신 레나가 앉아 있던 자리를 냉큼 차지하고 앉더니, 싱글벙글 웃으며 두엄의 궁 저편을 턱짓했다.

16562810122442.jpg“그보다 쟤 좀 봐.”

레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고, 이쪽을 매섭게 쏘아보는 루비드를 발견했다. 루비드는 ‘잘들 논다’ 내지는 ‘지랄들을 하네’라는 눈빛으로 레나와 클라비스를 꼬나보고 있었다.

16562810122442.jpg“귀엽지?”

16562810122466.jpg‘어디가?’

16562810122442.jpg“관심을 뺏겨서 화내는 거야. 옛날부터 자기랑 안 놀아주면 저렇게 삐졌거든.”

16562810122466.jpg“별로 알고 싶지 않은 내용인데요.”

16562810122442.jpg“야박하긴. 모처럼 한 공간에 있는데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클라비스가 연신 생글대며 말하자, 레나는 더 들을 필요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러자 클라비스가 다시 한마디 툭 던져 레나를 붙잡았다.

16562810122442.jpg“황제 폐하 알현은 잘 했어?”

16562810122466.jpg“……덕분에요.”

16562810122442.jpg“소유로 삼아준다 그러지?”

레나는 뻔히 알면서 묻는 남자를 기분 나쁘게 쳐다보았다. 클라비스는 레나의 불쾌감을 읽었지만 모르는 척 빙글댔다.

16562810122442.jpg“조심해, 실수하면 험한 꼴 당하니까. 아직은 내숭을 떨지만 곧 이해할걸? 내가 왜 황제를 죽이고 싶어 하는지.”

클라비스가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그들이 있는 두엄의 궁엔 백 명이 넘는 기사와 사제들이 있었다. 거리가 멀어 이 대화는 들리지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레나는 개방된 장소에서 황제 살해를 논하는 클라비스가 불편했다. 그래서 그를 말 그대로 미친놈 보듯 쳐다봤지만 클라비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늘 그렇듯, 성화 속 천사처럼 아름답게. . . . 두엄의 궁이 무너지기 세 시간 전, 아직 오전이었다. 북부의 기사들은 여전히 균열을 들락거렸고 레나도 슬슬 저들이 뭘 하나 궁금해졌다. 그래서 균열로 다가가 조금 살펴보려는데, 루비드가 레나를 보자마자 성난 고양이처럼 하악거렸다.

16562810181557.jpg“뭐야, 꺼져!”

16562810122466.jpg“……딱히 루비드 씨한테 접근한 건 아니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제가 루비드 씨에게 명령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어요.”

16562810181557.jpg“건방 떨지 마라, 잡견 놈의 첩 주제에…….”

16562810122466.jpg“첩?”

루비드의 경박한 어휘에 레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곤 화낼 가치도 없다는 듯 여상히 웃으며 말했다.

16562810122466.jpg“또 혼나고 싶어요?”

16562810181557.jpg“뭐?”

16562810122466.jpg“한 번 혼난 걸로는 모자라나 봐요, 그 버르장머리는.”

16562810181557.jpg“하!”

레나의 도발에 루비드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더니 다시 차갑게 정색하며 레나를 쏘아보았다. 그의 자색 눈동자가 니힐의 눈처럼 하늘색으로 물들었다. 루비드가 진심으로 난동을 부리기 직전이었다.

1656281021215.jpg“와, 왕자 저하!”

저 멀리서 누군가가 루비드를 부르며 우다다 달려왔다. 그러더니 루비드가 돌아볼 새도 없이 그의 허리를 와락 붙잡았다.

1656281021215.jpg“고정하세요!”

16562810181557.jpg“윽!”

1656281021215.jpg“여기서 싸우시면 안 돼요!”

16562810181557.jpg“야 씨, 이거 안 놔?”

1656281021215.jpg“아버지가 사고치기 전에 말리라고 하셨어요……!”

16562810181557.jpg“사고? 이게 진짜 죽을려고…….”

루비드는 자신을 사고뭉치 취급하며 만류하는 소년 사제, 엔지의 뒷덜미를 잡아 쭉 들어올렸다. 상체가 대롱 들린 엔지는 그 상태로 루비드에게 빌었다.

1656281021215.jpg“세상에서 제일 잘생기신 존경하는 저하, 제발 제 얼굴을 봐서 고정하세요, 화를 참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폭력과 다툼이 아닌 평화와 감사의 마음으로 세상을 대해주세요, 여기서 또 폭발하면 쌈닭이라는 오명을 씻지 못해요!”

엔지는 숨도 안 쉬고 그렇게 외쳤고, 그 방정맞은 애원에 루비드의 분노는 차게 식어버렸다. 그의 눈은 어느새 보랏빛으로 돌아왔고, 표정도 여느 때처럼 신경질로 가득 찼다.

16562810181557.jpg“알겠으니까 비켜, 이 촉새 자식아.”

1656281021215.jpg“사랑해요, 저하.”

16562810181557.jpg“아, 비키라고!”

루비드는 언성만 높일 뿐 자신에게 달라붙은 엔지를 적극적으로 떼어내지 않았다. 그리고 왕자를 진정시키는 데 성공한 엔지는, 그의 옆구리에 숨어 남부공 대리를 힐끗 바라보았다. 하지만 소년의 기대와 달리 레나 루벨은 이미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두엄의 궁이 무너지기 한 시간 전. 유니는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 자꾸 이쪽을 힐끗대는 소년 사제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 소년 사제는 당연히 엔지 루벨이었다. 저놈, 평소엔 지하 세탁장을 뻔질나게 드나들더니 요 며칠간은 두엄의 궁에 매일같이 출석하고 있다. 녀석의 목적이야 뻔했다. 그래서 유니는 여보란 듯 소파에서 뒹굴며 옆에 앉은 레나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보통 하녀에겐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행동이지만, 레나는 자연스럽게 유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16562810122466.jpg“졸려요?”

16562810122429.jpg“아뇨.”

16562810122466.jpg“그럼 지겨워요?”

16562810122429.jpg“아니요, 엔지 루벨이 계속 쳐다봐서요.”

16562810122466.jpg“네, 저도 알아요.”

레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유니는 레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저 멀리에 있는 엔지를 돌아보았다. 그 녀석은 무언가 바라는 얼굴로, 이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 . . 두엄의 궁이 무너지기 사십분 전. 엔지는 유니가 레나에게 어리광부리는 모습을 먼발치서 지켜보다가 유니와 눈이 마주치자 윽 하고 시선을 옮겼다.

1656281021215.jpg‘뭐야, 쟤.’

뭔데 저렇게 친한 척이야?

1656281021215.jpg‘자기가 무슨 친동생도 아니면서.’

엔지는 속으로 볼멘소리를 하며 다시 레나 루벨을 바라보았다. 아까, 루비드를 말리면서 엔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남부공 대리를 보았다.

1656281021215.jpg‘역시 닮았어…….’

닮았다. 누나를. 못 본 지 오래돼서 가물가물한 누나의 얼굴을 다시 선명하게 연상시킬 만큼.

1656281021215.jpg‘그럼 왜 날 아는 척 안 하지?’

누나면 날 알아볼 텐데. 엔지는 애꿎은 바닥을 발로 차며 고민했다. 먼저 가서 말을 걸어볼까?

1656281021215.jpg‘……아버지가 싫어하실 거야.’

엔지의 아버지는 그가 남부공 대리에게 관심보이는 걸 싫어했다. 그럼에도 엔지는 진실을 알고 싶었다. 하인들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다.

1656281021215.jpg‘몇 마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엔지가 레나에게 다가갈까 말까 고민할 때였다. 두엄의 궁에 있던 북부 기사들이 돌연 철수하기 시작했다. 엔지는 이제 끝났나 하고 그저 지켜보았는데, 돌연 아버지의 시종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16562810269879.jpg“공자, 아버님께서 부르십니다.”

1656281021215.jpg“저를요?”

16562810269879.jpg“본궁으로 같이 가자고 하십니다.”

1656281021215.jpg“네?”

지금 엔지는 사제로서 두엄의 궁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사제복을 입은 지금 그는 북부의 출신일 뿐 소속은 아니었고, 때문에 후작의 이런 호출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엔지는 고개를 갸웃대며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 . . 두엄의 궁이 무너지기 이십분 전, 후작은 루비드를 설득하고 있었다.

16562810181557.jpg“저하, 남은 상황은 제가 살피겠습니다. 원정일까지 들어가 쉬시죠.”

16562810181557.jpg“됐어. 어차피 또 나와야 하는데 뭐 하러.”

16562810181557.jpg“만전을 기하려면 휴식도 필요합니다. 하루만이라도 들어가시죠.”

후작의 완곡한 권유에 루비드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엔지도 시종과 함께 후작의 곁으로 왔고, 후작은 루비드와 엔지를 챙기며 철수를 명했다. 그런데 그때 남부의 기사가 대뜸 찾아와 후작에게 쪽지를 건넸다.

16562810269879.jpg“남부공 대리가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막 몸을 빼려던 후작은 뜻밖의 상황에 멈춰 섰다. 그는 궁 저편에 있는 레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전령이 가져온 쪽지를 펼쳐보았다. 그 안에는 짧은 한 문장이 담겨 있었다. ―이번엔 끝까지 지켜봐주세요. 제가 싸우는 모습을. . . . 두엄의 궁이 무너지기 십분 전.

16562810122466.jpg“지켜봐달라고 했는데.”

레나가 별로 서운하지 않은 투로 중얼댔다. 북부 기사들이 철수한 두엄의 궁은 텅 비어 휑했다. 요 며칠 궁을 꽉꽉 메우고 있던 북부 기사들은 루벨 후작을 필두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래서 여기 남은 건 이제 레나와 유니, 그리고 남부 기사들뿐이었다. 남부 기사들이 갑자기 넓어진 궁을 서성이고 있을 때였다.

16562810269879.jpg“무언가 옵니다!”

균열을 바라보던 기사 하나가 급박하게 외쳤다. 직후 균열의 붉은 빛이 폭발하더니 무덤에서 북부 기사들이 뛰쳐나왔다. 망자가 나오는 줄 알고 긴장했던 기사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이른 안심이었다. 남부 기사들은 격하게 달려 나온 북부 기사들을 태연히 바라보다가, 그들이 꼬리처럼 달고 온 것을 발견하곤 그대로 얼어붙었다.

16562810269879.jpg“마…….”

그것은 무서운 열기를 뿜으며 세상에 닥쳤다. 그들의 형상은 벌레를 닮았으나 크기는 생전과 같았다. 거대한 악충의 형상으로 지독한 불꽃을 달고 나는 존재.

16562810269879.jpg“마, 망자다!”

태움과 그을림의 왕 히엠스 그라샤에게 귀속된 망자, 재를 옮기는 자들이 균열에서 까맣게 몰려나오고 있었다.

16562810269879.jpg“으아악!”

불덩이가 날아다니며 궁 안을 헤집었다. 하지만 북부 기사들은 단호히 말을 몰아 퇴각했고, 그 뒤에 남은 남부 기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우왕좌왕했다. 그 아수라장을 바라보며, 레나는 잠시 몸을 풀었다. 요 며칠 수상하게 들락거린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북부에서 망자들을 끌고 와 주었다. 이 중 하나라도 밖으로 나가 본궁에 피해를 끼친다면 그건 모두 레나 루벨의 책임. 황제가 이를 어떻게 문책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레나는 후작이 꾸민 일의 실체를 확인하고 쓰게 웃었다.

16562810122466.jpg‘앞에선 초대하고 뒤로는 함정을 파다니.’

아무래도 아버지는 아직도 고집을 부리실 작정인가보다. 조금 짜증나지만, 레나는 자식 된 도리로 그 정도 아집은 이해하기로 했다.

16562810122466.jpg“유니.”

16562810122429.jpg“네, 아가씨. 손질은 다 해놨어요.”

유니는 레나가 말하기도 전에 요 며칠간 깔고 앉아 지키던 가방을 열었다.

16562810122466.jpg“오랜만에 꺼내네요.”

16562810122429.jpg“귀하신 몸이잖아요.”

16562810122466.jpg“그렇죠. 무려 우리가 가난한 세 번째 이유니까요.”

레나는 웃으며 가방 안으로 손을 뻗었다. 주인의 손길에 몸을 고이 접고 있던 철편이 뱀의 비늘처럼 율동하며 일어났다. 가방에 있던 것은 그 길이를 가늠할 수도 없는, 은색으로 빛나는 채찍이었다. 레나는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불덩이를 노려보며, 기지개 켜듯 말려 있던 채찍을 힘껏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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