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레나 루벨의 성깔2020.11.26.
“저 바보가……!”
무형의 힘을 느낀 레나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레나는 허공에 펼쳐진 채찍을 황급히 거두고 발치에 놓인 가방을 챙겼다.
“으엑!”
가방 안에서 꼬마의 비명이 울렸다. 단단한 가방 속에 숨은 유니의 목소리였다. 레나는 유니를 가방 채로 들고 물러났다. 동시에 기사들에게도 외쳤다.
“피하세요!”
레나가 소리친 직후, 참격에 정통으로 맞은 궁전의 기둥과 외벽이 굉음을 내며 무너졌다. 쿠웅! 쿵! 기둥이 넘어지고 천장이 쏟아졌다. 다행히 대부분 뒤로 밀려 기사들을 덮치진 않았지만 대신 파편이 튀었다. 레나는 머리로 날아든 돌을 가까스로 피했고, 유니도 돌멩이가 가방 표면을 두드리는 통에 연신 비명을 질렀다. 참격이 궁전을 휩쓸자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모든 것이 무너졌다.
“어…….”
엔지는 루비드의 만행에 놀라 눈을 깜빡거렸다. 힐끗 옆을 보니, 루비드도 이렇게까지 할 마음은 없었는지 짐짓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왕자는 특유의 뻔뻔함과 싸가지로 곧 당당해졌고, 그 외의 사람들만 경악하여 난장판을 목도했다.
“으윽…….”
“피, 피가…….”
파편에 얻어맞은 기사들이 제 몸을 부여잡고 신음했다.
“잔해에 깔린 사람이 있는지 파악하고 부상자를 이송하세요!”
레나는 이든에게 지시를 남기고 돌아섰다. 그러곤 궁전 입구에 선 루비드를 쏘아보았다. 저 대책 없는 참격을 본 게 벌써 두 번째다. 무도회장에서 신경질을 부릴 때 한 번, 그리고 지금 또 한 번. 분에 넘치는 힘을 받아 날뛰더니 결국 이 사달을 냈다. 레나는 만신창이가 된 기사들 때문에 화가 나서 루비드에게 걸어갔다. 그런데 레나가 몇 걸음 채 떼기도 전에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망자들이 또 옵니다!”
레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균열이 커다랗게 일렁이더니, 재를 옮기는 자들이 또 한 번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아까보다 많은 수였다.
‘뭐지?’
레나는 날아오르는 망자들을 향해 다급히 채찍을 휘둘렀다.
‘북부에서 유인해 온 건 다 해치웠을 텐데…….’
망자를 떨어트리던 레나는 불현듯 떠올렸다. 며칠 전, 무덤에서 만난 많은 심장을 가진 왕이 레나에게 했던 말을.
―광신도와 전쟁광도 그대를 노리고 있습니다.
“설마…….”
레나의 머릿속에 불편한 가설이 떠올랐다. 그 변태 왕의 말마따나 광신도와 전쟁광도 벼르던 중이었다면, 북부가 망자들을 유인하면서 노출시킨 균열의 위치를 못 본 척 넘어갈 리 없다. 지상에 나올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그들에게 이건 더 없이 좋은 기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레나는 이를 악 물었다. 그러곤 망자들을 루비드에게 잠시 맡기고 유니가 숨은 가방을 열었다.
“이제 끝났어요?”
유니는 멀미난 얼굴로 묻다가, 레나의 어깨너머로 망자들을 보고 기겁했다.
“유니, 곧 린 씨가 올 거예요.”
“린 씨요?”
“네, 지금쯤이면 거의 다 왔을 거예요.”
레나는 아까 후작이 이상한 낌새를 보일 때 린에게 사람을 보냈다. 두엄의 궁에서 호수의 궁까지는 말로 이삼십 분 거리. 그러니 이제 슬슬 린이 올 시간이다.
“가방 속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요. 궁 밖으로 가서 린 씨를 만나세요.”
망자들이 끝없이 몰려온다. 레나는 이 와중에 가방을 지키며 싸울 자신은 없었다. 유니가 숨은 가방에 건물의 잔해나 불덩이가 떨어지면 정말 큰일이라, 레나는 차라리 유니를 내보내기로 했다.
“아, 아가씨는요?”
“저는 여길 마저 정리할게요.”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유니의 등을 떠밀었다. 유니는 주저하다가, 이대론 아가씨가 싸울 수 없는 걸 알고 궁전 입구로 힘껏 내달렸다.
. . . 그게 유니가 기억하는 레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후 유니는 두엄의 궁 밖에서 린을 만났다. 도중에 약간 위험한 일이 있기는 했지만, 다행히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유니는 린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그와 함께 두엄의 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싸움이 다 끝났는지 망자들은 모두 사라졌고, 어쩐 일인지 아가씨까지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 우리 아가씨 어디 갔어요?”
그래서 유니는 폐허 위에서 숨을 돌리는 남부 기사에게 다급히 물었다. 하지만 온몸에 재를 묻힌 기사는 초점 없는 눈으로 말을 더듬기만 할 뿐이었다. 조급해진 유니가 다시 소리치려는데, 그 곁으로 비교적 멀쩡한 모습의 기사가 다가왔다.
“레나 경의 하녀.”
그렇게 유니를 아는 척한 건 이든 경이었다. 그가 말했다.
“레나 경은 무덤으로 넘어갔다.”
“무덤이요?”
유니가 놀라자 이든은 묵묵히 끄덕였다.
“여기서 싸우면 망자들을 놓칠 것 같으니 차라리 저 안에서 싸우겠다고…….”
뜻밖의 소식에 유니는 물론, 멀찍이서 귀를 기울이던 린도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럼 아가씨는…….”
“이참에 태움과 그을림의 왕을 치고 오겠다고 했다.”
“아, 아가씨 혼자서요?”
“그건 아니다.”
“그럼요?”
유니는 기사들이 같이 갔나, 그것도 별로 미덥지 않은데 등의 생각을 하며 이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든의 대답은 유니의 생각보다 더 최악이었다.
“북부의 루비드 왕자가 뒤따라 들어갔다.”
이미 혼미한 정신으로 듣고 있던 린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전혀 모르는 사이, 두 번째 원정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히엠스 그라샤가 망자의 왕이 되었다는 소식이 제국에 전해졌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두 종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그럴 리 없다는 부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럴만하다는 납득이었다. 히엠스 그라샤는 누구보다 신실하게 신을 섬겼다. 동시에 아주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는 수백에 달하는 여인을 마녀로 매도하여 화형 시켰고, 국경을 넘어 수만 명의 이교도를 학살했다. 그 모든 것이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일이기에 사람들은 마땅히 생각했다. 그는 죽어서 분명 천국에 갈 거라고, 혹은 지옥에 떨어질 거라고. 의견이 분분했지만, 다행히 그것은 니힐의 증언으로 곧 정리되었다. 무덤에서 히엠스 그라샤를 직접 만난 황제는, 자신의 전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히엠스 그라샤는 겉과 속이 동전의 양면처럼 다른 듯 같은, 세상에 둘도 없는 위선자라고. 그에 대한 황제의 전기는 이렇게 시작했다. . . . 나는 드디어 태움과 그을림의 왕을 창으로 꿰어 매다는 데 성공했다. 내 고조부는 관통상을 입었으면서도 여전히 온화한 표정이었다. 마치 성화 속 천사 같은 그 얼굴을 보며 나는 조금 궁금해졌다.
―고조부님, 심장을 가져가기 전에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보렴, 내 어린 손녀야.
히엠스 그라샤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나는 솔직히 물었다.
―고조부님께선 생전 신의 뜻을 받드셨습니다. 그런데 왜 더 좋은 곳으로 가지 않고 여기서 고통받고 계십니까?
―어떤 대답을 원하느냐?
―진실을 원합니다. 단 제가 원하는 진실은 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고조부님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이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그에게 물었다.
―조부님께서 이교도를 절멸한 것은 정말 신의 뜻이었습니까? 아니면 그들의 비옥한 땅이 필요했기 때문입니까?
―신의 종은 땅이나 재물을 탐하지 않는단다.
―그럼 여인들을 태워 죽인 것도 신의 뜻이었습니까? 아니면 전염병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함이었습니까?
―나는 단지 믿는 대로 행했을 뿐이란다.
―그렇다면 지금 고조부님의 처지 또한 신의 뜻이라 여겨도 좋습니까?
―손녀야, 내 어린 딸아.
내 물음에 태움과 그을림의 왕이 피 흘리는 입술로 짙게 웃었다. 그러더니 가슴이 꿰뚫려 벽에 박힌 채, 목을 앞으로 내밀어 내게 속삭였다.
―진실을 말해주마. 사실 나는 단 한 번도 신을 믿은 적이 없단다. 그리고 지금 너와 내 꼴을 보니 역시 그런 건 없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니?
영원히 묻힐 뻔한 진실이 시체의 입에서 토해졌다. 나는 경멸을 참으며 되물었다.
―그런데 왜 믿는 척하여 다른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든 겁니까?
―그래야 사람들이 나를 따르지 않겠느냐. 그래야 네 증조부와 조부, 아비, 그리고 너에게까지 왕관을 물려주지 않겠느냐.
―단지 그것입니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느냐, 시대를 풍미한 인간도 결국엔 죽어 사라지는데 그 덧없음을 무엇으로 보상받을까. 너희가 군림해야 내가 한때 왕이었던 사실도 세상에 새겨질 터, 너희는 나로 인해 높아지고 나는 너희로 인해 기억되니 부모와 자식은 본디 한 몸이요, 너와 나도 그러하다.
―고조부님께서 왜 그런 삶을 사셨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몸을 가르고 심장을 꺼냈다. 과연 그의 심장은 내게도 익숙한 모양이었다. *** 균열을 넘어 무덤에 들어온 레나는 솔직히 감탄했다.
‘대체 뭘 하나 했더니…….’
레나의 눈앞엔 깨끗하게 정비된 길이 펼쳐져 있었다. 늪처럼 질퍽대던 검은 땅엔 단단한 대리석 도로가 깔렸고, 빙 돌아가야 하는 험한 계곡이나 가파른 절벽엔 다리가 생겼다. 덕분에 붉은 하늘을 가진 지옥의 정경이 아주 조금은 친근하게 느껴졌다.
‘무덤에 길을 낼 생각을 하다니.’
무덤의 험한 지형은 군대가 힘을 쓸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래서 북부의 자랑인 막강한 군대도 무덤에선 유명무실했는데, 그들은 엄청난 병력을 이용해 이 불리한 환경마저 바꿔버렸다.
‘과연 북부…….’
레나는 북부의 저력을 인정하며 그들이 닦아놓은 길로 말을 달렸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재를 옮기는 자들이 날아왔다. 그것들은 레나에게로 곧장 날아들더니, 채찍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탐색하듯 빙빙 돌기 시작했다.
‘정말 나를 노리는 건가?’
레나는 광신도가 자신을 노린다는 변태 왕의 말을 결국 인정했다. 그러곤 저 생소한 적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신의 뜻이라며 화형을 남발한 히엠스 그라샤, 그리고 그의 권력과 선동에 취해 함께 횃불을 던진 광신도들. 살아생전 신의 사자를 자처하며 타인을 심판해온 그들은 숱한 생명을 재로 만들었고, 결국 그 업보에 눌려 무덤에 정체되었다. 그러한 속사정을 알기에 레나는 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들과 죽자고 싸운 적은 없었다. 레나가 한창 무덤을 누빌 때 그 곁엔 레지나가 있었고, 레지나와 히엠스는 암묵적으로 거리를 두는 사이였다. 그래서 레나도 히엠스와 직접 마찰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개인적인 원한은 없지만…….’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니. 레나는 공격할 준비를 하며 망자들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망자들이 이전처럼 달려들지 않고 거리를 둔 채 세를 불렸다. 안 그래도 빨간 하늘이 불길로 넘실대기 시작했고, 더 모일 수 없을 정도가 되자 망자들은 서로 부딪히기 시작했다. 펑펑 소리가 나며 공중에서 망자들이 폭발했다. 그걸 의아하게 바라보던 레나는 곧 저들의 의도를 깨달았다. 망자들의 불붙은 조각이 화살처럼 빗발치며 레나를 위협했다.
‘이런.’
하늘에서 불비가 내리자 레나는 자신의 망토로 말의 눈부터 가렸다. 그러곤 고삐를 바투 잡고 떨어지는 불덩이를 피해 말을 몰았다.
‘잔재주를 부려서 어쩔 셈이지?’
레나가 망자의 왕들에 대해 알 듯 그들도 레나에 대해 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는 레나를 성가시게 하는 것 외엔 아무 소용없는 것도 알 것이다. 그래서 레나는 불덩이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며 히엠스 그라샤가 어떤 속셈을 숨겼는지 고민했다. 그때였다. 하늘 높이 떠 있던 망자들이 돌연 싹둑 잘려나가 후두둑 떨어졌다. 레나는 그 익숙한 힘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백마 탄 왕자가 보였다. 루비드 플레누스 그라샤였다. 어느새 쫓아온 루비드가 참격으로 망자들을 떨어트렸고, 그를 본 레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은 녀석이 붙었네.’
도움은 바라지도 않으니 방해만 하지 않았으면. 레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힘껏 말을 몰았다. 루비드가 그 뒤를 득달같이 쫓았고, 결국 두 사람은 나란히 달리게 되었다. 레나는 옆으로 온 루비드를 힐끗 쳐다보았다. 루비드 역시 레나를 잠깐 노려보더니 더 경쟁적으로 말을 몰았다. 두 사람은 북부가 건설한 도로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그 도로는 그들을 어느 한 곳으로 착실히 인도했다. 레나와 린이 보름 만에 찾아낸 성이었다. 하지만 북부가 만든 도로는 불과 몇 시간 만에 그들을 그 앞까지 인도했다. 레나와 루비드의 눈앞에 태움과 그을림의 왕, 히엠스 그라샤의 성이 살벌한 위용을 드러냈다. 성을 발견한 루비드가 다시 말의 배를 걷어찼다. 그래서 레나가 그 앞을 급히 가로막았다.
“잠깐만요, 루비드 씨.”
“뭐야, 비켜.”
“무작정 내려가면 위험해요. 기왕 둘이 왔으니까…….”
“야.”
레나가 협력을 제안하려고 하자, 루비드가 무겁게 떨어지는 목소리로 그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살벌하게 짓씹었다.
“참견 말고 꺼져.”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언사에 레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레나는 짐짓 놀란 얼굴로 루비드를 바라보더니, 이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네 걱정을 한 게 아니라 방해될까 봐 그런 거야, 이 버릇없는 자식아.”
“뭐……!”
“차라리 잘 됐어. 너 나한테 불만 많지?”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말에서 내렸다. 그러곤 루비드를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야.”
루비드 플레누스. 레나의 사교계 데뷔를 멋지게 망친 망나니. 여자의 가슴에 손수건을 꽂는 쓰레기. 천지 분간 못하고 힘자랑을 하는 애송이. 그런 주제에 오냐오냐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고만장한 도련님. 전부 다 싫지만 역시 가장 싫은 건 마지막. 사실 이제껏 내색은 안 했지만, 레나는 후작에게 수발 받는 루비드가 퍽 얄미웠다. 그런데 운도 좋지, 무덤 한복판에서 단둘이 되었다. 레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덤벼, 이기면 꺼져줄게. 대신 지면…….”
레나는 말끝을 흐리며 생각하더니, 이내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앞으로 레나 누나라고 부르는 거야, 루비드 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