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가치 부정2020.11.23.
반년 전, 남부. 남부공 빌 알레스는 이글대는 붉은 균열을 증오스럽게, 또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망자들에게 빼앗긴 영토를 전부 되찾고, 드디어 저 지옥의 통로 앞까지 도달했다. 이제 저 아래 있을 제단을 회수하면 길고 긴 전쟁도 끝이었다. 한 걸음 앞에 고지가 있지만, 그 한걸음은 너무나 멀고 험했다. 균열에서는 지금도 망자들이 꾸역꾸역 밀려나오고 있었다. 과연 누가 저 망자들을 헤치고 하늘을 기워낼 수 있을까. 남부공과 남부의 기사들은 절망과 희망을 함께 끌어안고 균열과 망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저 멀리서 푸른 깃발이 일어났다.
‘드디어 왔군.’
기사와 병사들은 깃발을 보고 길을 텄다. 그 사이로 검은 옷을 입은 집행자가 걸어 나왔다. 검게 무두질한 가죽 갑옷, 얼굴을 가린 복면, 첫 출전 때는 짧았던 머리카락이 이제는 등줄기에 닿을 정도로 길어 질끈 올려 묶었다.
남부 기사들은 푸른 깃발을 앞세우고 나타난 집행자에게 경의를 표하며 걸음을 물렸다. 그러자 집행자가 기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기사들은 동의로 화답하며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침묵 전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들의 전장은 마지막까지 고요했다. 숨 막히는 적막 속에서 기사들이 검으로 방패를 치며 소음을 일으켰다. 첫 울음을 삼킨 자들이 소리를 듣고 발광할 때, 집행자는 채찍을 펼쳤다. 그리고 사람들은 보았다. 직접 보지 않고는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광경을. *** 집행자가 쓰던 채찍은 반년 전 제 역할을 다하고 마지막 순간에 끊어졌다. 그래서 레나는 새로 제작한, 그래서 아직 손에 덜 붙는 채찍을 들어 길게 늘어트렸다. 그러곤 허둥대는 기사들 사이에서 이든을 불렀다.
“이든 경.”
“레나 경, 어떻게…….”
“정신 차려요. 지금부터 기사들과 떨어지는 걸 처리하세요.”
“네?”
이든이 얼떨떨한 얼굴로 반문했지만 레나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궁의 천장을 향해 채찍을 넓게 펼쳤다. 채찍이 풀어진 실타래처럼 허공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시간이 멈췄다. 레나는 의식을 개방해 시간을 쪼개며 생각했다. 망자들의 수, 기사들의 위치, 이 궁전의 형태, 확보할 수 있는 공간, 그리고 허공으로 떠오른 채찍의 각도와 힘의 방향. 계산을 마친 레나는 양손에 쥔 두 자루의 채찍을 마음껏 틀었다. 그러자 채찍이 벼락처럼 쏟아지며 망자들을 매섭게 내리쳤다. . . . 그 시간, 후작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엄의 궁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기사들은 그가 명령한 대로 기백명의 망자들을 유인해 균열로 끌고 나왔고, 그렇게 미끼 노릇을 한 기사들은 이미 궁 밖으로 나와 합류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궁은 아직 조용했다. 간혹 들려오는 굉음과 고함이 무언가 일어났음을 암시하고는 있지만, 정작 궁 밖으로 나오는 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지켜보던 후작은 결국 기사를 궁으로 보냈다. 잠시 후 두엄의 궁을 보고 온 기사가 파리해진 얼굴로 고했다.
“남부공 대리가 채찍으로 망자들을 모두 떨어트리고 있습니다.”
“뭐?”
신경질적으로 되물은 건 후작이 아니라 루비드였다. 후작이 꾸민 일을 아직 모르는 왕자는 곧장 몸을 돌려 두엄의 궁으로 향했다. 후작은 굳은 얼굴로 동행했고, 엔지도 눈치를 보다가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두엄의 궁에 도착한 이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불덩이를 매단 망자들이 은빛 채찍에 맞아 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 산란하는 빛 가운데 레나 루벨이 있었다. . . . 망자들이 몰려오기 반 시간 전, 레나는 조용히 조짐을 읽고 있었다.
‘슬슬 움직이나?’
북부 기사들이 후작에게 무언가 연거푸 보고하고 있었다. 남부의 경계 임무는 오늘로 닷새째,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으니 꾸미는 일이 있으면 슬슬 움직일 때가 되기는 했다. 레나는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남부 기사 중 누군가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함정을 팠다고. 그래서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함정을 파는 건 그러려니 할 일이지만, 기사들 중 다른 마음을 품은 자가 있는 건 꽤 중요한 문제니까.
‘가장 의심스러운 건 역시 이든 경이지만…….’
오히려 너무 수상해서 긴가민가하다. 그냥 나서기 좋아하는 순박한 사람일 가능성도 높아, 레나는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러던 중 묘한 낌새를 보이는 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북부 기사들이 철수하자 남부 기사 몇 명도 은근슬쩍 자리를 이탈했다. 멀리서 보니 동료들에게 화장실 등의 핑계를 대고 몸을 빼는 모양새였다. 그들은 모두 세 명이었고, 눈치를 보며 궁의 출구로 향하고 있었다.
“유니, 저 세 명 잘 기억해둬요.”
“왜요, 아가씨?”
“우리 편이 아니에요.”
레나는 유니에게 속삭이며 이든 피에타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떠나가는 북부 기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든 경.”
레나가 부르자 그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네, 일단 오해해서 미안해요.”
“네?”
“시간이 별로 없지만 중요한 얘기니까 할게요. 전에 그러셨죠. 가족들에게 가치를 인정받고 싶다고.”
뜻밖의 말에 이든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끄덕였다. 레나의 말처럼 이든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경계 임무를 시작하기 전에, 동부의 지원을 받는다는 소리를 듣고 조급한 마음이 들어서. 그는 자신들이 오합지졸로 취급받는 걸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동료들이 의기소침한 것도 잘 알았다. 그 와중에 기사 몇 명은 레나 경이 나가자마자 동부의 도움을 받으면 절대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래서 이든은 그들을 대신해 레나에게 말을 전한 거였다. 이든의 긍정에 레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사실 레나는 그 말 때문에 이든 경이 아버지의 끄나풀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왜냐하면 가치를 인정받으라는 말이 아버지가 쓰던 말과 꼭 같아서. 그가 어린 레나를 지배하고 흔들 때마다 사용한 잘했다, 자랑스럽다, 실망스럽다, 더 노력해라, 지켜보겠다 따위의 말과 함께 쓰인 언어여서.
“그랬습니다만, 뭔가 문제라도?”
이든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 고지식한 남자를 향해 레나는 웃으며 끄덕였다.
“상당히 늦었지만 그때 못 한 말 지금 할게요. 경, 그러지 마세요.”
“무슨 말씀이신지…….”
“누군가의 기대를 채우는 걸 너무 중요하게 여기지 마세요. 그러다간 자신의 삶이 아니라 남의 삶을 살게 될지도 몰라요.”
레나의 담담한 말에 이든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하지만 레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몸부림쳐야 받을 수 있는 인정이라면 받지 않는 편이 나아요. 그걸로 경의 가치가 좌우된다면 더더욱. 그러다간 평생 몸부림만 쳐야할 수도 있어요.”
그러다 몸부림을 멈추면, 당신의 가치를 가늠하던 자들은 실망했다고 할 것이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돌아설 것이다. 그건 정말이지 너무 흔하게 벌어져온 일들. 친밀한 관계에서 시작되기에 더 진득하게 느껴지는 압박. 그럼에도 그것을 사랑이라 믿는 순진한 시절들.
“부디 있는 그대로 사랑받으세요, 이든 경.”
레나는 이든 경을 보며 어릴 적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속삭였다. 당부인지 축복인지 모를 낯부끄러운 말에 이든이 눈을 깜빡였고, 그 얼굴을 본 레나가 웃으며 덧붙였다.
“타인의 인정을 갈망하는 건 미래가 없는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일이에요. 하지만 경은 아니잖아요. 앞으로 얼마든 살아갈 수 있으니 이제라도 찾아보세요. 경을 그 자체로 아껴줄 사람을요.”
레나가 그렇게 말을 맺자, 이든은 당혹스러운지 다른 곳을 보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곤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음, 그럼 다시 용건만 짧게 할게요. 우리 지금 함정에 빠졌어요.”
“네?”
갑자기 바뀐 화제에 이든이 눈을 홉떴다. 그러나 레나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괜찮아요, 놀라지 말고 제가 하는 말을 들어주세요.”
레나는 그렇게 몇 가지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균열에서 북부 기사들이 망자를 끌고 나온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 . . 은빛 채찍이 섬광을 만들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언뜻 무작정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는 채찍은 굴곡이 일어날 때마다 망자들을 정확히 치고 찢었다. 불덩이를 안고 날던 망자들은 퍽퍽 소리를 내며 폭발하고 추락했다. 그렇게 떨어진 망자들은 밑에서 대기하던 남부 기사들에게 최후의 일격을 받았다. 두엄의 궁으로 돌아온 후작은 그 광경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해낼 줄이야…….’
후작은 이번엔 레나도 어쩌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강해도 날아다니는 것을 다 잡을 수는 없다. 그래서 속수무책 망자들을 놓쳐 황제에게 문책 받게 되리라 믿었다. 그런데 후작의 기대는 레나의 숨겨둔 역량 앞에서 또다시 어긋났다. 하지만 후작은 그것이 분하지 않았다. 분하기는커녕 자부심이 차올랐다.
‘내 핏줄이다.’
내 핏줄, 내 자식, 내 딸. 나로부터 시작된 나의 분신. 후작은 평생 떠안고 있던 문제를 드디어 해결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우수함을 증명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그런데 레나가 그것을 비로소 해냈다. 그의 핏줄의 우월함을 모두에게 확인시켰다. 후작은 천체가 스러지는 듯한 광경을 황홀히 바라보며 손에 든 쪽지를 더 힘주어 쥐었다. ―이번엔 끝까지 지켜봐주세요. 제가 싸우는 모습을. 레나는 그에게 보라고 했다. 자신이 싸우는 모습을. 그래, 잠시 어긋났지만 레나 루벨은 결국 그의 딸이다. 여전히 그의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는 사랑스러운 딸인 것이다. 후작은 그 어느 때보다 자랑스러운 기분으로 자신의 딸을 향해 환희했다. 그리고 그 옆에선, 그의 아들 역시 눈을 크게 뜨고 산란하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버릇처럼 루비드의 곁에 선 엔지는 눈앞의 광경에 취해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대단해…….”
아무 의도 없이 순수한 감상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루비드의 귀로 들어가면서 엔지의 한마디는 많은 것을 촉발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루비드는 엔지의 한마디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이를 바득 갈았다. 대단하다니, 저딴 여자가 대단하다니. 저 정도는 나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저런 잔재주 따위……!’
루비드는 이를 악물고 레이피어를 빼들었다. 저 여자, 레나 루벨에게 또 밀릴 수는 없었다. 그는 위대한 북부의 왕자로서 그에 걸맞은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절박함을 분노로 덮어씌운 루비드가 눈동자의 색을 바꿨다. 그는 눈을 파랗게 빛내며, 레나의 독무대를 부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참격을 날렸다. 휘잉, 서늘한 바람 소리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갑작스레 날아든 거대한 힘에 한창 싸우던 레나와 남부 기사들은 경악하며 고개를 돌렸다.
“피하세요!”
레나가 다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그 소리는 뒤따라온 굉음에 파묻혀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다. 레나의 목소리를 덮은 건, 망자를 휩쓴 참격이 두엄의 궁까지 반파하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