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어린 왕자2020.11.30.
예리한 참격이 검붉은 땅과 하늘을 양분했다. 피잉, 핑, 핑. 회초리 소리가 초 단위로 울리며 일대의 모든 것을 부수고 깨트렸다. 하지만 정작 루비드가 처단하고 싶은 대상, 레나 루벨만은 그 가운데서 멀쩡했다. 레나는 살벌하게 날아드는 참격을 간발의 차로 피하며 거리를 좁혔고, 루비드는 이리저리 피하는 레나를 향해 쉼 없이 참격을 쏟아냈다.
“죽어라, 이 쥐새끼야!”
“말버릇하고는.”
레나가 혀를 차며 도약했다. 루비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날쌘 참격을 날렸다. 하지만 레나는 우습지도 않다는 듯 몸을 틀어 피했다. 그러곤 루비드의 지척에 내려 단검으로 그의 레이피어를 긁었다. 쇳소리가 나며 참격이 막혔다. 이어 두 사람은 힘겨루기를 시작했고, 그들의 얼굴은 필연적으로 가까워졌다. 몸이 밀착되자 전야제 때 함께 춤을 춘 일이 생각났다. 그날의 굴욕을 떠올린 루비드가 으르렁댔다.
“넌 처음부터 거슬렸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레나의 반박에 루비드가 신경질을 내며 단검을 쳐냈다. 그러곤 레이피어를 매섭게 내질렀지만 레나는 이번에도 보란 듯이 피했다. 레나가 루비드의 레이피어를 다시 내리누르며 말했다.
“말 나온 김에 하는 얘긴데, 그 드레스 얼만 줄 알아?”
“네 주제엔 과분했겠지.”
“……넌 정말 말버릇부터 고쳐야겠다.”
“헛소리……!”
루비드가 바락 성을 내며 레나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하지만 경쾌한 타격음 대신 탁하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레나가 팔로 막은 탓이었다. 기습이 막히자 루비드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레나는 그 모습을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게 통하겠어?”
그렇게 중얼댄 레나가 돌연 몸을 돌렸다. 그러곤 그를 따라 하듯 그의 옆구리를 무릎으로 찍어버렸다.
“컥!”
루비드가 숨을 토하자 레나는 다시 빙글 돌아 그의 발뒤축을 걷어찼다. 루비드는 그대로 나동그라졌고, 레나는 등을 대고 누운 루비드의 가슴팍을 발로 찍어 밟았다.
“쿨럭!”
뒤통수가 얼얼한 와중에 가슴까지 밟힌 루비드는 마른기침을 하며 레나를 쏘아보았다. 레나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해봐.”
“뭐?”
“누나, 해보라고.”
레나의 고압적인 명령에 루비드는 순간 말을 잃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람들 앞에선 교양 있는 척 상식적인 척 온갖 척은 다 하더니, 갑자기 얼굴을 바꿔 포악하게 구는 모습이 낯설었다. 루비드는 놀라서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 미친……!”
루비드가 누운 채 팔을 휘둘렀다. 그의 레이피어 끝에서 일어난 참격이 레나의 머리칼 몇 올을 자르고 날아갔다. 빗나간 게 아니라 이번에도 레나가 피한 거였다. 레나는 고개를 꺾은 채 루비드의 손목을 걷어찼다. 레이피어가 그의 손에서 튕겨 나가 땅에 꽂혔다. 무기마저 치워버린 레나가 삐딱한 시선으로 물었다.
“너 머리 나쁘지.”
루비드는 대답하는 대신 레나를 떨쳐내려고 몸부림쳤다. 더 강하게 짓밟아 제압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레나는 미련 없이 발을 뗐다. 그러곤 몸을 굴려 일어나는 루비드를 향해 중얼댔다.
“이 정도면 알아들을 법도 한데.”
“기고만장하지 마라, 쥐새끼처럼 도망 다닌 주제에…….”
“역시 머리 나쁘네. 주변에서 얼마나 오냐오냐해줬으면 그래?”
연이은 모욕에 루비드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 유치한 위협은 레나를 웃게 할 뿐이었다. 아마 저 왕자는 조금만 언짢아도 저렇게 정색했을 것이다. 그럼 주위에선 알아서 겁을 먹고 눈치를 봤겠지. 저 녀석의 고귀한 혈통, 대단한 배경, 이어받은 권능을 생각하면 그건 당연한 이야기. 저 시건방진 왕자에겐 행패마저 권리였을 터. 레나가 혀를 차며 중얼댔다.
“솔직히 궁금해. 그 돼먹지 못한 성미가 어디서 왔는지.”
“너 따위가 알면 어쩔 건데.”
“정신 차릴 때까지 혼내줘야지.”
루비드가 이를 악물며 레이피어를 주워들었다. 그러곤 다시 득달같이 덤벼들었다.
‘정말 머리가 나쁜가?’
레나는 달려드는 루비드를 보며 진지하게 생각했다. 곱게 자란 도련님이니 몇 대 때려주면 금방 항복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오기가 발동하기라도 했는지, 루비드는 꽤 악착같았다. 레나가 어깨로 날아든 레이피어를 피하며 루비드의 턱을 돌려 찼다. 입술이 터지고 곱상한 얼굴에 상처가 났지만, 그는 손등으로 대충 훔칠 뿐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
‘쓸데없이 끈질기네.’
레나는 이 녀석을 어떻게 굴복시킬까 고민했다. 기절할 때까지 패주면 좀 겸손해지려나? 아니, 그런 식으로는 소용없을 것 같다. 좀 더 근본적으로 눌러야 한다. 안 그러면 어설프게 원한을 사서 사사건건 방해받을지도 모른다. 레나가 궁리하는 사이 루비드의 참격이 날아들었다. 빈틈을 노린 까다로운 공격이었지만 레나는 이마저도 가볍게 흘려보냈다. 애당초 시간을 멈추듯이 볼 수 있는 레나에게 이런 수준의 공격은 모두 헛수고였다. 하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루비드는 진심으로 분통을 터트렸다.
“젠장, 쥐새끼처럼 잘도 피하지……!”
“그럼 피하지 말까?”
“뭐?”
레나의 가벼운 대꾸에 루비드가 와락 인상을 썼다. 그에 레나는 여유롭게 대꾸했다.
“아까부터 쥐새끼라고 하는데, 피하는 게 불만이면 기회를 줄게.”
레나가 루비드에게 두 팔을 벌렸다. 참격을 날려보라는 뜻이었다. 참격은 북부의 자부심이라고 들었다. 실제로 루비드는 불리할 때마다 참격을 써대며 힘을 과시했다. 아까부터 쥐새끼 운운한 것도 참격에 맞기만 하면 끝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레나는 그의 믿음을 깨부수기로 작정했다.
“기회를 준다고?”
루비드가 당황해서 중얼댔다. 이런 거리에서 참격에 맞으면 분명 죽는다. 루비드는 레나 루벨이 정말 짜증 나지만 그렇다고 죽일 마음까지는 없었다. 그래서 주저하는데 레나가 웃으며 되물었다.
“왜, 막을까 봐 겁나?”
“막아?”
루비드가 기가 찬다는 듯 반문했다. 그러더니 언제 망설였냐는 듯 인상을 도로 차게 굳혔다.
“그래, 됐어. 죽어.”
죽든 살든 알 게 뭐야. 도발에 넘어간 루비드는 더 생각하지 않고 레이피어를 치켜들었다. 그러곤 어느 때보다 견고하게 힘을 빚으며 자신의 세계를 헤집은 불청객, 레나 루벨을 쏘아보았다. 정말이지 눈엣가시 같은 여자.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웬 여자가 루벨의 딸을 자처한다기에 뭐 하는 앤지 얼굴이나 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무도회에 초대했는데, 그 여자가 멋대로 기를 펴고 위세를 떨쳤다. 그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레나 루벨은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고 주위를 마구 휘두르더니 끝내는 선봉 자리를 차지하고 공까지 세워 황제에게 선택받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건방진 이방인은 리그난 아이테르너로 족했다. 제국의 정점이라는 이 비좁은 자리에 레나 루벨 따위가 발 들일 틈은 없다.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건 오직 나. 가장 앞서고 가장 높이 올라야 마땅한 위대한 왕자. 그러지 못하면 존재할 의미조차 없는 루비드 플레누스 그라샤 뿐. 루비드는 벼랑 끝에 몰린 심정으로 맹렬한 참격을 뱉어냈다. 참격이 쏟아졌지만 레나는 약속대로 피하지 않았다. 다만 들고 있던 단검, 한 뼘 길이의 보잘것없는 칼날을 앞세울 뿐이었다. 그걸 본 루비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레나가 죽거나 심하게 다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소심한 녀석이네.’
죽일 각오도 없이 저지르고 보다니.
‘아니, 무책임한 건가?’
그래놓고 눈치를 보는 게 마치 얼떨결에 칼을 쥔 꼬마 같다. 어떤 의미로는 가장 위험한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레나는 점점 윤곽을 드러내는 루비드의 면면에 쓰게 웃었다. 그러곤 자신에게 날아든 참격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참격이 당도한 순간 레나의 시간은 한없이 느려졌다. 세상이 멈추는 감각 속에서 레나는 의식을 깨우고 살펴보았다.
‘이게 루비드의 참격.’
평소엔 너무 빨라 잘 보이지도 않던 참격이 우뚝 멈춰 자태를 드러냈다. 초승달 모양의 그것은 수정처럼 투명하고 종이처럼 얇았다. 그런데도 단단해 건드리면 베일 것 같았다. 꽤 멋진 형태였지만 레나는 감탄하지 않고 웃었다.
‘나쁘진 않지만 원본에 비할 바는 아니야.’
레나가 경험한 진짜 참격은 이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예리했다. 그걸 온몸으로 받으며 강해진 레나다. 하물며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가 흉내 낸 한 가짜 참격 쯤이야. 관찰을 마친 레나는 신중하게 팔을 움직였다. 레나의 단검이 참격의 단면, 그 완만한 곡선의 정점에 닿았다. 그리고 시간이 다시 움직였다. 레나의 단검은 평범했다. 평소라면 참격에 닿는 순간 잘려 나갈 무른 쇠붙이였다. 하지만 참격의 중심에 정확히 맞물린 단검은 오히려 미끄러지듯 들어오던 참격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 순간 멈췄던 시간이 도로 움직였고, 이미 금이 간 참격은 시간이 흐르는 순간 유리처럼 산산이 깨져버렸다. 파앙. 가벼운 파공음과 함께 참격이 흩어졌다. 그러자 파랗게 물든 루비드의 두 눈에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이 떠올랐다.
“놀란 얼굴이네.”
산산이 부서지는 조각 속에서 레나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런데 이거 별로 어려운 일 아니야.”
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루비드를 바라보았다. 이쯤이면 주제 파악을 했겠지 싶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루비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참격을 날린 자세 그대로 서서 레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길 한참, 그의 멍한 얼굴에 서서히 떠오른 건 분노도 좌절도 아닌 짙은 당혹감이었다. 덕분에 레나는 덩달아 당황했다. 평소처럼 씩씩대며 난장을 피울 줄 알았는데, 루비드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의 낯짝이 밀랍처럼 창백해지자 지켜보던 레나는 살그머니 이름을 불러보았다.
“……루비드 씨?”
하지만 루비드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하늘이 무너진 얼굴로 레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때문에 레나는 조금 더 당황했다. 천지 분간 못하고 펄떡대던 녀석이 갑자기 상처 입은 표정을 지으니 괜히 몹쓸 짓을 한 기분이었다. 답지 않게 왜 그래? 누나라고 부르기 싫어서 연기하니? 레나는 이렇게 도발해볼까 잠시 고민했다. 그때였다. 루비드의 참격에 밀려났던 망자들이 다시 몰려왔다. 재를 옮기는 자들이 곧 하늘을 가득 메웠고, 그들은 아까처럼 서로 충돌하며 불비를 쏟아냈다. 레나는 정신을 차리고 몸을 피했다. 그러곤 반사적으로 루비드 쪽을 돌아보다가 다시금 당황했다.
“루비드 씨……!”
정말 충격을 받았는지, 루비드는 주변이 불바다가 되고 있는데 여전히 정신을 놓고 있었다. 반응할 틈을 놓친 루비드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레나는 잇소리를 내며 채찍을 꺼내 들었다. 딱히 같은 편도 아니고 예쁜 구석이 있는 놈도 아니지만, 레나는 반사적으로 불길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채찍이 요란하게 튕겨 나왔다. 마치 철판을 치는 느낌에 레나는 당황했다.
‘뭐지?’
불이 채찍을 튕겨 내다니. 레나는 반신반의하며 다시 채찍을 휘둘렀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게다가 다시 잘 보니 루비드를 에워싼 건 단순한 불이 아니었다. 그건 불이라기보다는 막에 가까웠다. 하늘에서 떨어진 불덩이는 유리처럼 매끈하게 형태를 바꾸더니 이내 완전한 구체가 되어 루비드를 가뒀다. 그걸 본 레나는 짧게 혀를 찼다.
‘아까부터 수상하다 싶더니.’
망자들이 계속 불비를 쏟아내서 무슨 속셈인가 싶었는데, 히엠스 그라샤가 기괴한 함정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다른 공간을 만든 건가?’
일전에, 많은 심장을 가진 왕도 이공간을 만들어서 레나와 린을 가둔 적이 있다. 어쩌면 그와 같은 짓을 하려는지도 모른다. 레나가 지켜보는 사이 불그스름한 구체의 표면에 사람 그림자 같은 상이 가득 맺혔다. 그것들이 요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루비드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 아아아!”
고통보다는 공포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레나는 다시 채찍을 휘둘러 불투명한 구체를 내리쳤다. 하지만 채찍의 철편은 또 다시 요란하게 튕겨 나왔다.
‘너무 단단해.’
이걸 깨트리려면 더 큰 힘이 필요하다. 그때 그 뱀, 나자 아이테르너처럼. 하지만 레나의 강점은 어디까지나 속도와 정교함이고, 망자가 된 나자 아이테르너 만큼의 힘을 낼 재간은 없었다. 레나의 팔목은 저 단단한 막을 두어 번 후려친 정도로 이미 욱신대고 있었다.
‘별수 없나?’
레나가 체념하려는데 루비드가 또 한 번 소리를 질렀다.
“으, 아아! 악!”
결국 레나는 통증을 견디며 채찍을 치켜들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한숨을 쉬었다.
‘염치가 있으면 나중에 갚겠지.’
아니, 염치 같은 거 없잖아. 저 녀석. 레나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다시 힘껏 채찍을 휘둘렀다. 콰앙, 쾅! 쾅! 철판 내리치는 소리가 연신 울렸다. 그러길 수십 차례, 견고하던 구체에 차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대로 다시 한번 내리치자 견고하던 벽이 드디어 쪼개지며 산산이 부서졌다. 레나는 숨을 몰아쉬며 반짝이며 사라지는 파편 속에서 루비드를 찾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쓰러진 루비드가 보였다.
‘살아 있나?’
그 순간 루비드가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으…….”
상체만 일으킨 루비드는 어지러운 듯 이마를 짚었다. 그 모습을 본 레나는 곤혹스러운 투로 중얼댔다.
“……이제 정말 누나라고 불러야겠네요.”
“뭔 개소리…….”
루비드는 도발인 줄 알고 신경질을 내다가 말을 멈췄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원래도 그리 굵은 목소리가 아닌데 평소보다 더 가늘었다. 아니, 가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 꼬마 같았다. 놀라서 머뭇대던 루비드는 몇 가지 이변을 더 깨달았다. 꼭 맞던 제복 코트가 거추장스럽게 겉돌았다. 눈높이는 이상하게 낮았고, 숨 쉬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무심코 팔을 들었는데, 옷소매가 손을 다 덮을 정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뭐야, 이게…….”
“어린이가 됐네요.”
“뭐?”
“열 살 정도 된 것 같아요.”
레나가 담담히 설명했다. 하지만 루비드는 도무지 믿을 수 없어 황급히 소매를 걷었다. 이윽고 드러난 두 손은 매우 작았다. 작을 뿐 아니라 보들보들하고 말랑말랑했다.
“이, 이게 무슨……!”
루비드는 경악한 표정으로 제 얼굴과 몸을 마구 더듬었다. 어딜 만져도 작고 부드러웠다. 길쭉하거나 단단하거나 늘씬한 부분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 생생함 감촉에 루비드는 입술을 떨며 레나를 바라보았다. 레나는 유감이라는 듯 예쁘게 생긋 웃었다. 어린이의 절규가 메아리친 것은 그다음 일이었다.